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삼총사] 염몽

쥬샤크의 이야기 / 2022.08.19 업로드

이제는 사람들의 입에 간간이 오르내리는 이야기가 있다. 전설이라 불리는 한 검객과, 그에 대적하는 실력을 가졌다고 여겨진 다른 검객의 대결. 마침내 그 성대한 막이 내려간 이후 결정된 단 하나의 패자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바람처럼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이 넓은 도시 안의 누구도 그의 행방을 추측해내지 못했으니, 다만 부상을 입고 죽었다고 판단하였다.


쥬샤크는 몰라보게 수염을 기른 채였다. 암만해도 그 해적 총사만큼은 아니었으나 세월에 비해 연륜이 있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근위대장일 적에야 제 용모가 추기경님의 위신에 그대로 옮겨붙는 것이었대도, 옷깃 하나 붙잡을 이 없는 현재로서는 전부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래서일까. 이름도 외우기 힘든 낡은 여관 의자에 기대앉아 다 비운 컵을 소리 내어 내려놓는 추레한 남자는 일부러 과거의 영광이란 전부 어디에 남겨두고 온 듯했다. 그 말대로 한때는 파리 시민 모두가 그를 알았으나, 변방으로 벗어난 지금 그의 이름을 단번에 짚을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작지 않은 잔이 하나둘 비워진다.

언젠가 어린이들의 손에 차고 넘칠 만한 컵을 들고서 넷이서 건배를 한 적이 있더랬다. 별로 추억으로 회상하고 싶은 인물들은 아니었으나 사람이 끝에 다다르면 싫은 것이 생각난다고, 떠도는 삶에 가장 많이 되새긴 것은 이상하게도 그들이었다. 같이 검을 겨루고, 내가 이겼니 네가 졌니 실랑이하다 함께 물 한 바가지를 넘기고, 그리고 다시 또 대련을 하고⋯⋯.

"나는 총사가 될 거야."

"나도."

"우리 다 같이 총사가 되는 거야!"

"⋯⋯."

술이 넘어가며 목구멍 안쪽을 잘못 건드린 듯 고통이 밀려왔다. 그날 아토스에게 입은 상처였다. 흉터는 아물었으나 예전처럼 누군가에게 명령하고 소리를 지르기란 불가능했다. 하기야,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어이, 쥬샤크!"

"⋯⋯아."

"하하, 한눈팔지 말랬지? 이 아토스를 앞에 두고 말이야!" 

익숙하고도 지겨운 목소리가 귓가를 연신 때렸다. 휴식하고자 찾은 자리에서까지 내내 맴도는 그들이다. 먼저 끊어냈으면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이마에 짙은 주름이 새겨졌다. 이제 그만.

"너는 흥분하면 몸짓이 커진다니까! 그걸 고쳐야 돼!"

가르치길 좋아하는 아라미스의 충고를 자존심이 상해 무시했던 것이 십 년도 전이었던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그가 맞았다는 것을 쥬샤크는 가슴 한 켠에 분명히 알았다. 아직까지 고치지 못한 나쁜 습관, 그리고 그런 자신의 약점을 한 번에 파고들어 제압한 건방진 애송이를 보고 있으면 꼭 부끄러워져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그게 증거였다. 쥬샤크는 이를 갈았다. 자신을 통제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지금에조차 스스로 포박을 강행한다. 점점 많은 양의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였다. 과거에는 미련이 없다. 그런데 왜.

똑같은 말을 들었다. 실제로 자신과 대적한 이들이 칼을 휘두르며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적어도 쥬샤크가 본 환상은 같은 말을 내뱉었다. 한눈팔지 말랬지, 쥬샤크. 너는 흥분하면 몸짓이 커진다고 말했지. 지옥에 떨어져도 들릴 메아리. 그는 테이블에 천천히 이마를 대고서 바람 소리 섞인 웃음을 흘렸다.

친구였나, 우리.

문득 자신의 목소리로 물음이 던져진다. 더 고심해봐야 하등 의미 없을 문답이다. 쥬샤크는 그것을 떨쳐내려 짧은 머리카락을 헤집었으나, 술이 들어가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변한 뇌를 이길 수는 없었다. 왜 하필, 오늘인데.

"갑자기 왜 그러나? 자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말을 해."

"⋯⋯."

"쥬샤크."

악을 질러도 망가진 목은 별다른 음성을 토해내지 못했다. 발개진 얼굴을, 또 눈가를 손으로 벅벅 문지르며 마른 숨을 삼킨다. 아는 마음이라면 차라리 스스로를 죽여 잠재우기라도 할 터였으나, 당장 울컥 치미는 것은 어찌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었다. 듣기 싫은 목소리가 웽웽 울렸다. 쥬샤크, 쥬샤크, 쥬샤크⋯⋯.

어이, 친구.

방랑 중이라고는 하나 쥬샤크의 허리춤에는 늘 칼이 있었다. 근위대 일을 하던 시절에 쓰던 것과 최대한 닮게 만든 것이었다. 그것을 뽑아 들어 어딘가로 겨누었다.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아니, 어쩌면 이건 전부 상상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자신은 테이블에 힘없이 엎드려 있을지도⋯⋯. 흐려지는 시야에 익숙한 얼굴들이 잡혔다. 과거의 편린이다.

검사가 주저앉아서 되나?

시끄러워. 쥬샤크는 이미 다 상한 얼굴을 문질렀다. 오늘따라 거나하게 마신 술 탓이라고 하고 싶었으나, 그마저도 누군가를 생각나게 해 욕지거리를 흘려냈다. 도망자, 비겁한. 어디선가 비웃음이 들렸다.

“⋯⋯.”

죽음이 확정되었을 때, 그 문턱에서 겨우 기어 올라왔을 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부축했던 근위대 부하들과 애송이를 추가한 삼총사는 한 데 엉켜 어딘가로 향했으니 들리는 것은 물소리뿐이었다. 살았다, 살아는 있었다. 삶에 대한 의지가 지독하지는 않았으나 어쩌면 한이 남았는가 싶었다. 그가 잘못 벨 리가 없다. 전설의 검객이라 불리우는 그 남자가. 그러니 내가 '살아남은' 것이겠지⋯⋯.

지난 길을 후회해 본 적 없다. 죽음을 두려워해 본 일조차 없다. 크나큰 미련 가지고 무엇 이룩하겠다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한 시절 또한 없다. 그저 나의 정의를 발견하고 싶었을 뿐, 그 과정은 틀리지 않았을 터인데. 그날의 핏물이 다시금 옷을 적시는 듯한 환각이 눈앞을 사로잡는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혹 아니라면 새빨간 것은 술일는지.

완전히 꺾였다. 다시는 두려움에 그와 칼을 맞대지 못할 것이다. 아니, 얼굴만 보아도 꽁무니를 빼려나. 추기경의 쥐새끼, 지금의 자신은 정말로 그런 꼴인지도 모르겠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내내 괴롭히던 환청은 이제 사라진 듯 고요했다. 쥬샤크는 잔을 들었다가, 그 안이 비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천천히 내려두었다. 문득 금방이라도 아토스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올까 싶다. 그 생각에 또 자연스레 칼을 쥐었으나 실재하지 않는 것을 상대로 휘둘러 봐야 추할 뿐이었다. 자신은 패배자였다. 개인으로 보아도, 역사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러했다. 반역 행위― 누군가의 정의였을 혁명의 실패에 그들은 그리 이름 붙였다. 보기 좋게 제 꾀에 당한 셈이지. 가벼워진 컵이 테이블 위에서 덜그럭거렸다.

그나마 남은 이성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잔뜩 긴장한 가게 주인에게 동전을 몇 개 쥐여주고 여관의 위층으로 오른다. 이런 날이면 꼭 악몽을 꾸었다. 잠들기 싫었다. 지극한 친우를 대하는 맑은 눈빛을, 칼을 맞대며 언젠가 미래에 함께하자며 웃던 소리를 마주하기에 지쳐 버린 탓이다. 손목이며 발목이며 사슬 같은 것에 꽁꽁 매인 기분이었다. 침대의 틀이 삐걱대는 것이 꼭 우리 타던 그네 같았다. 쥬샤크는 고함을 내질렀다. 나오는 것이 없었다.

다 지나고 나서 그 시절 꿈을 상상해본 일 있다. 그럴 때면 쥬샤크는 자신의 인생을 어디까지 되돌려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틀리지 않았다. 다만 달랐을 뿐이다. 그는 태생부터 불안하였고, 저들과는 달리 발아래 땅을 다지는 것이 급했다. 너희에게는 그런 근심 없었을 테다. 생존을 위해 살을 에는 고통 참지 않아도 되었을 테다. 네놈들은⋯⋯.

술기운에 헛웃음이 배어 나왔다.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의 그것이었다. 전부 개소리다. 쥬샤크는 자신의 불찰을 알았다. 죽도록 노력해도 다듬지 못하였던 무능을 이해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스스로와 싸웠다. 자신은 그러했는가. 옳은 방향을 골랐던가.

나의 정의를 찾고자 했다. 권력과 힘이, 남을 밟아 오를 세력이 그것을 이루어 주리라 의심치 않았다. 정말로 이 내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길이었을 텐데. 쥬샤크는 맨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이제는 장갑 따위도 없다. 그가 말해 온 정의는 매번 같은 이들에게 스러졌다. 그러니 어찌 그리워한단 말인가. 기만으로 가득찼던 사춘기 이전을. 그래, 결국 매번 등을 바라보는 것은 자신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저들이고.

달빛이 작은 창으로 들이쳤다. 종종 저것을 하늘이 제게 베푸는 일말의 온정으로 믿은 적 있으나, 작금에 이르러서는 다 바스러진 꿈 이상 되지 못했다. 천을 당겨 창문을 가리었다. 이번엔 여관 앞마당에 드나드는 개가 무엇을 쫓느라 아르렁아르렁 꼭 아침을 부르짖듯 했다. 저기 틀어박힌 것은 누구를 위한 북극성인가.

죽음 이후는 과연 깨지지 않을 염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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