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더데빌] 퇴색

블렉먼데이 이후 / 렟존cp / 2019.03.20 업로드

무지한 자는 자신이 무얼 가졌는지 모르고,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가진 것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다.


다소 급하다 생각할 만큼 빠르게 열쇠를 끼워넣는 소리가 넓고 텅 빈 거실을 울렸다. 시간은 새벽 4시를 이제 막 넘어가고 있었다. 창가에 앉은 한 여자는 두 손을 바르게 모으고 눈을 살포시 감고, 무릎을 꿇은 채 차가운 맨바닥에 앉아 입으로 속삭이듯 무언가를 끝없이 중얼거렸다. 가벼운 흰색 가운차림에 빗질 되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은 정갈하다 보긴 어려웠지만 그의 자세만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올곧았다.

"그레첸."

남자의 지친 목소리가 여자가 있는 창가까지 닿았다. 여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무언가 계속 읊조리는 데에만 집중했고, 그것이 불만이었던지 이제 막 귀가한 남자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약간은 거칠어졌다.

"또 기도해?"

"⋯⋯."

"그레첸."

여자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자세히 들어보면 사하여, 구원해, 이끌어 등의 단어가 들렸다. 이의 이런 모습은 모르는 사람에겐 꽤 독실해 보일 것이다.

"그레첸!"

남자가 성질을 참지 않고 연인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 돌리자, 그제야 어렴풋이 여자의 흐린 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왔구나."

"맨날 기도해? 이딴 게 무슨 도움이 돼. 그레첸, 제발 나 좀 도와줘. 부탁이야."

"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돕고 있어."

핀으로 고정하지 않은 넥타이가 팔락 흔들리며 작은 바람이 일었다. 남자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한 손으로 여자의 팔을 급히 쥐고 다른 손으로는 그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속도가 너무 느려. 빨리 뭐라도 꼬리를 잡아야 그 윗선까지 쭉쭉 뻗어올라갈 텐데, 나 하나로는 한계가 있어. 네가 뒤에서 서포트만 해주면⋯⋯."

여자가 힘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마르고 무거운 바람이 두 사람 사이로 흩어졌다. 여자는 상대의 팔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타고 올라가 제 어깨에 놓인 손을 힘주어 떼내 토닥인 후 놓았다. 그 모든 과정이 제안의 날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처럼 느렸다.

"이런 기도는 나한테 도움이 안 돼. 언제까지 덧없이 신만 찾을 거야. 이게 어떻게 잡은 기회인지 너도 옆에서 봐서 잘 알잖아. 엑스는 나한테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을 거고, 난 이걸 지금― 꼭 잡아야 돼. 그레첸, 너만 정신차리면 돼."

"존, 나 저녁에 거울을 봤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여자는 아랑곳 않고 겨우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옛날에 네가 그랬지. 내 눈에 별이 박혀있다고. 매일 다른 별들이."

"⋯⋯."

남자는 제 연인의 이런 뜬금없는 주제 돌리기에 한숨만 쉴 뿐이었다. 지친다는 표정으로 어디 한 번 계속 말해보라는 듯 편히 자세를 고쳐 앉는 남자에게서 여자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눈빛은 흐렸지만, 절대 무르다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존, 내 눈을 봐. 아직도 별이 있어?"

"그레첸."

"난 못 봤어. 그 거울 속에는 별이 다 지고 하나도 없었어. 존, 내가 이렇게 썩어가는 걸 보면서도 모르겠어? 네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썩긴 누가 썩어. 또 본 적도 없는 신이랑 악마 탓하려고? 네가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이렇게 기도만 해대니까 몸이 망가지는 거잖아!"

"⋯⋯."

남자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애써 감정을 고르며 적당한 말을 찾느라 떨리는 입꼬리와 오르락내리락하는 목젖이 이 공간에 한참의 정적을 깔았다.

"그래. 힘들겠지. 너나 나나 힘들어. 근데 나는, 우리 조금이라도 더 잘살아 보겠다고, 너랑 좀 더 잘 살겠다고 이러고 있어. 적어도 뭔가 결과가 눈에 보이는 걸 하면서 힘든 거라고! 근데 너는 뭐야? 날 지켜주겠다며. 내 옆에 있겠다며. 왜 이렇게 엇나가는 건데? 신만 죽도록 찾으면 이 상황이 쭉쭉 잘 풀려? 당장 저 악취 나는 인간들 바닥에 처박을 건수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해? 그걸 신이 해주나? 어? 그레첸, 정신 좀 차려. 부탁이니까."

여자는 남자의 퍼부음 속 마지막 마침표가 떨어질 때까지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널 지키는 거야, 존. 네가 벗어날 수 있도록."

여자의 시선이 남자의 어깨 너머 허공으로 진득이 향했다.

"저 악마의 음험한 손을 네가 스스로 뿌리칠 수 있도록. 그게 내가 지금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모든 거야."

스치는 공기 속에 잠시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것을 들었을 리 없는 남자는 질렸다는 듯 여자를 노려보다 벌떡 일어나 등을 보이고 떠났고, 방문은 바람이라도 분 것처럼 세게 쾅 닫혀버렸다. 절대 열리지 않을 듯이. 그 너머는 마치 다른 세상인 것처럼 고요했다. 분명 누군가가 방금 그 곳으로 들어갔음에도 문을 열면 아무것도 없을 것처럼.

여자는 눈꺼풀을 떨어뜨리고 방문가를 처연히 바라보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바닥을 짚으며 비스듬하게 고개를 들었다. 기름칠이 덜 된 기계처럼 힘겹게 몸을 가눈 그는 방금 전의 허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당신이 바라는 것 어느 하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그에게서 나를 거두지 못할 것을 확신하니, 지금 그가 잠시 나를 외면할지언정 완전히 떠나서는 안 됨을 그의 마음 깊은 곳이 알기에 우리는 견고할 것입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으나, 창가로 슴슴히 들어오는 달빛이 그곳까지 닿지 않는 것은 확연했다. 여자는 몸을 파르르 떨며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찬 바닥을 꽉 누르다 이내 중심을 잃고 픽 쓰러졌다.


얇은 커튼이 미처 다 막지 못한 햇살이 방을 비집고 흘러와 침대 위의 여자를 감쌌다. 창밖의 길은 이제 막 하루의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들로 북적였으나 그 소리가 두꺼운 창문을 뚫지는 못해 방 안은 아무 소리도 존재치 않았다. 여자는 밤새 한 번의 뒤척임 없이 지금까지 죽은 듯 누워있었고, 이 집 안에 남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는 데다가 그 흔한 아침 알람이나 문자, 전화 등도 여자의 핸드폰엔 울리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아침이었다.

여자가 항상 규칙적으로 눈을 뜨던 시각에서 벌써 5시간이 지났다. 그러니까, 몸이 건강할 때의 이야기다. 제대로 먹은 게 없으니 속이 쓰려 깰 법도 한데 며칠간 못 잔 잠을 몰아 자고 있느라 이는 거의 기절 상태였다. 오죽하면 아침에 여자를 침대로 옮기던 남자도 코에 손가락을 대고 숨을 쉬는지 확인했을까.

그렇게 몇 시간을 더 벽시계가 무음으로 달리고 있을 무렵, 다행히 해가 지기 전에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제대로 안 눕혀뒀는지 쑤시는 팔 한 쪽을 주무르며 슬리퍼를 찾아 신은 여자는 발로 땅을 딛다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꼭 오늘만 이런 것은 아니었다. 여자는 점점 망가지고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으니까. 그것조차 익숙해진 듯 주변의 가구들에 의지해 걸음을 하는 이는 아주 많이 위태로워보였다. 온 집의 불은 다 꺼져있었지만 큰 유리창에서 들어오는 밝은 햇빛 탓에 어두운 구석은 적었다. 여자는 커튼을 천천히 끝까지 다 걷고 또 그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내 손톱이 부러지고 갈라져 그 날카로움에 살이 찢기고 뜯어질지라도 당신께 뻗는 손을 거두지 않을 것이니 부디 그의 죄를 씻어 다시금 빛에 부끄럽지 않은 하나의 인간이 되게 해주시고 그 속죄의 글씨를 영원히 가슴에 새기고 나아가게 하소서."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자세로 쉴 새 없이 기도만을 토해내는 여자는 이젠 평범한 사람이라 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여자는 남자가 아침에 나가 새벽에 들어올 동안 무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물론 알려면 속속들이 알 수 있었지만 여자가 원하지 않았으므로. 언젠가 남자가 들뜬 목소리로 표가 잔뜩 떠 있는 태블릿 pc를 눈앞에 들이댔지만, 여자는 화면에서 뻗어 나오는 인공적인 빛에 눈이 시려 시선을 피하고 귀를 막았었다. 그때 그는 또 화를 냈었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요즘처럼 갈등이 깊어진 적은 없었다. 요새 남자는 여자에게 무언가 도와달라며 자꾸 애달프게 부탁하는 일이 많았는데, 여자가 매번 그렇듯 거절하거나 처음부터 부탁할 일이 없으면 보통은 말도 섞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을 가린 어둠을 벗겨내시어 그가 눈가에 상처를 입더라도 올바른 것을 볼 수 있게 해주시고 빛이 있는 곳으로 걷게 해주시고⋯⋯."

오늘따라 여자의 목소리가 일정치 않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눈을 꾹 감아 흐를 간극이 없음에도, 쌓이고 쌓이는 감정들에 결국 바위틈에 새는 물처럼 그의 볼로 조금씩 물길이 그려졌다.

"어디 계십니까."

수많은 날의 수많은 기도 중에 일부러 하지 않으려 꾹꾹 눌러 저 밑에 구겨놓았던 말이 결국 눈물과 함께 터졌다. 속눈썹이 젖어 들어가며 볼로 서너줄씩 왈칵 쏟아진 따뜻한 물방울들이 바닥에 툭툭 소리를 내며 내팽개쳐지고, 한 번 뱉은 말은 하늘을 향해 오르고 오르다 꺾여 바닥으로 낙하했다. 닿아야 할 곳에 닿지 못한 목소리는 그대로 나뭇가지들 사이에 숨어버려 더는 찾을 수 없었다.

"악마가 내민 유혹을 신의 보호 아래 내치지 못해 어리석음으로 인한 시련이 극에 달했으니 이것은 필시 저와 그의 탓입니다. 부디 저희를 용서하시어 다시 당신의 품에 쉴 수 있게 하소서⋯⋯."

간절한 기도가 무색하게, 찬란한 해는 저며지듯 모습을 조금씩 감추어 여자의 주위가 점점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집 안에 빛이 미치는 범위가 좁아지면 여자는 타오르듯 빨간 노을 앞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또 속죄했다. 정작 방황하는 이는 조금도 뉘우치지 않고.

삑삑 삑삑 삑삑. 도어락 소리가 조금 일찍 울렸다. 남자의 이른 귀가 시간에 놀란 여자가 잠시 기도를 멈추었지만 몇 초 후 다시 이어 평소와 다를 것은 없었다. 문을 열고 신발을 벗자마자 또 창문가에 무릎 꿇은 제 연인을 본 남자의 표정이 바로 구겨졌으나, 왜인지 다른 날과 달리 그가 애써 표정을 펴고 다정히 여자의 어깨를 감쌌다.

"일이 잘 되고 있어. 오늘 먹고 싶은 거 있어? 너 좋아하는 거 사 오려다가 말았어. 그냥 같이 나가서 먹으려고. 밖에 안 나간 지도 꽤 됐잖아."

예전처럼 퍽 부드러운 눈매를 한 남자였지만 여자가 그것이 거짓된 미소임을 몰라보지는 않았다. 여자는 눈으로 보이는 것 외에 그 속까지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특히 상대가 이 남자라면 더욱. 블랙 먼데이 당시에도 남자의 간절함과 진심을 보았기에 여자는 크게 화를 내거나 그를 강제로 뜯어말릴 수 없었으며 그건 여자가 가장 후회하는 일 중 하나가 되었다.

"왜, 입맛이 없어?"

대답 없는 연인에도 화내지 않고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며 말을 잇는 남자는 지금 참고 있었다. 일이 잘되어 기분이 좋아 이러는 건지, 아니면 일이 잘되니 드디어 저 순위 밖으로 밀려있던 여자를 제 옆으로 다시 끌어와야겠다는 마음이 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건 진심에서 나오는 다정함은 아니었다.

"그래도 먹어야지. 어젠 미안했어. 걱정돼서 그랬지. 속 안 좋으면 죽이라도 사 올게."

"존."

"응, 그레첸."

"피곤하겠다. 들어가서 쉬어."

남자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으며 땅을 꺼뜨릴 듯한 한숨이 그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그레첸, 우리 좀 진지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나는 늘 너한테 눈으로, 손짓으로 말하고 있어. 존, 네가 듣지 못한 거야."

"싸우자고 하는 거 아니야. 차분하게 이야기하자고 하는 거지."

"그래."

여자는 딱딱한 창에 머리를 기대고 턱을 들어 고개를 젖혔다. 다리에 쥐가 나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그걸 눈치챈 남자가 작은 한숨과 함께 여자의 종아리를 한 손으로 가볍게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그레첸."

"응."

"네가 엑스를 신뢰하지 않는 거 알아."

"⋯⋯."

"하지만 우리 지금 너무 잘 살고 있어. 그레첸, 보이는 걸 봐. 숨겨진 진실까지 보라고 하지도 않을 테니까 제발 보이는 것만 좀 봐줘."

"오늘 악몽을 안 꿨어."

"⋯그래, 잘 되고 있다니까."

"매일 밤 온몸이 찢길 것처럼 빌고 또 빌고, 우리가 구렁텅이로 민 사람들을 다시 꺼내보겠다고 손을 뻗다 뼈가 부러지고, 내가 흘린 눈물이 강을 이뤄 나를 덮쳐 숨을 쉬지 못하고⋯⋯. 그 날 이후로 내가 잠을 제대로 자는 날도 드물어. 그러고 일어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에 담갔다 꺼낸 것처럼 푹 잠겨있지."

"⋯⋯."

"어제는, 그래. 잘 잤어. 존, 근데 하나도 괜찮지가 않아. 감기 몸살보다 스무배는 아파. 나 지금 어디 하나 안 아픈 곳이 없어. 너 없이 나 혼자 이 넓고 추운 집에서 하루 종일 기도하고 신께 용서를 구하며 버텨."

남자가 '기도'라는 부분에서 뭔가 반박을 할 듯 숨을 들이쉬었지만 여자가 손을 들어 그를 저지하는 행동이 더 빨랐다.

"존, 너는 내가 네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지. 너는 네가 가는 길이 정확히 어딘지 몰라. 그곳에 가시밭은 없어도 천천히 네 발목에 엉겨 밑으로, 더 밑으로 끌고 들어가는 수렁이 있어. 네가 거기에 나까지 끌고 들어가고 있어."

"그럼 너 혼자 나가!"

여자는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의 지금 상태로는 관계를 회복하기는커녕 가까이 있을수록 둘 다 상처만 깊어질 거라는 걸. 하지만 여자는 계약 조건을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퇴색되면 그땐 끝이라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그렇기에 피 흘려도 그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지긋지긋해. 매일 이상한 말만 하면서 허상만 바라보잖아."

"존, 내가 퇴색되면 모든 게 끝이야. 약속을 기억해. 제발."

"그딴 걸 신경 쓰는 게 바보 같은 거야! 그게 뭐. 너 벌써 퇴색된 지 오래야. 그런데 너 말고 뭐가 달라졌어? 지금 끝나게 생긴 건 너 하나야. 내가 말했지. 너만 정신 차리면 모든 게 완벽해진다고.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굴어? 다 우리를 위해서인데! 내가 아니라 우리!"

"⋯⋯."

"다 지겨워. 내 발목에 엉겨서 밑으로 끌고 들어가는 수렁? 그게 너야. 지금 내 발목에 엉겨 붙은 게 너라고."

"존."

하지만 이것까지는 여자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너랑 있으면 지쳐."

여자는 놀란 눈으로 급히 남자의 손을 잡아 매달렸다. 가장 어두운 심연의 울퉁불퉁한 조각이 저 멀리서 스멀스멀 그를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두려움에 남자의 손을 억지로 세게 쥐었으나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손아귀에서 쉽게 손을 뺀 남자는 여자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존, 존. 사랑해. 너도 그렇잖아."

"아니, 넌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너를 사랑하는 거야. 그 잘난 구원이니 양심에 갇혀서 스스로 고통에 빠져놓고 다 존 너를 위한 거다 죄책감 심어주면서, 자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구는 너 자신을 사랑하는 거라고. 너는."

"존, 네가 어떻게."

심연의 조각이 조금 더 빨리, 걸어오고 있었다.

"존, 넌 나를 잃어서는 안 돼."

"네가⋯⋯ 내 전부였는데. 지금은 아니야. 너를 잃어도 나는 충분히 살 수 있어."

"아니야. 다시 생각해. 넌 날 버릴 수 없어."

"내가 널 버려? 네가 내 곁에서 너무 멀리 떠난 탓이야."

"날 사랑하잖아."

"그래. 사랑했어."

"⋯⋯."

"너로 인해 내가 빛났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어. 네가 나의 해가 되고 내가 너의 달이 되어서 같은 빛을 머금고 다른 색으로 비추던 때가 분명히! ⋯⋯그 전엔 분명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너는 이제 내 빛을 가리는 그림자가 돼서 내 앞에 서 있잖아."

"아니야. 네가⋯⋯."

"제발 내 탓 좀 그만해! 전부 질리고 죽을 만큼 힘들어. 제발 나 좀 놔주라."

"존, 안⋯⋯ 안 돼."

여자의 눈이 초점을 잃고 방황하는 와중에도 이제 가까이서 빠르게 달려오는 심연의 조각은 뚜렷이 보였다.

"지옥이고 뭐고 그런 말 꺼낼 생각이면 마지막까지 그러지는 마.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네가⋯ 내 지옥이야. 그건 내 손으로 끊어낼 수 있어. 미안해."

"존, 제발!"

"조만간 짐 싸서 나갈게. 네가 이 집을, 특히 이 창가를 되게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둘 모두의 눈에 총기가 없었다. 어둠에 눈이 가려진 남자와 그런 남자 때문에 빛을 잃은 여자가 노을이 지는 거실 한복판에 있었다. 심연의 조각은 이제 그들의 코앞에서 웃고 있었으나 그것을 본 것은 또 여자 혼자뿐이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너를 사랑함으로 내가 병을 얻었으니.

여자는 혼미한 정신 속, 귀가 아닌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이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시야가 트였다. 처음 보는 공간이었다. 자신의 집도 아니고, 남자도 곁에 없었으며, 무의 공간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무것도 없었다.

여자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희뿌연 안개가 너무 심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몽롱한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몸을 일으켜 무릎으로 섰을 때, 바로 앞에서 무언가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그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그를 알아보았으며 그가 걸음을 멈춰 천천히 왼팔을 드니 여자 또한 자신도 모르게 오른팔을 들어 손을 마주잡았다. 안개에 가려 선명하진 않았지만 그의 얼굴은 약간의 미소와 안타까움, 아픔, 괴로움 등이 섞인 표정이었다. 그는 여자의 볼을 감싸고 머리를 당겨 제 품에 뉘인 채 웅크린 등을 끌어안아 규칙적으로 토닥였고, 여자는 그 품에 나른히 눈을 감고 손가락 힘 하나 들어가지 않는 망가진 몸을 맡겼다. 여자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과 조용히 흐르는 듯한 노랫소리가 안개 속을 채웠다.

향기로운 산들에서 너는 어린 사슴과 같고,

달려온 나의 머리카락에 밤이슬이 가득하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순결한 너는 아무 흠이 없도다.

여자가 입을 열었으나 목에서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괜찮다는 듯 가슴께를 토닥여 달래고 그대로 여자의 양손을 잡아 천천히 일으켰다.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

나의 완전한 자여.

마치 걸음마를 배우듯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힘주어 걷는 여자의 모습에서 조금의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래 걷지 못하고 다시 바닥에 털썩 쓰러진 여자를 부축하려 어쩔 줄 모르는 그에게 이번엔 여자가 괜찮다는 듯 팔을 힘겹게 토닥였다.

어디선가 작은 음악 소리가 들렸다. 그가 불러주던 것과는 다른, 줄을 튕기듯 가벼운 음악이 여자의 귀 안쪽에 핏방울처럼 맺혔다. 아직 손을 단단히 잡고 있는 그와 시선을 맞춘 여자가 마른 입술을 여니 이번에는 쉬고 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스며 나왔다.

그를 붙들어 주소서.

그를 사하여 주소서.

그를 정결케 하소서.

아이의 세상이 까맣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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