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죠유지] 계절 한 바퀴

27X14 | 센다이에 출장 온 사토루가 3일 동안 유우지를 만나는 이야기

Adore U by 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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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

“꽃을 고르는 안목이 좋네.”

제게 하는 말일까.

얌전히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던 유우지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눈을 붕대로 가린, 누가 봐도 수상한 행색의 사내가 이쪽을 보며 생긋 웃고 있다. 허벅지를 반쯤 덮는 넉넉한 바람막이 주머니에 양손을 끼운 채 여유로운 모습. 안목을 운운하는 걸 보아하니 눈이 아픈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그전에 보통 저런 걸로 가리면 앞이 안 보이는 게 맞지 않나?

게다가 이 사람, 입꼬리는 올리고 있지만 웃고 있지 않다. 그저 척일 뿐인 가짜 웃음.

일순간 당황해 유우지는 꽃다발을 품에 숨기듯 제 쪽으로 당겼다. 바스락하고 꽃을 곱게 감싼 포장지가 구겨지는 소리가 들린다. 무례하다고 생각할 법한 반응에도 사내의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간 채다. 새하얀 가림막에 막혀 눈은 보이지 않지만 저를 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당혹감을 느낀 것과 별개로 누군가에게 안목을 인정받은 건 처음이다. 칭찬은 사람의 경계심을 지우개로 살살 지우듯 흐리게 만든다. 그저 외형을 두르는 취향이 이상한 사내일 뿐인가 싶어 유우지는 경계 태세를 느슨히 풀었다.

그래 뭐, 붕대가 취향인 사람인가 보지. 원래 자신은 뭐든 그런가 하고 넘기는 경향이 있다.

“음… 고마워?”

칭찬에 기쁜 마음과는 별개로 낯간지러운 건 매한가지. 유우지는 꽃다발을 도로 옆구리에 끼운 채 머쓱함에 볼을 긁적였다. 그야 꽃을 사는 게 처음도 아니고, 거즘 1년 가까이 반복하고 있는 일이니 어느 정도 고를 줄은 안다. 아무것도 몰라 점원 누나의 추천만으로 사가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계절마다 무슨 꽃이 나오는지도 읊을 수 있게 되었다. 최근 같은 병실에 입원해있던 아저씨가 꽃가루 알레르기라 한동안 쉬긴 했지만.

그 아저씨는 말끔히 쾌차해 어제 퇴원했으므로, 도로 본래의 루틴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빈 침대를 지그시 내다보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다시 꽃을 사 와야지 생각했다. 사람들이 떠나가는 자리보다 형형색색의 꽃에 시선을 두는 게 몇 배는 나으니까.

자신은 티비 보는 것 말곤 별다른 취미도 없고, 기껏해야 만화책을 빌려다 보는 정도라 여윳돈은 꽃을 사가는 데 쓴다. 학기 중엔 병원에 다녀야 하므로, 돈은 주로 방학 때 아르바이트로 벌어 비축해두고 야금야금 꺼내 쓰고 있다.

이런 데 돈 쓰지 말라며 매번 핀잔을 늘어놓는 할아버지에게는 간호사 누나를 위해서라고 넘기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다. 언제나 투덜대는 주제에 제 시선을 피해 꽃병을 들여다보는 할아버지를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오늘도 꽃을 샀다.

“꽃의 주인은 누굴까. 여자친구려나.”

“할아버진데. 나 그런 거 없고….”

“웃긴다. 연애해본 적도 없나 보네.”

“엣, 어떻게 알았어? 티나!?”

“응. 엄청. 이름은 뭐야?”

초면에 대뜸 연애 경험이 없는 것까지 파헤쳐놓고는 이름을 물어온다. 언동이 자유로운 사람인가 싶어 별 고민 없이 이타도리 유우지, 하고 대답을 돌려준다. 이쪽도 초면인 어른에게 말을 놓은 입장이니 매한가지려나 싶다.

삐뽀 삐뽀-

어느새 신호등이 바뀌고 걸음을 종용하는 소리에 발이 먼저 움직였다. 행색이 독특한 사내와 나란히 횡단보도를 건넌다. 목적지의 방향이 같은 건지 골목을 돌아 지나가는 길에도 계속 제 옆을 지키고 있다.

그러고 보니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름을 알려줬으니 예의상 이쪽도 물어야 할 것 같은데, 질문의 앞머리에 붙일 호칭이 신경 쓰인다. 애초에 이렇게 나이 터울이 있어 보이는 사람과 길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도 처음이다.

깊게 파고들려니 머리가 아파 적당한 호칭을 고르기로 했다. 보통 파칭코에서 옆자리 사람을 뭐라고 불렀더라. 아, 맞아.

“아저씨는?”

“…고죠 사토루. 근데 나 아저씨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닌데. 이제 27살이고.”

“난 14살인걸.”

“엄청 어리구나- 그나저나 이름을 알려주는 건 간만이라 새롭네.”

“에, 왜?”

“내가 일하는 곳은 날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

“아저씨 연예인이야? 나만 모르는 건가?”

“잘생기긴 했지만, 연예인은 아냐. 뭐 유명하고 바쁜 건 비슷하려나.”

“에… 이상한 일이라도 하는 거야….”

점점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에 유우지는 눈썹을 샐쭉이 일그러트렸다. 그 모습에 사토루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새롭다. 신선하다고나 할까. 이렇게 자신을 소개해보는 게.

보통 만남을 갖는다면 대부분이 주술계와 관련된 일이고, 그 자리에서 고죠 사토루를 모르는 이는 없다. 구태여 소개하지 않아도 모두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소리다. 그러니 이렇게 통성명을 하는 것도, 자신을 일절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무척이나 간만의 일. 어째서인지 즐겁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뭐, 이상한 일 맞긴 해.”

“무슨 일인데?”

“유우지한테는 못 알려주는 일.”

“왜?”

“글쎄?”

또 보자.

그리 말하며 사토루는 제 어깨를 톡톡 두들기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가는 방향도 다른 데 따라왔던 건가. 일순간 멈춰있던 유우지는 괜한 호기심이 동해 뒤를 돌아 가볍게 달렸다. 그가 지났을 골목을 돌자 다른 행인들만 있을 뿐, 특이한 행색의 사내는 온데간데 없다. 의아함이 스치며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진다. 걸음이 엄청나게 빠른 사람인가. 다리가 길어서 보폭이 넓은 덕분인가.

길의 어귀 가운데에서 한참을 머물러있었다. 시야에 잡힌 노을 지는 하늘에 겨우 해가 저물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어렵사리 걸음을 되돌려 병원으로 향하면서 종전의 대화를 계속해서 곱씹었다. 그래도 대화하기 편한 사람이었지.

해소되지 않은 의문을 한가득 품은 채 잘도 그런 생각을 했다.

 

Day 2

“키쿠후쿠 좋아해?”

아, 어제 그 아저씨다.

교내에 행사 준비가 있어 교실을 비워 줘야 한다고 등을 내밀렸다. 평소보다 1시간 가량 이른 하교에 인근 놀이터 그네에 앉아 시간을 죽이던 참이었다. 바로 집에 돌아가도 좋지만, 적막한 공간에 더 오래 있게 되는 건 역시 별로랄까. 그렇다고 병원에 일찍 가기엔 친구들과 놀지도 않고 뭐하는 거냐며 혼날 게 뻔해 이쪽을 택했다.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마음이 안정됨을 느낀다.

앞 코로 모래를 쓸어넘기며 애꿎은 운동화만 괴롭히고 있을 때 옆에서 끼익,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비어있던 그네 옆자리에 사뿐히 앉은 사내가 제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건 매끈한 포장에 싸인 키쿠후쿠 한 알. 고운 얼굴선과 대비되는 마디가 굵고 투박한 손이다. 너른 손바닥에 얹어진 키쿠후쿠가 유독 자그마해 보인다.

“좋아하진 않고, 있으면 먹는 정도.”

말은 그렇게 해놓고 서스럼없이 손을 뻗어 사내가 건네주는 동그란 간식을 얌전히 넘겨받는다. 다시 만나게 된 건 우연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어제는 병원 주변, 지금은 학교 옆 놀이터. 두 지점 간의 거리는 꽤 머니까.

“에, 그치만 센다이 명물인데?”

“지역 명물이면 주민이 다 좋아할 거란 발상은 어디서 오는 거야….”

길게 늘어트리려던 의문은 사내의 경박한 물음에 의해 톡, 맥없이 끊겼다. 뭐 괜찮으려나. 유우지는 어이없다는 듯 대꾸하며 키쿠후쿠의 포장을 뜯었다. 바스락 소리와 함께 맥없이 포장이 갈라지며 동그란 찹쌀떡이 자태를 드러낸다. 잇새로 가볍게 짓눌러 반 틈으로 갈랐다. 연두빛의 앙금과 생크림이 제멋대로 비져나오려 한다.

집에 선물로 들어오는 건 대개 호지차 맛이었다. 아마 받는 이의 취향에 입각한 선물이었을 테다. 할아버지는 씁쓸한 걸 좋아하니까. 그래서 언제나 차를 마실 때면 티백을 푹 우려 진하게 내려 먹곤 했다. 할아버지가 입원한 후로는 보지 못한 풍경. 기억의 저편으로 내밀린 이전을 애써 끄집어냈다. 은은히 감도는 단맛을 느끼며 잇자국이 선명한 키쿠후쿠 반쪽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러고 보니 즌다 맛은 처음이다.

“이거 맛있네.”

“맛있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이야.”

옷 입는 안목과 다르게 입맛은 좋은가 보네. 유우지는 그리 생각하며 남은 반절을 마저 입에 집어넣었다. 고소한 완두콩 앙금과 달큰한 생크림이 뭉개지며 입안을 구른다. 달달한 맛이 나쁘지 않아 신기했다. 항상 씁쓸한 걸 맛있게 먹어와서 당연히 그쪽이 취향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그저 먹어볼 기회가 없어서 몰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단 걸 좋아하는 편일지도. 취향도 경험이 바탕이 되어야 알 수 있는 거구나. 만난 지 겨우 이틀인 사내에게 배움을 얻는다.

“아저씨는 관광 온 거야?”

“아니, 출장.”

“원래는 어디 사는데?”

“도쿄.”

“센다이에는 언제까지 있어?”

“내일까지.”

물음표를 통통통 띄우듯 연달아 내던진 질문에도 사내는 귀찮은 내색 없이 고분하게 회답을 돌려준다. 그 모습에 의외로 친절한 사람인 것 같다고 맘대로 상대를 정의 내렸다.

“근데 아저씨는 왜 붕대를 두르는 거야?”

“너무 잘 보여서. 이것도 꽤 피곤하거든.”

“왜 하필 붕대? 안대라던가 다른 것도 있잖아.”

너무 잘 보인다는 게 어떤 맥락의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비단 시력의 이야기가 아니란 것 정돈 이해했다. 어떠한 연유로 붕대를 고르게 되었는지를 묻자, 사내는 고심하듯 턱 끝을 어루만진다. 으음, 하고 의미 없는 늘어짐이 이어지길 잠깐, 다물려있던 입이 도로 열렸다.

“붕대 두르는 건 번거로워. 근데 말이지, 난 일할 때도 별로 힘을 들이지 않아. 굳이 따지자면 붕대를 두르는 게 더 수고롭지.”

“그래서?”

“이게 이유인데?”

그니까 지금 그 수고로움을 자처하는 이유를 물은 건데. 목전의 사내는 아무래도 원하는 답을 돌려줄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뜻 모를 말을 잔뜩 늘어놓은 주제에 싱긋 웃고 있다.

아, 또다.

“근데 아저씨는 왜 한 번씩 웃는 척을 해?”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꼬박 하루를 묵힌 의문이 튀어나왔다. 연거푸 던진 질문들은 이걸 위한 받침이었을지도 모른다. 제 말에 놀란 듯이 사내의 얼굴 근육이 느슨히 풀어진다.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보는 건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살피며 유우지는 이어질 대답을 기다렸다. 허나 벙긋하게 벌어진 입은 다물릴 기미가 없어 보인다.

“아저씨?”

대답을 종용하기 위해 재차 이어진 물음에 사내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입을 합 다물었다.

“…놀랐어.”

“왜?”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라.”

“에, 그래?”

“유우지는 눈치가 빠르구나.”

눈치가 빠르냐 느리냐를 두고 본다면 분명 전자에 가깝긴 하다. 유감스럽게도 공부와는 인연이 깊지 않고 특히 수학 쪽으론 도통 머리가 굴러가질 않지만, 타인을 파악하는데 기민하다는 자각은 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부모 없이 조부 밑에서 자란 영향인지 천성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과 어울릴 때 나쁠 게 없으므로 어느 쪽이든 좋다고 생각한다.

“역시 좀 실례였나.”

“전혀?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오히려 새로워서 좋고. 너 같은 녀석은 싫지 않네.”

아무래도 예의범절에 있어서는 그다지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닌 것 같다. 너 같은 녀석은 싫지 않다는 모호한 표현에 불쑥 기쁘단 마음이 치고 올라온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붕 뜨는 마음에 다른 이유를 찾아주기 위해 그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래에 발을 딛고 앞으로 뻗어 나아간다. 느릿하게 흔들리는 그네가 포물선을 그리며 몸이 붕 뜨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시선은 아래에 고정해둔 채 유우지는 다시금 말문을 떼었다.

“내일 돌아가는 거지.”

“응.”

“내일도 만나?”

“그럴까.”

사내의 덤덤한 대답에 모래에 발을 디뎌 그네의 움직임을 멈춘다. 평온하던 심장 박동이 규칙성을 잃었다. 평소 뛰고 있단 자각도 없을 정도로 일률적으로 뛰던 박동이 점차 속도를 높여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찰나의 간극을 지나, 유우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사내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당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재차 생각하게 된다.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는 그네만이 사내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자고 내뱉지 못한 대답이 입안을 고요히 맴돌았다.

 

Day 3

어제와 같은 시간, 같은 장소.

연일 진행되는 교내 행사로 쫓겨나듯 하교해 놀이터까지 한걸음에 내달렸다. 간만의 뜀박질에 후드 위에 걸친 교복 재킷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곧 6월이니 조만간 하복을 입어야 할 테다. 편해서 좋았던 후드티는 당분간 넣어둬야겠지. 일순 거칠어졌던 숨이 금세 안정을 찾아 균일한 속도를 되찾았다. 그네에 앉아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사박거리는 모래 밟는 소리가 들려와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 사람이다.

“누구 기다려?”

다 알고 있으면서 그리 묻는다. 만난 지 겨우 3일째인 사내지만 얄궂은 구석이 있다는 건 알겠다. 아무래도 그쪽을 기다렸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모양인가 본데. 좋을 대로 해주고 싶지 않아 새초롬하게 옆을 흘겨보고는 말문을 열었다.

“아니. 아저씨는?”

저보다 늦은 사내에게 누굴 기다리냐고 묻는 건 아무래도 엇나간 질문인가. 공연히 같은 말을 되돌려주고 싶어 내뱉은 아무러한 말에 돌아온 건 의외의 대답이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있어.”

“에, 누구?”

그네 시트에 채 담기지 못한 기다마한 다리가 보란 듯이 꼬아졌다. 훤칠한 신장에 걸맞는 다리 길이다. 괜히 부러워져 제 다리를 휘적대자 사내가 이쪽을 보고는 피식 웃는다.

“친구가 날 두고 어디로 가버려서 말이지.”

“그렇구나. 금방 돌아오면 좋겠네.”

“아마 안 돌아올걸.”

“왜?”

“난 그 친구를 아주 잘 알거든.”

“되게 친한가 보네.”

“뭐…. 유일한 친구지.”

그래서 지금은 혼자야.

그리 말해오는 목소리는 내용과 상반되게 한없이 가벼워 옅은 바람결에 휩쓸릴 것만 같았다. 떠내려가려는 그것을 붙들고 가만히 사내의 말을 곱씹는다. 그런가. 이 사람도 혼자인가. 다음 말을 머릿속에서 고르기도 전에 성급하게 입이 먼저 열렸다.

“나도 혼자야.”

“그래?”

“응. 정확히 말하면 둘이긴 하지만, 할아버지가 병원에 계시거든. 둘이지만 혼자라고 해야 하나, 어렵네.”

할아버지의 입원. 누구에게도 얘기해본 적 없는 주제다. 담임 선생님의 운동부 입부 권유에도 5시 전에 하교해야 한다고만 에둘러 말해 거절했는데. 그런 주제에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내에게 잘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우지는 무리 지어 다니는 친구가 없다. 집단에 속하게 되면 몰려다니게 되고, 그러다 보면 서로를 드러내고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하니까. 제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 할아버지의 병문안이라, 도저히 빼놓고는 말할 수가 없어서 차라리 발을 빼는 쪽을 택했다.

단순한 이유다. 약한 구석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굳이 누군가를 깊게 사귀지 않아도 점심을 같이 먹자고 권해오는 아이들은 있고, 점심시간에 만화책을 빌려주는 아이들도 있다. 그걸로 족했다. 필요 이상의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이따금 말할 상대가 필요해 티비 소리만이 울리는 집안에서 가만히 벙긋거리는 날도 있지만, 그럴 땐 일찍 잠들면 그만이다. 다음날이 되면 또 시끄러운 교실에서 안도감을 얻고, 하교 후에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어느새 제법 익숙해진 외로움은 마주하면 할수록 덩치를 부풀리기 마련이라 최대한 외면하는 게 상책이다. 어느 정도 다룰 줄 알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일면부지의 사내에게 털어놓고 있는 걸 보면, 실은 꽤나 한계에 몰려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돌아오지 않을 친구라. 사실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하고 있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아마 할아버지는 쾌차할 수 없을 것이다. 이따금 진지한 분위기를 잡으려 드는 할아버지나, 제게 유독 친절히 대해주는 간호사 누나들을 보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걸 전부 외면한 채 마냥 기다리고 있는 건 이쪽이다. 다시 현관 입구에 신발 두 켤레가 놓이고, 밥상에 수저 두 벌이 자리하게 될 날을. 집안에 두 사람 분의 말소리가 뒤섞이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소중한 사람이자 유일한 가족이니까. 제 옆의 사내도 같은 이유일 거라 생각하니 어쩐지 동류처럼 느껴져 동질감이 들었다.

“그 꽃다발도 병문안에 들고가던 걸까나.”

“맞아.”

“세심하네. 그런 걸 다 사들고 가고.”

“할아버지가 은근 꽃 보는 걸 좋아하거든. 간호사 누나도 보라고 겸사겸사.”

“대견하네.”

사내는 그리 말하며 길쭉한 팔을 뻗어 제 머리를 부빗거리며 가볍게 쓰다듬었다. 묵직한 손이 내려앉는 무게감에 유우지는 말없이 눈만 꿈뻑거렸다. 이렇게 아이 취급을 받아본 게 간만이라 당혹감이 일었다. 손이 넓은 탓인지 그만큼의 온기가 머리 위에 스미고 있다. 마지막으로 느껴본 게 언제일지 모를 따스함이다. 그게 못내 좋다고 생각하면서, 느릿하게 머리 위를 떠나는 손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고작 3일짜리 만남, 3일짜리 온기.

이럴 줄 알았으면 첫날 이야기를 좀 더 해볼 걸 그랬다. 어제 이 대화를 주고받았다면, 온기도 하루 일찍 넘겨받을 수 있었을까. 이유 모를 아쉬움에 유우지는 가만히 입맛을 다셨다.

“오늘 돌아가?”

“응. 이제 곧 가야 해. 신칸센 시간이 다 돼가서 말이지.”

“그렇구나….”

아쉬움을 채 감추지 못해 말꼬리가 한없이 늘어졌다. 그런 제 속내를 다 알아차렸다는 듯이 사내는 그네에서 가벼이 몸을 일으켜 눈앞에 마주 섰다. 고개를 한참이나 들어 올려 사내를 바라본다. 여전히 새하얀 붕대에 가로막혀 있지만 아마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을 것이다. 문득 붕대를 끌어 내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맨눈으로 고스란히 시선을 얽히고 싶어졌다.

“또 볼 수 있을 거야.”

“어떻게?”

“내 직감? 나는 촉이 좋아서 말이지.”

“아, 그래….”

명확한 근거가 아닌 직감에 따른 말이다. 이렇게 행색이 특이한 사내를 만난 건 처음이니 센다이에 오는 일도 드문 사람일 것이다. 직업도 모르니 출장이 드문지 잦은지조차 알 수 없다.

“다음에도 만나러 올게.”

대책 없이 나중을 기약하는 이 말을 믿어도 될까. 고작 3일짜리 인연에 다음까지 약속하는 게 퍽 우습지만, 더 우스운 건 그의 말에 기대감을 품게 된 자신이다. 통성명이나 겨우 한 사내를 또 만나고 싶다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아니면 유우지가 날 만나러 와도 좋고.”

 

기대할게.

사내는 그리 말하며 싱긋 웃었다. 지어내지 않은 진심으로 기대된다는 듯한 웃음. 진의가 여실히 드러나는 미소에 유우지는 안심하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계절을 한 바퀴 돌아 어느 학교의 옥상 위에서 극적으로 이뤄질 해후를 알지 못한 채.

 

2018년의 6월까지, 앞으로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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