난춘 上

블랙배저 NCP

깜장배저 by 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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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글은 엔딩 후 if를 기반으로 하며 온갖 날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블랙배저 본편의 272화 대사를 포함하고 있으니 최신화까지 보신 분들께 감상을 추천드립니다.

  • 죽음, 번아웃, 우울증 트리거 주의.


난춘|暖春

   기나긴 전쟁이 끝이 났다. 내가 카일을 죽인 후, 나를 배신자라며 낙인을 찍은 나의 동족들은 대다수가 죽음에 이르렀다. 우두머리가 꺾였으니 합당한 결과였다. 아직 남아 있는 소수의 동족들도 머지않아 끝을 보게 되겠지. 지독한 시간이었다. 지금 내 손에 묻어 있는 식은 피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와아아아-!!!

   전장에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고양감에 휩싸여 있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이들은 나의 동족에게 삶의 터전을 잃고, 인류를 잃고, 가족까지 잃었으니. 세지 못할 시간 동안 꿈꿔왔던 결과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발치에 붉은색의 진득한 피가 보였다. 시선을 조금 돌리면 바로 옆에 동족의 시체가 보였다. 잘려나간 팔과 발, 제대로 감지도 못한 눈까지. 시체는 분노에 의해 갈기갈기 찢긴 채였다. 이를 누가 죽인 건지는 모르겠다. 인간도 나도 이들에게 분노해 있었으니 정당한 분노였을 것이라는 점만을 알뿐. 피에 젖어 질퍽이는 땅을 밟다가 슬피 흐느끼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드디어 끝났어. 드디어 모든 게⋯.”

   얼굴을 알지 못하는 한 배저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시야에 카이로스가 보였다.

   “카이로스.”

   “아, 대장.”

   나를 발견한 카이로스가 다급히 다가와 내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매우 집중한 표정이었다. 아마 상처 여부를 확인하는 거겠지. ⋯근데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괜히 머쓱해져 아직도 나를 살피고 있는 카이로스를 밀어냈다.

   “나 괜찮아. 멀쩡해. 상처도 없어.”

   “폭주 후에 흡수를 미친 듯이 했으니 그건 당연하겠지.”

   카이로스의 어조에 화가 실려 있었다. 그는 내가 카일과 싸울 때 한 행동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어쩔 수 없었어. 알잖아, 카이.”

   “⋯.”

   “그렇게라도 안 했으면 난 죽었을 거야.”

   슬픔과 원망이 섞인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카이로스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비릿한 혈향을 실은 채였다.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놀랍게도 내가 죽을 뻔한 건 사실이었다. 혹독한 훈련으로 과거의 나를 월등하게 넘어선 상태였지만 그건 카일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는 과거를 다시 되풀이한 셈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른 것이 있었다. 바로 상처의 위치. 과거 내 심장에 꽂혔던 카일의 검은 내 급소를 찔렀고, 과거 카일의 급소를 찔렀던 내 검은 카일의 심장에 꽂혔다. 내가 죽을 뻔한 것도, 하지만 끝내 살아남은 것도 단지 그래서였다.

   “⋯그래. 끝났네.”

   “응?”

   난 뒤늦게 아까 배저의 말에 답하듯 중얼거렸다. 카이로스가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의문을 보였지만 그를 보지 않았다. 울며 웃고 있는 인간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발밑에 깔린 나의 동족들을 보았다. 눈을 뜨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드디어 다 끝났어. 이 모든 게.”

   잊고 싶은 현실을 다시 상기시키듯 중얼거렸다. 카이로스도 이번엔 들은 듯했다.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걸 보면. 

   카일의 마지막 눈빛을 떠올렸다. 증오와 원망, 분노를 담은 그 눈빛을. 그리고⋯.

   속이 쓰려온다. 차라리 그 눈을 보지 말 걸 그랬다. 매일 밤 나를 향했던 저주를 빌미로 마지막의 내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주한 눈이었을 뿐인데.

   “카일⋯.”

   나의 친우는 왜 그 눈에 한 줌의 애정을 품고 있었는지.

*

   전쟁이 끝난 후의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전쟁 후에 배저들은 당장의 승리감에 젖어 현실을 보지 못했지만 조금 사그라든 감격과 함께 시야에 들어온 전장은 처참했다. 그곳에는 내 동족의 시체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인간의 시체는 수도 없이 많았다. 사망자 수가 집계되었을 때 전쟁의 결과와 함께 뉴스에 보도되었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도 기자들은 이에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이게 과연 진정한 승리가 맞는가’, ‘기어코 총사령관이 자신의 세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이번 전쟁을 통해서 자신에게 반하는 내부 세력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다 죽인 게 아니냐’라는 여론까지 빠르게 생성하여 사람들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진짜 어이가 없었다. 예현은 이번 전쟁으로 왼팔을 잃었다. 그 괴물 같은 회복력은 다 어디로 갔는지 자신이 예현을 마주했을 때는 이미 왼팔이 깔끔하게 잘려있었다. 그린 드림에 당하기라도 한 건지 뭔지. 근데 왼팔을 포기하면서까지 처절하게 싸운 애한테 하는 말이 고작 그거라고? 매정한 현실에 나는 분노했다.

   곧이어 느낀 건 상실감이었다. 무엇에서 비롯된 상실감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상실감은 무섭도록 나를 짓눌렀다. 처음에는 마냥 슬퍼하도록. 그다음에는 동족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가지도록. 그리고 결국엔 모든 게 공허해지도록.

   점점 무기력해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 어떤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냥 쉬고 싶었다. 정말 조용히 혼자서. 물론 그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일이 바빴기 때문에. 시체 회수, 장례, 유가족들을 향한 조의, 언론 발표 등 모든 일이 조금 정리가 된 후에야 모든 배저들이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힐데! 여기서 뭐행.”

   의자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 아미가 달려왔다. 평소 옷차림과는 다른 옷을 입고 한 손엔 프라푸치노를 쥐고 있었다.

   “그냥 쉬고 있었습니다. 아미는 지금 어디 가십니까?”

   “아 이미 갔다가 온 거야! 윤 오빠가 아직 퇴원을 못 해서 병문안 갔다 왔징.”

   그 말을 하는 아미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나는 그 표정 깊은 곳에서 발견한 걱정과 슬픔을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저도 다음에 병문안 가겠습니다. 윤이 싫어하는 음식이 뭔가요?”

   “우와! 나랑 같이 가장. 우선 오빠는 렉시크 누들 싫어해!”

   순간 말문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내 사수는 아직도 그 천상의 누들을 싫어하는 건가? 그 뒤로도 일부러 몇 번 먹였었는데 말이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아미가 꺄르르 웃었다. 그러다가 나를 보며 물었다.

   “힐데. 만약 휴가를 받으면 뭐 할 거야?”

   “⋯휴가요?”

   갑자기?

   아직까지도 바쁜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한 질문이라 살짝 당황했다. 눈을 데구루루 굴리다 대답했다.

   “아마⋯ 친우의 무덤에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후엔 집에서도 좀 쉬고요.”

   “아⋯.”

   내 말에 누구의 무덤인지 눈치를 챘는지 아미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아미에게 희미하게 웃어 주며 되물었다.

   “아미는 계획 있으십니까?”

   내 물음에 조금 눈치를 보던 아미는 이내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며 다시 페이스를 회복했다. 왼팔을 잃은 예현에 이어 윤까지 다친 상황인데도 나를 챙기다니. 보면 볼수록 정말 다정한 사람이었다. 아미의 말을 들으며 맞장구를 쳐 주고 있자 예현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예현이 들어올 입구를 응시했다.

   “아미. 힐데.”

   “….”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예현에게는 역시 왼팔이 없었다. 비어있는 그의 왼팔을 쳐다보자 예현이 흐린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른팔은 멀쩡하니 자신은 괜찮다는 뜻이리라. 저 미련한 놈. 내가 표정에서 슬픔을 지워내지 못했는지 예현은 결국 아미에게 잠시 자리를 피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미는 괜찮다며 바로 나갔다. 이제 이 공간엔 예현과 힐데 둘뿐이었다.

   “힐데. 저 괜찮아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요.”

   “팔이 잘렸는데 괜찮다고?”

   “정말이에요. 팔은 잃었지만 일은 해결됐으니까요.”

   예현이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후련해 보이는 까마득한 검은 눈에 쓴소리는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귓가에 잔잔한 미성이 들려온다.

   “힐데.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일은 다 끝났는데 아직 물어볼 게 남아 있나?

   문득 든 의문에 잠시 대답하지 않고 있자 예현이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뭐든 물어봐.”

   “그, 이미 예전에 한 번 물은 적이 있었는데⋯.”

   물어본 적 있다고? 뭐였지. 임무 파견? 크리처 몰살? 아니면⋯.

   “카일이 당신에게 어떤 선택을 내렸나요?”

   아.

   예상치 못한 주제에 잠깐 숨을 멈췄다. 그래. 전에 그런 얘기를 했었지. 속이 울렁인다. 갑자기 세상이 나를 두고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진정하기 위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자 새까만 동공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꿰뚫어 보는 기분. 나는 예현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음.”

   “⋯설마 그가 안 좋은 쪽을.”

   “아니야.”

   예현의 말을 잘랐다. 아이는 겁에 질려 있었다. 자신을 향한 호의와 애정에 한없이 약한 아이. 그리고 이 아이라면 분명 나를 자신에게 호의와 애정을 주는 이로 분류했을 거다. 더불어 자신의 대부인 나를 잃기 싫을 거고. 느릿하게 손을 뻗어 예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에 닿는 머리카락이 부드러워서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 진정이 됐다.

   “카일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았어.”

   “네?”

   “말 그대로야. 카일은⋯.”

   나는 목이 메어 말을 멈추었다. 흐려지는 정신 때문에 죽어가던 카일의 눈빛이 다시 떠오른다.

   “카일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로⋯.”

   그저 고요히 나를 바라보다 죽었을 뿐.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말의 무게가 무거웠다. 조심스레 나를 살피는 예현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 여린 아이에게는 내 말이 희소식이었을까. 가슴이 부푸는 게 보일 정도로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놀란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넌 아직도 인간을 사랑하는구나.’

   카일이 피를 토하며 웅얼거린 말이었다.

   동족들에게 사랑과 후회라는 이름하에 죽음을 선사한 내가 마지막까지 그들에게 무엇으로 남았을지는 잘 모르겠다. 전 기사단장. 타이탄의 전 수장. 배신자. 개새끼. 쓰레기. 역겨운 놈 등등. 그들에게 난 무엇이든 되겠지만 결과론적으로 나는 동족마저 죽여버리는 살인자가 되었을 것이다. 나도 나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근데 카일. 난 인간만 사랑하는 게 아니야.

   나는 너희를 더⋯.

   “힐데. 괜찮아요?”

   “아.”

   예현이 걱정이 섞인 눈빛으로 나를 본다. 언뜻 카일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점점 참기 힘들어지는 감정에 서둘러 눈을 감았다. 귓가를 울리는 이명이 한층 더 크게 들렸다.

   “괜찮아. 이 정도는.”

   “⋯좀 쉬고 올래요? 휴가 줄까요?”

   “휴가?”

   마침 아까 아미가 휴가 얘기를 했었는데. 미리 예현에게 귀띔 받은 거였나.

   눈을 떠서 깊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그에게서 카일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흐릿하게 웃었다.

   “응. 휴가를 좀 줄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총 2주의 휴가를 받았다.

*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사라졌다.

   그 사실을 처음 알아챈 건 리카르도였다. 전쟁이 끝난 후 안부차 연락을 했는데 안 보길래 이상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폰이 꺼져있다는 음성만 나왔단다. 근데 그건 그럴 수 있지만 일주일째 똑같아서 오두막에 찾아갔더니 사람은 없었고, 차가운 온도에 생활감도 없었다고 한다.

   예현은 자신의 앞에 분노와 걱정이 섞인 표정으로 서 있는 리카르도를 조용히 응시했다. 힐데의 모든 것을 알고 그를 지지해 주는 사람 중 한 명. 그렇기에 현재 그의 분노는 정당하다고 예현은 생각했다.

   납치는 당하지 않았을 거다. 만약 납치였다면 예전처럼 협박 메일을 보내거나 원로들이 연락을 주었겠지.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을 추리니 유력한 건 하나였다.

   “⋯힐데가 요새 좀 불안정해 보이긴 했지.”

   아마 모든 것을 끝낸 후의 무거운 상실감. 거기에 짓눌려 있는 게 아닐까.

   예현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던 리카르도는 침묵을 지키더니 한마디를 꺼냈다. 찾아오겠습니다. 예현은 그를 지그시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배저들이랑 같이 가도 돼. 너무 많이는 말고 한 세 명 정도.”

   리카르도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바로 나갔다. 그의 다급한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예현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덮었다. 곧바로 어둠이 찾아왔다.

   ‘한때 절친했던 전우 둘을 내 손으로 보낸 상황에서, 모든 것을 놓을 명분까지 주어진다면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과거의 어느 시점, 슬픔과 두려움이 섞인 힐데의 목소리가 예현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어림잡을 수조차 없는 그의 아득함이 느껴졌다. 예현은 여전히 그걸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 중이었지만 입술을 꽉 깨물어야만 했다.

   자신의 대부는 다정하다. 기꺼이 예현의 오래된 상처를 보듬어 주는 것에 이어 삶의 버팀목이 되어 주기도 했다. 고작 그 어린 날의 미숙한 자신이 본인의 검을 이어받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래서 예현은 그가 안타까웠다. 정이 많은 사람이라 그 정이 자기를 죽이려고 들어도 결코 완전한 이별을 하지 못할 테니. 

   그리고 예현은 그 고역을 알았다.

   창문틀 통해 햇빛이 드리운다. 그 빛은 예현에게 도달했다. 햇빛은 따뜻하되 뜨겁지 않았고, 빛나지만 눈이 아플 만큼은 아니었다. 몸이 나른해진다.

   예현은 문득 힐데가 이 햇빛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

   “뭐? 힐데가 사라졌다고?”

   아미가 놀란 목소리로 리카르도에게 되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최근 흔적이 없어. 물건은 다 그대로인 걸 보면 떠난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럼 마지막으로 발견된 걔 행방은?”

   짜증이 깃든 얼굴의 윤이 머리를 거칠게 털며 물었다.

   “집안에 생활감은 일주일 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하⋯. 이 새낀 대체 어디로.”

   “아! 맞다!”

   까칠한 윤의 말을 끊은 아미가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이 두 남자를 향했다.

   “저번에 힐데랑 휴가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친우의 무덤에 간다고 했었어! 진짜 갔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치 않은 정보에 말을 할수록 자신감을 잃어가 아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반면 남자 둘은 생각했다. 힐데는 친우의 곁에 있을 거라고.

   그의 친우는 한 명이 아니다. 그럼 지금 갈만한 무덤은 어디일까.

   세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얼마 전 전쟁으로 힐데의 손에 죽은 그의 친우, 카일.

   그래. 힐데는 분명 카일의 묘에 갔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아챈 그들은 카이로스에게 무덤의 위치를 뜯어내고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바로 힐데를 찾으러 출발했다.

*

   하지만 그들은 바로 난관에 봉착했다.

   “진짜 여기 맞아⋯?”

   숨이 찬 아미가 헉헉대며 물었다. 윤은 침묵했다. 리카르도마저 아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둘의 표정도 딱히 좋지는 않았다. 그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던 아미는 당장이라도 바닥에 드러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들의 체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철저하게 훈련된 상위권의 배저였으니까. 문제는 무덤의 위치였다. 카이로스가 알려 준 곳으로 가려면 여러 개의 산을 넘어 어느 외진 곳으로 가야 했다. 도로가 없어서 차를 타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전투기나 헬기를 타기에는 사회에 논란이 터질 위험이 있다. 결국 선택이 가능한 길은 걸어가는 곳 하나뿐이었는데 그 길은 매우 험난했다. 오죽하면 이제는 카이로스가 과연 제대로 알려 준 게 맞나 의심이 들었다.

   “지도상으로는 이 근방인데~⋯.”

   리카르도가 지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주위를 둘러보면 나무와 풀밖에 없었다. 옆에서 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이럴 거면 그냥 흩어져서 찾아보는 게.”

   바스락-.

   갑작스레 들린 인기척에 윤이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모두 숨을 낮춘 채 주위에 집중했다. 

   빼곡한 풀들 사이로 기어가는 벌레가 보인다. 돌아다니던 산짐승들이 그들을 보고 놀라 달아났으며 허공을 부유하던 나비는 포르르 날아오더니 꽃에 앉았다. 잔잔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 찾았당.”

   무수히 많은 나무들 사이의 힐데를 찾아낸 아미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힐데에게 다가가려는지 발걸음을 서둘러 뗐다. 하지만 아미는 곧바로 멈추었다.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윤은 고개를 돌려 아미가 응시하는 곳을 보았다.

   어느 동그란 흙더미 앞에 긴 백발을 가진 한 남자의 인영이 있었다. 어느새 쌀쌀해진 바람이 윤의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덩달아 남자의 긴 백발도 살랑거리며 흩날렸다. 그는 어떠한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서 무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지 그런 그에게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가 있다면. 그래.

   “힐데⋯.”

   무덤 앞 긴 백발의 남자. 힐데베르트 탈레브. 타이탄의 전 수장은 울고 있었다.

   아미가 슬픔이 담긴 작은 목소리로 힐데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듣지 못한 듯했다. 그저 감정이 보이지 않는 건조한 무표정으로 무덤을 바라보며 고요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윤은 힐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옆에 같이 서 있던 리카르도도 윤과 마찬가지였다. 친우의 무덤과 바로 옆에 꽂혀 있는 친우의 검. 그 앞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는 힐데베르트 탈레브. 언뜻 보면 힐데는 망부석 같았지만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이 위태로웠다. 

   그 와중에 윤은 생각했다.

   왜 저러는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윤은 울고 있는 힐데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이번뿐만 아니라 대체로 모든 상황에서 힐데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저놈이 또⋯라고 생각하며 넘길 뿐.

   최 윤은 자신만의 선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다. 대체로 그 선의 기준은 냉철해서 윤 스스로가 신경을 쓸만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대폭 줄여 준다. 물론 예외는 있다. 예현과 아미. 그리고 이제는 저기서 울고 있는 자신의 부사수까지는 윤이 신경 쓰는 사람에 포함된다. 그래서 윤은 자신의 사람인 힐데가 저렇게 울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가 본인을 배신자라고 매도한 자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윤보다 조금 더 앞에 서 있던 아미는 여태 가만히 있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비장한 표정으로 힐데를 향해 걸었다. 정적만이 가득했던 곳에 걷는 소리가 울린다. 힐데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발견한 힐데의 눈이 크게 뜨인다. 아미는 힐데와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안타까움으로 인한 슬픔은 그가 알 수 없도록 뒤로 숨긴 채였다.

   “카일⋯.”

   이라고 했던가. 힐데를 따라 무덤 앞에 선 아미는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아보았다. 마지막까지 타이탄의 수장이었던 자. 반대로 수많은 인간들이 죽음을 바랐던 자. 많이 들어 익숙하지만 낯선 이름이 입안에 굴러다닌다. 

   아미의 발치에 위치한 동그란 흙더미는 모든 인간들이 두려워했던 적을 품은 것치고는 초라했다. 

   잠시 동안 침묵한 아미는 눈을 감고 카일의 무덤을 향해 기도했다. 그가 평안히 가게 해달라고. 그리고 부디 남은 이의 발목을 잡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아미는 눈을 떠 깜빡였다. 

   비록 배저 신분인 아미에게 카일은 적이었지만, 힐데의 친구인 아미에게 카일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의 친우였던 자였다. 그런 생각을 한 아미는 그가 더 이상 힐데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를 바라며 기도를 끝마쳤다.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여전히 놀란 얼굴로 멍하니 아미를 바라보고 있던 힐데가 그녀의 말에 슬픈 미소를 지었다. 찬란한 금빛을 머금은 그의 눈이 예쁘게 접히면서 고인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감사해요, 아미.”

   정말로 감사해요⋯. 

   힐데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호흡이 부자연스러운 걸 보니 울음을 참는 것 같았다. 아미도 덩달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웃으려고 노력했다. 울면서 웃는 묘한 얼굴이 되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이렇게라도 웃지 않으면 이 여린 사람은 더 죄책감을 가질 테니까. 

   아미가 열심히 눈물을 참고 있던 중 점점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도 아미처럼 해도 되려나~.”

   어느새 힐데 옆에 온 리카르도의 물음이었다. 힐데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리카르도를 쳐다보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을 조용히 보고 있던 아미가 저만치 떨어져 서 있는 윤에게 달려가 그를 끌고 왔다. 오빠도 해! 아미가 강하게 외쳤다. 막무가내였다. 윤은 질질 끌려가는 중에 거절하려고 했지만, 중간에 힐데와 눈이 마주쳐서 그냥 아무런 말 없이 끌려와 줬다. 

   나란히 기도를 마친 이들은 산을 떠났다. 일주일 동안 자신의 몸을 혹사한 힐데를 리카르도가 들쳐 업은 상태였다. 선임들의 걱정 섞인 짜증과 잔소리를 얌전히 듣고 있던 힐데는 문득 짧았지만 자신이 머물렀던 산을 돌아보았다. 일주일 동안의 애도를 품은 산이 황혼의 빛을 띠처럼 두른 채 빛나고 있었다. 수려한 금안이 그 장면을 눈에 담았다. 

   카일. 나는 아직도 네가 마지막에 애정을 보인 이유가 뭘까 매일 생각해.

   줄곧 너는 두 눈에 원망과 증오를 담아 나를 봤었으니.

   그런데 너는 왜, 내가 너를 죽여야만 하는 때가 돼서야⋯.

   자신을 두고 홀로 떠나간 친우는 의문에 대해서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힐데는 눈을 감았다. 까마득한 과거, 친우들과 함께했던 자신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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