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말소]

잊다

폐허 by 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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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추출은 다소 급하고 빡빡한 스케줄로 진행되었다. 처음 버스 안에 모습을 드러냈을 땐 여려보이는 겉모습이 무색하게 건강하고 활기찼지만 황금가지를 수거하러 버스가 출발한 이후로 ■■는 빠르게 쇠약해졌다. 앓는 일이 늘었고 잠이 부쩍 늘었다. 이상의 노력으로 로쟈와 공명한 황금가지를 꺾어올 때 쯤엔 족쇄를 차고 버스 안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의 자유를 허락 받았지만 어느샌가 바깥을 돌아다니긴 커녕 침대 밖으로 잘 나가지 않게 되었다. 잔병치레는 일상이 되었고 이유없는 몸살을 앓는 날도 더러 생겼다. 뭐든 잘 먹곤 했지만 먹지 않는 날이 먹는 날보다도 더 많아졌다. 불길한 꿈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거나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가 어떻든 추출은 진행되었고 ■■는 그 일에 한 번도 불평 하는 일이 없었다. 베르길리우스가 어두운 낯으로 조용히 방을 찾아오면, 멍하니 천장을 초점없는 눈으로 보다가도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곤 했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의 품에 안겨 돌아오면 꼭 사흘, 깨어나지 못했다. 첫날은 열병을 앓았다. 40도가 넘는 고열에 몸이 데일 듯 뜨거웠고 목이 쉴 정도로 기침했다. 둘째날엔 악몽에 시달렸다. 하루종일 신음하며 뒤척였다. 마지막날엔 모든 게 끝이 난 듯 고요했다. 식어서 굳어버린 시체처럼 창백한 낯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이상은 꼭 그럴 때면 ■■가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맥이 느껴지는데도 그랬다. 그 하루가 견딜 수 없이 불안해서 그는 결국 몰래 그 손에 닿고 말았다. 힘없이 늘어진 차가운 손을 잡고 기도했다. 이름 없는 신에게라도 빌고 싶었다. 그저 목소리 한 마디가 간절했다. 무슨 말을 해도 좋으니 괜찮다는 한 마디를 듣고 싶었다. 그게 상냥한 거짓말이라고 할지라도.

■■는 사흘이 지나면 약속한 것처럼 깨어났다.

⋯⋯이상?”

그렇게 이름을 불리고 나면, 이상은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것 같은 표정으로 그 작은 손을 부서질 듯 세게 잡았다. 병약한 환자가 깨어나고 나면 꼭, 거짓말처럼 그 손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소녀가 그 손을 마주 잡으면, 그는 그 따스함을 빼앗는 게 죄처럼 느껴져 황급히 손을 빼곤 했다. 그것이 아쉬운 듯 ■■는 서글프게 웃었지만 그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바라는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가 바랐던 것은 이미 이루어졌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형태로.

하지만 건강을 해치는 것보다도 더 큰 문제는 날이 가면 갈수록 추출해 낸 기억이 머릿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소녀는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늘었고 빼내면 빼낼수록 텅 비어갔다. 처음엔 그것이 불안했는지 불안정하고 신경질적으로 구는 일이 늘었다. 소녀는 아무도 방에 들이지 않았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건 이상이 유일했다. 베르길리우스가 찾아오더라도 문을 걸어 잠그고 베개로 귀를 막은 채 틀어박혔고, 베르길리우스가 어쩔 수 없이 겁박하면 울면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상이 겨우 진정시키고 나서야 문 너머로 대화할 수 있었다. 자기자신을 계속 잃어갔기에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그저 매일 찾아오는 이상에게 매달렸다. 일을 하러 불려 나가는 이상에게 떠나지 말아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거나 그 바짓단을 애처롭게 잡고 부탁했다. 잠들기 전까지 곁에 있다가, 잠에 든 것을 확인하고 방에 돌아가기라도 하면 새벽 중 문을 쾅쾅 두드리며 이상을 찾았다. 이상이 급히 문을 열면 온통 눈물로 범벅인 얼굴로 이상에게 안기곤 했다. 잘못했다고 중얼거리면서,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말했던가. 그러나 그렇게 극적으로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 기억 추출이 있었던 날, 이상은 최악의 악몽을 꿨다. 그는 어떤 백화점의 옥상 난간에서 충동적으로 투신했다. 그는 발을 뗀 순간, 문득 어둑한 하늘에서 해를 찾았다. 그 순간에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의심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목소리였다. 그는 그제서야 제가 찾던 태양이 그 아래에 있었음을 알았다. 잔뜩 울며 날카롭게 지른 비명 끝에 퍼석, 하는 소리가 들렸던가. 무언가가 산산조각 나서 깨질 때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제 자신이 비명을 지르는 것도 모르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는 분명 기억 추출 후 회복 중일 소녀에게 찾아갔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소녀는 예의 ‘사흘’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의식을 찾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가만히 앉은 채 누군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저 숨이 끊어지지 못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이 방에 들어간다고 해도 소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침대에 앉은 채로 환하게 빛나는 형광등을 가만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상이 이름을 부르며 그 곁에 다가가서야 인기척을 알아차렸다. 기계처럼 느릿하고 차가운 눈빛에 덜컥 불안이 치솟았다. 이상은 창백해진 낯으로 눈을 돌리곤 그 옆에 앉았다. 차마 그 빈 눈을 마주볼 용기가 없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허락을 구하는 것도 잊고 그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고장이 난 소녀는 기뻐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그 손을 가만히 두었다. 어느새 차갑게 식은 손에 힘이 들어가서, 저도 모르게 그 작은 손을 부서져라 쥐고 있었다.

“저, 이상스러운 부탁일지도 모르겠소만⋯⋯”

바로 옆에 있지 않으면 들리지 않았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이상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하,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내 이름을 불러줄 순 없겠소?”

그는 무언가가 두려워져 결국 고개마저 푹 숙이고 말았다. 잊었다는 말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싫다고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삶의 기억이 사라지고 심하게 쇠약해져도 소녀는 여전히 다정하고 상냥했다. 소녀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더니 곁에 선 낯선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뭔데?”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뒷일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어떻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떠났는지조차 기억에 없었다. 이상은 멋대로 끔뻑이려는 입을 다물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를 쳐다보는 탁한 눈빛에 심장이 쿵쿵, 제멋대로 빠르게 뛰었다. 그는 역시 잊어달라며 횡설수설 이상한 변명을 덧붙이곤 황급히 방을 떠났다. 문을 닫자마자 그는 문에 기댄 채 주르륵 무너져내렸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소녀가 여지껏 거짓없이 쏟아부었던 마음이 버거워 도망치고 천 년 동안이나 소복히 쌓인 죄의 인과가 벅차 외면했던 것이 무색하게 소녀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히는 것이 두려웠다. 우습다는 것은 알았다. 천 년이나 반복하는 동안 이상은 소녀가 반복한 횟수 만큼이나 소녀를 잊었다. 이름이 매번 바뀌는 동안 결국 소녀는 원래의 제 이름을 완전히 잊고 말았다. 몇 번이고 이름이 뭐냐고 물었던 것이 단 한 번 돌아왔을 뿐이었다. 다 부서지고 망가져버린 몸과 아픔으로 가득한 그 영혼에 비할 바가 도저히 못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그는 그깟 잊힘이 너무나도 아팠다. 그는 닫힌 문에 기댄 채 벅찬 숨을 억지로 뱉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참담해도 그는 저에게 슬퍼할 자격이 없음을 알았다.

이상은 꼬박 이틀을 틀어박혔다. 충격받은 탓도 있지만 어째야 좋을지 몰랐다. 이상으로선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시간들이 너무도 많이 쌓여 있었고 이제는 그 기억마저 온전히 제 것이 되었다. 주지 못하고 빼앗았던 것들만이 떠올랐다. 한때는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제가 안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정작 모든 시간을 제가 안게 되자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이 끔찍한 여정을 혼자서 견뎠을까. 한참을 그렇게 처박힌 채 보냈지만 결국 이상은 그 문을 열고 다시 소녀를 찾아갔다. 분명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소녀가 견뎌 낸 천 년의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소녀는 방의 한가운데에 주저 앉아서 제 방에 있었던 편지들을 읽고 있었다. 그와의 밀담이었다. 이상은 겨우 불안을 감추고 그 곁에 다가갔다. 괜히 놀래키지 않게 일부러 인기척을 냈다. 부쩍 마르고 초췌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날보단 생기 있는 얼굴이었다.

“무엇을 읽고 있소?”

그는 묻지 않아도 될 말을 굳이 물었다. 그것은 분명히 제 글씨였고, 제가 정성스럽게 쓴 편지였다. 소녀는 다 갈라진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편지, 이 방에 있었어⋯⋯.”

“그랬구료.”

이상은 마찬가지로 짧게 대꾸했다. 차마 제가 줬던 편지라곤 할 수 없었다. 말을 해서 무엇하랴. 천 년 하고도 몇 년이나 쌓은 추억은 물론이고 이상이라는 존재 조차 그 기억에서 이름 한 자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고 싶진 않았다. 대신, 이상은 괜히 말을 돌렸다. 소녀가 편지를 더 읽지 않았으면 했다.

“이곳은 버스요. 기묘한 구석이 있지만⋯ 나와 미라 양 말고도 승객이 더 있소. 괜찮다면, 바깥으로 나가 그들과 인사하는 건 어떻소?”

“미라⋯⋯.”

소녀는 제 것이었을 이름을 작게 되풀이하더니,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그 말 역시 아팠다.

“⋯그럼, 나 또한 떠나는 것이 좋겠소?”

소녀는 잠시 곁에 앉은 낯선 이에게 시선을 줬다. 이상은 그 눈빛이 기껍다가도, 괜시리 불편했다. 싫은 사실을 자꾸만 떠올리게 했다. 거절 당하는 것보다도 더한 절망을 각오했지만 그럼에도 손이 덜덜 떨려왔다. 영원 같은 침묵 끝에 소녀는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렇게 많이 떠들었던 일이 그의 삶에 있었을까? 그는 아주 옛날에 말수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것도 이젠 아니었다. 그래도 이상은 부러 밝게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버스에 함께 타고 있는 수감자들의 이야기, 메피스토텔레스, 버스의 행방, 림버스 컴퍼니, 재밌었던 해프닝⋯⋯.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그와 소녀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절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었지만 무어라도 뱉으려고만 하면 목이 막혀왔다. 결국 이름 한 자 건네지 못한 채 해가 지고 달이 떴다. 물론, 소녀의 방엔 창문이 없기에 바깥이 보이진 않았지만. 밤이 늦어 졸음이 왔는지 소녀는 한참 이상의 이야기를 듣던 중에 졸기 시작했다. 친근감의 표시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어느덧 제 곁에 앉은 이상의 어깨에 기댄 채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이상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 한참을 그러고 앉아 있다가, 소녀가 조금씩 앓자 몸이 불편할 것이 걱정됐는지 작게 속삭였다.

“시간이 너무 늦었구료.”

이상은 잠에 허덕이는 소녀를 조심히 안아들곤 침대에 눕혔다. 외로울 것이 걱정되어 침대 구석에 있던 오리 인형을 들어 품에 안겨주었다. 소녀는 느릿느릿 눈을 껌뻑이더니 오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이전엔 그리도 좋아했던 것인데, 아무래도 낯선 모양인지 인형을 안는 것이 왠지 어색했다. 이상은 춥지 않게 이불을 덮어주곤 올지, 말지도 모르는 내일을 약속했다.

“내일도 오겠소.”

그렇게 끝나가는 밤을 먼저 붙잡은 것은 소녀였다. 소녀는 막 떠나려는 이상의 잠옷을 잡곤 제 자신도 왜 그랬을지 모를 말을 뱉었다.

“같이 자면 안될까?”

그것은, 이 낯선 이에 대한 알 수 없는 애착이었다. 이상의 이름 한 글자 조차 남지 않은 그 밑바닥엔 한겨울 아침의 햇빛같은 매서운 온기만이 남았다. 소녀는 이상의 이름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에게 은은한 애정을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은 탓인지 소녀에겐 그것이 간절했다. 겨울바람이 추워도 그 작은 볕에 있고 싶었다. 그 밖에 갈 수 있는 곳은 차갑기만 한 그늘 뿐이었다.

그가 품어선 안 됐을 연민이 밀려왔다. 곧장이라도 바스라지고 무너질 것만 같아서, 이상은 고개를 끄덕이곤 침대에 함께 누웠다. 침대는 좁았고 이불 역시 둘이 덮기엔 작았다. 이상은 최대한 소녀가 편하게 잘 수 있게 침대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곤 베개도, 이불도 마다한 채 누웠다. 등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소녀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 누워 눈을 감았다. 잠들지 못할 밤이 될 것이 뻔했지만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방해될까 걱정되었다. 그렇게 함께 누운지 오 분 정도 됐을까. 소녀가 뒤척이고 있다고 생각한 찰나에, 이상은 제 품으로 소녀가 꾸물거리며 들어오고 있음을 알았다. 소녀는 완전히 이상에게 붙은 채 가슴에 얼굴을 톡 기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감정 없는 목소리로 종일 무미건조하게 짧게 대답했던 소녀였다. 이상은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 없어서 듣지 못한 것처럼 어색하게 얼어붙었지만 소녀가 참지 못하고 울기 시작하자 결국 품 안에 ■■를 안고 말았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안다고 해도 이제와서 그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는 게 없는데도 저 멀리서 커다란 운명이 덮쳐오고 있었다. 이상은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무수히 많은 세계들이 마구 엉켜버린 매듭이 되어버린 소녀를 그 필연에서 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그가 하지 못한다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그 누구라도 하지 못하리라. 이상은 누구보다도 소녀를 구하고 싶었지만 제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을 알았다. 소녀는 이상을 몇 번이고 구했지만, 이상은 단 한 번도 소녀를 구하지 못했다. 소녀를 집어 삼킬 절망이 오고 있음에도. 그는 아무것도 바꿔줄 수 없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는 한참을 울다 지쳐 잠들었다. 부쩍 야윈 뺨 위로 벌겋게 부은 눈이 안쓰러웠다. 이상은 품에 안은 ■■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마치 지금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눈에 가로 새기려는 듯 오래도록 소녀를 바라봤다. 버석해진 머리카락, 파리해진 낯과 갈라진 입술, 옅은 숨과 생기를 잃은 피부. 온몸을 감싼 낡은 붕대와 회색빛으로 얼룩진 원피스. 그리고 이상은 그 목에 걸린 작은 로켓을 발견했다.

이상은 몸에 함부로 닿지 않게 조심히 로켓을 옷 속에서 꺼냈다. 낡고 녹슨 로켓 안엔 빛이 바란 사진이 한 장 들었다. 그리고 그 뒷면에는 깨져서 멈춘 시계가 있었다. 이상은 그 로켓이 제가 준 것임을 알았다. 처음으로, 너와 내가 만났던 그 옛날. 이상은 로켓을 선물했었다. 그때 고심해서 골랐던 태양 문양은 여행 끝에 다 닳았는지 알아보기 어렵게 됐지만, 분명히 그가 줬던 물건이었다. ■■는 로켓을 받고 아주 기뻐했었다.

영원히 간직할게!

정말로 영원, 이었다. 천 년이 넘는 세월이 다 지나는 동안 망가지고도 가지고 다녔던 것일까. 앞면에 든 사진엔 앳된 인상의 자신이 찍혀 있었다. 분명 ■■와 함께 찍었던 사진이었는데, 남은 것은 제 자신 뿐이었다. 마치 다가올 미래를 암시하듯, 그곳엔 더 이상 ■■가 없었다.

이 긴 비극은 다음날 아침 막을 내렸다. 결국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이상은 인기척에 소녀가 깰 것이 걱정되어 최대한 조심히 일어나려고 했으나 몸을 조금 돌리자마자 품에 안겨 있던 소녀는 이상의 허리를 덥석 붙잡곤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마.”

“미, 미안하오. 가지 않을테니 푹 쉬시오, 아직 이른 새벽이니.”

소녀는 잠을 잘 못 이루는 편이었지만 그 아침은 무슨 일인지 조금 오래 잤다. 그리고 동이 트는 무렵부터 조금씩 앓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지자 이상은 악몽이라도 꿀까 염려되어 그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 깨웠으나 소녀는 깨어나지 못하고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십 분 정도 지났을 때 눈을 번쩍 뜨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온 버스에 다 들릴 정도로 날카롭고 큰 비명이었기에 버스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소녀의 방으로 달려왔다. 수감자들은 물론이고 베르길리우스와 카론도 함께였다. 제일 먼저 도착한 베르길리우스의 붉은 눈빛이 이상에게 콱 박혔다. 상황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이상도 달리 해줄 말은 없었다.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으니까, 그저 조금 심한 악몽을 꾸고 있는가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정말로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났을 예정된 일이었으니까. ■■를 인간으로서 죽게 해주려면 지금이 마지막이었다. 그가 지시 받은 명령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는 바들바들 떨면서 몸을 힘들게 일으켰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를 똑바로 바라보고 처절하게 고함쳤다.

지금 당장 죽여, 빨리!!

결국 칼을 뽑아 든 베르길리우스의 앞을 막아선 것은 이상이었다.

“멈추시오.”

“비켜.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마지막 기회라는 게 대체⋯⋯”

그리고 다음 순간에, ■■의 가슴을 시계침이 관통했다. 침이 뚫고 간 심장엔 작은 구멍이 생겼다. 빙글빙글 나선형으로 돌면서, 드릴을 돌리듯 구멍은 점점 커졌고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발작하는 소녀를 묶은 것은 뫼르소였다. 그는 베르길리우스의 지시로 사슬로 특이점을 구속했다. 그날 베르길리우스는 특이점, ■■를 회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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