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삼총사] 해적의 기도

해적 시절 포르토스 / 논cp / 2018.10.09 업로드

이 이야기는 포르토스가 아직 총사이기 이전, 바다 위에서 약탈을 일삼는 해적일 때의 이야기다. 포르토스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 수도 있는. 뭐, 본인은 부정할지도 모른다.

바다에 살다 보면 당연히 여러 일을 겪기 마련. 포르토스는 그것을 성장이라 여겼다. 남자라면 거칠게 살아야지. 술과 바다와 함께 하는 삶ㅡ후에 아토스가 포르토스와 처음 만났을 때 이것을 겉멋이라고 표현한다ㅡ.

- 선장님, 날이 어두운 걸 보니 비가 올 것 같습니다.

- 어, 비 막을 준비해.

- 그렇게 가볍게 보실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크게 내릴 것 같아요.

태평한 선장은 럼주 병을 입에서 떼며 손을 내저었다. 벌써 몇 병째인지.

- 내 무릎 안 쑤시는 거 보면 괜찮아. 걱정하지 말고 운전하고 있는 애 방향이나 잘 잡으라 그래. 슬슬 식량도 떨어지는데 한 번 잘못 가면 여기 다 며칠씩 굶어야 돼. 아주 포악한 해적이 된다고. 으와ㅡ.

고양이 같은 손짓을 하며 부하를 보내고 껄껄 웃는 포르토스는 사실 평소에 배 위에서 하는 것 없어 보이는 선장이었다. 매일 럼주를 손에 들고 다니니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적어도 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마리우스의 눈에 비친 포르토스는 그냥 매일 놀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마리우스는 포르토스의 배가 식량을 얻기 위해 한 항구도시에 닿았을 때 배에 몰래 올라탄 소년이었다. 문제는 그 도시가 제대로 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인데,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해적들의 불법적인 약탈이 하도 많아 주민들의 대다수가 떠나 휑해진 탓이다. 후에 마리우스가 이야기한 바로는, 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차마 바다로 건너가지는 못하고 육지와 가장 가까운 경계지역으로 이동해 모여 산다고 했다. 가족도 없이 살아가던 이 소년은 그때 사람들 무리를 따라가지 못하고 비어버린 지역에 남았다. 그리고 살기 위해 뒷생각 없이 해적선에 올랐다.

마리우스가 배 안에서 들키지 않고 버틴 시간은 겨우 이틀이었다. 뒷덜미가 잡혀 선장이 있다는 곳으로 끌려갈 때, 마리우스는 이제 정말 죽겠구나 싶었다. 나중에 그때 마리우스를 발견한 선원이 자긴 거칠게 끌고 간 적이 없다며 억울함을 토했지만, 아무튼.

- 뭐야? 이틀간 배에 숨어있었다고?

험악하게 생긴, 술 냄새 나는 선장을 보자마자 마리우스는 꼭 쥐고 있던 마지막 희망까지 버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 와하하하. 진짜 대단한 친구네, 이거. 딱 해적 배짱이야. 됐어, 놔둬. 대신 나중에 돌아가고 싶다고 울면 정말 바다에 던져버릴 거야.

선장은 오싹한 말을 끝으로 자리를 물렀다. 그 후로 본의 아니게 몇 주간 신입 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마리우스로서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었으나, 적어도 좋은 형들이 잔뜩 생긴 것은 기뻤다. 아까 말했듯이 선장님은 아직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 마리우스, 뭐 해. 빨리 천 씌워. 비 올 거라고 했잖아.

- 형, 선장님은 이런 일 안 해요?

- 가끔은 하셔. 너 일하기 싫어서 그러지?

- ⋯이 배엔 물보다 술이 많은 것 같아요.

마리우스는 그 전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마지막 술 궤짝에 천을 씌우며 말했다.

- 왜, 너도 마시게? 마셔도 돼. 그런 걸로 화내는 분은 아니다.

- 술 안 마셔봤어요.

- 앞으로 마실 거다. 나도 처음 배 탈 땐 못 마셨어.

- 안 마셔요.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은 둘은 꼼실거리며 배의 안쪽, 실내로 들어가 누웠다.

- 배에선 비가 오면 어떻게 해요?

- 뭘 어떻게 해?

- 바다가 흔들리잖아요.

- 그냥 버텨야지. 물건 안 움직이게 고정하고, 비 안 맞게 덮어놓고.

- 그게 끝이에요? 여태까지 죽은 사람 없죠?

- ⋯⋯.

- 형!

- 푸하. 없어, 인마.

- 아, 놀리지 마요. 진짜 무서운데.

- 애기냐?

- 잘 거예요. 말 시키지 마요.

마리우스는 등을 훽 돌리고 눈을 감았다. 괜히 깨어서 걱정하느니 자고 일어나면 한바탕 비가 지나고 날씨가 맑아져 있기를 바라면서. 육지에 살 때는 오히려 비가 오면 밖에서 흠뻑 젖으며 뛰어다니던 소년이지만, 그것도 제 밑의 땅이 단단할 때 이야기였다는 걸 깨달았다. 바다에서 이만큼 지냈으면 적응할 만도 한데 새로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괜한 불안감에 떠는 자신이 정말 꼬마 같기도 하여 더 분했다. 마리우스는 좀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선원이 제게 담요를 덮어주고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선장님! 여기 좀 도와주세요!

- 진정 좀 해. 한두 번이야? 내놔. 넌 저쪽 보고 있어.

아름다운 섬의 꿈을 꾸던 것도 잠시, 마리우스는 시끄러운 소리에 강제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 어, 야. 깼어? 넌 그냥 안에 있어. 괜히 나가서 어리버리하다가 다치지 말고.

비몽사몽한 상태로는 지금 상황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고개를 흔들어 대충 정신을 차린 소년은 재빨리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소리, 이건 무슨 소리지? 급하게 안에서 무언가를 챙겨 밖으로 나가는 선원을 따라 멍하니 밖으로 나가려던 마리우스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밖에 보이는 건 단순한 비 수준이 아니었다. 육지에 있을 때조차도 자신을 꼭꼭 숨어있게 했던 거센 폭풍.

- 너 들어가라니까.

자신을 실내로 다시 들이미는 선원 뒤로 붉은 머리띠가 비쳤다.

- 어딜 들어가. 너도 나와. 지금 좀 급해.

- 선장님, 아직 어린 애라⋯⋯ 괜히 다치면 일만 늘어나⋯⋯.

- 애? 동료가 아니고? 너 육아하냐?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 소년은 혹시 제 머리카락이 섰을까 뒤통수를 매만졌다.

- ⋯죄송합니다.

- 쯧, 그렇게 걱정되면 데리고 가서 상자 묶는 거나 시키든가.

포르토스는 큰 손바닥으로 선원의 머리를 한 대 툭 때리고는 으유, 으유,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아니, 모습만 사라졌지 그 큰 목소리로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는 것은 천둥과 빗소리를 뚫고도 선명히 들려왔다. 선장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쉰 선원은 마리우스의 등을 떠밀어 그나마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켰다.

- 너 다른 형들 하는 거 보고 그대로 끈 갖다가 상자들 꽁꽁 묶으면 돼. 안 떠내려가게 조심해라. 이런 날씨엔 시체도 못 찾아.

진심인지 장난인지, 아니 이런 상황에 장난을 칠 힘이 남아있는지. 마리우스는 후다닥 달려가 일에 동참했다. 비가 점점 거세지고, 번개의 강한 빛은 때때로 소년의 눈을 자극했다. 조금만 떨어져도 서로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마리우스는 자신의 목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배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떠안은 기분이었다. 처음 이 배에 오를 때는 '다음 목적지에 가면 거기가 어디든 내려서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이렇게 위험한 일이 언제 또 얼마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소년은 이 배를 타고 계속 떠돌고 싶었다. 스스로도 미친 생각 같았지만.

- 하던 일 끝났으면 빨리 들어가!

선원 중 연장자 한 명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녔다. 그것조차 잘 들리지 않아, 마리우스가 멀리 있는 형들을 챙겨야 했다. 배의 다른 쪽은 어떻게 해뒀는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재산피해는 없을 것이었다. 배 곳곳에 씌워둔 방수 천이 심하게 펄럭였다. 고리에 걸어뒀음에도 조금 있으면 날아갈 것처럼. 그게 괜히 걱정되어, 잘못될까 만져보지는 못하고 눈으로 살펴보니 이미 밖에 있는 사람은 자신 혼자였다. 마리우스는 천이 바람에 날려 생긴 틈으로 빗물이 조금씩 들이치는 것을 모른 척하고 실내로 뛰었다.

뛰려고 했다, 는 표현이 더 맞을까. 고개를 돌린 소년은 순간 검은 무언가를 보고 놀라, 급하게 발을 멈추다 그만 쿵 넘어지고 말았다. 유령인가? 이런 분위기에 꼭 어울리는 정체였다. 세상에, 유령이라니.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배의 가장 높은 곳에 미동도 없이 아른거리는 검은 형체. 마리우스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건지 호기심을 가지는 건지도 모른 채 조심조심 그곳으로 올랐다.

여길 어떻게 오른 거야. 소년은 체력이 그리 좋지 않았다. 계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밧줄과 사다리를 사용해서 혹은 그냥 점프해서 가야 하는 길은 적어도 소년에게는 가시밭길 못지않았다. 분명 소년의 소리가 그 유령에게 들렸을 거리인데도, 아니 정정하자. 유령이 귀가 있다면 충분히 듣고도 남았을 거리인데도 유령은 마리우스가 처음 본 모습 그대로였다. 어쩌면 이 시끄러운 천둥과 비 때문일지도 모르지. 마리우스는 이미 그것을 유령이라고 단정 짓고, 들키지 않으려 상자 뒤에 숨었다. 위치 선정이 안 좋았는지 비가 불쾌하게 조금씩 목덜미를 적셨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마리우스는 제 눈으로 들이치는 빗물을 축축한 소매로 닦아내면서 유령에게서 가장 가까운 구조물 뒤로 자리를 옮겼다. 발목까지 덮을 것 같은 길이의 검고 간단한 망토, 그리고 후드. 유령이라기엔 무언가 사람 같기도 하고, 사람이라기엔 유령 같은 차림이었다. 게다가 보통 유령이 기도를 하던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손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신을 믿는 유령이라니. 마리우스는 괜히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겨우 참고 입을 틀어막았다.

소년이 그렇게 숨을 죽이고 오랜 시간 기다렸으나 형체는 도무지 자세를 바꿀 것 같지 않았고, 마리우스는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자신을 찾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다들 바빠서 사라진 걸 모른다거나. 차라리 실내에 있으면 조금 덜 춥기라도 할 텐데.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에 배가 쉴 새 없이 흔들려 멀미까지 나는 것 같았다. 소년은 그냥 저 유령을 바다로 떠밀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바로 그때, 기다림의 보람이 있었는지 그 형체가 방향을 바꾸어 앉았다. 바로 마리우스의 정면으로. 마리우스는 이번엔 웃음이 아니라 놀람을 감추려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방금까지 바다로 빠뜨릴까 킥킥댔던 자가 제 선장이었으니. 큰 사고를 칠 뻔한 셈이다. 물론 만약 유령이었다면 사고 대신 저주를 피할 수 없었겠지만.

포르토스는 정말로 기도를 하는 듯 보였다. 손을 가지런히 마주 대고 시선을 살짝 낮춘 채 눈을 가볍게 감고 있는 모습이, 사제의 정식 기도와는 다름에도 무언가 보는 이에게 엄숙함을 주었다. 마리우스는 제가 몇 주 동안 본 선장님과 전혀 다른 분위기에 몸이 그 방향으로 쏠리는 듯한 기분까지 받았다. 게다가 이쪽이야 구조물이 비를 어느 정도 막아주고 있지만, 포르토스는 달랑 후드 하나만 쓴 채 그 비를 온몸으로 다 맞고 있는 게 아닌가.

- 선장님!

이크, 마리우스는 누군가가 올라오는 소리에 얼른 몸을 더 깊이 숨겼다. 심지어 평소에 소년에게 꽤 엄하게 대했던 선원의 목소리다. 들키면 크게 혼날 거야.

- 선장님, 이제 그만 들어오십시오.

- ⋯⋯.

포르토스는 부하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인지 눈 한 번 뜨지 않고 기도를 이어갔다. 속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누구에게 드리는 기도일까. 매번 해왔던 걸까. 마리우스는 궁금한 것이 많아졌다. 동시에 거의 해소할 수 없는 호기심이기도 했다. 포르토스에게 그것을 직접 물어도 대답을 들을 수는 없을 테니까.

-선장님, 진짜로 몸 상하십니다. 자연 현상은 그칠 때가 되어야 그쳐요. 정 기도를 하실 거면 안에 들어가서 하시는 게 낫습니다. 이렇게 큰 폭풍우는 꽤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되실지 모릅니다.

- ⋯⋯.

- 선장님! 안에서 저희 다 걱정하는 건 안 보이십니까? 제발요. 선장님 앓아누우시면 이 배는 그동안 누가 통솔하구요. 그래도 저희 선장님 배려해서 최소한 30분은 기다렸습니다. 이 정도로 양보하세요.

이쯤 되면 대놓고 무시를 하는 것이다. 포르토스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부하를 두고 마치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는 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후드가 어느 정도 막아주고는 있지만 얼굴과 옷, 길게 빠져나온 머리카락들이 모두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어떻게 추위라는 감각을 모르는 것처럼 저렇게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있을까. 그보다 덜 젖은 마리우스도 할 수만 있다면 담요라도 덮고 싶었는데 말이다.

선원은 휘청거리면서 포르토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계속 무언가 일방적으로 말을 계속 건넸다. 이제 그 거리에서는 마리우스에게 들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포르토스는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기도를 이어갔고, 선원의 속이 타들어 가고 있는 건 굳이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포르토스는 지금 하나의 석상 같았다. 말을 해도 들을 수 없고, 잡고 일으키려 해도 땅에 박혀 움직일 수 없는 석상. 그 정도로, 방향을 일부러 바꿀 때 말고는 자세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리우스는 혹시 포르토스가 이미 자신이 여기 있는 걸 알고 있으나 느끼지 못한 척 계속 기도를 이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눈을 계속 감고 있었으니 소년을 봤다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만.

한참을 그랬을까. 결국 선원이 고개를 떨구고 천천히 일어났다. 사실 마리우스를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이 상황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렇게 심한 폭풍우는 정말 가끔 오는 것인데, 그럴 때마다 포르토스는 이 위에 올라 익숙한 자리에서 항상 한 자세로 기도를 했으니 말이다. 하도 설득이 안 되자 선원 여럿이서 안으로 끌고 가려 한 적도 있었으나 그때가 포르토스가 이 배에 탄 이후로 가장 크게 화를 낸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다.

선원이 터덜터덜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던 마리우스는 다시 빼꼼 고개를 더 내밀어 선장을 관찰했다. 기도드리는 사람을 이렇게 자세히 뜯어본다는 것이 조금 그릇된 일인 것도 같았지만 어차피 마리우스는 신 따위 믿지 않으니 괜찮았다.

폭풍우는 멈출 생각을 않았다. 조금 잦아들었다 싶으면 원래대로 굵어졌고, 조금 더 심해졌다 하면 가늘어지길 반복했다. 아까보다 위험해진 상황에 선원들은 이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여기까지 올라오다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환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선장이 이러고 있는데 더 설득할 생각도 없는 걸까. 소년은 도대체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일까. 조금만 보다 들어가려 했던 소년의 결심이 한 시간, 두 시간을 넘어 이제는 선장과 끝까지 같이 하겠다는 오기로 변했다. 다리가 저려 주무르며 앉아있는 한이 있더라도 이 폭풍우가 그치고 난 후의 포르토스의 얼굴을 왜인지 모르게 꼭 보고 싶었다. 추위에 몸을 잔뜩 웅크리면 포르토스가 보이지 않아, 소년은 그것마저 참아야 했다. 자기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냥 이 빗물에 미끄러질까 봐 혼자 내려가지 못해 앉아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선장님은 밤을 새울 작정이실까. 그렇다면 같이 새워야 할까. 아까 낮잠을 조금이라도 자 둔 것 때문에 마리우스는 만약 선장님께서 밤을 새운다면 충분히 같이 새울 각오가 되어있었다. 사실 이 천둥 번개 속에서 잠을 잘 엄두도 나지 않았고.

정말 과장해서 말하자면, 소년은 사람들이 왜 종교를 믿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뭐 포르토스가 신 같아 보였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저렇게 굳건한 사람이 있다면 신도들이 그 사람의 신념을 따라가려는 것도 이상할 게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포르토스가 지금 어떤 신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마리우스는 그 신이 제 선장을 배신하지 않기를 바랐다.

번개로 눈앞이 번쩍일 텐데도 포르토스는 절대 눈을 뜨지 않았다. 아마 계속 뜨지 않을 것 같았다. 빗물은 후드를 적시고 그의 속눈썹에 닿아 똑똑 흘러내려 기도하던 손에 맺혀 떨어졌다. 마리우스는 셈을 잘 못 하지만, 포르토스가 받아낸 빗방울만 해도 어림잡아 수억 개는 될 것 같다고 여겼다. 소년은 이제 무릎을 끌어안고 제 선장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아까도 럼주를 병째로 마시는 걸 봤었는데, 혹시 지금 술에 취한 상태일까. 그냥 주사가 앉아서 자는 거라서 저러고 있는 것이라면? 소년은 하마터면 정말 웃을 뻔했다. 그럴 리가 없지. 만약 그랬다면 자신이 지금 여기서 보낸 몇 시간은 대체 뭐란 말인가.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더라도 저 정도로 움직임 없이 한 자세로 오래 앉아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소년이라면 벌써 기우뚱해서 바다로 떨어졌겠지.

마치 자신이 짝사랑을 하는 것 같았다. 고향 ㅡ그 도시를 고향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ㅡ 에서 마음을 주었던 소녀도 이렇게 오래, 정성 들여 쳐다본 적이 없었다. 사실 한 사람을 이 정도로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속된 말로 변태 같은 게 아닌가. 저의 선장은 정말 인기척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시선도 못 느끼는 걸까? 그 정도로 둔한 사람은 확실히 아니었다. 오히려 알고도 모른 척하면 모른 척했지. 그건 몇 주 밖에 같이 생활하지 않은 마리우스도 쉽게 알 수 있는 정보였다. 적어도 예민한 바다 위에서 한 배를 이끄는 선장을 하려면 말이다.

마리우스는 이대로 아침에 폭풍이 그쳤으면, 하고 바랐다. 그때 포르토스의 얼굴에 막 떠오르는 황금빛 햇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빨리 그치라고 할 땐 코웃음 치듯 비바람을 퍼붓던 폭풍은, 마리우스가 그 생각에 사로잡히자마자 약하게나마 잦아들기 시작했다. 너무 조금씩 약해지는 탓에 마리우스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아까까지 배에서 맞는 비가 무섭다고 꿈속으로 도피하려던 소년은 어디 가고 아침까지 이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을까. 자신도 어이가 없었다.

소년이 그러든 말든, 포르토스의 후드 모자가 조금 덜 살랑대었고, 그의 등과 어깨선을 타고 흐르던 빗물도 눈에 띄게 적어졌다. 이제는 폭풍이라고 하기보단 그냥 세게 내리는 비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소년이 원하던 것보다는 조금 이르게, 포르토스가 드디어 눈을 찬찬히 떴다. 눈을 깜박여 눈가에 맺힌 빗물을 떨어내고, 이미 다 젖어 소용이 없는 소매로 얼굴을 닦아낸 뒤, 다리가 저리지도 않은지 너무도 평온하게 일어선 그는 후드 모자를 벗어내고 그대로 바다를 향해 엎드려 공손히 인사를 드렸다. 소년에게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모자를 벗은 탓에 아예 포르토스의 볼과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이었다. 비록 원하던 햇살 비친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이 배에 오래 있게 된다면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도 있을 거라는 이상한 자신감이 들었다. 소년은 그렇게 아쉬움을 달랬다.

포르토스는 대충 볼과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들만 떼내고, 물먹은 옷이 무겁지도 않은지 평소와 같은 느린 발걸음으로 줄사다리를 내려갔다. 이제 그 위엔 마리우스 혼자였다. 몇 시간을 앉아있던 자리가 갑자기 불편하게 느껴졌다. 선장이 앉아있던 자리만 덜 젖은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그곳을 한참 바라보던 소년은 배긴 엉덩이를 문지르며 조심조심 사다리를 탔다.

- 선장님!

- 수고했다.

마리우스가 덜덜 떨며 느릿느릿 내려오자, 선원들이 다 같이 몰려나와 포르토스의 옷을 짜고 담요를 덮는 등 요란을 떨고 있었다. 그에 비해 선장은 그냥 그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수고했다, 한 마디씩 던질 뿐이었다. 소년은 그것조차 제 선장답다고 느꼈다.

그때 선원 중 한 명이 마리우스를 발견하고 큰 소리를 냈다. 여태까지 어디 있었냐고 등짝을 때리려는 것을 급하게 피하고 있으니 선장과 눈이 마주쳤다. 마리우스는 무언가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포르토스는 아무 표정 없이 고개를 돌렸지만, 소년은 쿵쿵 뛰는 심장 덕에 미처 피하지 못해 등짝을 한 대 맞고 말았다.


- 너 그 날 진짜 뭐 했냐?

원래 그렇게 튼튼한 타입이 아니었던 소년은 몸살에 걸렸다. 억울했다. 비를 쫄딱 맞은 건 제 선장인데, 그는 오늘 멀쩡히 술을 병째 마시고 있고, 그의 반의반도 젖지 않은 자신은 이리 고생 중인 것이다.

- 아무것도 안 했어요. ⋯⋯으에취.

-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렇게 되냐? 너 없어졌다고 난리가 났었어.

- 근데 왜 안 찾으셨어요?

- 바다에 빠진 줄 알고.

소년은 아직도 형들의 저런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 선장님도 안 계셨다던데.

- 누가 그래?

- ⋯다른 형이.

- 선장님은 저렇게 날씨가 심해지면 매번 저 위에 올라가서 기도를 드려. 우리가 백날 말려봐야 소용이 없지, 뭐.

- 왜요?

- 모르지. 날씨 멀쩡해질 때까지 그러고 계신다니까. 그래놓고 너처럼 이렇게 감기 한 번 안 걸려.

- 저도 원래는 잘 안 아파요.

- 뻥 친다.

- 술 마실래요.

- 안 마신다며.

- 지금 말구요. 다 나으면. 선장님이랑, 다 같이.

- 마음대로 해라. 그것도 다음에 내릴 곳에서 뭐 많이 얻었을 때 얘기지.

- 나 잘래요.

- 진짜 멋대로네.

피식 웃던 소년의 입꼬리가 멈칫했다. 문밖의 실루엣이⋯⋯.

- 선장님?

한 번도 이렇게 뵌 적은 없었는데. 소년은 또다시 죄책감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 다른 애들 천 걷고 다 정리하고 있는데 여기서 혼자 농땡이야?

- 아니, 애 간호를 좀⋯⋯.

- 또 애. 내가 해적선에서 애 찾지 말랬지.

- 죄송합니다.

- 나가 봐.

- 예.

소년은 제발 둘만 남겨두고 나가지 말라고 마음속으로 외쳤으나, 들릴 턱이 없었다. 선원은 재빠르게 나가버렸고, 선장은 소년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앉아야 하나? 누워있는 게 너무 버릇없어 보이나?

- 몸이 약한 해적은 해적이 아니야. 알아?

- 네⋯⋯?

- 겨우 비 조금 맞았다고 이렇게 골골댈 거면 다른 동료들한테 피해나 주는 거라고.

이어질 말은 뭘까. 그러니까 다음에 닿는 곳에서 아예 내리라고, 그런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역시 그 위에 그렇게 오래 있는 게 아니었다. 눈앞의 것을 쫓느라 전체적인 것을 보지 못 했⋯⋯.

- 내가 방해 안 하니까 말은 안 했는데, 거긴 왜 올라왔어?

알고 있었다. 장난으로 설마 다 눈치챈 거 아니냐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 아니, 어떻게? 숨어있었는데? 한 번도 눈 뜬 적 없으면서?

- 내가 알 거라는 생각을 아예 못 했어? 허, 진짜 해적이 뭐가 이렇게 둔해. 해적은 귀가 밝아야 돼. 눈이 가려져도 다른 감각을 잘 이용할 줄 알아야 살아남는 거라고.

- 죄송합니다.

- 내가 뭐 그런 말 듣자고 왔겠어? 왜 올라왔냐고 물으려고 온 거지. 다음부턴 얌전히 있어. 애들이 너 바다에 빠진 줄 알고 상 치를 뻔했다더라.

- 네.

포르토스는 어휴, 하고 혀를 차더니 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걸음을 바삐 해 사라졌다. 분명 이제 다시 술을 마시러 가는 거겠지. 대답을 긍정으로 하기는 했지만, 다음에 또 이런 상황이 생긴다면 소년은 그때도 또 거기에 올라갈 것이었다. 지금의 자신이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을 백날 한들, 그날이 오면 또 충동적으로 포르토스를 쫓을 것이라는 예상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술만 마시며 하는 것 없던 것 같은 선장의 단단한 알맹이를 본 것 같은 하루였고, 동시에 마리우스의 인생에서 다시는 없을 것 같은 강렬한 하루였다. 언젠가 포르토스가 배에서 내리는 날이 온다면 ㅡ마리우스는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지만ㅡ 자신도 더는 배에서의 생활을 계속하지 않을 거라 결심한 하루이기도 했다.

밖에서 작은 종소리가 들렸다. 새로운 육지에 곧 닿는다는 신호였다. 마리우스가 '해적'으로 사는 첫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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