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mafrost 01
졸업식 아침
청명하고 날카로운 알람 소리가 몽롱한 정신을 일깨웠다. 잠기운은 아쉬움을 잔뜩 피력하며 온몸에 진득이 눌어붙어 왔지만 라이젤 클로비스는 그것을 애써 뿌리치며 무거운 눈꺼풀을 힘주어 들어 올렸다.
창을 굳게 가린 두꺼운 커튼 사이로 살그머니 새어 들어오는 아침 햇살. 코 끝에 닿는 공기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차가웠다. 라이젤은 꼭꼭 덮고 있던 이불을 헤치고 팔을 뻗어서 아직 귓전에서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휴대전화의 알람을 껐다. 알람을 끄자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휴대전화의 배경 화면이 떠올랐다. 눈 덮인 바닥에 뒹굴고 있는 노랗고 큰 개 사진. 그리고 그 위에 떠 있는 날짜와 시간이 자연스레 눈 안에 담겼다.
5월 23일, 오전 6시 54분. 5월 23일이라 표기된 날짜 위에 녹색 눈동자가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반쯤 감겨 있던 눈이 선명히 뜨이고 일자로 다물린 입술 끝이 슬그머니 올라가며 옅은 미소를 그려냈다. 그래, 일어나야지. 작게 앓는 소리를 토해낸 라이젤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에 발을 디뎠다. 5월 23일. 그토록 기다리던 졸업식 날이었다.
라이젤은 욕실로 들어가 깨끗이 씻고 젖은 머리를 꼼꼼히 말린 뒤 간밤에 반듯하게 준비해 두었던 교복을 하나하나 꼼꼼히 챙겨 입었다. 지금까지 3년간 지겹게 입었던 옷. 오늘 이후로는 더 입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주름 하나, 티끌 하나 서리지 않은 옷을 깔끔히 차려입고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졸업식이니 조금 멋을 부려볼까 싶어 빗으로 이리저리 모양새를 바꾸어 보기도 했지만 어떻게 머리를 바꾸어도 어색하고 이상해 보여 다시 원래 하던 대로 단정히 빗어 정리했다. 무언가 빠트린 것은 없을까. 방 안을 한 차례 둘러본 라이젤은 거의 비다시피 한 가방을 한쪽 어깨에 들쳐메고, 왼손 손목에 워치형으로 된 가이딩 수치 측정기기를 감으며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리기, 티티, 우리 조그마한 별. 좋은 아침.”
“좋은 아침, 아빠.”
계단을 밟고 1층으로 내려가자 익숙한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라이젤은 포근한 인사말에 익숙히 답을 건네며 주방에 발을 들였다. 렌지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따뜻한 스튜와 오븐에서 데워지고 있는 빵. 스튜 냄비 옆에서 달걀을 부치고 있던 남자, 밀라드를 빤히 바라보던 라이젤은 프라이팬을 구경하는 척 슬그머니 그의 옆에 붙어 섰다. 밀라드는 제 옆에 온 막내아들을 보고 낮게 웃음을 흘리더니 한 팔로 라이젤을 꾹 감아 안고서 볼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 졸업식이네.”
“네.”
“엄마는 이따 졸업식 할 때 바로 온대. 조금 늦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끝나기 전에 온다더라. 너 서운해할까 걱정하더라.”
“네, 어제 연락받았어요. 안 서운해요.”
라이젤은 고개를 저으며 답하곤 오븐을 열어 다 데워진 빵을 꺼내려 했지만 밀라드가 그를 만류하며 대신 빵을 꺼냈다.
“가서 앉아 있으렴. 오늘 같은 날에 그 옷에 얼룩이라도 지면 마음 아파지지 않겠니.”
“괜찮아요.”
“가서 앉아, 가져다줄게.”
몇 번 머뭇거리던 라이젤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그를 보며 방긋 웃은 밀라드는 데운 빵을 솜씨 좋게 썰어 담고 프라이팬에 굽고 있던 달걀과 베이컨을 그릇에 담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스튜를 덜기 위해 새로운 그릇을 집어들며 물었다.
“블랑은? 온대?”
“에니프는 못 온대요. 중요한 테스트 일정이 있다고. 대신 저녁 파티엔 참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나 참, 누굴 닮았는지.”
“누굴 닮았겠어요.”
어깨를 으쓱이며 한 라이젤의 말에 밀라드는 멋쩍어하며 웃음을 흘렸다. 일에 정신이 팔리면 도통 쉴 생각을 못 하고 끝까지 매달리는 성정을 가진 첫째는 그 누구보다도 제 부모를, 그중에서도 그 자신을 똑 닮았음을 모르지 않았던 탓이었다. 적당량 덜어낸 치킨 스튜를 마저 놓아준 밀라드는 맞은편 테이블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서 아침을 먹는 라이젤을 즐거운 표정으로 구경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더라. 요 며칠 그렇게 날씨가 안 좋아서, 오늘도 날씨가 안 좋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었는데.”
“날이 맑더라고요. 조금 춥지만.”
“원랜 이즈음엔 더운 바람이 불어야 하는데…….”
말꼬리를 흐린 밀라드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라이젤과 같은 색을 머금은 녹색 눈동자가 걱정과 마뜩잖음을 한가득 담은 채 눈 덮인 바깥을 응시했다.
5월 말, 졸업식 시즌. 눈과 얼음으로 덮인 알래스카주에도 훈풍이 불어오는 시기.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5월이 슬슬 막바지에 치달았음에도 따뜻한 기운은커녕 한겨울마냥 살을 에는 칼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쳤다. 학생들은 진작 벗었어야 할 동복을 입고 그 위에 코트와 목도리를 꽁꽁 둘러매듯 착용해야 했다. 뉴스에서는 올해 파종 시기를 놓쳐 울상이 된 땅 주인의 얼굴과 난방비에 몸살을 앓는 사람들의 사연을 연신 화면에 내보냈다.
전례가 없을 만큼 심각한 기상 이변. 이 기상 이변에는 이유가 뚜렷이 존재했다. S급에 가까웠던 A급 센티넬의 폭주. 냉기를 다루던 센티넬이 제때 가이딩을 받지 못한 채 위험한 임무에 배정되었다가, 임무 중에 제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망하며 터진 사고로부터 기상 이변이 발생했다. 그 힘의 주인은 이미 몇 달 전 명을 달리하였으나 그 힘은 여전히 남아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시름을 안겨주었다.
그 폭주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추운 알래스카주 사람들의 마음에 쐐기 같은 불편함과 냉기를 심어 주어 센티넬에 대한 반감을 더욱 키우는 데에 일조했다. S급도 되지 못한 센티넬의 폭주가 알래스카주 전역에 이리 오랫동안 문제를 끼칠 정도라면 그 이상 등급의 센티넬은 얼마나 큰 문제를 가지고 올 것인가. S급 센티넬이 그리 흔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혹시’라는 단어가 가져오는 불안감을 너무도 쉽게 받아들이고 동화되어 갔다.
사람들은 센티넬의 존재 자체에 두려움을 가지고 그들에 대한 규제 강화를 외치기 시작했다. 몇몇 극단적인 자들은 센티넬이란 존재를 아예 사회에서 배제하고 격리해야 한다며 주장했다. 센티넬과 가이드를 관리하는 이능력 기관은 그들 또한 인권을 가진 사람이라며 그 주장을 일축했지만, 그것은 들불처럼 일어난 불안감을 잠재우는 데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창밖에 가득히 쌓인 눈.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선연히 느껴지는 찬 공기. 알래스카주에서는 더없이 익숙한 것들이었으나 밀라드는 그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익숙함보다는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계절과 시기에 맞지 않는 이 냉기는 사람들에게 센티넬에 대한 거부감, 더 넘어서서는 일부의 혐오감까지 불러일으키는 요소였으므로.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세 사람 중 둘이 저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불안과 두려움이 항상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신경을 가득히 잠식해오곤 했다.
밀라드의 두 아들은 각각 센티넬과 가이드였다. 그나마 가이드로 발현한 큰아들, 에니프는 괜찮았다. 사람들의 화살은 보통 센티넬 쪽으로 겨누어져 있었고, 첫째는 그런 조그마한 악의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길을 잘 헤쳐 나갈만한 강단을 가졌기에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앞에 바르게 앉아 스튜를 떠먹고 있는 작은아들에 대한 걱정은 어떻게 해도 거둘 수가 없었다. 열기를 다룰 수 있는 C급 센티넬, 라이젤 클로비스. 파괴력도 뭣도 없이 그저 주변의 온도를 어느 정도 올릴 수 있는 수준의 능력치만을 가진 둘째. 능력 발현이 원활하고 조절 감각이 세심하여 C급을 받았으나, 실상은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라이젤은 그저 히터가 필요치 않게 된 일반인이나 다름없었지만 센티넬에 대한 반감이 커진 사람들의 눈초리는 아직 졸업조차도 하지 않은 고등학생에게도 여지없이 쏠렸다.
“내일 기관에 가야 하는 거 맞지?”
“네. 오후 1시까지요. 앞으로 3개월간 집이 비겠네요.”
덤덤히 답한 라이젤은 깨끗이 비운 스튜 그릇 옆에 수저를 내려두었다. 밀라드는 라이젤에게 일회용 냅킨을 건넸다. 라이젤은 그것을 받아 들고 입을 닦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이 조용해지겠구나.”
밀라드가 그릇을 치우며 하는 말에 라이젤은 조금 웃었다. 고등학교 졸업식인 5월 말부터 대학교 입학식이 있을 9월 초 전까지. 센티넬인 라이젤은 이능력 기관에 들어가 3개월간 의무교육을 이수해야 했다.
센티넬과 가이드로 발현된 사람들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주어진다. 하나는 이능력 기관에 소속되는 것, 하나는 일반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러나 S급부터 B급에 해당되는 센티넬과 가이드에게는 기관에 소속되는 길만이 주어졌다. 자유도가 주어지는 것은 C급 비전투계 센티넬부터. 라이젤은 C급 비전투계 센티넬로 아슬아슬하게 이능력 기관 소속에 강제되는 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신 기관에 소속되지 않기를 선택한 센티넬과 가이드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혹은 성인이 되기 전에 3개월 간 기관에서 숙식하며 의무교육을 이수해야만 사회생활에 합류하여 일반인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다.
라이젤은 어제 기관에 들어갈 때 가져갈 짐을 모두 싸 두었다. 오늘은 졸업식이 있을 것이고, 저녁에는 졸업 파티에도 가야 할 테니 짐을 정리할 시간을 따로 빼기가 어려웠다. 졸업식을 끝내고, 친구들이랑 사진도 찍고, 부모님과 식사도 하고, 파티를 위해 맡겨 둔 옷도 찾아야 하고, 파트너도 데리러 가야 하고……. 오늘 일정을 머릿속에서 죽 나열해본 라이젤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눈코 쉴 새 없이 바쁘겠구나.
이를 닦고 얼굴과 옷차림을 한 번 더 점검한 라이젤은 교복 위에 코트를 덧입고 목도리를 맸다. 코트 소매를 슬쩍 들추어 가이딩 수치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이딩 수치는 86%. 넉넉하다 못해 넘친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들췄던 소매를 다시 바로 하고 내려두었던 가방을 어깨에 맸다. 신고 있던 실내화를 벗고 부츠와 구두 중 무엇을 신을지 고민하다가 구두 안에 발을 밀어 넣었다. 현관으로 나서기 전. 라이젤은 뒤를 돌아보고선 마중 나온 밀라드를 바라보았다.
“아침 고마워요. 잘 먹었어요.”
“다행이구나. 이따 보자, 내 귀엽고 자랑스러운 티티.”
“이따 봐요, 아빠.”
라이젤은 인사를 건네며 조금 웃었다. 작은아들의 웃는 얼굴을 본 밀라드는 더욱 환하고 다정한 미소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라이젤은 그 미소를 뒤로한 채 집 밖으로 걸어나갔다.
서늘하지만 쾌청한 날씨. 안정적인 가이딩 수치. 바람은 찼지만 그만큼 상쾌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고등학교 생활의 종지부를 찍는 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기에 걸맞는 날씨라는 생각을 잠시 한 라이젤은 사뭇 경쾌히 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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