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데빌] 완벽
2020.01.30 업로드
존 파우스트는 아주 완벽한 사람이었다. 만약 책꽂이의 책 중 하나라도 자리를 바꿔두고 바로 고치지 못하게 하면, 그는 하루 종일 입술을 씹을지도 모른다.
그 완벽한 집에 사는 두 사람은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냈다. 이 날이 저 날이 되고 일주일이 뒤바뀌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똑같은 하루들을. 이를테면 이렇다. 그가 매일 같은 시간에 눈을 떠 두 명 몫의 아침을 준비할 동안 그의 연인이 의식을 찾는다. 그들은 매일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매일 같은 일과를 보내고, 매일 함께 외출하고서는, 매일 같은 시간에 서로를 끌어안고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분명 행복한 연인의 일상처럼 보이나 그 속은 말하자면 아늑한 감옥과도 같았다.
"존, 밖에 누가 왔어."
"올 사람 없는데⋯."
"일하는 중이야? 그럼 내가 나가볼게."
"아니야!"
"⋯⋯."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이, 자신이 아는 대로 존재해야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나갈게. 쉬어, 그레첸."
"그래."
그리고 오늘은 그가 구원받은 지 만 1년째 되는 날이었다.
"누구십니까."
"네게 두 번째 기회를 줄 존재."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뒷산에서 새가 울어댔다. 그레첸은 그것을 볼 수가 있었다. 아마 꽁지가 빨간 새였을 것이다. 아니면 이마 깃이.
"⋯누구십니까."
"존 파우스트, 오늘이 기념일이던가."
존은 이 목소리를 알았다. 모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매일 밤 꿈에 나왔던 울림.
"만 1년이 되는 날이지."
바깥의 누군가가 단단한 문을 손마디로 가볍게 두드렸다. 존 파우스트는 문고리에 올린 손을 아주 천천히 거두고, 실내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느리게 뒤로 움직였다.
"⋯⋯소용없어."
"그레첸."
"누가 서 있는지 알잖아."
"들어가, 그레첸."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두 목소리는 바람보다 작았다.
"열어야 해."
"안 돼."
"우리가 안 열면 그냥 들어올 거야."
"그레첸, 방에 있어."
"⋯⋯."
그레첸은 제 앞의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 1년 동안 그는 저런 표정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비추었다. 무언가 조금이라도 뒤틀리면 그대로 사라질 것처럼.
"그레첸, 들어가. 얼른."
"우리에게 볼일이 있으신 거야."
"그레첸, 제발⋯!"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다 문 너머를 의식해 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애원에 가까웠다.
"신을 피할 수는 없어."
"그레첸, 신이 아니라!"
남자가 제 옆을 지나치는 연인의 팔을 급하게 잡아챈 것은 문고리가 이미 돌아간 다음이었다. 존의 완벽에 딱 하나 어긋나는 존재는 매번 그레첸이었다.
"손님을 오래 세워두는군."
"⋯⋯."
존이 고개를 훽 돌려 그레첸의 표정을 살폈다. 혹 제 연인이 '오셨습니까.'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같은 말을 입에 담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레첸은 그저 침묵을 지키며 그 존재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당신께 우리 집 거실에 앉으라 권해드려야 합니까."
존재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릴 줄 알았으나, 대신에 소름 끼치는 정적이 살을 파고들었다.
"원한다면 내 친히 이 자리로 소파를 옮길 수도 있고."
"⋯⋯어디든 원하는 곳에 계십시오. 하면 그곳이 당신의 자리이겠지요. 당신께서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내 너를 사랑한 이유가 있지."
입이 굳은 듯 한 마디도 얹지 못하는 남자에게 존재의 시선이 가 닿았다. 옷장에 다리가 깔려 옴짝달싹 못 하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존은 본능적으로 기도문을 되뇌었다.
반면 그레첸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존재의 앞을 두 다리로 완강하게 막아서서는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네 개의 눈이 정확히 맞닿은 채로 둘 중 누구도 시선을 먼저 돌리지 않았다.
"만 일 년. 오래도 되었지. 네가 내 심연 속에 들어앉아 부유하던 것이 고작 엊그제인데."
"그 엊그제 같던 시간 동안 우리는 아물고 메워졌습니다. 신께서 우리를 탄생시킬 당시에 주신 선물 중 하나가 아닙니까."
"그걸 빛이 주었다 생각하나."
존재가 빛나는 영혼에 손을 뻗어 둥근 어깨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당신 또한 신이십니다."
"그래. 옳다."
존재는 아무 목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안부 인사 같은 것이나 주고받자고 굳이 이 집의 문을 두드린 것 같았다. 하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이곳에 있을까. 보다 못한 남자가 연인의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 입을 열었다.
"⋯만 일 년이라는 숫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기왕이면 의미가 있는 날에 찾아오는 게 낫지 않을까 하여."
"무슨 의도십니까."
"내 나의 아이를 보러 오는 것에 의도가 필요한가."
"그 없이 찾아오실 리 없다는 거, 압니다."
존재는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너무 빨리 핵심으로 들어가니 재미가 없다는 듯이.
"네게 두 번째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 말하였지."
"계약은 필요 없습니다."
그 말에 존재는 허리를 젖히고 깔깔 웃어대었다. 아니, 잘 모르겠다. 이번에는 벌어진 입 안에 검은 공간 외에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네 영혼이 이미 썩어 문드러져 지옥의 밑바닥을 긁고 있는데 내 어찌 그럴까."
"⋯⋯."
"더는 선한 영혼의 소유자도, 본디 빛을 택한 사람도 아닌 주제에 건방지게 굴지 말거라."
"⋯⋯."
존재는 우악스럽게 남자의 어깨를 당겨 옆으로 밀쳐내었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뒤의 여자는 아직도 같은 눈으로 존재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두 잊게 해줄까. 너희들의 지난 시간을."
존의 귀에는, 저 단어들이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공기 중을 떠도는 것 같이 들렸다. 그만큼 이질적인 문장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만약 너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지금보다 나은 결말을 맞을 수 있을지, 그걸 걸어보라는 이야기야. 스스로 배팅하는 셈이지."
"저와 그레첸의 기억을 전부 지우고요."
"그래."
"돌아가십시오."
남자는 기가 찬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연인의 손을 잡아당겼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결국 그들을 농락하려는 목적인 게 분명하지 않은가.
"이리 사는 것보단 낫지 싶은데."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혹시 모르지. 너희들이 이전에도 이 선택지를 가진 적이 있었을지."
"⋯⋯."
"만약 그러하다면 너희의 이야기가 이것으로 과연 몇 번째일까."
"속이지 마십시오. 저희를 그냥 좀 내버려 두세요."
"존 파우스트. 이 선택은 이 아이의 것이다."
존재가 비웃듯 여자의 머리칼을 손 틈 새로 흘리면, 그의 손바닥을 타고 새하얀 제안서가 여자의 팔을 스쳐 공중에 팔랑거렸다. 그리고 그것이 여자의 손에 닿을 찰나, 남자는 감히 그것을 쳐냈다.
"필요 없습니다!"
"네 권한이 없다 말하였지."
짐승의 목을 긁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막상 네게 주어졌던 선택에는 가장 소중한 이가 무어라 하든 펜을 쉬이 놀렸으면서, 우습구나."
그레첸은 야윈 팔을 뻗어 바닥의 종이를 쥐었다. 지난 악몽 속에 보았던 것과 짜증 날 정도로 똑같은 감촉이었다. X는 만족스레 웃었다.
"아주 긴 밤을 보내겠구나, 나의 아이야."
그의 마지막 목소리는 땅에서 울렸다. 모습이 사라져도 그 소리는 존의 귓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존은 급히 집 안의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열었다. 이러면 악마가 빠져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그동안 그레첸은 제안서를 들고 현관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시린 겨울 공기가 맨 팔에 닿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그레첸, 그거 줘."
순식간에 차가워진 바닥 위로 실내화가 스치는 소리가 사부작댔다. 존은 팔을 쭉 뻗고서, 예민한 아기를 달래듯 목소리를 낮췄다.
"존, 저녁 먹을 시간인 것 같아."
"아, 어. 그래야지. 일단 그거부터 줘."
"걱정하지 마. 서명 안 해."
연인의 불안한 표정에 답하듯, 그레첸은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
"그래, 안 할 거니까 필요 없잖아. 줘. 버리자."
"존, 우리 저녁 먹자."
존은 더이상 요구할 수 없었다. 그레첸은 최후의 날처럼 존을 지나쳐, 식탁 앞에 가만히 앉았다. 존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평소처럼 밥을 먹었다. 평소처럼 설거지를 하고, 평소처럼 연인과 소파에 앉아 내용 없는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평소처럼 다이어리에 가벼운 문장 몇 개를 쓰고 평소처럼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그는 오늘 하루, 영원히 잠들 수 없을 터였다.
그의 완벽에서 단 하나 어긋나는 것은 항상, 딱 하나, 자신의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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