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잭더리퍼] 아주 오래전 이야기

앤폴cp / 2019.02.20 업로드

*이 글은 뮤지컬 '잭 더 리퍼'의 넘버 '아주 오래전 이야기'를 기반으로 쓰였습니다.


"아, 눈이다. 앤더슨, 눈 온다. 보여?"

함박눈은 아니지만 조금씩 흩뿌리듯 내리는 눈이다. 꼭 그 날처럼. 평소라면 당장 떨쳐냈을 기억이지만 오늘은 술을 마셨으니까, 그리고 그때처럼 우리가 같이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아주 오래전 이야기를 잠깐만 꺼내도.

"기억나?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그날도 이렇게 눈 왔었지. 딱 이렇게 왔었어. 가루처럼. 쌓이지도 않고 손에 떨어지자마자 볼 새도 없이 녹아서 얼마나 아쉬웠었는지. 그래도 함박눈이랑은 또 다르게 좋았어. 그 날 왠지 모르게 곧장 집에 가기 싫어서, 사람 없는 건물 뒤편에서 추운 것도 모르고 눈을 보고 있었거든. 목이 꺾이도록 하늘을 올려다봐서 눈에 눈이 들어가기도 했다니까. ⋯좀 웃어. 어쨌든, 너도 알지? 네가 나 그러고 있는 걸 얼마나 뚫어지게 쳐다봤게.

⋯⋯기억나지. 어떻게 잊겠어. 모자 쓰고, 한쪽 손 하늘로 내밀고. 그러고 눈 내리는 거 열심히 보면서 서 있었잖아. 네 손이랑 볼이 얼마나 붉었는지까지 기억나.

그래. 근데 네가 나를 더 열심히 봤고, 네 볼이 더 붉었어. 몰랐지? 그 자리에서 멈춰서서 한 발자국도 못 다가오고 서성였잖아. 모자도 안 쓰고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머리카락도 좀 젖었더라. 나 보면서 헤벌레 웃다가 나랑 눈 마주치니까 고개 홱 돌리고, 괜히 이상한 혼잣말 하고. 뭐였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못 돌아가겠다느니 뭐 그랬나? 듣는데 너무 티 나서 웃었잖아. 그날 거기는 왜 왔던 거야?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그 건물에서 막 나오는 길이었어. 그냥 심부름 정도였지 뭐. 형사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니까⋯⋯. 근데 진짜 별걸 다 자세하게 기억한다. 그런 건 좀 잊어.

처음부터 나 보러 온 게 아니었어? 미안, 농담. 어쨌든 그때 너 딱 첫사랑에 빠진 소년이었는데. 얼마나 귀엽던지. 가만두면 절대 못 올 것 같길래 내가 먼저 이리 오라고 했잖아. 걸어오는 것도 웃겼어. 기름칠 안 된 것처럼 삐걱삐걱. 근데 대답도 다 엉뚱한 말이나 하고, 입꼬리는 내려갈 줄을 모르고. 바보 같은데 그게 제일 귀여웠어. 너 그때 내 말 안 들었던 거 맞지?

아니? ⋯⋯그래. 너한테 좋은 냄새가 났어. 나한테 뭐라고 말하는 목소리도 좋았고⋯⋯. 네가 날 쳐다보는 눈이 맑아서, 아. 이런 건 좀 그냥 넘어가.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너 엄청 굳어있었거든. 얼굴은 활짝 웃는데 몸은 뻣뻣한 게 따로 놀더라. 진짜 풋풋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세월에 찌들었어? 농담이야. 아직 잘생겼어. ⋯⋯음, 오늘 술 마셔서 그런 거니까 이해 좀 해줄래? 어, 어디까지 얘기했지? 아, 그래.

그때는 말이야. 사랑을 잘 몰랐어.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게 익숙했던 시절이거든. 모두가 날 예뻐해줬어. 일찍 돌아가신 아빠도, 엄마도, 친구들도, 주위 어른들도 다. 고백도 많이 받았어. 알아?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마냥 꿈 같은 감정이었지. 너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어. 아픔 같은 것도 잘 몰랐고. 지금이야 흉터에 무뎌져서 둔해진 거지만 그땐 진짜로 몰랐거든. 어른이 되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 말고는 인생에 큰 고난이랄 것도 없었고. 너 만나고 나서는 매일 네 품에서 마냥 좋았지. 너나 나나 되게 순수하고 어린 티가 났었는데.

우리 취향도 잘 맞았어. 요새는 단 거 잘 안 먹지? 사귀기 전이었나. 우리 단골 가게 처음 같이 간 날에 주문한 게 같아서 둘이 또 꺄르르 웃었잖아. 그게 뭐 그리 대단하고 좋은 일이라고 그렇게 행복했는지 몰라. 그거 말고도 식기 잡는 방법이나⋯, 뭐가 있더라. 아, 뭐 마실 때 컵의 어느 쪽에 입을 대는지도 똑같았지. 그런 거 하나하나 찾아가는 것도 재밌었어. 처음엔 우리가 천생연분인 줄 알았다니까. ⋯앤더슨, 왜 그런 표정이야. 즐거운 얘기잖아. 오늘은 좀 웃어. 그래. 그래야 얘기할 힘이 나지.

너 좋아했던 이유 또 있어. 나, 아빠를 정말 좋아했거든. 안타깝게 내가 어른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이랑 같이 있던 기억은 좋은 것밖에 없어. 근데 너한테서 아빠 향이 나는 거야. 아니, 향수 얘기하는 게 아니고. 너한테서 우리 아빠처럼 다정했던 모습이 보였다는 얘기야. 우리 같이 걸을 때는 매일 네가 내 손 잡아줬잖아. 그리고 항상 앞장서서 걸었다? 그것도 아빠랑 똑같았어. 아빠가 나보다 다리가 훨씬 기시니까 보폭을 맞춰준다고 하셔도 내가 항상 뒤로 쳐졌거든. 처음엔 너도 그런 줄 알고 더 바쁘게 걸었는데, 네가 그랬지. 나랑 손잡고 걸으면 얼굴이 너무 빨개지는 것 같아서 일부러 앞에서 걷는다고. 그 말 듣고 그냥 뒤에 있어 주기로 했어. 진짜 웃겨.

근데 그렇게 걷다 보니 나도 그게 좋더라. 네 등과 어깨를 보는 것도 좋았고, 나보다 훨씬 크고 두꺼워서 내 손을 다 감싸는 촉감도 좋았어. 너무 무르지도 않고 너무 딱딱하지도 않은 등이 시야에 늘 존재하는 게 안정감을 주기도 했고. 아, 그리고 네 셔츠에서 항상 좋은 냄새가 났어. 그럴 때마다 뒤에서 안아주고 싶었는데 너 놀랄까 봐 못 했어. 아, 알았어. 장난 안 칠게. 당황하기는. 사실 내가 설레서 못 했어. 너도 네가 앞에서 걸으니까 못 봤겠지만 내 얼굴도 만만치 않게 붉었을걸.

우리 소풍 간 날은 기억나? 날씨가 되게 좋아서 충동적으로 우리 도시 말고 풀냄새 나는 데로 가자, 해서 간 거잖아. 둘 다 처음 가는 곳인데 길 잃어버릴 걱정은 하나도 안 하고. 참 대담했네. 거기 엄청 큰 나무 있었지. 흔한 로망 있잖아. 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사랑하는 사람 다리 베고 낮잠 자는 거. 나도 막연히 갖고만 있던 거였는데 그날 이룰 수 있어서 좋았어.

누워서 하루 종일 내 손 가지고 장난치던 거? 손 닳는 줄 알았어.

싫다고 안 했잖아? 너 오히려 좋아했어. 내가 손깍지 끼고 어린아이 잼잼하듯이 잡았다 놨다 하는 거 따라하기도 하고, 손가락 두드리려고 하니까 요리조리 피하면서 웃기도 하고⋯⋯. 아, 잡아보라면서 허공에 손 휘저으며 입으로 슈웅슈웅 소리도 냈었구나? 다시 생각해보니 네가 더 재밌어했네. 그치? 봐봐. 아무 말 못 하는 거. 그러다가 내가 네 손 끌어다가 내 눈에 덮고 낮잠 잤었지. 너 그거 나 일어날 때까지 그대로 뒀더라? 불편했을 텐데. 손 치우면 깰까 봐 그랬지? 그런 배려 하나하나가 정말로 고마웠어.

우리 돌아갈 때도 손잡고 걸어갔잖아.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오래 걸은 게 처음이라 다음 날 다리 아파서 고생했다. 근데 절대로 후회하진 않았어. 오히려 완벽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바람도 적당하고, 풀냄새도 기분 좋고, 저 앞엔 불그스름한 노을이 펼쳐져 있고, 바로 눈앞엔 네 어깨가 보이고. 도시의 건물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할 때 얼마나 아쉬웠는지.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갈 수 있는 걸 처음 알았어. 보고 있는데 보고 싶다는 말을 처음 이해했지.

그리고 네가 갑자기 여기서 기다리라고 내 손 놓고 뛰어갔었잖아. 나름 나 못 보게 한다고 꼼지락거리는데 다 보이더라. 장미 한 송이 조심스레 꺾어오는 거. 그러면서 장미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거. 웃음 꾹 참고 모른 척 어리둥절한 표정 짓고 있느라 고생했어. 네 얼굴이랑 장미꽃이랑 색깔이 똑같았거든.

'선물이야? 나 장미 좋아하는데.'

야생 꽃은 혹시 날벌레라도 끼어있을까 봐 몸 가까이에 오래 둔 적이 없어. 근데 네가 주니까 너무 기뻤는지 반사적으로 머리에 꽂아버린 거 있지.

'나 예뻐?'

기껏 줘놓고는 내 얼굴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 돌리고선 예쁘다고 더듬더듬 말하는 네가 참 사랑스러웠어. 네가 그때 나한테 장미가 왜 좋냐고 물어봤었지? 내가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더라?

뒤집으면 예쁜 붉은 치마 같아서 좋아한다고.

아⋯⋯. 내가 그랬었나? 맞다. 그랬었다. 이젠 그 이유로는 좋아할 수가 없어서 잊고 있었어. 대신 네가 기억하고 있었네.

어, 뭐⋯⋯. 그럼 지금은 장미 안 좋아하나 봐?

두 번째 이유가 있어. 그 후로는 장미를 보면 그날 웃던 네 얼굴이 떠오르더라. 그 당시 내 감정까지도 생생하게. 그래서 아직 좋아해. 그렇게 떼로 핀 장미는 못 본 지 오래됐지만.

"그리워. 정말로. 나 그때로 돌아가면 해주고 싶은 말 있는데."

너는 항상 내 마음을 잘 알아맞히곤 했다. 어쩌면 그건 초능력이나 텔레파시가 아니라 네가 날 그만큼 많이 관찰하고 신경 썼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얼마나 걸으면 쉬고 싶어 하는지, 힘든 걸 숨길 때 말수가 얼마만큼 줄어드는지, 좋아하는 걸 볼 때 어떤 표정이 되는지, 하기 어려운 말을 하고 싶어 할 때 어떤 표정이 되는지⋯⋯. 아마 지금 네가 입을 떼지 않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이다음에 내가 할 말을 이미 알고 있는 거겠지.

"이제는 돌아갈 수 없겠지만⋯⋯ 사랑해. 정말."

나는 지금 누구를 보고 있을까. 과거의 너? 아니면 현재의 너? 어느 쪽이든 내가 사랑하는 앤더슨, 너라는 게 중요하다. 이미 고칠 수 없을 만큼 부서진 관계지만, 아직 그 마음을 둘 중 누구도 내려두지 못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면서 한 발짝도 다가서지 않고,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은 채로 모른 척 이 거리를 유지하는 너와 나는.

"그거 알아? 넌 바보야. 지금 이러는 나도 바보고."

"폴리."

"이건 그냥 술주정일 거야. 그래. 난 바보니까⋯⋯."

우리는 새로 생길 상처가 두려워 옛날의 흉터만 쓸어내리며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고 있다. 물론 나 역시 술의 힘을 빌려 너에게 말을 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가벼운 무게의 문장들이 될 수는 없다. 애석하게도 이 밤이 지나고 새로운 낮이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 말을 했었다는 것도 기억나지 않는 척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걸 알기에 오래 참아야 했던 사랑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런다 해도 우리가 변하지 않을 것을, 그저 하룻밤 술주정으로 애써 넘어갈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이건 누구의 탓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세월의 흐름에 겁만 많아진 어른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는 간질간질한 심장을 어찌하지 못해 괜히 서로의 시선을 피하고 이야기하던 시간들도 있었으나 지금은 네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돌린다. 너도 마찬가지인가보다. 울음을 참는 소리가 멀게 들리는 걸 보면. 그래도 혹시, 지금만큼은 용기 내어 네 얼굴을 보고 싶은 만큼 봐도 괜찮지 않을까. 술에 취했으니까. 어렵게 그 시절을 꺼내놓기도 했으니까.

"앤더, ⋯선물이야?"

"어, 아니. 아니야."

우리의 추억과 많이 닮은 장미. 너와 나는 많이 변했어도 매년 피는 장미는 항상 똑같이 선명한 붉은색을 띤다. 가끔은 그 작은 꽃이 부러워질 정도로.

"너는 내가 뭘 들고 있기만 하면 선물이냐고 묻더라."

"매번 나 주려던 거 맞았잖아."

"⋯⋯."

"나 장미 좋아하는데. 나 예뻐?"

일부러 그날과 같이 말해본다. 내가 선을 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딱 오늘만이다. 오늘만 이러고 말자. 즐거울 것 하나 없는 인생에 하루 기적처럼 주어지는 날이라 생각하고, 오늘까지만.

"어. 예뻐⋯⋯."

"아직도 내 눈 못 쳐다보네? 그때처럼."

그러네. 전부 다 변한 건 아닌가 보다. 고개를 돌리고 더듬더듬 예쁘다 말해주는 모습에 내가 사랑했던 청년이 겹쳐 보인다. 그래도 아직 너는 너구나. 이제 장미를 좋아하는 이유로 떠올릴 기억이 하나 더 늘겠다. 아, 잠시나마 예전의 나로 돌아간 것 같다. 앤더슨, 너도 그래? 너는 내 마음을 정말 잘 맞혔는데, 나는 전이나 지금이나 네 마음을 하나도 모르겠다. 그냥 너도 나와 같은 감정이기를 바라본다.

아직도 흩날리고 있는 가루눈을 맞으며 바삐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어디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급한 일이 생각난 것도 아니지만, 이 회색 도시의 밤이 이만치 아름답고 생생했던 적은 처음이라 정말로 시간을 빙 돌아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이 계단의 끝에서 건물 모퉁이를 따라 빙글 돌면 그날의 내가, 그리고 그날의 네가 서 있을 것 같은 착각. 그리고 그날을 현재의 너와 내가 한 번 더 함께하며 아름답게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는 바보 같은 생각도 함께.

"앤더슨, ⋯앤더슨? 또 갔네. 말도 없이."

아쉽게도 그 아름다운 착각은 조금 일찍 깨어진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첫 번째 이별 이후로 너는 내게 제대로 안녕을 말하고 사라진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손 한 번 흔들어주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네 성격에 낯 간지러운 건 알지만 오늘은 괜히 섭섭하다. 모퉁이를 돌아보면 역시나 예전의 우리는 없고 회색 건물과 그 위에 쌓이는 잿가루만이 있을 뿐이다. 머리카락 위 붉은 꽃만이 아까의 네가, 내가 술에 취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닌 진짜 너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괜찮다. 너는 또 말없이 떠났지만 이 꽃만은 내일도 모레도 항상 내 머리 위 가장 눈에 띄는 곳에서 화려하게 피어있어 줄 테니까. 그거면 됐다.

사랑하는 앤더슨, 오늘의 너는 나한테 가장 커다란 선물이었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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