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모래시계] 바람이 땅을 쓸고 지나가면

@Want_Your_Story 님과 한 역극을 바탕으로 살을 덧붙인 글 / 2022.08.16 업로드

역극 원본 - https://pnxl.me/ezhv5w


"아가씨, 이제 가셔야 합니다."

"아, 재희."

혜린은 종종 공상에 빠져들었다. 태수와의 재회가 있던 주주총회 이후, 밀물처럼 치고 들어오는 서류에 밤낮없이 파묻혀 애쓰다 그만 더친 습관이었다. 그런 이를 현실로 끌어내는 것은 주로 아버지이거나, 민 변호사 혹은 지금 눈앞에 있는 재희였다. 적어도 지금은 언급할 수 없는 이름들을 제외하고는.

목소리가 무척 무거웠다. 물론 재희의 변성기 이전 목소리야 현재로서는 알 길 없으나, 혜린은 비유적으로 그가 점점 언어에서 무언가를 덜어내고 있다고 여겼다.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아니면 영원히 모를 것도 같았다. 최소한의 무게만 남긴 채 모조리 저 어디 강물에라도 떠나보낸 듯한 어투는 종종 곁에 있는 이의 달랠 수 없는 외로움을 마주한 기분에 남게 했다.

"⋯⋯고마워. 지금 해암 선생님 댁에 가는 거지? 그분을 설득해야 승산이 있는데, 주식 넘겨주실까."

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 넋두리처럼 입에서 흘러나왔다. '흘러나왔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유난히 재희에게만은 부러 뻔한 질문을 건네는 빈도가 잦은 것이, 지나치게 편해서인지 아니면 거울이라도 앞에 둔 기분에 스스로 재차 확인하는 절차인지 알 수 없었다.

재희는 회답하지 않았다. 영 말수가 적은 성격은 윤재용 회장이 아랫사람으로 흐뭇해한 모습 중 하나였다. 혜린은 종종 재희와 무언으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눈을 마주하면 이 사람이 내게 어떠한 감정을 비추고 있는지, 다른 사람도 아닌 재희라면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그것은 재희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 재용과 혜린 곁에 있으면서 어깨너머로 들은 일은 알아도 모르고 보아도 잊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만큼이 제게 주어진 역할이었으므로 이에 따로 의문을 가지거나 반항해 본 적 또한 없었다. 종종 자신이 모시는 이가 주저앉고자 할 때에는 그마저도 선을 넘고 싶은 충동이 일기는 하였으나, 역시 딱 거기까지였다.

열여덟과 열넷, 그때부터 재희가 봐 온 혜린은 쉽지 않은 과제에 몸을 내던지는 사람이었다. 결과를 알면서도 걸어보는 싸움을 일상으로 삼는 사람이었고, 자신은 평생 하지 못할 도전을 내내 해내는 이였다. 모든 일에 선을 그어두고 스스로를 옥죄는 재희에 비하면 혜린은 그가 아는 인간상에서 무척이나 진취적인 부류였다. 그러니 그 등을 받쳐 세상의 흐름에 떠밀리지 않도록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재희가 오롯이 품은 단 하나 삶의 이유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해서."

"그런 말 하지 말아. 재희는―"

둘의 대화는 종종 이런 식으로 끝을 맺었다. 그럴 때면 혜린은 마음이 빼어나게 잘 맞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가슴속 한구석이 틀어막힌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언젠가 혜린이 말했던가. 재희가 존댓말을 쓰고 자신이 반말을 쓰기 때문에, 그래서 이 집이 싫다고. 뭐가 그리 죄송하고 면목이 없는지, 물어도 만족스러운 답을 내지 못할 것을 알아 씁쓸함을 삼킨다.

"⋯이미 충분하니까 됐어. 미안하단 소리는 그만 해."

첫 단추부터 수직으로 꿰인 관계라, 안타깝게도 어른씩이나 된 혜린은 예전처럼 철없이 재희를 조를 수 없었다. 주기만 하는 사람과 받기만 하는 사람. 가장 가까운 관계마저도 이리 갇혀 버린다는 게 울적했다. 혜린은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피곤함을 틈타 날을 세우고 삐져나온 감정을 정리했다. 이제 와서 그런 감상에 젖기에는 심히 묵어 버린 연이었으므로.

"알겠습니다."

재희는 자연스레 혜린의 반걸음 뒤에서 걸었다. 이제는 조금 느릿하게 걸어야 그나마 속도가 맞았다. 멈춘 공기 속에 서로 하지 못한 말들이 내내 떠다녀도 둘 중 그것에 집중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정하고 적당한 보폭, 좁혀지지도 늘어나지도 않는 거리, 차에 가까워지면 빠르지 않게 앞서 나가 문을 여는 생채기 입은 손, 그리고 반듯하게 편 허리와 혜린을 향하는 어깨⋯⋯. 꼭 둘을, 재희를 표현하기에 적절했다. 딱 그만큼의 거리.

혜린은 손을 쓰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 언제나 이때로부터 재희가 운전석에 몸을 얹고 시동을 걸 때까지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잠시간의 정적이 있다. 혜린은 거무죽죽한 막을 입힌 창문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느다랗고 엷은 웃음이 고요를 깬다.

"재희, 내가 아버지 자리 지켜낼 수 있을까. 어때? 어떻게 생각해? 이번을 잘 넘긴다 해도, 그다음은?"

물음에 물음이 꼬리를 이으며 가죽 시트에 희미한 손톱자국을 남겼다. 차 키를 꽂는 재희의 움직임 역시 잠시 멈추었다가, 으레 평소처럼 부드러이 이어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혜린의 말을 아예 듣지 못한 것도 같았다.

"뒤에 있겠습니다."

그저 그 한마디뿐이었다. 대신 나서 일을 수습할 수도, 당장에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데려다 줄 수도 없는 사람이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오직 혜린의 뜻만이 그가 지닐 역할의 전부였다. 핸들을 쥐는 손에 유난히 뼈가 도드라졌다. 어쩌면 재희는 자신을 여기까지 존재케 한 사람을 전쟁터로 데려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기저에는 하나의 믿음만이 깔려 있었다. 당신은 하고 싶다면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하하, 이대로 이 차를 타고 먼 곳으로 도망가고 싶다고 해도?"

"그게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실 거잖아요, 도려낸 뒷말이 엔진음에 묻혀 사라졌다. 혜린의 목소리 하나로 공항에 차를 댈 재희임을 앎에도 그는 결코 그런 선택을 내리지 않는다. 재희가 오래도록 알아 온 혜린이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라, 가끔 그게 가슴 한 켠을 욱신거리게도 했다.

헤린은 오래 말을 않았다. 숨통 한 번 트려고 던진 농담에 재희가 진지하게 반응해서, 아니면 그저 할 말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창 너머 지나는 풍경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사람들이 나보고 변했대."

긴 숨 끝에 던진 서두는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한번 매듭을 풀고 나니 그다음은 쉬웠다. 줄줄이 튀어나오는 마음을, 혜린은 굳이 조절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 상대였다.

"아버지 더러운 돈 경멸했던 모습이랑은 다르다면서. 예전의 나는 창피한 게 참 많아서, 변하지 않을 줄 알았대. 이거 내가 배신한 건가? 말해 봐. 민 변호사님 제하면 이제 내 곁에 있는 사람 중에는 재희가 날 제일 오래 봐 왔잖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는 아가씨는 항상 같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따르는 사람. 제 사람을 지키는 사람. 그러나 사지가 잡혀 늘 탄식하는 사람. 재희는 골수에서 혜린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공백이 길수록 오해도 커지는 법이다. 혜린은 변한 적이 없다. 오히려 너무 달라지지 않아 문제일 정도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꺾일 것처럼 올곧은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아가씨께서는 할 수 있는 걸 하실 뿐입니다."

더러운 돈이라고는 해도 그나마 덜 지저분히 다루는 사람에게 쥐여 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재희는 제가 받드는 일의 뜻을 묻는 일이 좀처럼 없었으나, 그 의도와 본질을 헤아리는 힘은 갖춤에 묘한 인재였다. 재용과 혜린은 각각 다른 관점에서 이를 기꺼워했다.

재희는 항상 그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건넸다. 가식도 아부도 아닌 것을 말했다.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고, 자신과 보냈던 시간들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듯 태도를 뒤집고 발길을 돌리는 참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걸음 하나 뒤로 옮기지 않고 혜린의 곁에 남는 재희는 그에게 당연함과 동시에 잃을까 덜컥 겁이 나는 이였다.

"그래, 할 수 있는 거. 으응. 할 수 있으면서 해야만 하는 거. ⋯⋯그거 할 뿐이지. 정말 해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부딪혀야지 어쩌겠어."

마주하는 사람들의 칠 할 이상이 적이다. 곁에 있는 몇몇 사람들의 손만 붙잡고 뛰치기엔 아직은 버거운 길.

"⋯⋯근데 계속 부딪히다 보면 나도 아파. 어떻게든 잊고 또 부딪혀 보는데 또 아프고, 그게 쌓이다 보면 무서워지는데."

혜린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았다. 하나 날것을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두지 않음은 카드놀이의 기본이었고, 그 시절 아버지인 윤 회장이 어린 딸에게 가르쳤던 습관은 지금까지도 남아 그를 차지하고 있었다.

"재희는, 무서울 때 어떻게 해? 재희가 잘 알 것 같아. 싸울 때 말야."

신호등의 붉은빛이 차 안으로 새어들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대화가 멈추었다. 혜린은 질문이 적절했는지를 생각했다. 재희는 응답이 마땅할지를 짚어보았다. 삼십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두렵고 아픈 것은 대신 해 드릴 테니 나아가기만 하시라는 마음이, 미처 말이 되지 못한 채 부슬비처럼 재희의 목구멍을 두드렸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 그가 스스로 존재 아닌 '삶'을 허락한 이유였다. 세상 너머에 당신이 찾는 길이 있다면 그곳에 닿을 수 있도록 등을 내어주는 것. 핸들을 붙든 손에 힘이 빠졌다. 재희의 눈이 지그시 감긴다. 무서울 때 앞을 바라보고 다시 땅을 디디게 만드는 원동력. 이럴 때 혜린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있었다면⋯⋯. 달갑지 않은 얼굴이 등장하는 상념에 시야를 다시 틔우면 그제야 출발 신호가 떨어진다.

"버텨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막지 않으면 아가씨가 위험하니까요."

"지킨다는 거구나? 재희다운 답이야."

굳이 시간을 비운 것치고 간단한 대답, 그 정도로 그친 짤막한 감상. 그럼에도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차 안팎은 꽤나 다른 공기를 피우고 있었다. 혜린은 그것을 덧입고 대화를 이어 나갈지 고심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자기 위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문장이 있었다. 재희, 그러다 만일 네가 위험해지면? 그의 목숨을 담보로 안전을 보장받고 있음을 확인하려는 말에 불과했다. 혜린은 목소리를 참았다.

"그럼 난 지금 얼마 남지 않은 것들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버텨야겠네."

그리고 그저 맥없이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부적절함을 이유로 삼켜 소멸하는 언어는 이곳에도 있었다. 이제 자동차는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고, 혜린에게 떠넘겨진 짐은 그 무게를 키워내고 있었다. 무엇을 위한 초석인가. 의문을 가질 권한은 그에게 없었다.

"아가씨께서는 버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재희는 때때로 이러한 말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혜린의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재용의 사람이었다. 혜린을 감시하기도 했고, 그의 행동을 윤 회장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아무리 혜린을 위하려 한들, 앞뒤 안 보고 그 하나만을 위해 무작정 달겨들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래, 그 사람 같은 배짱은 애초에 쥘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럼?"

"원하지 않으시면 말씀하세요. 차를 돌리겠습니다."

혜린은 평소에 좀처럼 볼 일이 많지 않은 재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언제나 앞은 자신이, 뒤는 그가 지켜왔었다. 혜린은 얼핏 자신의 뒤통수가 어찌 생겨 먹었는지가 궁금해졌다. 룸미러를 건너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혜린의 대답이 떨어질 때까지 재희는 시선을 비끼지 않을 것이다. 불순물을 가라앉혀 걸러내듯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재희는 혜린의 안광에서 굽히지 않을 단단함을 읽어내고, 혜린은 재희의 눈 그림자에서 무너지지 않을 함의를 짐작한다.

"⋯안 그럴 거 알면서."

결코 누르지 않을 선택지조차 그 존재로 무언가 숨통이 트이게 했다. 단지 꺾을 수 있는 방향이 하나 늘어났을 뿐인데. 혜린은 자신이 디딜 리 없는 땅을 들춰 보았다. 차를 돌린다면 어디가 좋을까. 호주? 아니면 오빠인 영재가 있는 프랑스? 얼마 전에는 아이도 태어났더랬다. 그곳에 간다면 당장 행복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여쭤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아, 조카 보고 싶은데. 한참 커 버리기 전에 한 번은 볼 수 있으려나 몰라."

"공항으로 모실까요."

마지막 물음, 지친 걸음을 멈출 수 있는 마지막 도피처. 흔들리지 않는 표정 속에는 꼭 그만큼 부서지는 마음이 있었다.

혜린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의 상태라면 어떠한 대답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아버지의 손에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속죄. 부정한 권력에 스러질 또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사람들. 아버지의 성이 무엇으로 쌓아 올려졌는지 알게 된 그날부터 꺼지지 않도록 간직해 온 작은 불꽃과 자신이 자신일 수 있도록 해주는 그것. 전부 버리면 혹 살아 있다고 해도 그것을 '나'라고 말할 수 있을 텐가. 혜린의 눈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확답이었다. 재희는 그 순간 뒷덜미를 아리게 휘젓는 무언가의 감각을 느꼈다.

그의 앞에서는 무너지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다. 올바른 일, 세상을 바꾸는 일, 그런 것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만약에 혜린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면― 재희는 자신이 그때 평생의 뜻과 다르게 행동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도착했습니다.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이것이 정녕 당신을 위함일까.

차는 한 고즈넉한 한옥 앞에 멈춰 섰다. 연못에 나뭇잎이 툭툭 떨궈지는 것을 보며 혜린은 언젠가 아버지가 내밀었던 모래시계를 떠올렸다. 지금의 이 만남이 어떤 파문을 불러올지, 그것은 시계 속 알갱이의 낙하 순서처럼 무엇 하나 예상할 수 없었다. 시동이 꺼지고 익숙한 듯 재희가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연다. 언제나 그렇듯 가벼운 묵례와 함께 뒤를 따라나서면 더는 넘을 수 없는 문이 있다. 그것을 등지고 서 허공을 바라보는 이의 얼굴은 조용하고, 또 차분하다.

"다녀올게."

바람이 땅을 쓸고 지나가면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작지만 단단한 모래알들이다. 유리 속에 갇히지 않은.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