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모래시계] 그 후의 이야기

혜린의 이야기 / 2019.07.28 업로드

- 태수 씨, 나 왔어.

혜린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장우산을 접어 든 채였다.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건네받을 사람이 없는, 비 오는 날이었다.

- 우석 씬 같이 못 왔어. 일이 바쁘대. 나쁘지? 우리 검사님이 그렇지 뭐.

자연스럽게 유리문 한쪽에 수수한 꽃장식을 붙여두고, 혜린은 안쪽의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전부 활짝 웃는 것뿐이었다. 태수의 표정들이 하나같이 어찌나 밝은지,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 강우석도 참. 웃는 사진이란 사진은 죄다 넣어놨네.

초점이 나간 사진, 크게 흔들려 얼굴을 알아보기도 힘든 사진, 평범하고 예쁘게 찍힌 사진, 살짝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사진 등등. 우석은 집에 있는 앨범을 뒤져 태수의 웃는 사진을 모두 찾아냈을 것이다. 그중에는 혜린이 알지 못했던 우석과 태수의 고등학교 시절 사진도 있었다.

- 나한테는 예전 사진 한 번도 안 보여줬으면서. 강우석 부럽네.

말끝을 늘이며 능청스레 웃던 혜린이 사진 속 태수와 눈을 마주했다. 알아, 당신한테 꺼내고 싶지 않은 일이었겠지. 정말 행복했지만 다신 돌아갈 수 없어서 차라리 숨겨두고 싶은 기억들.

- 아쉽다. 태수 씨랑 사진 좀 찍어둘 걸.

조심스러운 손짓이 우산을 벽에 기대어두었다. 사진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시선은 젖은 바짓단으로 향하고, 또 단조로운 회색 바닥으로 향했다.

- 나 사실 우석 씨 조금 미워했던 적 있었다? 아주 잠깐. 근데 지금은 이해해. 그게 우석 씨가 최선으로 믿었던 길이었겠지. 그 사람, 다시 돌아간대도 그럴 거야.

누군들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우리 다시 돌아간다면, 우리 그때 조금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아무 의미가 없는 후회들을. 그런 것들을 끝없이 되풀이해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들의 입을 닫게 했었다. 무엇보다,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붙들기에 바빴으니까.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 그래도 한 번만 더 기회가 있었으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

습한 공기를 따라 전해지는 빗소리가 빈 정적 속을 채웠다. 그의 말을 대신 전달하듯 한참을.

- 그런데, 돌아가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모래시계 속 모래는, 겉의 유리를 깨지 않고서는 손댈 수 없다. 운 좋게 금 하나 없이 모래를 꺼냈다 하더라도 무얼 얼마나 바꾸면 좋을까. 셀 수 없이 많은 모래알 중 어느 몇 알을 골라 바꿔 넣는다고 티가 나기나 할까. 거의 모든 모래를 전부 바꾸어 넣으면 그것이 원래의 시계와 같을까.

- 나도 나이를 먹나 봐. 자꾸 허황된 생각이나 하네.

회색 바닥에 구두코가 콕콕, 반복해서 찍혔다.

- 하루 정돈 이래도 괜찮지? 돌아가면 나 일해야 해.

사랑하던 시간의 태수라면 당연히 그래도 된다며 냉큼 혜린의 무릎을 베고 누웠을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잃었던 시간의 태수라면⋯⋯ 그래,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수도 있겠다. 혜린은 박태수라는 사람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대학 시절에 처음 만나 친구가 되고, 사랑을 하고, 그리고 서로를 묻어두고. 그뿐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정도였으므로. 그때,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 태수 씨도 알겠지만, 사람을 쭉 상대하다 보면 눈치만 늘어. 표정만 봐도 이 사람이 나한테 뭘 원하는지,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아니면 뭘 숨기려고 하는지⋯⋯. 그런 것들이 보이잖아.

혜린은 그 날 태수의 얼굴을 기억한다. 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고, 머릿속에서 지우려야 지울 수도 없었던, 사진처럼 남은 그의 표정을. 그것은 혜린이 보고 있는 유리 너머의 태수들과는 다른 그림이었다.

- 당신, 무서워했던 것 같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불확실한 끝맺음으로 흩어졌다.

- 처음에는 몰랐어. 태수 씨, 내 앞에서 한 번도 뭔가를 무서워하고 그런 적 없었잖아. 그날 집에 돌아와서 내내, 그리고 그다음 날, 그다음 다음 날, 태수 씨 얼굴을 계속 생각했어. 근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 있지. 당신 두려웠을까?

친구의 죽음을 직접 말해야 했던 우석, 오히려 그를 위로했던 태수, 죄책감을 품어야만 했던 혜린. 태수의 죽음을 마주한 셋 모두가 가져야 했던 공포. 그중 가장 큰 두려움을 안고 있었던 것은 단연 태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혜린은 며칠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 우석 씬 그렇게나 글자를 많이 읽었고, 나는 그렇게나 사람을 많이 읽었는데. 태수 씨 표정 하나 제대로 읽어준 사람이 없었어.

표정을 감추는 것과 감정을 참는 것은 아주 다른 것이었다.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눈속임을 하는 것과 나 자신을 꽉 눌러 틀어막는 것. 혜린과 우석은 전자를 읽는 것에 익숙했으나 후자를 보는 것에 어색했다. 그뿐이다. 태수는 그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두려움을 참았을 것이다. 그가 이 세상에서 옳다고 믿는 단 둘, 혜린과 우석을 위해.

- 바보같이, 왜 그랬어?

차분한 목소리가 젖은 한숨에 막혔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볼에 달라붙어 축축해짐에도, 혜린은 꽤 오랫동안 소리 없이 태수의 앞을 지켰다. 살아오며 잃은 사람들이 너무 아팠다. 아버지, 재희, 태수, 해고된 공장 노동자들, 같이 목소리를 높이던 대학 동기들, 그 사람들 모두가 혜린의 삶에 하나하나 박혀있었으므로.

- 근데 이젠 누구도 원망하기 싫어, 나.

언젠가 평온한 갈대밭에서 태수가 뜬금없이 물은 적이 있었다.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맞이하기 싫지만 맞이해야만 하는 미래 중에 어느 것이 더 잔인하냐고.

- 그거 제대로 대답 못 해준 거 미안해. 그땐 말이야, 태수 씨. 나한테는 간절하게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 없었어. 난 태수 씨랑 있는 지금이 좋았으니까. 그리고 미래도 그렇게 흘러갈 줄 알았으니까. 태수 씨가 내 현재와 미래에 있었잖아.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하는 빗줄기가 갈대밭의 바람 소리를 이곳으로 불러왔다. 옅은 색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풀어질 즘이면, 혜린의 볼을 타고 내렸던 눈물도 이미 말라 모습을 바꾼 뒤였다.

- 근데 이제 태수 씬 과거에 사네. 나중에는 또 뭐라고 말해줄지 모르겠어. 지금은⋯⋯. 나는 현재가 가장 잔인해, 태수 씨.

혜린이 쓰게 웃으며 떨궈진 고개를 들었다. 사진 속 태수의 눈높이로 펼쳐 든 왼손 약지에 조금 오래된 것 같은 반지가 반짝였다.

- 우석 씨가 태수 씨 유품 정리했대. 이거 나 주더라. 돌려준 거니까 내 거 아니라고 했는데, 억지로 끼워주는 거 있지. 나 프러포즈 받는 줄 알았잖아, 우석 씨한테.

내뱉은 웃음이 땅으로 훅 꺼졌다. 입꼬리가 이렇게 무거웠던 적이 있었나.

- 조금 양심 없어도, 이거 나 할게. 괜찮지?

팔이 다시 힘없이 툭 떨어질 때도, 곧게 선 다리는 꺾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혜린은 그런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자신만은 똑바로 지탱할 줄 아는 사람. 그렇게 천천히, 완벽하게 다시 쌓아나갈 수 있는 단단한 사람. 그것은 태수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만약 태수가 지금의 혜린을 보았다면, 그저 미소를 지어주었을 것이다.

- 나 걱정하지 마. 다음엔 웃는 모습 보여주러 올 거야.

일부러 가벼운 투로 말한 혜린이 물기 있는 우산을 다시 집어 들었다. 비가 조금 잦아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언제 다시 왈칵 쏟아질지 모를 일이었다.

- 벌써 가서 미안. 재희도 나 기다려. 질투하지 말고, 다음에 하루 통째로 비워서 정말 우석 씨랑 같이 올게.

돌아가면 혜린은 당분간 눈 붙일 새도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야 할 것이다. 많은 것이 변했고, 그만큼 많은 일이 혜린의 손에 있었다. 수많은 일에 묻혀있다 보면 잠깐 태수를 잊는 순간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게 점점 시간을 흘려보내면 혜린은 무뎌질 것이고, 언젠가부터 더는 과거에 상처 입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우석과 가볍게 식사하고, 태수를 찾아와 웃으며 일상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자신의 세상을 넘어 또 다른 세상 너머를 걷는 사람이 되어.

- 안녕, 태수 씨.

빗방울이 둥근 우산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곧 차 소리가 부드럽게 멀어져갔다. 이제부터 어떤 길을 고르든 그것은 그의 몫이고, 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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