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태양을 독점하고 싶었다.
해가 공평하게 세계를 비추듯 소녀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했다. 지나치며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반갑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제 몫의 식사를 나눠주었으며 때로는 손을 붙잡고 앞으로 이끌었고 소리 내어 웃었다. 남모르게 소녀를 연모하는 이들이 늘었다. 소녀 본인은 알지 못했던 것 같았지만 소녀가 검계의 많은 조직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상은 잘 알았다. 알기만 했을까. 타인이 함부로 소녀에게 다가서고 은근히 그 손을 잡거나 어깨를 감싸고 사람들을 따돌려 어디론가 감춰버릴 땐 언짢다 못해 불쾌했다. 스스로가 우습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달빛조차 싫어하는 그림자가 감히 태양을 사랑하다니. 하지만 단 한 번 태양이 이쪽을 환하게 비췄을 때 그는 눈이 멀어 본분을 잊고 볕을 갈망했다. 한겨울에 드리운 햇빛이 너무도 따듯한 나머지 그곳이 제 세계라고 착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착각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소녀가 보여 준 미소는 세계에 존재하는 그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소녀는 제게 뻗어진 그 어떤 손도 잡아 줄 것이며 누구의 이름이라도 밝게 부를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이 고결하고 사랑스러웠지만 동시에 욕심이 났다. 제 자신이 그다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이 싫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걸 보면 트집을 잡아서라도 떨어트리고 싶었다. 다행히 그는 타인의 앞에서 제 욕망을 잘 참아냈으나 단 둘이서 있는 자리에서까지 모른 척 삼킬 순 없었다.
소녀는 항상 일기를 썼다. 단 하루도 빠짐 없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한지 밤이면 펜을 붙잡고 잘 때까지 놓지 않았다. 나중에 슬쩍 엿본 적도 있지만 별 특별한 내용은 없이 그저 하루 있었던 일들을 적당히 요약하여 적어내는 것에 불과했다. 그냥 일기라기엔 조금 세세하긴 했지만 별나다고 생각할 정도로 특이한 내용을 적는 것도 아니었다. 낮엔 검계 안을 마구 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느라 바쁘고 모처럼 둘이서 앉아 있는 밤에는 글만 적고 있는 게 야속했다. 남에겐 그렇게 흔하게 웃고 떠드는 것도 저에게만 아끼는 것이 퍽 서운했다. 이상은 한 시간 째 일기를 쓰고 있는 소녀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이 나를 앞에 두고 글만 쓰니, 퍽 섭하오."
소녀는 무엇이 또 그리 부끄러운지 그 말 한 마디에 얼굴을 붉혔다. 바쁘게 글씨를 적던 손에도 힘이 풀려서 펜이 툭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펜은 바닥에 잉크를 한 번 묻히고 구석으로 도르륵 굴러갔다. 바라던 대로 되자 왠지 웃음이 났다. 이제서야 저를 봐주는 것이 조금 얄궂어서 왠지 장난을 치고 싶었다. 이상은 굳어버린 소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곤 낮게 속삭였다.
"그래. 이제 나를 볼 마음이 생겼소?"
이상이 성큼 다가가더라도 얼어버린 소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몸을 뒤로 젖힐 뿐이었다. 싫을 건 없었지만 몹시 당황스럽고 이리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이 낯간지러웠다. 이상은 마침내 완전히 소녀를 덮쳐 쓰러트리는데 성공했다. 소녀는 바닥에 쓰러진 채 저를 똑바로 내려다보는 이상을 쳐다보았다. 잠깐 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고운 머리카락이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졌다. 이상은 터질 듯 벌게진 얼굴을 가리는 손을 붙잡고 위로 떨어트렸다.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가 검은 그림자를 향했다. 저 동요는 당혹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기대에서 기인한 것일까. 능구렁이처럼 웃던 얼굴이 곧 딱딱하게 굳어졌다. 왠지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당신은 상냥하니까. 조금 못살게 굴면 나를 봐주고 달래줄까. 그는 스스로가 치졸하게 굴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게 해선 안 됐을 것도. 그러나 장난이라며 평소처럼 웃으며 넘기기엔 이미 늦었다.
이상은 바닥에 쓰러진 소녀에게 몸을 기울여 그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었다. 전신이 상처 투성이인 그와 다르게 햇빛 한 번 받아보지 못한 것처럼 새하얗고 보드라운 피부에 기어이 붉은 자국을 남겼다. 가느다란 두 손목을 결박하는 데엔 한 손만으로도 충분했다. 처음엔 부들거리며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소녀가 그를 힘으로 이길 순 없었다. 몇 분 되지 않아 소녀는 그 상황을 그저 받아들인 것인지 저항을 멈췄다. 다만 이따금씩 떨거나 몸을 움츠렸다. 아프게 물었을 땐 작게 앓았고 때론 신음했다. 그는 제가 잘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꼴사나운 질투에 눈이 멀어 뻔히 보이게 상처를 주고 있음도 알았다. 그러나 소녀는 있는 힘껏 입을 다물고 소리를 참을 뿐 그를 거부하거나 밀어내진 않았다. 그는 잘 매인 고름을 슥 풀어내며 물었다.
"그만두고 싶거든 이야기 하시오."
"괜, 찮아⋯⋯."
마음 어딘가가 욱신거렸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어도 똑같았을까. 마음이 곪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은 어딘가 답답해져서, 표정을 구기고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다정이 과하구료."
그는 아침에 제가 매어 준 고름을 풀어내고 마음을 들여 맞춰 준 옷을 헤쳐 기어이 맨 살갗을 드러내고 입맞추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글쎄. 사무치게 외로워진 것일지 모르지. 오랫동안 조직에 머무르면서 조직원들을 아껴 돌봐오긴 했지만 누군가와 정을 나누려 했던 기억은 까마득하게 멀었다. 다른 사람을 특별히 연모하여 독점하고 싶은 욕망은 생각보다 낯설고 불쾌했다. 하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그립고 애틋했다.
자신이 없었다. 소녀가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형태는 아니었으면 했다. 제대로 된 침상도 아니었고 준비 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 몸에 닿아도 괜찮을지 허락을 구한 적도 없었고 잠깐이라곤 하지만 억지로 손목을 결박하고 잇자국을 냈다. 그는 입술이 맞닿기 전에, 문득 여린 손목에 손자국이 날까 두려워 급히 손을 거뒀다. 뒤늦게서야 이 모든 게 후회 됐다. 날이 선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밀어붙인 것이, 그리하여 미움을 살 것이 두려웠다. 내게 입맞출 자격은 없겠지. 그래도 어딘가 쓸쓸하여 이상은 그 이마에 아주 가볍게 닿곤 떨어졌다. 그는 소녀를 일으켜 주곤 제가 풀어헤친 옷깃을 다시 여며주었다.
"⋯⋯."
아주 잠깐 드리운 그 그림자가 아쉬웠다. 난폭해도 좋으니 사랑해줬으면 했다. 소녀는 제 옷 고름을 다시 매어주는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멍하니 멈춘 남자를 바닥에 쓰러트리곤 무어라 말하려는 것을 입술로 재빨리 틀어막았다. 그러나 소녀는 용기만 있었을 뿐 요령은 없었다. 그와 키스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언제였는지 기억 나지 않을 정도로 먼 옛날이었다. 당초에 맨 처음 세계에서의 이상은 남에게 키스하는 법을 알려줄 정도로 능숙하지도 않았고 자주 입술을 맞대지도 않았다. 그러니 곧바로 이상이 다시 입을 맞춰왔을 땐 속수무책으로 휘둘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조그만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다시 입술을 부벼왔다. 경직되어서 꽉 다문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고, 아주 조금 난 틈으로 혀를 밀어 넣어 벌렸다. 때로 숨이 모자라서 벅차하는 것이 느껴져도 봐주지 않고 그 입을 막았다. 몇 번이고 서로의 호흡을 교환했다. 몇 번을 탐해도 갈증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이 밤을 다 할 때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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