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가족이라는 것
ㅅ님 리퀘 / 2019.07.23 업로드
"안나, 남편의 말을 끊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이오."
세료자는 생각했다. 아버지의 표정은 변하는 법이 없다고.
평소 아버지인 카레닌은 그를 꾸중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일은 늘 어머니의 몫이었으니 말이다. 안나가 화려한 드레스 자락을 바닥에 끌며 조그마한 세료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 그리고 세료자의 어깨를 붙들고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잘못된 것을 가르치고 있을 때면, 카레닌은 항상 그들과 조금 떨어진 장소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서 미간에 주름을 잡고 턱을 조금 치켜든 채 지켜볼 뿐이었다. 세료자가 어느 날 아버지의 그 포즈를 따라 했을 때도, 안나는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며 아들을 부드럽게 타일렀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안나는 세료자를 꼬옥 안아주며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엄마는 너를 사랑해서 올바른 것들을 가르쳐주고 싶은 거란다. 네가 미워서가 아니야.'
세료자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해했다기보다는, 그냥 어머니가 그렇다 하니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나 그 뒤에 따르는 것은 참으로 아이다운 의문이었다. '그럼 나를 한 번도 꾸짖지 않은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지극히 순수한 호기심은 조금 엉뚱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세료자, 어머니에게 가서 옷을 갈아입⋯⋯."
"아빠아, 로즈가 종이배 접는 거 가르쳐줬어요."
"아, ⋯⋯그래. 잘했다."
"세료자, 이만 들어가거⋯⋯."
"아빠아! 발 아파요―."
"⋯⋯그래. 안아주마."
"세료자, 어머니 손 꼭 잡⋯⋯."
"아빠, 모자가 너무 커요!"
"⋯⋯애가 모자가 크다는데, 새 걸로 사주시오."
카레닌은 큰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아이가 왜 이러는지. 그렇게 많이 자라지도 않았는데 벌써 아버지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것일까. 아이는 부모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아내가 요새 그의 말을 제대로 듣는 법이 없으니 세료자가 그것을 보고 배웠을지 모른다는 결론에 이른 카레닌은 심각한 표정으로 아내를 찾았다.
"무슨 일이세요?"
"세료자는 무얼 하고 있소."
"잠자리에 들 시간이니, 이제 재우러 갈 생각이에요."
"모자는 새 걸로 사주었고?"
"확인해봤는데 조금도 크지 않아요. 밖에 너무 오래 나와 있어 힘드니 떼를 쓴 거겠죠."
카레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수염이 풍성했더라면 그것이 갈대처럼 흔들렸을 만큼의 무거운 한숨을.
"요새 세료자가 아버지 말씀을 끝까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안 그래도 그 점은 주의를 주었어요."
"아이 교육은 안나, 당신이 할 일이오."
"일부러 아버지를 무시하거나 그럴 아이가 아닌 것을 알잖아요."
"당신이⋯⋯ 그 원인을 제공했다 생각하지는 않으시오."
"무슨 말씀이세요?"
"아내가 남편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앞으로 아이가 무얼 최선으로 배우겠냐는 말이오."
"⋯⋯."
안나의 침묵에 카레닌의 기가 아주 조금 꺾여 들어갔다. 카레닌 생각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안나에게는 심한 말일지 몰랐다.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은 아니니 아이에게 이야기 잘해주시오."
카레닌이 근심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홱 돌아서 옷자락을 휘날리며 저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안나는 그 자리에 서서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요 며칠 세료자는 예전과 달랐다. 엄마와 한 번 약속한 것들은 절대로 어기는 법이 없는 착한 아이였는데, 요즘 남편이 말을 걸 때마다 그것을 툭툭 끊고 제 말만 하는 모습은 안나에게도 적잖이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 아들을 재우는 김에 그 이유를 물을 생각이었다.
"엄마⋯⋯."
아이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복잡한 머리를 붙들고 발을 뗀 순간 들리는 목소리는 자신의 천사의 것이었다.
"아가, 방에 있지 않고 왜 나왔니."
벽 뒤에서 얼굴 반쪽만 겨우 내밀고 어머니를 부르는 세료자의 표정이 편치 않았다. 덜컹 심장이 내려앉아 드레스 자락을 양손에 쥐어 잡고 아들에게로 뛰어간 안나가 세료자의 볼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왜, 어디가 아픈 거야? 다쳤니?"
"아니요⋯⋯."
작은 아이는 바닥에 시선을 꽂고 입술을 달싹이며 한참을 침묵했다. 그 고요가 안나의 가슴을 까맣게 태워 가도, 혹시라도 아이를 재촉하면 겁을 먹을까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가만히 아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나 봐요."
끝이 없을 것 같은 기다림 끝에 던져진 말은 안나의 모든 사고를 멈추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해할 수 없었다. 타들어 가던 속에 갑자기 찬물을 양동이째 쏟아버린 것 같았다.
"사랑하면 잘못을 가르쳐주는 거라고 엄마가 그랬는데. 내가 잘못했는데 아빠는 엄마한테 뭐라고 했어요. 아빠는 엄마만 사랑해요. 나는 아니야. 나한테 사랑한다고 한 적도 없단 말이에요."
세료자의 동그란 눈에 실망이 가득 찼다. 그러니까 아이는 지금 아버지에게 서운하다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왜 나를 꾸짖지 않느냐고. 왜 사랑해주지 않느냐고.
안나는 입이 벌어진 채로 땅에 깔린 제 드레스 자락 위에 쿵 주저앉아버렸다. 아이의 사고는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설마 제 아버지의 사랑을 테스트할 줄은 이 집의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야. 아니란다, 세료자."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안나는⋯⋯ 솔직히 말해서 이러면 안 되지만, 제 아들이 너무도 귀여웠다. 아무래도 내일 즈음에 남편에게 한마디 해주는 게 좋겠다.
카레닌은 제 방에서 혼자 웃다가 심각해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대요.'
그럼 여태까지 그가 아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한껏 다정하게 웃어주었던 것은 모두 물거품이었다는 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그것은 카레닌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누가 그것을 다정한 아버지의 웃음으로 볼까. 눈은 조금도 접지 않고 입꼬리만 쓱 올리는 그것을. 덧니 자랑으로 보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분이 들뜨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아들이 어머니와 있을 때 훨씬 즐거워하는 것을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때때로는 서운했던 것이다. 물론 남에게 티를 내는 것은 흠이라 생각해 철저히 감추었지만 말이다.
당연히 세료자는 누가 봐도 사랑스러웠다. 물론 제 자식이 안 예쁠 리가 만무하지. 문제는, 그는 애정을 표현하는 것에 능숙한 편이 아니었다. 그를 만나본 자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카레닌은 아내를 아꼈고 아들을 귀여워했지만, 그들을 '사랑한다'는 단어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가. 꼭 그런 부끄러운 말을 서로 건네야 한다는 말인가, 가족끼리! 그러지 않아도 안나는 카레니나였고, 세료자는 카레닌이었다. 누구나 그의 가족을 알았으며 세료자가 더 자라면 셋이서 언제 어디든 함께 다니게 될 것이었다. 심지어 여태까지 서로 크게 부딪히는 일도 거의 없었다. 물론 이것도 카레닌의 생각이다.
만약 제가 정말로 그 말을 하게 된다면, 그런 상황이 온다면⋯⋯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내뱉지는 않을 것이다. 카레닌은 턱을 세게 문지르며 방을 나섰다.
아랫사람에게 물어 찾은 아내와 아들은 탁 트인 테라스에 테이블을 두고 앉아있었다. 그 위에는 세료자의 입 크기에 맞춰 구운 것 같은 따뜻한 빵 몇 개가 접시 위에 다닥다닥 놓여있었고, 둘은 평소처럼 얼굴 가득 웃음을 건 채였다. 카레닌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아름다운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 풍경에서 그는 늘 방관자였다. 액자 밖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위치의. 물론 오늘은 조금 달라질 생각으로 온 거지만 말이다.
"크흠."
"오셨어요. 세료자, 아버지에게 인사해야지."
세료자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일어나 아버지를 향해 작디작은 고개를 숙였다.
많은 생각을 하고 나오기는 했지만, 막상 그 얼굴을 마주하니 어떻게 오해를 풀어줘야 할지 머리가 백지였다. 안나가 아무리 설득해도 믿지 않는 것 같다 하니 이제는 아내에게 떠맡길 수도 없었다. 조그맣게 헛기침을 뱉고 아들의 옆에 간신히 자리한 카레닌은 우선 주위에 서 있는 이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모두 물렸다. 그러고는 아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아들의 눈을 맞추었다.
"⋯⋯."
마지막으로, 기계처럼 빵 한 조각을 들어 아들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아아―."
세료자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행동이 뭘 뜻하는 건지도 알았다. 보다 더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식사든 간식이든 이렇게 먹여주셨으니까. 한입에 빵을 넣고 우물대던 세료자는 고개를 숙이고 허공에 바쁘게 눈을 굴리더니, 망설임 없이 새 빵 하나를 집어 아버지에게 팔을 뻗었다. 물론 아이의 팔은 매우 짧았으므로 카레닌의 입가 근처에도 못 갔지만, 카레닌이 고개를 숙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어색해 뻣뻣한 목을 그대로 두고 허리를 숙였다는 게, 옆에서 지켜보던 안나에게는 꽤 웃긴 그림이었다. 단지 남편의 노력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입술을 꾹 깨물고 참고 있었을 뿐이지.
하지만 동시에 안나는, 이 장면이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날 기차에서 내린 세료자가 제게 달려와 포옥 안길 때 그것을 바라보던 남편의 마음이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어쩌면 이 집에 조금의 발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피어났다.
"읍. 이, 이게 뭐요?"
안나의 잔잔한 미소는 카레닌이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 다리가 바닥에 시끄럽게 끌리는 소리에 깨어졌다.
"무슨 일이에요?"
큰 소리에 조용히 대기하던 사람들이 한 번에 뛰어와 공작을 살폈다. 세료자는 눈을 굴리며 엄마에게 안겼고, 안나는 한 팔로 아들을 감싼 채 제빵사를 붙들고 무얼 넣은 거냐며 다그쳤다.
"그게⋯⋯."
"어서 말해. 이게 무슨 일인가!"
"공자님을 돌보는 이가, 공자께서 감기에 드실 것 같다고 하여 그것에 좋은 것들을 반죽에 소량 넣은 탓에⋯⋯. 아마 그래서 빵 중에 하나에서 쓴맛이 나는 것으로⋯⋯."
부산스럽던 모두가 멈추었다. 부부는 경악스러운 눈으로 아들에게 시선을 돌렸고, 세료자는 모른 척 엄마의 품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말했지만 세료자는,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눈치가 없는 편이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제빵사가 이런 식으로 영양을 듬뿍 담은(?) 간식을 내둔 적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까지는 깜박 속아 낼름 먹고도 음식을 뱉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에 꾸역꾸역 삼켰으나, 몇 번 그러면서 구분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쳐버린 것이다. 일부러 티가 나지 않게 어두운색으로 구웠어도 묘하게 다른 향과 색을 알아챌 정도로 세료자는 영리했다.
이번에는 안나가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한동안 정적이 깔렸다. 화가 나서가 아니다. 웃겨서도 아니다. 말 그대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서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세료자는 한참을 그렇게 엄마 품에서 꼼짝을 않다가 조용히 고개를 들어 부모님의 눈치를 보았다. 카레닌은 입에 있던 것을 더 씹지도 않고 삼켜버리고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세료자."
"네에⋯⋯."
"다음부터는⋯⋯."
"⋯⋯."
"약은 다른 방식으로 먹이라고 할 테니⋯⋯."
카레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 카레닌의 목소리가 멈추자 또 아까와 같이 조용함만이 가득했다. 보다 못한 안나가 이 분위기를 수습하려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네가 즐거웠으면 됐다."
카레닌이 아까보다 우아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세료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둥글고 작은 머리통에 아버지의 손이 가득 덮였다. 그리고 제 부인이 늘 그러하던 것처럼 허리를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인위적이지 않은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종이배가 호수에 오르는 것처럼 잔잔한 웃음을. 평소에 카레닌 공작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공작부인이 가끔 그렸던 상상 속에서 말고는 볼 수조차 없었고, 그 말은 공자가 세상에서 처음 눈을 뜬 이후로 아버지의 미소를 처음 봤다는 뜻이 되었다.
세료자는 생각했다. 아버지의 표정이 어머니의 것과 많이 닮았다고.
짧은 순간의 마음을 남기고 테라스를 나선 아버지의, 남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카레닌 모자는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안나는 이 집에 조금의 발전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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