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삼총사x시라노] 흘려보내지 못할 것

2019.10.25 업로드

파리, 아름다운 도시. 온갖 예술이 세느강을 따라 흘러넘치는 곳.

그런 수식어를 가진 곳이라면 온갖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프랑스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 특히 청년들은 저마다 다른 억양과 옷차림을 자랑하며 거리를 오갔다.

그중에는 물론 시라노도 있었다. 프랑스 남서부의 가스코뉴, 그 촌 동네라 불리는 곳에서 배짱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온 이 말이다.


"추기경의 작은 쥐는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 외엔 할 일이 없는가 보군."

"작은 쥐라니, 저런 쥐가 집에 있다면 나는 당장 목을 베어버리겠어."

"쥐새끼."

"찍찍!"

시라노가 발베르를 쫓아 여유롭게 광장으로 나왔을 때 들은 첫마디는 이것들이었다. 아, 물론 그 욕설이 그를 향한 것은 아니다.

"발베르, 내가 분명 거기 가만히 있으라 하지 않았던가."

검은 바탕에 금색의 무늬가 이리저리 피어난 옷을 입은 키 큰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발베르는 그의 팔을 소심하게 잡은 채 이리저리 눈을 굴려대고 있었다. 시라노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그들 앞에 나서며, 특유의 비웃음을 걸치고 칼을 휙 돌렸다.

"하, 꽁지 빠지게 달려서 어딜 가는가 했더니. 형아네 품을 찾아왔군."

순간, 모두의 시선이 시라노에게 꽂혔다.

"넌 뭐야."

입을 조잡하게 움직여 뭐라 뭐라 말을 전달하는 발베르의 팔을 밀쳐낸 남자가 칼을 빼 들었다. 시라노의 얼굴을 한 번 훑은 시선이 가늘어졌다.

"그래도 오다가다 얼굴을 몇 번 마주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알아보지 못하면 꽤 섭섭할 뻔했습니다."

"네 칼보다 더 긴 코를 보고 못 알아볼 인간은 적어도 이 파리 안에는 없지 않을까 싶군."

커다란 코는 물론 시라노의 콤플렉스가 맞았지만 그는 적의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얄팍한 사람이 아니었다. 리슐리외 추기경의 근위대를 이끄는 대장, 쥬샤크. 종종 추기경이 행차하실 때마다 옆에 늘 붙어있던 남자다. 평소 부딪힐 일은 잘 없었지만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 인간이었다. 듣자 하니 검은 꽤 다룬다고 하던데, 그 추기경이 직접 고르신 인재이니 발베르보다는 쓸 만하겠지. 아, 물론 추기경의 안목이 멀쩡하다면 말이다.

가벼운 미소와 함께 그를 빗긴 눈이 사총사에게 닿았다. 시라노는 모자를 고쳐 쓰고 가볍게 묵례했다.

"아, 코 하니 알겠구만. 그 촌뜨기 부대⋯⋯."

달고나 색 옷을 입은 남자가 빨간 두건을 쓴 남자의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시라노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알아본 달고나 색 남자가 제 달고나 색 장갑을 빨간 남자의 입에 밀어 넣고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가스코뉴 출신의 시라노 드 벨쥐락, 이야기 자주 들었⋯⋯. 으븝, 포르토스!"

포르토스라고 불린 빨간 남자가 가죽장갑을 퉤 뱉어 달고나 색 남자의 얼굴에 문댄 탓이었다. 그 모양을 즐거움 반, 한심함 반으로 바라보던 화려한 금색 옷의 남자가 칼로 시라노를 가리켰다.

"어이, 좀 비켜보지."

아니, 발베르가 붙들고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시라노라고 했던가. 뭐⋯⋯. 뒷이름은 기억 안 나네. 그래도 내가 여인도 아닌 이의 이름을 외웠다는 건 아주 특별한 일이지. 마침 쥐새끼랑 놀아주기 귀찮았는데, 좀 데리고 가지 그래."

"하,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쥐새끼 동생이랑 친한 거 아니었나?"

"글쎄요."

"그럼 데리고 가지."

"싫습니다."

웃음기가 섞인 팽팽한 대화가 빠르게 오고 갔다.

"자. 그만하게, 친구들. 우리는 더 중요한 할 일이 있지 않나."

긴 가죽 코트를 입은 마지막 남자가 인자하게 입을 열었다.

"실례가 많았네. 나는 아토스고, 이쪽은 아라미스, 저기가 포르토스와 달타냥일세. 왕께서 내리신 일 때문에 정식으로 인사하지 못해 미안하네. 쥐새끼와⋯⋯ 더 작은 쥐를 떠넘기고 가는 것도 미안하고."

"아토스."

쥬샤크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으나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시라노가 그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아토스, 아라미스, 포르토스. 삼총사다. 왕을 지키는 총사들 중 특히 검술이 뛰어난 세 명이지만 파리에서 건달이라 불리는 이들. 그리고 그 옆에는⋯⋯. 요새 소문이 떠들썩하던 뉴페이스인가 보군.

포르토스와 달타냥은 장갑에 침이 묻었네, 네가 먼저 내 입에 지저분한 장갑을 넣었네 하며 투닥이고 있었고, 아라미스는 짝다리를 짚고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턱을 들고 미소 띤 얼굴로 우아하게 서 있었으며, '전설의 검객'이라는 칭호를 지닌 아토스는 그 명성에 맞게 부드러운 눈매에 곧고 단단한 눈빛을 담고 있었다. 네 사람을 죽 훑은 시라노가 입꼬리 끝을 말아 올렸다.

"태어나서 모기 한 마리 이 손으로 놓쳐본 적이 없으니, 그 점은 염려치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오, 나 저 친구 마음에 들어."

"저 사람도 가스코뉴 출신이래요."

"알아, 인마. 너랑 딱 닮았어."

이것이 다소 어지러운 시라노와 사총사의 첫 만남이었다.


추기경이 '또' 특별히 신경 썼다던 새 연극 역시 저번 것과 비슷한 삼류일 뿐이었다. 웬일인지 르브레와의 약속대로 가만히 앉아 그것을 들어주던 시라노는 좀처럼 몸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아라미스가 하는 게 백 배는 낫겠군.'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백 배는 낫겠군."

어라, 머릿속으로 생각만 한다는 게. 아니지. 그것은 시라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시라노가 왠지 모를 싸한 기분에 주름 팬 이마를 입구로 돌렸을 때.

'호랑이도 아니고. 제 말 하면 오는군.'

설마 했던 대로 아라미스가 있었다. 또 허리에 손을 올리고 짝다리를 짚은 채로 턱을 들고서는.

"오, 친구! 거기 있었나. 지나가던 이 아라미스마저 부끄럽게 하는 발연기에 내가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었네. 설마 방금 그 대사, 자네가 한 건 아니겠지."

누가, 언제부터 친구였다는 건지. 시라노가 내뱉은 한숨이 코끝을 데웠다.

"공연이 예상치 못하게 중단되어서 죄송하게 되었군요. 마저 진행하십시오."

시라노가 하나도 미안해 보이지 않는 인사를 대충 형식적으로 말하는 동안, 아라미스는 그새 추기경 옆의 쥬사크를 발견하고는 가소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쥬샤크는 상사 옆에서 화도 못 내고 이만 갈고 있었다. 시라노는 여기저기 치이는 쥬샤크를 아주 가끔 연민했지만, 그렇다고 적이 이웃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눈도 마주치지 않고 코를 치켜든 채 아라미스를 따라 극장 밖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또?"

"말했잖나. 지나가는데 하도 질 낮은 연극이 들려와 내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고."

"내게 무슨 일이시냐고 물었는데요."

"용건이 있어서 올 것 같나? 내가 자네에게? 거참, 자존감이 코만큼 높은 친구군."

"싸우자고 오신 거면 받아드리겠습니다."

"저걸 듣고 있느니 차라리 우리랑 술이나 마시자고. 자네를 구원해준 거지."

솔직히, 시라노는 이거나 저거나 뭐가 다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면에서 구원이란 말인지.

"됐습니다-."

"달타냥이 자네와 가스코뉴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해. 자네야 부대원들이 다 고향 출신이지만, 그 친구는 가족도 잃고 홀로 여기 올라와 처음 만난 고향 사람이 자네라네."

아라미스의 장점이었다. 뛰어난 연기력으로 사람을 제가 원하는 대로 끌어오는 능력 말이다. 달타냥이 실제로 그런 말을 했느냐고? 지나가는 말로 하기는 했다. 저렇게 우울한 투로 말고.


"자네들! 나 없이 또 먼저 시작하고 있었구만. 이거 섭섭해. 내가 손님도 데려왔건만."

"어, 어서 오게. 아라미스 자네가 맨날 늦으니 그렇지. 자네 오늘은 또 어떤 여인을 만나고 오셨어?"

"알잖나. 나 요새 샤를린느 밖에 없어―?"

"하이고, 포르토스가 술 끊는다는 말보다 더 신빙성이 없네요."

"야, 내가 술 못 끊을 것 같아?"

"네."

"맞아."

실없는 대화가 오가는 한 여인숙 내의 술집. 갑자기 마음이 흔들려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오기는 했으나, 시라노는 술집에 발을 들인지 30초 만에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어졌다.

"어이, 그⋯ 시⋯⋯."

"라노."

"알거든? 시라노. 그래, 자네 아라미스가 예전에 오페라 가수였던 거 아나?"

그렇게 이야기해대는데 모를 수가 없지, 라고 시라노는 생각했다.

"예."

"아라미스, 한 번 보여줘."

어차피 보여줄 거면서 왜 물어보는 걸까, 라고도 생각했다.

"갑자기?"

"뭐. 자네 술 취하면 맨날 하는 거잖아. 달타냥, 뭐해. 박수 안 치고."

"아유, 이거 한 번 받아주면 끝도 없는데⋯⋯. 어! 콘스탄스!"

"야, 어디 가! 야!"

다행인지 무엇인지 달타냥이 그릇을 나르러 나온 여인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몸을 배배 꼬기 시작하자, 포르토스와 아라미스는 테이블에 잔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아토스는 그것마저도 즐거운 듯 아까부터 내내 느슨하게 웃고 있었고, 시라노는- 서로 딱 붙어있는 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애인입니까?"

"콘스탄스랑 촌뜨기? 어."

"매번 저러니 술맛 떨어지는구만."

"술맛이 떨어져? 그럼 나 줘."

아라미스가 아무 말 없이 잔을 들어 술을 한 번에 입으로 털어 넣었다.

"에이씨."

"좋아 보이는군요."

"좋아 보이긴, 너도 저거 몇 달만 봐봐. 칼 뽑고 싶은 걸 몇 번을 참았는지."

"촌뜨기가 파리 올라오자마자 첫눈에 반했지."

"⋯⋯첫눈에요."

첫눈에 반하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운명임을 알아보다. 그에게 낯선 단어들이 아니었다.

"어, 서로 동시에 반했댄다. 저 둘 보는 우리만 고생이지."

'시라노는 사랑을 해보지 않아서 몰라요?'

록산의 들뜬 고백을 듣기 전까지, 시라노는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 외모만 보고 사랑한단 말인가. 시라노는 혹 록산의 옆자리에 제가 있지 않더라도, 그 누군가가 꽤 좋은 사람이기를 내내 바랐었다. 친구의 마음으로.

물론 크리스티앙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방식은 그가 염두에 두지 못한 것이었다. 그 둘도 저들처럼, 서로를 볼 때에 눈은 소나기가 내린 듯 촉촉해지고 입술은 꽃잎을 짓이긴 듯 장밋빛으로 물들며 날 때부터 붙어있던 것처럼 손을 얽어 잡고 놓지 못할까. 저렇게 서로를, 경이로운 오로라가 커튼처럼 드리운 하늘을 보는 듯 바라볼까.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그가 가진 감정과 다른 것일까? 아주 오래전부터 가슴 속 씨앗이 첫 잎을 틔우고 푸른 줄기를 올리며 꽃과 열매를 맺는 것을 하나하나 지켜본 시라노는, 제 마음이 록산을 바라보며 어떻게 자라왔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눈에 반한다는 건 어떤 것인가? 알아챌 새도 없이 이미 땅속에서 몸집을 키워버린 열매인가? 뒤늦게 당황해서 속을 파보고 나서야 아주 커다랗고 다디단 감정을 그제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일까?

누군가 시라노의 어깨를 짚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튕긴 시라노는 자신이 달타냥과 콘스탄스를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스스로 민망함에 고개를 숙였다. 반면 저들은 서로에게 집중한 탓에 시라노의 시선을 눈치채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그것조차 어딘가 씁쓸한 일이었다.

"자네, 콘스탄스 좋아하나?"

"방금 처음 봤습니다."

"첫눈에 반했을 수도 있지."

"⋯⋯글쎄요."

"아, 아니면 달타냥을!"

"장난하실 거면 가겠습니다. 저희 시인들이 저를 기다려서요."

"그것도 아니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나 보군."

딱딱한 나무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시라노는 등받이를 잡고 멈춰 서 아라미스의 눈을 마주했다. 포르토스와 아토스는 이미 술잔을 몇 번이나 더 비운 상태인 데다가 이쪽엔 관심도 없어 보였다.

"내가 또 사랑 문제의 권위자가 아닌가. 다 말해보게. 들어주지."

"당신에게요?"

그가 기가 찬다는 듯 큰 코를 치켜세우며 짤막한 웃음을 흘렸다. 아라미스는 파리 시내의 모든 여인을 꼬실 줄 아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연인이 있든 배우자가 있든 상관하지 않고 말이다. 그가 아직 사랑하지 않은 여인은 아마 저기 있는 달타냥의 연인 콘스탄스와, 그래. 록산 정도일 것이다.

시라노는 옷매무새를 대충 정리하고 정말 자리를 뜨려 했다. 아라미스의 눈만 아니었다면 정말 그리했을 것이다. 르브레와 라그노가 자신을 오랜 시간 찾고 있을지도 몰랐다. 야시시 축제를 시작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라그노의 빵집까지는 꽤 거리가 있다. 그러니 시라노는 여러 이유로라도 이곳을 지금 떠나는 게 더 좋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아라미스의 눈빛에서 그는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누군가를 한 번이라도 진득하게 오래 좋아해 본 적 없을 것 같은 그에게서 자신과 같은 무언가를. 어쩌면 그가 아까처럼 연기를 하는 것일지 모른다. 아니면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이 사랑이란 말이야, 장미와도 같아서 보기엔 아름답지만 꺾을 때는 조심해야 해."

"예, 가시가 있으니까요."

그래. 이럴 줄 알았다. 또 헛소리군. 아라미스가 매일 제 연애담을 자랑하며 꼭 서론처럼 붙이는 말이었다.

"표정을 보니 동의하지 않는가 보군."

"꺾고 싶지 않은 사랑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만약 록산을 사랑하며 시라노 자신이 어느 가시에 찔린다면, 그 가시는 록산의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상처 주고 마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남이 먼저 꺾어가도 괜찮나?"

"그 친구가 원한 일입니다. 그 친구, 누군가에게 꺾일 사람이 아닙니다."

아라미스가 바람 소리를 흘렸다.

"후회하지 않을 텐가."

"제 것은 당신 것처럼 가볍게 차곡차곡 접어 어딘가에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랑이 아니니까요. 후회가 소용이 있을 시점은 지났습니다."

"아, 자네는 내가 한 번도 아픈 사랑을 해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나."

아라미스 기준에서 아픈 사랑이라 해봤자 고작 며칠 그녀가 보고 싶다 징징대고 만 것이 아닐까 했었는데. 시라노는 헷갈리는 눈으로 아라미스의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자네, 목숨과 사랑 중에 선택하라면 무엇을 고를 텐가?"

목숨인가, 사랑인가. 그것을 선택해야만 한다면.

시라노는 뜬금없는 물음에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록산을 구하고 대신 죽을 수 있는지를 묻는 걸까. 그를 위해 희생을 할 수 있는지? 어쩌면 어린 시절 어느 날에는 그렇게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크면 록산을 괴롭히는 것들을 모두 물리치겠노라고. 자신이 다치더라도 꼭 록산만은 지키겠다고. 하지만 지금 그는 지킬 것이 너무도 많았다. 놓아서는 안 되는 것들의 수가 제가 여태까지 종이에 썼던 모든 글자보다 많을 것이다.

"제가 포기해야 하는 목숨은 없습니다. 제 것도, 그 친구의 것도, 다른 누구의⋯⋯ 것도."

록산과 약속을 했다. 크리스티앙의 뒤를 봐주기로. 그리고 지금은 전쟁 중이다. 이렇게 술집에 앉아있지만 언제 칼을 들고 총알이 날아드는 곳으로 나가야 할지 모를 일이다. 시라노는 그들 모두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리하여 다른 이들의 가슴에 바람이 들지 않도록 막을 의무.

"그렇군. ⋯⋯나는 사랑이었네. 그녀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내 무대를 버렸지. 그래, 죽으려 했어. 총이 불발이 나 이렇게 살아있지만. 결국 그녀도 잃었고."

아라미스는 그날을 떠올렸다. 백작의 협박을 듣고 총을 쥔 채 밤새 고민했던 자신을. 무대에 오르기로 마음을 굳히고서도 수없이 망설였던 그 순간들을. 내가 단지 자존심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인지 끝없이 고민했던 시간들을. 여러 번의 시뮬레이션들을. 여러 갈래로 나뉘어 진동하는 심장 조각들을. 그리고 확신을 내린 단 하나의 감정을.

"⋯⋯처음 듣는군요."

"하, 안쓰러운 눈 하지 말게. 지금은 깨끗하게 잊었어."

"목숨까지 버릴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을요."

자신도 그럴 수 있을까. 언젠가 록산과 크리스티앙의 결혼을 축하하고, 그들의 아이와 놀아주고, 그저 아주 좋은 친구로서 둘의 곁에 있다 보면 언젠가는 그저 멀쩡해질 수 있을까.

아니, 시라노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제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기분이었다. 록산을 지금처럼 사랑하지 않게 된 자신이라니, 시라노는 그것을 상상하는 것조차도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은 시라노가 가진 것 중 유일하게 아무도 자신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스스로 도려낸다는 것을 그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자네 말대로 놓을 것들은 세느강에 흘려보내고 사는 거야. 이 아름다운 도시 속에, 사랑으로 남은 깊은 흉터 하나 없는 사람 없을 걸세."

"그중 여인들의 것들은 당신이 남긴 게 대부분이죠."

아라미스는 웃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미처 떠내려 보내지 못한 것들이 영원히 남겠네요."

"가끔 강이 넘쳐서 보냈던 것들이 몰려오면 흉터가 욱신거리기도 하고."

"많이 아프시던가요."

"견딜 만하지 않겠나. 흉터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모여 사니까."

시라노는 달타냥과 아토스, 포르토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들도 말입니까."

"그건 본인들에게 물어봐야지."

"⋯⋯예, 그래야겠네요."

상처는 본인만이 알 수 있는 부위에 생기기 마련이다. 티 내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고, 티 내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내게 흉터가 있다고 말했을 때에 누군가가 손길을 건네줄 수도, 아니면 오히려 소중한 이를 잃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시라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모든 흉터를 숨겨야 하는 쪽이라는 것도 물론.

"그래도 자네를 가장 많이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자네라는 걸 잊지 말고."

"예."

"얼마나 강물 위에 놓아줄 수 있는가가 중요하네. 한 아름 안고 있다가 곪아가기 싫으면. 그럼 자네 주위 사람들도 지키지 못할걸."

"알고 있습니다."

"꼭 내 예전을 보는 것 같군."

아라미스가 혀를 찼다.

"왜 다들 힘든 길을 알면서 가려 하는지 모르겠어."

"가스코뉴 출신들이 그렇습니다."

"허, 그것참 대단한 정보구만. 달타냥 저 친구가 언젠가 총사대장이 된다고 할까 봐 겁나는군."

"제가 바란다고 전해주십시오."

"됐어. 저 친구 명령을 받느니 은퇴를 하지."

시라노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갑자기 아라미스와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시라노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다루고 잠재워야 하는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상처 주지 말아야 할 모두'에 자신을 포함하는 것을, 자신은 없지만 해보기로 했다. 최대한 아프지 않도록, 아파도 금방 아물게 할 수 있도록 자신을 돌볼 방법을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부 두루뭉술한 생각들이었지만 그는 점점 길을 찾을 것이다. 버티는 것보다 이기는 것을 잘하는 시라노니까.

그럼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그래. 라그노의 빵집에서 야시시 축제 때 먹을 빵 준비가 한창일 것이다. 그걸 도와주러 가야겠지. 부인께 드릴 돈주머니를 하나 들고, 오늘의 시 주제가 되어줄 무언가를 찾고⋯⋯. 혹시 가는 길에 무례하게 결투를 청하는 이가 있다면 조금 놀아주고. 아차, 비가 올 것 같으니 코에 비가 떨어지지 않게 코 우산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면 콧물인 줄 알 테니까.

시라노는 칼을 뽑아 들었다. 칼끝을 바닥으로 내리고 빈손을 등 뒤로 돌린 채로. 아라미스가 입꼬리를 작게 끌어올리며 마찬가지로 칼을 뽑아 탁, 칼끼리 가볍게 맞부딪혀줄 때까지 시라노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중에 저 친구들 챙기는 거 도와달라고 데려온 건데 쓸모가 없었군."

시라노는 얼굴이 발개지고 있는 아토스와 포르토스를 향해 형식적으로 웃어주었다. 달타냥은⋯⋯ 연인이랑 할 말이 그렇게나 많은지 인사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시라노는 애써 다시 아라미스에게로 고개를 꺾었다.

"그런 일이라면 다시는 저 불러내지 마시길 바라겠습니다."

"다른 일이라면?"

"그것도 웬만하면요."

"알았네."

웃음소리가 술 냄새 나는 공기에 섞여 흩어졌다. 나무문이 열리는 소리가 그릇이 부딪치는 등의 일상적인 소리와 어우러졌다. 밤공기가 꽤 차가워졌다. 시라노는 내일 록산에게 쓸 편지에 건강 관련 내용을 꼭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돌바닥 위를 걸었다. 르브레가 이 친구 어디 갔다 왔냐며 호통을 칠지도 모르겠다. 비가 내릴 듯 말 듯 뭉글뭉글한 밤하늘을 하나의 종이 삼아, 바닥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신발 굽을 펜 삼아, 시라노는 자신이 내딛는 길 전체에 그의 시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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