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 봄비
2022.08.14 업로드
강우석은 오랜 친구의 이름 석 자를 들여다보았다. 제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이 늘어놓는다면 A4용지 한 장이야 거의 채우겠다마는, 그중 맨 앞을 차지할 이는 단연 박태수― 그가 아닐 리 없었다.
- 야, 박정희 대통령은 어디 학교 나왔다냐.
- 육사 나왔다지.
너는 꿈이 있었다. 싸움도 잘하고 공부도 잘해서 무엇 할 거냐는 질문에 너는 힘만 믿고 약자를 착취하는 이들을 응징하겠노라 답했다. 그 열일곱 어리숙한 신념에 나 역시 섣부르게 발을 들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회한 적 없었다. 모든 순간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나는 그러한 적 없었다.
- 우석아, 네가 말하는 옳고 그른 게 대체 뭐야?
알면서도 대답하지 못했다. 열 살 때부터 민주주의니 뭐니 지겹게도 외워놓고서는, 정작 네 앞에서 바른 시민의 의무가 어쩌고 하는 말들은 다물리고 말았다. 문득 대학 시절 학생회장이란 선배의 말이 너와 나 사이에 벽을 가르듯 둥둥 떠올랐다.
- 아는 게 없으니 겁나는 것도 없겠지. 아무 생각 없이 감옥 보내고 사형시키겠지. 이 사람이 왜 도둑질을 했는지, 이 사람이 감방 가면 그 처자식이 굶어 죽거나 말거나⋯⋯.
틀리다. 법은 법으로서 존재하고, 따르지 않는 자는 사정이 어떠하든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것이 사회의 도리이며 이치다. 그리 생각해 마지않았다. 분명히⋯⋯ 그랬다.
너는 내게 몇 가지의 죄였다. 아니, 수십 가지의 업業이었다. 남들 다 한다는 뇌물, 그런 것 주고받지 않겠다고 여태 꼿꼿하게 세웠던 모가지가 완전하게 나의 의도로 꺾이던 날을 나는 기억한다. 너의 아픔을 아는 주제에 어찌 죄를 묻겠냐고 핏대 터뜨리며 가슴 쥐어짜던 나날들을 나는 기억한다. 지나치게 삭막한 등 아래 물기 감추며 그대 반성을 논하였던 시간을, 끝의 마지막까지 무르지 아니했던 그와 너를 기억한다. 무엇을 위하여. 이제는 깨닫게 해 줄 이 없어 갈 곳 잃은 물음이 삶을 짓누른다. 너는 내가 가장 가까이 두고도 거두지 못한 세상의 구석자리였다.
언젠가 꿈에 네 얼굴 마주한 적 있다. 여전히 거칠고 다정한 부름에 그만 고개 떨구며 울음 토해냈다. 고작 열일곱 혹은 열여덟쯤인 너의 면전에서 어른의 모습으로 참담히 무너져 내렸다. 부끄럽지 않기만을 바랐던 길이 치덕치덕한 핏물로 뒤덮여 발을 붙든다. 삶이 우리에게 모질었다 한들, 오롯이 불가항력으로 치부하기에는 내가 취한 길임이 너무도 분명했다. 그것을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 난 거물 잡을 거니까, 넌 거물만 되지 마라.
- 내가 말했지, 내가 널 잡게 될 거라고 했지⋯⋯.
- 우리는, 반성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있어도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 순간 떠오르는 말들은 역설적이게도 전부 나의 것이다. 마치 목소리 하나조차 소유하여 남길 수 없다는 듯 빗소리에 파묻히는 무음無音은 모조리 너의 언어고, 흙으로부터 올라오는 정전기 같은 저릿함은 다른 모든 이들의 문자다. 하물며 그 사람 보낸 것으로 무엇이 바뀌었느냐고 잔잔히 묻던 우리의 친우까지도.
속눈썹을 파고드는 태양 빛 닮은 광원에 스스로 새까만 우산 아래 그늘로 기어들어 가는 것은 늘, 언제나 남은 자의 몸부림이다. 지나고 나면 생마저도 미화되어 그래 꽤 잘했다고 여기게 될까. 나는 비 머금은 땅 위에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발자욱을 남기려나.
- 그다음이 문제야.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사는지. 하나는 너처럼 살고, 하나는 나처럼 산 거야.
주먹 안쪽으로 밀려 구겨지는 종이에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너의 이름이 번진다. 함께 넘고자 했던 세상의 끝에 머문 것은 온기 없는 손아귀뿐인데, 그것을 이유로 필히 나는 네 몫까지 살아야 한단다. 꼭 지켜야만 한단다. 무엇을 얻고 싶은지, 무얼 만날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세상 너머로 나는 가야만 한다고⋯⋯.
- 우석아, 너 대단하다. 진심이야.
⋯⋯태수야, 우리 돌아갈 수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볼까. 그 시절의 꿈처럼.
대답 돌아올 길 없는 질문을 구둣발 아래 뉘였다. 네가 없어도 세월은 참 짓궂게 흘러간다. 아무도 상처 입지 않는, 그저 사람 사는 세상을 나는 꿈꾸었던가. 그것 하나를 위해 여기까지 참 오래도록 달려왔었나. 모든 의문문은 하릴없이 온점으로 마쳐진다. 실은 몸소 깨닫고 있음에 갈고리조차 얻지 못한 말들, 사법고시를 치를 당시처럼 성하게 보이는 답안들이 오늘따라 참으로 멀었다.
끝내 인정하고야 만다. 그날 옳은 것은 너였다고.
그리고 동시에, 다시금 첫인사를 맞이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같은 선택을 내릴 것이라고.
마당에 펼쳐 말리던 검은 우산에 때아닌 봄비가 내렸다. 잠시의 머무름도 허하지 않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성격이 급하던 그다웠다. 강우석은 이내 힘겹게 제가 적어 나간 모든 이름을 읊었다. 자격이 있건 없건 그 무게를 모두 들쳐멜 각오로 디딘 걸음이었으므로, 제 친구를 볼 낯이라도 남기려거들랑 짊어지고 또 쥐어야만 했다. 이까지 오도록 등을 떠밀어 준 사람, 그리고 진창에 함께 남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러니 버겁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입을 잠그고서 묵묵히 살아내는 것이 이 삶에 놓인 역할이다.
차박차박, 빗물 밟는 기척이 들렸다. 눅눅한 숨을 머금은 종이 모서리는 방향 헤아릴 것 없이 뭉그러졌으나 기어이 찢어지지는 않았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걸음이 갓 스물의 소년을 검사실로 끄집어낸다. 현실은 짧은 노크 소리를 두어 번 울리며 지치지도 않고 몰아친다.
참 오래도록 아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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