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 혜린 / 재희 역극 백업
@Want_Your_Story 님과 1rt 봇 해시 당시에 한 혜린과 재희의 역극 백업입니다! / 2022.08.16 업로드
아가씨, 이제 가셔야 합니다.
아, 재희.
박태수를 다시 만난 주주총회 이후로 더욱더 서류에 파묻혀서 밤낮없이 애쓰느라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피로한 눈을 꾸욱 누르고는.
고마워. 지금 해암 선생님 댁에 가는 거지? 그분을 설득해야 승산이 있는데. 주식 넘겨 주실까.
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 넋두리처럼 입에서 흘러나왔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오랜 시간 재용과 혜린 곁에 있으며 어깨너머로 들은 것들은 알아도 모르고 보아도 잊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만큼이 제게 주어진 역할이었으므로.
⋯⋯죄송합니다.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해서.
결과를 알면서도 걸어보는 싸움이다. 그가 모시는 이는 쉽지 않은 과제에 몸을 던지는 사람이다. 중학생, 그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자신은 평생 해보지 못할 도전.
그런 말 하지 말아. 재희는―
늘 이런 식이다. 뭐가 그리 죄송하고 면목이 없는 건지. 주기만 하는 사람과 받기만 하는 사람. 처음부터 이어져 온 수직관계가 거북하고 부담스러워서, 제일 가까운 재희마저도 결국엔 그 수직 관계에 갇혀 버린다는 게 문득 울컥해서 피곤함을 틈타 삐져나온 본심을 눌렀다. 그런 감상에 젖기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쌓여 온 이 관계가 확고하게 굳어 버린 것을 서로가 너무나 잘 알았다.
⋯⋯이미 충분하니까. 됐어. 미안하단 소리는 그만 해.
조용히 침묵을 지킨다. 멈춘 공기 속에 당신이 내내 하고 싶었을 말들이 떠다닌다. 무언가를 바꾸기엔 너무 오래되었고, 내게는 그럴 자격조차 없다. 이만큼의 거리. 다가가지 않고 멀어지지 않는, 당신을 지키기 위한 빈 공간.
알겠습니다.
자연스레 상대의 반걸음 뒤에 서 걷는다. 조금 느릿하게 걸어야 속도가 맞는다. 일정하고 적당한 보폭, 차에 가까워지면 빠르지 않게 앞서나가 문을 여는 손, 그리고 반듯하게 편 허리와 당신을 향하는 어깨. 늘 그렇듯이.
재희가 열어준 차 문에 자연스럽게 올라탄다. 잠시간의 고요가 찾아와서 먼 하늘을 바라보다가, 재희가 차에 타기 위해 문을 여는 소리에 고요가 깨진다. 가만 있다가 픽 웃으며.
재희. ⋯⋯내가 아버지 자리 지켜낼 수 있을까. 어때? 어떻게 생각해? 이번을 잘 넘긴다 해도, 그다음은?
⋯⋯뒤에 있겠습니다.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나. 대신 일을 수습할 수도,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데려다 드릴 수도 없다. 당신의 뜻만이 내 역할의 전부니까. 핸들을 잡는다. 나는 지금 당신을 전쟁터로 데려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하고 싶다면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하. 이대로 이 차를 타고 어디 먼 곳으로 도망가고 싶다 해도?
그게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실 거잖아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내가 당신의 한마디로 공항에 차를 댈 것을 앎에도 당신은 그러지 않을 테니까. 그게 내가 아는 당신이니까. 가끔 그게 가슴 어딘가를 욱신거리게 했다.
⋯⋯.
숨통을 트려고 실없이 던진 농담에 진지한 답변이 돌아와 어색해져 시선을 돌린다.
사람들이 다 나더러 변했대. 아버지 더러운 돈 경멸했던 모습이랑은 변했다면서. 예전의 나는 창피한 게 참 많았는데 변하지 않을 줄 믿었는데― ⋯라던데. 내가 배신한 건가. 민 변호사님 제하면 이제 내 곁에 있는 사람 중에 재희가 날 제일 오래 봐 왔잖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는 아가씨는 항상 같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따르는 사람. 자신의 사람을 지키는 사람. 그러나 사지가 잡혀 늘 탄식하는 사람. 공백이 길수록 오해도 깊어지는 법이다. 그 안까지 들여다볼 수 없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일 뿐이니까.
아가씨께서는 할 수 있는 걸 하실 뿐입니다.
더러운 돈이라 할지라도 더 더러운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보다 내가 쥐는 게 낫다, 그리 판단한 게 아니던가. 언제나 넘겨짚을 뿐이었지만.
⋯⋯.
자신이 어쩌면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내가 변했다 하고, 나와 보낸 시간들은 아무 의미 없단 듯 돌아서서 태도를 바꿔버리는데 어쩌면 정말로 자신이 변한 것은 아닐까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것을. 어쩜 그렇게 단호하게 단언할 수 있지. 얼마간의 정적 끝에 입을 뗀다.
그래, 할 수 있는 거. 응.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거― ⋯할 뿐이지. 정말 해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쩌겠어, 해야 하니까 당장 해 볼 수 있는 것부터 부딪혀 보는 거지. 근데― 계속 부딪히다 보면 나도 아파. 아픈 걸 어떻게든 잊고 또 부딪혀보는데 또 아프고 아픈 게 쌓이다 보면 무서워지는데.
자신을 키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아픈 줄 까맣게 몰랐던 아버지. 내가 모르는 아버지. 아버지두, 아팠어요? 무서웠음 어떻게 했어요―
재희는, 무서울 때 어떻게 해? 재희가 잘 알 거 같아. 싸울 때 말야.
두렵고 아픈 건 대신 해 드릴 테니 나아가기만 하시라고, 그런 말이 목을 타고 오른다. 자신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그것뿐이다. 세상 너머에 당신이 찾는 길이 있다면 그곳에 닿을 수 있도록 등을 내주는 것.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춘 틈에 잠시 눈을 감는다. 다시 시야가 트이고 차가 출발할 때까지 입은 굳게 다물려 있다. 이럴 때 당신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달갑지 않은 사람이 떠오른다.
버텨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막지 않으면 아가씨가 위험하니까요.
⋯⋯지킨다는 거구나? 재희다운 답이야.
'재희가 위험해지는 건?' 하는 질문은 생각으로 그쳤다. 재희의 목숨을 담보로 안전을 보장받는 마음 편해지기 위한 자기 위안 아닌가.
그럼 난 지금 당장 얼마 남지 않은 것들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버텨야겠네.
하하, 맥없이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
저도 변하지 않았나 봅니다. 늘 그렇듯 삼키는 언어들. 목적지는 가까워지고, 당신에게 떠넘겨진 짐은 그 무게를 키워내고 있다. 무엇을 위한 초석인가. 의문을 가질 권한은 제게 없었다.
아가씨께서는 버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말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때로는 원망스러웠다.
그럼?
평소에는 자신이 볼 일이 드문 재희의 뒷모습을 쳐다본다. 반대로 재희는 수없이 많이 봤을 자신의 뒷모습도 떠오른다. 룸미러 속에서 재희와 제 시선이 맞닿았고, 그것을 피할 생각은 없어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하지 않으시면 말씀하세요. 차 돌리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있어 살 수 있었다. 당신 덕에 의미를 지니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전부 할 것이다. 시선이 마주친다. 그 눈에서 읽어낼 수 있는 건, 흔들리면서도 심지가 단단한 당신이다.
안 그럴 거 알면서.
픽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을 선택지이지만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여,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차 돌리면, 어디? 오빠 있는 프랑스? 아님 호주? 조카 보고 싶은데, 한 번은 볼 수 있을까 몰라. 조카 한참 크고 보게 되는 거 아냐?
그래도 여쭤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제게는 버릴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당신뿐이니 어디든 원한다면 따를 것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표정 속에는 꼭 그만큼 부서지는 마음이 있다.
공항으로 모실까요.
마지막 물음. 조금만 더 밟으면 돌이킬 수 없다.
그 자신도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입을 굳게 닫고 눈빛으로 답을 대신한다.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아버지에게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속죄. 부정한 권력에 또 희생당할 또 다른 사람들. 자신의 사람들. 아버지의 성의 실체를 직접 겪은 날 이후부터 자신이 지켜온 작은 불꽃. 자신이 자신일 수 있도록 해주는 그것. 이 모든 것을 버렸을 때 살아있어도 어찌 그게 자신이라 할 수 있을까.
당신의 앞에서는 무너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 어디서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곧 아가씨와 회장님께 영향을 미치는 일이었으므로. 올바른 일, 세상을 바꾸는 일, 그런 것 따위 생각해본 적 없었다.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당신이 위험해지는 그 순간― 나는 당신의 뜻과는 다르게 행동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뒷덜미를 휘젓는다.
⋯⋯도착했습니다.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이것이 정녕 당신을 위함일까.
차는 한 고즈넉한 한옥 앞에 멈춰 섰다. 연못에 낙엽이 톡 톡 떨어지는 것을 보며 혜린은 언젠가 아버지가 보여줬던 모래시계를 떠올린다. 지금의 이 만남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모르지만 지켜야만 하는 것들을 떠올리면서, 혜린은 차에서 내렸다.
응. 다녀올게.
시동이 꺼지면 운전석을 벗어나 뒷좌석의 문을 연다. 가벼운 묵례를 하고 그 뒤를 따라나서면, 넘을 수 없는 문이 있다. 그 문을 등지고 서 허공을 바라본다. 당신이 나올 때까지. 바람이 땅을 쓸고 지나가면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작지만 단단한 모래알들이다. 유리 속에 갇히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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