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세계
이제는 사람들의 입에 간간이 오르내리는 이야기가 있다. 전설이라 불리는 한 검객과, 그에 대적하는 실력을 가졌다고 여겨진 다른 검객의 대결. 마침내 그 성대한 막이 내려간 이후 결정된 단 하나의 패자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바람처럼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이 넓은 도시 안의 누구도 그의 행방을 추측해내지 못했으니, 다만 부상을 입고 죽었다고 판단하였
한정훈은 살았다. 이것을 '살았다'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생각을 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을 죽었다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그것은 연장선이라기보다 되풀이에 가까웠으므로, 다 꺼진 양초를 바라보며 익숙한 온기를 강박적으로 떠올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정훈에게는 '삶'이라는 글자가 어색했다. 희끄무레한 전등 아래 앉
역극 원본 - https://pnxl.me/ezhv5w "아가씨, 이제 가셔야 합니다." "아, 재희." 혜린은 종종 공상에 빠져들었다. 태수와의 재회가 있던 주주총회 이후, 밀물처럼 치고 들어오는 서류에 밤낮없이 파묻혀 애쓰다 그만 더친 습관이었다. 그런 이를 현실로 끌어내는 것은 주로 아버지이거나, 민 변호사 혹은 지금 눈앞에 있는 재희였다. 적어도
아가씨, 이제 가셔야 합니다. 아, 재희. 박태수를 다시 만난 주주총회 이후로 더욱더 서류에 파묻혀서 밤낮없이 애쓰느라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피로한 눈을 꾸욱 누르고는. 고마워. 지금 해암 선생님 댁에 가는 거지? 그분을 설득해야 승산이 있는데. 주식 넘겨 주실까. 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 넋두리처럼 입에서 흘러나왔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오
강우석은 오랜 친구의 이름 석 자를 들여다보았다. 제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이 늘어놓는다면 A4용지 한 장이야 거의 채우겠다마는, 그중 맨 앞을 차지할 이는 단연 박태수― 그가 아닐 리 없었다. - 야, 박정희 대통령은 어디 학교 나왔다냐. - 육사 나왔다지. 너는 꿈이 있었다. 싸움도 잘하고 공부도 잘해서 무엇 할 거냐는 질문에
때때로 이름 없는 것은 저 자신의 불행을 원했다. 그것은 실밥을 제거하지 않으면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 같은 것으로, 원인과 결과가 한데 뒤섞여 더 이상 시작점을 알 수 없게 된 불덩이였다. 얼기설기, 그러나 꽤 정성스레 꿰인 실은 한때 누군가의 희망이자 생명이었으나 이제는 그 쓰임을 다하고 고작 이물질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자신이 그것과
존 파우스트는 아주 완벽한 사람이었다. 만약 책꽂이의 책 중 하나라도 자리를 바꿔두고 바로 고치지 못하게 하면, 그는 하루 종일 입술을 씹을지도 모른다. 그 완벽한 집에 사는 두 사람은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냈다. 이 날이 저 날이 되고 일주일이 뒤바뀌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똑같은 하루들을. 이를테면 이렇다. 그가 매일 같은 시간에 눈을 떠 두
파리, 아름다운 도시. 온갖 예술이 세느강을 따라 흘러넘치는 곳. 그런 수식어를 가진 곳이라면 온갖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프랑스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 특히 청년들은 저마다 다른 억양과 옷차림을 자랑하며 거리를 오갔다. 그중에는 물론 시라노도 있었다. 프랑스 남서부의 가스코뉴, 그 촌 동네라 불리는 곳에서 배짱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온 이 말이다.
- 태수 씨, 나 왔어. 혜린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장우산을 접어 든 채였다.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건네받을 사람이 없는, 비 오는 날이었다. - 우석 씬 같이 못 왔어. 일이 바쁘대. 나쁘지? 우리 검사님이 그렇지 뭐. 자연스럽게 유리문 한쪽에 수수한 꽃장식을 붙여두고, 혜린은 안쪽의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전부 활짝 웃는 것뿐이었다. 태수의 표정들이
"안나, 남편의 말을 끊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이오." 세료자는 생각했다. 아버지의 표정은 변하는 법이 없다고. 평소 아버지인 카레닌은 그를 꾸중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일은 늘 어머니의 몫이었으니 말이다. 안나가 화려한 드레스 자락을 바닥에 끌며 조그마한 세료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 그리고 세료자의 어깨를 붙들고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잘못된
땀 흘린 뒤에 먹는 달콤한 디저트가 제일이라는 말을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누가 한 말인지는 몰라도 이 말은 달타냥이 어렸을 때부터 달고 살던 말이었다. - 아버지, 저 오늘 열심히 뛰어놀고 와서 힘들어요! 달콤한 게 먹고 싶어요! 이럴 때 아버지는 늘 웃으며 어디서 난지 모를 간식거리들을 하나씩 꺼내주시곤 했다. 달타냥은 눈을 접은 채로 그것을 받아 들어
이 이야기는 포르토스가 아직 총사이기 이전, 바다 위에서 약탈을 일삼는 해적일 때의 이야기다. 포르토스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 수도 있는. 뭐, 본인은 부정할지도 모른다. 바다에 살다 보면 당연히 여러 일을 겪기 마련. 포르토스는 그것을 성장이라 여겼다. 남자라면 거칠게 살아야지. 술과 바다와 함께 하는 삶ㅡ후에 아토스가 포르토스와 처음 만났을 때 이것을 겉
*이 글은 뮤지컬 '잭 더 리퍼'의 넘버 '아주 오래전 이야기'를 기반으로 쓰였습니다. "아, 눈이다. 앤더슨, 눈 온다. 보여?" 함박눈은 아니지만 조금씩 흩뿌리듯 내리는 눈이다. 꼭 그 날처럼. 평소라면 당장 떨쳐냈을 기억이지만 오늘은 술을 마셨으니까, 그리고 그때처럼 우리가 같이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아주 오래전 이야기를 잠깐만 꺼내도. "
무지한 자는 자신이 무얼 가졌는지 모르고,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가진 것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다. 다소 급하다 생각할 만큼 빠르게 열쇠를 끼워넣는 소리가 넓고 텅 빈 거실을 울렸다. 시간은 새벽 4시를 이제 막 넘어가고 있었다. 창가에 앉은 한 여자는 두 손을 바르게 모으고 눈을 살포시 감고, 무릎을 꿇은 채 차가운 맨바닥에 앉아 입으로 속삭이듯 무언
악마는 신을 동경하며 시기했다. 사랑하며 비웃었고, 걱정하며 무시했으며, 따르며 등돌렸다. 어느 옛날 신이 안식을 취할 때에 그의 빛을 몰래 한 움큼 훔쳐 품에 숨겨둔 까닭을 스스로도 알지 못했으나, 악마는 그것을 항상 품고 다녔다. 삼키지 못할, 그렇다고 들킬까 꺼내지도 못할. 악마는 몇 세기에 걸쳐 신과 가장 가까운 인간을 찾았다. 마침내 196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