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곤투모로우] 안녕하세요. 여기는―

2022.08.16 업로드

한정훈은 살았다.

이것을 '살았다'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생각을 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을 죽었다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그것은 연장선이라기보다 되풀이에 가까웠으므로, 다 꺼진 양초를 바라보며 익숙한 온기를 강박적으로 떠올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정훈에게는 '삶'이라는 글자가 어색했다. 희끄무레한 전등 아래 앉아 있노라면 그 단어는 누군가의 이름과 결을 같이했다. '사람'에서 모음만 빼낸 것이 삶이라면, 애초에 사람으로 사는 이만이 가질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 너머까지 생각해 본 일은 없었다.

문득 깨우치니 익사한 적도 없건만 온몸이 젖어 무거웠다. 정말로 바다에라도 담갔다 꺼내졌나, 아니면 땅을 스치다 풀물이 들었나. 처음으로 돌아보면 옷자락이 그득 시퍼렇다. 애석한 일인지 혹은 다행인지, 짓누르던 것은 다 지나고 나서야 감각되었다. 마지막 기억 속에 그림자 없이 용포를 질질 끄성가던 당신께서 그러하듯이― 한정훈은 핏물 진 겉옷을 왈칵 손에 쥐었다. 당장에라도 가벼워진 몸뚱이가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까 겁이 났다.

걸어도 걸어도 목적지랄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거리도 방향도 오리무중인데, 초행길은 괴상히도 익숙했다. 하나 만일 이곳이 눈감기 직전의 주마등이라면 제 앞에 펼쳐진 무無도 납득이 간다. 한정훈은 이제 구둣발 소리와 총성을 구분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서 풍경 소리가 번졌다. 한정훈은 걸음을 멈추었다. 바람이 있었나. 어쩌면 시간이고 공기고 흘러가는 것은 모두 자신을 비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 번 더 풍경 소리. 아니다, 이건 김옥균 선생이 또 동전을 던져 받는 소리구나. 나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겠다. 발등이 구겨진 검은 구두가 헐거워질 때마다 뒤꿈치의 힘줄이 울걱거렸다.

그때 목구멍에도 총을 맞았던가.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차피 들을 이 없는 외침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에 서러운 우리다. 정말로 시체를 물가에 갖다 버리었는지 숨이 찼다.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느리게, 또 느리게 이어지던 동작이 다다닥 멎었다. 이제는 할 일이 없다.

그래, 정말로 해야 할 것이 하나 남지를 아니하였다. 올려다봐도 오롯이 허공뿐인 하늘의 자리를 응시한다. 실패했다. 변치 않는 사실이 밀물처럼 흘러든다. 가고자 했던 나라가 가라앉았다. 뫼시고자 했던 사람이 재 되어 흩어지고 이루고자 했던 뜻은 형체 잃어 꺼졌다. 한정훈은 실소를 읊었다. 역시나 뱉어지는 것은 아까의 바람이었다.

종우―

그리고 그전부터 청하던 목소리 있다. 이제 그만 부르십시오, 정훈은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세상 하나 가로막는 데는 고작 이 정도 작은 움직임이면 된다. 우리는 못내 그것이 분하였다. 우리⋯⋯. 결국 딛고 설 땅도, 돌아갈 집도 없이 혼자 남은 자에게.

정훈―

아, 인제 해도 달도 잃고 가장 이른 때 뜨는 계명성까지 떨구니 지금 저희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도무지 아십니까. 다시금 앞이 트여도 구분할 수 없는 암흑 속으로 정훈은 점점 파묻히고 있었다. 이 순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실체는 빨려들지 아니하고 다만 가리워져 잊힐 것이란 직감이었다.

훈―

⋯네가 나의 무엇을 이해하고 도왔는지 나는 몰라. 정훈은 프랑스에서의 작별에 나누었던 대화를 끌어내었다. 돌아오겠다고 했던가, 아니면 고맙다고 했던가. 그것도 아니면 혹 조선말로 가벼운 인사 건네었던가. 바다 공기 한껏 머금은 듯 입술에 소금기가 묻어났다. 내가 본 것은 찬란함이었나, 아니면 찰나였나.

⋯⋯.

손가락 사이사이 끼인 거친 천이 바닥으로 떨어지려던 일순간, 돌연 이전보다 가까워진 풍경 소리와 함께 안개가 미약하게 걷혔다. 아주 조금이지만 정훈은 오 리 정도 떨어진 건물의 지붕 모양새를 알아보았다. 무슨 용도의 건물인지, 그 등장이 지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쉽사리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혹 피처彼處가 자신이 잠들어야 하는 곳이라면 일부러 돌아가고도 싶었다. 그래⋯⋯ 내 나라에⋯⋯. 정훈은 핏자욱이 말라붙은 이마부터 눈까지를 손으로 덮어 가렸다. 말라야 할 것은 새고, 토해내고 싶은 것은 오히려 굳어 있었다.

⋯⋯!

급히 목덜미가 수축하여 정훈은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언뜻 선명한 새 지저귐 같은 것이 들렸다. 시체를 뜯어 먹으려 몰린 까마귀인가, 아니면 자신을 손님으로 맞이하려는 까치인가. 그것도 아니면. 아니, 그건 아니다. 헛되고 비대한 희망은 여기까지로 충분했다. 정훈은 주먹을 쥐었다가, 이내 여기저기 찢겨 너덜거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그저 확인일 뿐이다. 지금까지도 걸어왔으니 저기까지 다다르는 것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유는 그것이 다였다. 어리석게 살아 보통으로 죽었으니 이에 정성스레 혀를 찰 이 없으리라.


제 몸 하나 지탱하기도 버거워 보이는 목조 건물은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숨을 훔쳐내며 마루 위로 오른 정훈은 한참을 머뭇대었다. 안에 누군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혹여나 정말로 이런 곳에서 자신을 기다린다면 어찌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물며 그가 조금 전의 음성 중 하나라면.

정훈은 까진 손을 문가에 올렸다. 처음 총을 잡을 적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채다. 생전에 이리 두려울 때는 어찌했더라, 정훈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문은 틈 하나 내지 않고 맞물려 있었다. 정훈은 조그마한 홈에 억지로 손을 밀어 넣고 잡아당겼다. 허탈할 정도로 쉽게 안쪽이 훤히 드러났다. 숨소리라고는 없었다.

먹은 것이 세게 얹히기라도 한 듯 발악하던 속이 금세 조용해졌다. 정훈은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정훈은 새를 찾아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찾았다. 그러나 새는커녕 벌레 한 마리 기어가지 않았다. 막다른 길. 정훈은 이전에도 이런 것을 겪었다. 과히 많은 새벽을 지새웠다. 그 당시 무엇을 의지하여 다음을 바라보았던가. 애를 써도 머릿속에 도는 것은 익숙하고도 먼 목소리들뿐이었다. 죽어 가장 먼저 아무는 상처는, 기억인지도 몰랐다.

거의 부스러진 육신을 느끼고서 정훈은 손을 뻗었다. 무엇 짚일 리 없음을 알았다. 알면서도 그리했다. 여전히 입술 새로 흐르는 것은 웃음소리가 못 되었다. 바스락, 손가락 끝부터 가루로 작살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정훈은 이번에야말로 입을 다물었다. 세상의 끝에서 한참을 경직하듯 서 있었다. 바스락, 제 몸이 흩어지기를 기다리던 귀가 다시금 열렸다.

정훈은 작은 경상經床 위에 놓인 봉투를 보았다. 교지이거나 전보이거나, 혹은 가짜 밀서처럼 생기기도 한 것이 낯익었다. 죽음 이후에도 마땅히 크게 변한 것은 없구나. 정훈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발신인과 수신인의 이름도, 보낸 주소도 적혀 있지 않았다. 메마른 손은 종이를 스칠 때마다 낙엽 밟는 고함을 내었다. 그는 얇은 종이를 꺼내 손에 쥐고서도 한참을 땅에 박힌 듯했다.

손아귀 힘에 종이의 가운데 크게 우그러진 자국이 남았다. 한정훈은 지척에 흘긴 자신의 외투를 바라보았다. 또 제 손안에 쓰여진 것을 바라보았다. 창문이 없는 대신에 들어온 문을 통해 바깥을 보았고, 다시 또 글자를 보았다. 그제야 한정훈은 자신이 아주 처음에 모서리에 손가락을 긁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한정훈은 그것을 다시 봉투에 넣어두었다. 다정하지 못한 손길이었으나 제법 건드리기 전과 같은 모습은 갖추게 하였다. 한정훈은 어딘가에서 새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귀를 기울였다. 아까 것이 모두 환청이라고 주장하듯 고요했다.

한정훈은 다리를 질질 끌어 밖으로 나왔다. 푸르른 하늘도 눈 부신 햇살도 없었다. ⋯⋯하나 바람이 불었다. 동풍이다. 턱 아래 그인 흉터에 물기가 어렸다. 주저앉으며 꺾였던 발목이 불에 지진 듯 욱신거렸다. 머리 위로 씻기듯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울음소리가 났다.

한정훈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표지판이나 다정한 안내 문구 따위가 아님을. 자신과는 아무 관련 없는, 어디 먼 곳의 이름 모를 누군가가 휘갈겨 날린 유리병 편지와도 같음을. 파도에 휩쓸려 떠다니다가 '아무에게나' 집히면 그만일, 완전한 타인의 낙서임을. 발신인과 수신인, 어느 쪽도 중요치 않은 서간. 하지만 작금의 한정훈이 영면에 살 수 있게 하는 구겨진 종잇조각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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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내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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