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아주 오랜만에 온화한 꿈을 꾸었다. 기다란 원피스를 걷어 올린 채로 커다란 소 위에 올라타서 시골의 논두렁을 지나가는 꿈이었다. 곁에는 그리운 시절의 그가 있었다. 그는 마구 흔들리는 소 위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소녀를 보며 은은하게 웃었다. 균형을 못 잡고 쓰러질 것만 같을 때 그 손을 잡곤 균형을 맞춰 주었다. 이상의 옆엔 벗이 두 명 있었다. 오랜 여행에서 여러 번 만났더랬지. 그들은 마찬가지로 위태롭게 흔들리는 소녀를 보며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돌아오니 이상의 침대엔 선객이 있었다. 소녀는 무릎을 모은 채 얼굴을 팔 안에 묻고 잠들어 있었다. 근래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것 같더니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깨지 않았다. 이상은 친애했던 옛 벗의 피가 묻은 코트를 멀리 걸어두고 조용히 침대에 걸터 앉았다. 부러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했거늘, 소녀는 약간의 흔들림 조차 놓치지 않았다. 그 눈은 천 년간 늘 그랬듯 피로에 물든 검은 눈동자를 쫓았다. 소녀는 자리의 주인이 돌아오자 벌떡 몸을 일으키고 잘 지어지지 않는 웃음을 억지로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꿈이 허상임을 알았기에 행복했던 시절의 꿈을 꿨어도 기쁘지 않았다. 그저 무사히 돌아온 것만이 기뻤다. 현실로 돌아왔을 때 제 곁에 이상이 살아 있다는 그 사실만이 위안이 되어서. 소녀는 평소처럼 밝게 이름을 불렀다.
"이상!"
"줄곧 기다렸던 것이오."
"잠깐 앉아 있었던거야! 잘 다녀왔어?"
"…기다리게 했구료."
그래. 기다리게 한 것이 틀림 없었다. 얼마나 기다리게 했을까. '기다린다'는 말은 더 이상 소녀에겐 별다른 무게를 갖지 않는 듯 했다. 소녀는 오래도 기다렸고 이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네가 찾아오는 것이 도리어 특별한 일이기에. 기다린다는 말은 맞지 않겠지. 기다린다는 건, 반드시 돌아올 것을 전제로 하니까. 스무 번쯤 반복했을 때 그가 돌아올 수도,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았다. 서른 번쯤 반복했을 때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걸 멈췄다. 그러니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잠깐, 앉아 있었다고. 이 순간도 어쩌면 지나가 버릴 찰나에 지나지 않으니까.
소녀는 평소처럼 헤실거리며 이상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친 다리가 불편한지 움직임이 느렸다. 이상은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다, 소녀가 완전히 제 옆으로 다가오자 붕대로 뒤덮인 조그만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소녀는 예상치 못한 접촉에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햇빛 한 번 받지 못한 것처럼 창백한 피부는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소, 손……. 닿고 있는데."
"내겐 허락되지 않은 것이오?"
"아니! 정말 너무 좋아! 그런데… 그게…"
부끄러워서……. 거짓없는 말은 점점 조그마해져갔다. 겹친 손이 도망치지도 못하고 낯간지러워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이상은 그것이 퍽 사랑스러워서, 피식 웃고 말았다.
"어……."
"무슨 일이오."
"웃… 었어."
생각이 입 밖으로 그대로 튀어나왔다. 부끄러워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대로 소녀는 시간이 멈춘 듯 이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수줍은 손이 더 이상 꾸물대지도 않고 저도 모르게 뱉고 마는 입이 다른 말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소녀는 돌이 된 것처럼 그를 가만 보다가, 유리 구슬 같은 눈물을 툭 툭 떨어트렸다.
"…미라 양."
"하지만, 너, 한 번도 웃지 않았잖아. 여기에 와서… 그런데……"
농담을 해도 그는 힘 빠진 웃음 소리를 낼 뿐 눈도 입도 웃는 법이 없었다. 맛있는 걸 먹어도 덤덤했고 놀래켜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에겐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지는 자연스러운 감정들이 메말라 버린 듯 했다. 사실은 그렇게 된 것을 정말 오래도록 봐 왔다. 그는 원래도 잘 웃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림버스 컴퍼니에 오고 나서 그는 정말이지, 바싹 말라 비틀어져 죽지 못해 사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것이 못내 아파왔다. 그때서야 헌신이 누군가에겐 잔인한 주박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천 년을 가시밭길 속에서 피 흘리며 걸어 온 결과가 이것이라면. 그 시간이 그를 단 한 번이라도 웃게 해주지 못한 것이 서글펐다. 너는 이 삶을 저주스럽다고 생각할까? 그렇다면, 난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생각이 들어도 그만 둘 순 없었다. 이미 소녀는 이곳에 멈추기로 결정했고 기억과 함께 능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끊임없이 제 자신에게 속삭였다. 이것도 저것도 전부 그를 위해서였다고. 언젠가는, 정말로 언젠가는. 살아만 있다면, 그에게도 행복이 올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웃게 되는 날이 있을 거라고. 아무리 제 자신을 다독여도 밤이 되면 또 다시 비명소리와도 같은 절규가 들렸다. 너 때문이라고. 너 때문에 끔찍한 숨이 끊길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다고. 다시 도망칠까 생각했을 땐 이미 모든 게 돌이킬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소녀는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저 그것만이 다행이었다. 네가 다시 웃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아주 작은 우연이라도 좋았다. 그 작은 기적만이, 소녀가 그토록 찾아 온 단 하나의 미래였다.
"그대는 나의 옛 벗을 아시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흐드러지고, 누군가는 비탄에 차 저물었지만 나는… 오늘 부러진 과거에 비로소 매듭을 지을 수 있었소."
소녀는 그들의 결말을 전해 들었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놀라기엔 이미 지겹도록 겪은 일들이었다. 악몽처럼 영원히 남은 멍에이기도 했다. 소녀가 처음 떠나 왔던 세계선은 지금과 몹시 닮아 있어서. 천 년 전에도 구인회는 똑같은 이유로 부서졌고 흩어졌었다. 동랑이 K사로 이직하고 구보가 이상을 N사로 데려간 것까지도, 정말로 똑같았지만 단 하나 다른 점은, 아무리 걸어도 절름발이가 된 그가 머물 수 있는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소녀가 그를 겨우 찾아냈을 때 그는 고층 건물의 끝에 서 있었다. 위태롭게 등지고 서 있던 그는 뒤로 단 한 발자국 걸어, 어떤 절망으로 추락하여 떨어졌다. 소녀가 그때 떨어졌던 부러진 날개를 구해내지 못했던 것이 이 모든 여행의 시작이었다.
"하여, 이제는……"
그때 소녀는, 여행의 끝이 오고 있음을 알았다.
똑바로 앞을 보고 걸을까 하오.
바라보지 않아도 스며들 수는 있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처음에도 이상은 소녀의 눈을 피하고 항상 먼 발치에 서 있었다. 언젠가 S사 앞에서 소녀와 동랑이 천진난만하게 달고나를 뜯을 때가 있었다. 회사 앞에 달고나 마차가 왔다고 말하는 동랑에게 소녀는 달고나가 뭐냐고 물었고, 떼기를 가르쳐주겠다며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손수레 앞으로 달려갔다. 소녀는 같이 가겠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멀거니 서 있는 이상의 손을 잡고 끌어 당겼다. 동전이 없으니 빌려 달라며, 몇 개 없는 동전을 억지로 가져가곤 모양을 제대로 만들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 했었다.
"그게 그렇게 어렵소?"
"지금 무시하는거야?! 네가 직접 해보던가!"
"아니, 나는……."
"아하하, 요령이 없네, 넌. 힘을 빼고 가장자리부터 뜯으라니까."
"참견하지 말라니까, 동랑! 이건 제대로 뽑을거야."
이상은 직접 달고나를 뜯지도, 가까이 가서 구경하지도 않고 멀찍이서 바라봤었다. 주변을 본다고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는 핑계를 대고 하트 모양 달고나를 떼냈다는 별 것 아닌 것에 기쁨을 느끼고 환희에 차 반짝이는 눈을 함부로 눈에 담곤 했다. 눈부신 태양을 직접 바라보지 못하는 것처럼, 즐거움에 빛나는 눈동자를 똑바로 보는 일 없이 그저 곁눈으로 그 빛을 담곤 홀로 좋아했다. 동백이 다가와 나잇값을 못하냐고 핀잔을 주고 결국 도발에 넘어가 휘말릴 때까지 그저 멀리 떨어진 채 서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퍽 즐거워서 남몰래 웃음 짓곤 돌아갔다.
모든 것이 다 불타버렸을 땐 이젠 어떻든 상관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그저 이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흔들리고 서서히 마모되며 마침내 짓밟혀도 상관 없다고. 그러니 제 손을 잡은 마지막 벗이 가자는 말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체념에 차서 죽어버린 종이 인형처럼 비틀 거릴 때 문득, 그 뒷모습이 떠올랐다. 꽃내음이 질식할 것처럼 덮쳐와도, 폭풍이 몰아치고 장대비가 쏟아져도, 지독한 폭염이 내리쬐고 시린 눈이 쏟아지더라도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자그마한 태양이. 어째서였을까. 본 적도 없는 어떤 이가 사무치게 그리웠던 것은.
날아가는 꿈을 꿨다. 날개가 없어서 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날개는 커녕 반쪽만 남은 절름발이 같은 걸음걸이론 어디도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오래 동경해서일까.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남은 것은 눈앞의 거울 뿐이어서. 그것이 유일한 세계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찾아오는 이들을 등지고 눈앞의 거울에 스스로를 가뒀다. 걸음을 멈추자 퍽 편안했다. 이젠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 한 가운데가 뻥 뚫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땐 몰랐지만 채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 그는 채울 것도 없었고, 채우는 방법도 몰랐다. 그저 모든 걸 잃은 것만 같은 그 표정이 너무나 아파서. 문득 모른 척하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그는 제 자신이 아직도 희망을 기억함을 잊었다. 그리고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그때 그는 사흘 치 약을 한 번에 삼키고 편안히 잠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똑같은 삶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고 복도로 나가 걷다 그 방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곳을 안식처라고 자신을 속이며 생각을 멈추고 거울에 영원히 갇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목적지도 없고, 기다리는 이도 없을 길 위로 절뚝이며 걷기 시작했다. 그 끝에 만난 이곳을 모든 것을 포기한 자신의 절망으로 여겼지만, 새로 만난 이들의 이름을 알았고 함께 등을 맞대었으며 같은 시간을 나누고 그들의 사이에 가만 스며들었다. 좋을 일도 없을텐데 그들은 저를 베어들려는 동랑의 앞을 가로막고 서 손에 피를 묻히고 몸에 상처를 새겼다. 문득 생각했다. 잃어버린 만큼, 새로이 얻었다고. 내가 감히 이 구멍을 메우려 들어도 괜찮을까? 처음엔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심이 섰을 때 비로소 그는 고개를 들고 또 다시 제 앞을 가로 막으려는 누군가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한때 스스로가 걷다 지쳐 걸음을 멈췄고 무언가를 포기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이라면 알았다. 그것이 희망이라는 이름의 날개짓임을.
"사실은 한 번 더… 날고 싶었소."
"이상……."
"어느 날 나는 반드시 절망하고 말테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디까지라도 살아야 하오."
추락은 길었고, 그의 추락만큼이나 소녀의 여행은 이어졌다.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미로의 저 끝에서 한여름의 낮보다도 밝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고맙소. 내가 다시 땅을 딛을 수 있게 해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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