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mpe L’œil (3)
밥은 굶어도 커피는 마셔야 하는 게 현대인인 법이다. 유신은 영 입맛이 없다며 카페에서 커피랑 빵이나 먹자는 의견을 냈다. 새벽부터 사람의 시신을 보고 온갖 소동에 휘말렸으니 입맛이 없는 것도 이상치 않다. 나무는 약간의 허기를 느끼고 있었지만 식사를 위장 안으로 밀어넣을 만한 기분은 아니었다. 커피와 빵으로 최대한 허기를 달래보자고 생각하며 부산역 맞은편에 위치한 카페로 발을 옮겼다.
인테리어 시공이 끝난 건지 끝나지 않은 건지 의심되는 카페였다. 일단 영업은 하고 있으니 이런 공사판 같은 내장은 의도한 인테리어일 테다. 나무는 카운터에서 커피 두 잔과 케이크 한 조각, 브라우니 하나에 쿠키 한 봉지를 픽업해 카페 안쪽 자리로 돌아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무의 몫, 아이스 바닐라 라떼가 유신의 몫이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기에는 후덥지근한 날씨다. 유신은 트레이에서 잔을 빼어들자마자 한 모금을 마셨다. 입술에 크레마인지 우유 거품인지 모를 잔여물이 남는다.
보기보다 넓다. 폐병원을 개조해 만든 카페라는 게 허풍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은 안쪽 공간은 바깥 공간과는 가벽으로 분리되어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이곳은 한때 진료실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무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목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모나지 않은 맛이다. 커피의 맛보다는 차가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실은 더 마음에 든다. 목이 탔었다.
"송 군."
피로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왜?"
"쿠키 봉투 좀 뜯어줘."
평범한 OPP 봉투다. 입구를 봉한 테이프를 떼내고 봉투의 모서리를 따라 찢었다. 그녀는 이따금 자신도 할 수 있는 간단한 동작을 남에게 시키고는 한다. 군소리 없이 쿠키를 건네는 나무를 보고 유신은 가늘게 미소지었다.
"고마워."
둥글고 작은 오트밀레이즌 쿠키가 그녀의 입술에서 반으로 쪼개진다. 부스러기가 튀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나무는 가느다란 포크를 들어 조각 케이크의 뾰족한 앞부분을 절단했다. 질펀한 식감의 얼그레이 크림이 그런대로 좋은 맛을 냈다.
"피곤해 보이네, 송 군."
남은 반절의 쿠키를 입술 사이로 밀어넣으며 그녀는 말했다.
"너도."
입 안에 잔류한 단맛을 아메리카노로 닦아내며 나무는 대답했다.
"코피까지 흘렸잖아. 송 군은."
"그랬지."
"그 작품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작가의 일생의 역작이니까."
찢어진 쿠키 봉투에서 쿠키를 하나 집어든다. 깨문다. 식감은 쫀득한 편이다. 고소한 곡물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작품에 담긴 열정은 결코 무시할 수 없지. 퀄리티가 어떠하든지 간에."
"송 군은 역시 예술가구나. 나는 잘 모르겠던데.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태어나는 예술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사람을 죽였다기보다는 사람을 잡아먹고 태어났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 이아영 씨는 자살했고, 그 분이 스스로 작품이 되기를 원한 거니."
이아영은 자살하기 직전 스승 한선혜를 작가의 방으로 불러 『조화』의 짜임새에 대해 의논했다. 오브제를 더 추가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한 건 이아영이다. 그녀는 아마 그 때부터 자살을 염두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갑작스러운 태풍의 진로 변경. 몰아치는 폭풍우. 고립된 사람들. 소중한 친구는 이런 날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떴다. 친구를 애도하지도 못하고 그저 슬퍼만 하고 있었던, 자신만 삶을 이어나가는 게 죄스러웠던 이아영으로서는 창밖의 폭풍우가 저승으로의 손짓으로 느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녀의 자살은 분명 충동적이었다. 하지만 사후 대처는 계획적이었다. 죽은 자신의 목을 잘라내 작품의 마지막 오브제로 장식하고자 했다. 그것은 물론 예술가로서의 어떠한 에고의 발현이었을 터다. 아니면, 그저 죽은 친구에게 바치는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고자 하는 아집이었을지도 모르고.
"송 군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 거 같아?"
"못하지. 따라 죽고 싶을 정도의 지인이 생긴다면 또 모르겠지만."
"나는 어때?"
"노 코멘트."
유신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바닐라 라떼가 담겼던 얼음 잔의 얼음이 반 정도 수면 위로 드러났다.
"송 군."
"왜?"
"무슨 생각을 했어?"
"뭔 생각?"
"무슨 생각을 했어, 그 방 안에서?"
한순간 카페 안의 소음이 멎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다갈색 눈동자가 이쪽을 올곧게 바라본다.
아, 끝났구나. 어디에서 눈치챘을까.
"송 군."
청아한 목소리만이 귓가를 가득 메웠다.
"아영이의 목을 자른 건 너구나."
새벽 한 시 오 분 옅게 잠들었던 소나무는 스마트폰의 진동을 느끼고 눈을 떴다.
"무슨 소리야?"
그대로 죄를 인정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누구에게 예의가 아닌가 하면, 자신을 위해 죄를 뒤집어 쓴 선혜와, 아영을 위해 감춰진 진실을 꿰뚫어 본 유신에게 예의가 아닐 것이었다.
유신은 길고 풍성한 갈색 머리칼을 한 번 쓸어넘겼다. 잠시 허공을 맴돌던 시선은 이윽고 나무에게로 되돌아온다. 감정 상태를 영 읽을 수 없는 눈동자였다. 슬픈 건지, 놀란 건지, 화난 건지. 아니면 전부 다인 건지.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송 군이 사람들 앞에서 한 추리는 어설펐으니까."
"어디가 어설픈데?"
"처음부터 하나하나 짚어줄게."
반 정도 남은 바닐라 라떼로 목을 축이고 나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우리가 혐의를 두었던 사람들은 총 여섯 명. 한 선생님과 지민 씨, 승현 씨, 평론가 영우 씨, 그리고 도슨트 두 분. 너는 일단 자연스럽게 갤러리 외부인이자 예술가가 아닌 우리 네 명은 용의자에서 제외했지. 그래, 그건 이치에 맞아. 예술계에 몸담은 것도 아닌데다 단순히 초대를 받았을 뿐인 우리가 아영이를 죽인다는 건 이상하니까."
맞는 말이다. 의식적으로 외부인 네 명은 혐의를 벗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범인상을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 예술가'로 어필하여 예술가가 아닌 우리는 범인일 수 없다는 인식을 무의식 중에 심어주었다.
"첫 번째로 너는 영우 씨의 혐의를 벗겼어. 천식인 영우 씨는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작가의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논리를 폈지. 여기에는 나도 동의해. 설령 환기를 위해 작가의 방의 폴딩 도어를 열고 목을 잘랐다고 해도, 목을 자르는 데 필요한 절단기는 방 안 쪽에 있어. 환기가 가장 안 되는 쪽에 있다는 말이야. 목을 자르다가 기침이 나서 몸에 피가 튀기라도 하면 갈아입을 옷이 없는 영우 씨는 아주 곤란하게 돼. 그러니 리스크가 너무 큰 영우 씨는 범인일 수 없지."
아무렇지 않은 척 브라우니를 포크로 잘라 입으로 날랐다. 단 맛 외에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분명히 코코아파우더가 들어갔을 텐데.
"두 번째가 지민 씨였나? 그 때 네가 뭐라고 했지?"
호칭의 변화를 인지했다. 나무는 괜스레 허리를 펴고 앉는다.
"바지 통이 넓어서, 시신을 옮기면서 피가 묻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지."
"그건 이상하지 않아?"
"어디가? 잘 모르겠는데."
"조금 이르지만 네 번째, 한 선생님이 시신을 옮기는 건 어렵지 않겠냐는 물음에 넌 뭐라고 대답했었지?"
"머리가 잘려도 남은 부분이 140cm은 되니 다리나 발목을 잡고 옮긴다면 피가 흐르는 목이 휠체어랑 닿을 일은 없다고 했지."
"그 큰 휠체어랑도 닿지 않는다면 두 발로 선 사람이랑은 당연히 닿지 않지 않겠어? 바지 통이 넓어서 피가 묻었을 거라니, 애초에 발치에 닿지도 않는데 피가 묻을 수는 없지."
대답은 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그것이 동의의 의미임을 유신은 깨달았을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엉망진창인 논리였다. 휠체어로 시신을 옮기며 피가 묻지 않을 수 있다면 사람이 단독으로 옮겼을 땐 당연히 피가 묻을 일이 없다. 하지만 그 땐 그런 억지 논리를 대서라도 한 선생님과 도슨트들을 제외한 모두의 혐의를 벗겨내야만 했다. 세 사람만이 저지를 수 있는 범행이라는 의심을 사람들 사이에 심어두어야만 했다.
그래야 한 선생님이 자백하러 나섰을 때 그녀에게만 온전히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질 테니까.
"세 번째, 안승현 씨에 대해서 넌 이렇게 말했어. 안채 정문의 빗자국으로 말미암아 범인은 우산을 쓰지 않고 주차장으로 나갔을 테지만, 승현 씨는 인공 와우를 드러내고 다니니 비바람을 맞으며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기계는 비를 맞으면 고장나잖아."
"그래. 그런데 승현 씨가 인공 와우를 쓰지 않고 주머니에 넣은 채 주차장으로 나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부정했지?"
"......다른 사람 몰래 밖으로 나가는 건데 귀가 들리지 않는 채로 파쇄석을 밟을 수는 없다고 했었지."
"파쇄석은 밟으면 엄청나게 소리가 나니까, 최대한 조심조심 밟아야 했겠지?"
그녀가 다음으로 꺼낼 말이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정말이지, 단시간에 많은 걸 떠올려냈군. 아니. 내 엉망진창인 추리를 들으면서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었던 건가. 그럼 왜 그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거지.
"한선혜 씨의 전동 휠체어로는 파쇄석을 조심히 밟을 수 없어. 어떻게 조심히 밟을 수 있겠어. 스틱을 조종해서 이동하는 게 전부인데. 휠체어에 살금살금 다니는 기능 같은 건 없다고. 한밤 중에 휠체어를 타고 파쇄석을 밟았다간 사람 여럿 깨웠을걸."
이것 역시 맞는 말이다. 기계는 인간과 달라서 살금살금 걷는 능력이 없다. 스텔스 면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냥 흙바닥도 아니고 파쇄석 위다. 휠체어의 육중한 바퀴가 파쇄석 하나하나를 짓눌러 밀어내며 엄청난 소음을 내게 된다.
그러니 휠체어 위에서 생활하는 한 선생님은 남들 몰래 주차장으로 나가지 못한다......
"......한선혜 씨는 자기가 범인이라고 나섰어. 사건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낱낱이 이야기 하셨고. 그 분이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신 건 분명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주차장으로는 결코 나갈 수 없어. 그럼 대체 누가 주차장으로 나갔던 걸까."
"도슨트 분들 아니야? 선생님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그 사람들. 생각해 보니 자기들 차에 머리 담기 좋은 비닐 봉투가 굴러다니고 있었던 거지. 그래서 안채에서 주차장으로 나가서 그걸 꺼내온 거야."
"아니, 그건 말이 안 돼. 한선혜 씨가 그 사람들을 마주친 건 갤러리에서야. 그 후 아영이의 머리를 잘라 봉투에 넣을 때까지 줄곧 같이 있었으니까, 중간에 안채로 돌아가 차 키를 갖고 주차장으로 나갈 시간 같은 건 없었어."
"갤러리에서 마주쳤다고 어떻게 단언해? 선생님이 주차장으로 나갔다고 증언하신 이상 증언에 거짓말이 섞인 건 분명해. 선생님은 그 사람들을 갤러리가 아니라 안채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르지. 안채에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객실로 돌아가 차 키를 들고 주차장으로 갔다는 설은 어때?"
"송 군."
유신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 이야기는 조금 이따 네 입으로 듣기로 할게."
아무래도 이것까지 확정하기에는 단서가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논의를 더 이어갈 재료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소거법으로 돌아가자. 아까 네가 말한 대로 조영우 씨와 안승현 씨는 범인 후보에서 완전히 제외돼. 오지민 씨는 아직 의심스러운 감이 있어. 한선혜 씨는 봉투를 준비하지 못했지만 사건에는 깊이 관여했지. 도슨트 두 명은 우연히 한선혜 씨와 조우해 사건에 관여하게 되었고."
그러면, 하고 유신은 잠깐 뜸을 들였다.
"그러면, 한선혜 씨나 도슨트 두 명 중 하나가 아영이의 목을 자른 걸까?"
"그렇겠지. 선생님은 자기가 목을 잘랐다고 증언까지 하셨잖아."
"그건 아니야, 송 군."'
"왜?"
"아영이의 장갑이 없어졌잖아."
숨을 작게 들이켰다. 숨을 들이킨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부러 아메리카노가 담긴 얼음잔을 들었다. 내용물을 마셨다. 차갑다.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다.
"조영우 씨의 일회용 마스크랑 다르게 아영이의 장갑은 제대로 된 목장갑이었으니까, 아영이가 장갑을 버리지도 않았을 거야. 그러니 사건 현장에서 장갑이 없어졌다는 건 범인이 그걸 사용했다는 뜻이겠지. 현장에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알겠어, 송 군? 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송 군. 좋은 울림이다.
"한선혜 씨는 손을 사용하지 못해. 설령 손을 짚을 일이 있어 장갑을 꼈다 해도 의미가 없지. 한선혜 씨는 작가의 방에 자주 드나들었으니까, 그 안에 그 분의 지문은 이미 많이 남아있을 거란 말이야."
손에 맞지 않는 목장갑을 억지로 꼈다.
"그럼 도슨트 둘 중 누군가가 그 목장갑을 꼈던 걸까? 아니야. 그 분들은 애초에 검은 장갑을 끼고 계셨으니까. 자기 것도 아닌 장갑을 낄 이유가 없지. 한선혜 씨도 아니다, 도슨트 두 명도 아니다. 그럼 대체 누가 장갑을 끼고 사건 현장에 있었던 걸까. 아니, 범인은 왜 장갑을 구태여 버려야만 했을까?"
"장갑 안쪽에 자기 지문이 남아있는 걸 염려했나보지."
"현장에 보안경이고 앞치마고 전부 남아있는데, 장갑만 없으면 눈치 빠른 누군가가 장갑이 사라졌다고 증언하지 않겠어? 그럼 자연스럽게 범인이 남의 장갑을 사용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겠지. 차라리 장갑을 그대로 놔뒀으면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았을 텐데. 그러니 범인은 장갑을 구태여 처분해야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는 거야. 이를 테면, 장갑에 피가 묻었다든가."
범인으로 나서기로 한 한선혜는 손을 쓰지 못한다. 그런데 이아영의 장갑에 피가 묻어 있으면 상황이 이상해진다. 손을 쓸 수 없는 범인이 장갑을 쓰기라도 했단 말인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모든 일을 끝마친 후 나는 장갑을 황급히 벗어 파쇄석을 가득 담아 절벽 저 아래로 던져버렸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남은 오지민 씨도 범인은 되지 못해."
거기까지 도달했나.
"오지민 씨는 적록색맹이니까."
무서운 녀석이다.
지민이 갤러리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색맹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은 없다. 티조차 내지 않았다. 지민의 절친한 친구인 승현도 그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는데, 나무가 알기로 그녀가 색맹인 티를 낸 적이 딱 한 번 있다.
어젯밤, 나무의 객실에서 몸의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하다가 은수의 부름으로 크로와상을 가지러 로비로 내려갔었던 때. 동현과 교차하듯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던 그 때. 지민은 초록색 알로에 주스를 손에 들고 어리둥절해 있었다. 소파 세트의 테이블에는 알로에 주스와 붉은색 샴페인이 함께 늘어서 있었다. 리셉션에서 준비되었던 음료는 붉은 샴페인 뿐이었으니, 그녀는 알로에 주스를 낮에 먹었던 샴페인으로 오인하고 입에 가져다 댄 것이었으리라.
"초록색 목장갑에는 본드 같은 걸로 더럽혀진 얼룩이 덕지덕지 져 있었어. 그런 장갑에 빨간 피가 묻으면 색맹이 아닌 사람들은 빠르게 알아차릴 테지만, 적록색맹인 지민 씨는 달라. 명도의 차이가 있는 얼룩으로만 보일 뿐 초록색 목장갑에 빨간색 피가 묻었다고 인지하지 못한다는 말이야."
그렇게, 용의자로 올랐던 모든 이가 이아영의 목을 자를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역시 용의자가 아닌 이들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다.
남은 건 네 명.
오동현, 진유선, 진유신, 그리고 소나무.
"여기까지 와서는 목을 자를 수 있는 가능성을 재는 건 무의미해. 네가 말한 예술가 집단에서는 모두가 예술이라는 공통 동기를 갖고 있기에 누가 어떻게 목을 자를 수 있었나에 집중했지만, 예술가 외부 집단, 그러니까 외부인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 동기라는 게 훨씬 더 중요해지지. 어제 처음 본 남의 머리를 자른다는 게 말이 되겠어."
"우리 넷 중 누군가가 그 정도의 일그러진 정신을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나는 유선이도, 너도 꽤 오래 봐 왔어. 유선이도 너도 처음 본 사람의 목을 자를만한 사람은 아냐."
오 탐정은 그럴만한 그릇이 절대 안 되고 말이야. 그녀는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 목이 타는지 얼마 남지 않은 바닐라 라떼를 쪽 빨아먹는다. 얼음 사이로 스며들었던 음료가 빨대 안으로 사라지는 꼴을 나무는 멍하니 보았다.
"한 선생님이랑 이전부터 친분이 깊었지, 너는."
천천히, 딱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한 건 이래."
서로 하나씩 먹은 쿠키는 아직도 다섯 개가 남았다.
"한선혜 씨는 새벽 한 시에 작가의 방으로 갔어. 그리고 거기서 이미 죽은 아영이를 발견했지. 아영이의 유서까지 읽은 한선혜 씨는 아영이의 바람을 이뤄주기로 마음먹었어. 하지만, 아무리 거장이라도 사람의 몸을 잘라본 적은 없었던 거야. 더군다나 머리를 따로 숨겨야하는 상황에까지 맞닥뜨려 혼자서는 도무지 아영이의 바람을 이루어 줄 수 없었어. 거기서 그 분은 일단 너에게 도움을 청했겠지......"
"왜 나야? 도슨트 분들은 어쩌고."
"그 사람들은 그냥 고용한 사람들이니까. 일용직이야. 그 사람들이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사람 대 사람의 신뢰 관계를 따지자면 이십 년 전부터 꾸준히 연락을 해 온 네가 훨씬 믿음직하지 않겠어?"
"고맙네. 높게 평가해줘서."
"전화를 하셨지? 3층 객실까지 와서 노크하는 건 너무 번거로우니까."
관두자. 이제 숨기는 건 의미가 없다.
이 애한테는 털어놓아도 좋을 것 같다.
함께 추락한 사이고, 함께 가상의 자식을 만든 사이며.
또 이상한 곳에서 마음이 맞는 사이이기도 하니까.
"전화를 하셨어. 한 시 좀 넘어서. 난 항상 새벽에 그림을 올리니까 그 때도 잠을 안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하셨나봐."
한 선생님과의 통화는 상당히 오랜만이라고 느꼈다. 오밤중의 전화로 모든 걸 알려주시진 않았다. 목소리에서 배어나는 아연이 당신이 처한 상황의 끔찍함을 간접적으로 알렸을 뿐이다.
아영이가 죽었다. 나무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
조용히 객실을 나와 발소리를 죽이고 걸었다. 엘리베이터는 부르면 웅웅대는 소리가 날 것 같아 계단으로 로비까지 내려갔다. 로비의 불은 반만 켜져 있었다. 아직 비바람이 치는 바깥을 흘기며 연결통로를 지났다.
선생님은 작가의 방 문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아 계셨다. 인기척을 느끼고 휠체어를 돌리는 손이 떨리는 게 작은 휴대폰 조명으로도 보였다. 그 때는, 아직 작가의 방의 양개형 폴딩 도어는 굳게 닫힌 채였다.
관계자용 문을 열고 작가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자살...... 입니까?"
"그래."
"부탁하고 싶으시다는 건?"
"아영이가 유서를 남겼어."
착 가라앉은 침착한 목소리였다. 붉게 물든 눈가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나 혼자서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아서, 나무 네가 도와줄 수 있겠니?"
유서는 아영이 죽어 있던 의자 앞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손은 대지 않고 허리만 숙여 내용을 훑어보았다. 목을 잘라 몸은 오브제로 전시하고 머리는 따로 보관했다가 친구의 곁에 데려다달라는 기묘한 요구가 적혀있었다.
"오브제로 전시하라는 건 무슨 의미죠?"
"『조화』의...... 아니, 주제작의 오브제로 사용해달라는 것 같아."
"이 방 앞에 있는 그 커다란 작품 말씀하시는 겁니까?"
방금 전에도 지나친 작품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아 흰 천으로 덮여있지 않았나. 선생님의 허가를 얻고 작가의 방을 나가 천을 걷어냈다. 인간보다 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네킹들이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다. 강강수월래의 가운데 부분이 텅 비어있는 게 신경쓰였다.
이아영은 분명 저 가운데에 들어가고 싶었던 거겠지. 빠르게 판단을 끝냈다. 지금 필요한 것들을 머릿속으로 종합한다. 머리를 자를 수 있는 절단기는 이곳에 있다. 지문을 숨기는 데 필요한 장갑도 있다. 이아영의 것이니 좀 작겠지만 쓸 수는 있다. 하지만 머리를 담을 때 필요한 봉투는 놀라울 정도로 보이지 않았다.
"아영이 차 트렁크에 안 쓰는 비닐 봉투가 여러 개 있어."
그리 말하며 주차장으로 향하려는 선생님을 막아세웠다. 휠체어로 주차장의 파쇄석 위를 지났다간 누굴 더 깨울지 모른다. 제가 다녀오겠다고 했다. 차 키는 이아영의 객실에 있댔다. 객실은 잠기지 않았을 거라 했다. 그녀는 대체로 보안에 예민하지 않았다고 한다. 과거형이다. 과거에 머무르게 된 이를 가리키는 시제다.
경사로를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다시 연결통로를 통해 안채로 되돌아간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예술가의 자살과, 그녀의 에고와, 인간 대 인간에 대한 사랑, 선생님과 나의 관계, 이런 행위로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 그에 대한 해답들을 하나씩 제시하고 나니 어느새 손에 이아영의 차 키가 들려 있었다.
안채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아영의 차 트렁크는 혼잡했다. 트렁크 안에 굴러다니던 대형 비닐 봉투를 하나 들고 갤러리로 복귀했다. 파쇄석을 밟는 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만반의 주의를 기울였다.
갤러리에 들어섰다. 인기척이 났다. 당연히 선생님이 내려오신 줄만 알고 고개를 돌렸다. 놀랐다. 정말로 놀랐다. 최근 십년 간 이 정도로 놀란 일이 있었던가.
"주차장에서 누가 걷는 소리가 나서 나와 봤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도슨트 최은수가 물었다. 그녀의 바로 뒤에 도슨트 박서진도 서 있었다. 이쪽을 보는 눈길이 어쩐지 매서웠다. 두 사람 모두 검은 장갑을 아직도 착용하고 있었다.
"이 시간까지 뭐 하세요, 안 주무시고들."
"무슨 일 있으시냐고 물었습니다."
"이아영 씨가 작업을 도와달라고 하셔서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당신한테요?"
"저도 나름 한 선생님의 수제자였거든요."
그녀는 빗물에 젖은 비닐봉투와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물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건?"
"비닐봉투입니다."
"어떤 작업에 사용합니까?"
"무언가를 담는데 사용합니다. 봉투니까요."
말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너에게 더 이상 들을 말은 없다는 듯 몸을 홱 돌리고 경사로를 올랐다. 서진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쪽의 얼굴을 흘끔흘끔 훔쳐보는 게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선생님은 초대하지 않은 손님 두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셨다. 작가의 방에 들이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하셨지만 도슨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억지로 문을 열었다. 사람이 죽어있는 모습을 분명 보았을 텐데, 놀라울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은수도, 서진도.
"죽었네."
"죽었어."
건조한 말 몇 마디가 전부였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들은 그냥 도슨트가 아니다.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갤러리 안으로 잠입한 수상한 치들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두 사람의 행동을 살폈다. 그들은 책상 위에 놓인 유서를 기민하게 파악하고는 내용을 읽고 있었다.
"머리를 담으려고 가져오신 겁니까?"
"네. 여긴 담을 게 보이질 않아서요."
"머리를 담아서 어떻게 하실 계획이셨습니까? 사람이 목이 잘린 채 발견되면 경찰이 올 텐데요."
"잠깐 숨겨두고 그 다음 날 찾으러 올까 했습니다."
"요즘 같은 따뜻한 날에 무서운 소리를 하시는군요.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쉽게 부패합니다."
그녀는 의자에 축 늘어진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옆얼굴이었다. 서진은 이쪽에 등을 보이고 여전히 유서를 읽고 있다. 셔츠 아래로 보이는 등 근육이 묘하게 굴곡졌다.
"머리를 밖으로 가져가는 건 저희가 도와드리죠."
무언가 결심한 듯이 그녀는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았다.
"대신, 머리를 자르고 몸을 장식하는 건 여러분이 해 주셨으면 합니다. 리스크 분담이라는 걸로 하죠."
공범자가 되겠다는 선언에 내포된 함의를 읽어내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손이 늘면 리스크도 따라 늘지만 당장 눈앞의 이득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얼음을 가져오겠습니다."
도슨트인 척 하는 두 사람은 작가의 방을 나섰다. 휠체어에 앉은 대가와 그녀의 제자 둘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제가 자르겠습니다. 선생님은 몸을 옮기는 것만 좀 도와주세요."
이런 때를 예견하기라도 한 건지 작가의 방 안쪽에는 누구라도 쓸 수 있는 절단기가 있었다. 맨손으로 절단기의 손잡이를 잡는 건 본능적으로 꺼려졌다. 외부인이 작가의 방 안의 절단기에 지문을 남겼다가는 단박에 혐의가 씌워지고 말 테니까.
방 중앙의 커다란 테이블에 굴러다니던 이아영의 목장갑을 꼈다. 역시 작았다. 하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의자에 흘러내린 이아영의 겨드랑이 아래에 양 팔을 넣어 절단기까지 옮겼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생명 활동을 계속했던 몸은 현세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아주 조금의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입을 앙 다문 절단기의 손잡이를 잡아 들어올렸다. 이아영의 하얀 목을 절단기의 두 날 사이에 끼워넣는다. 머리칼을 올려묶은 뒤통수만이 보였다. 얼굴을 보고 목을 자르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손잡이를 도로 내리기 전에, 하얀 손목을 잡아 맥을 짚었다. 심장은 뛰지 않았다. 등에 귀를 대고 맥박을 들었다. 심장은 여전히 뛰지 않았다.
"죽었습니다, 선생님."
갑자기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죽었어요, 확실히."
아, 그렇구나.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거다.
이건 확실히 죽었다고. 나는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뼈와 살이 일정한 비율로 혼합된 어떠한 재료를 사용해 토르소를 만들고자 하는 거라고.
그렇게 자각하니 한순간 의식이 맑아졌다.
그렇구나. 이건 예술 활동이다.
절단기의 손잡이를 내렸다. 날과 재료가 부딪혀 덜거덕하고 멈췄다.
힘을 준다.
날이 재료 안으로 파고든다.
소재가 품고 있던 내용물이 찢어진 표면 밖으로 새어나온다.
힘을 더 준다.
날은 안으로, 또 안으로 파고든다.
올려묶은 검은 머리가 점점 아래로 꺾인다.
머리가, 쩌억하고, 단면을 보이며, 꺾인다.
흡,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미끄러진다. 혈액으로 번질거리는 날이 인간의 목을 절반 정도 잘라낸 채 멈췄다.
쇠 냄새가 훅 풍겼다.
"선생님."
그녀는 절단기에서 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죽었습니다, 선생님."
커다란 가위 사이로 목을 들이민 예술가는 다음의 처치를 기다리고 있다.
"죽었어요."
뺨으로 물기가 흘렀다. 미처 마르지 않은 빗물이다.
"정말로요."
형용하기 어려운 희열이 뒷목을 타고 기어올랐다.
아니, 어쩌면 공포인지도 모른다.
공포와 희열은 실로 동전의 앞뒷면과 같으니.
손잡이를 잡았다. 아래로 내린다. 단단한 무언가에 걸려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힘을 준다. 힘이 가해지는 방향을 어림한다. 우두둑, 하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손에 느껴지는 진동, 장애물을 부숴 가속이 붙은 날이 목을 그대로 깨끗하게 잘라내는 광경.
무게중심을 잃은 몸이 테이블 아래로 툭 떨어졌다. 무게중심인 머리는 피로 젖은 절단기 뒤편에 굴러다닌다. 테이블 위가 그야말로 피범벅이라 얼굴이 더럽혀졌을 것 같다.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현기증이 일었다. 근처의 벽을 짚고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선생님. 가서 벽 좀 열어주세요."
폴딩 도어를 뜻하는 것이었다. 시야 바깥에서 휠체어가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벽이 차라락 하고 열린다.
뺨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물기가 주륵주륵 떨어진다.
몸은 선생님과 함께 옮겼다. 성인 남자보다도 힘이 강한 게 전동 휠체어다. 이상하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야 만 것이다. 목을 잃은 이아영의 다리를 하나씩 잡고 작가의 방 밖으로 끌어냈다. 목에서 울컥울컥 쏟아지는 피가 더러운 바닥에 얄쌍한 선을 그었다.
오브제의 포즈는 선생님과 상의해서 만들었다. 그녀를 제외한 마네킹 모두가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는 포즈를 하고 있으니 유일한 인간인 그녀는 힘없이 누워있는 포즈를 취하는 게 좋을 듯했다.
마네킹과 비교해 인간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점이 있었다. 몸에 쉽게 움직이는 관절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조차 시간이 흐르면 딱딱하게 굳어버릴 테니 그러기 전에 작업을 끝마쳐야만 했다.
"파괴적이군요."
어느새 나타난 최은수가 말했다. 그녀의 심복은 손에 얼음이 가득 담긴 비닐봉투를 들고 있었다. 봉투 겉면에 쓰인 걸 보니 밤참으로 먹었던 크로와상 생지의 봉투인 것 같았다.
서진과 눈이 마주쳤다. 무표정하게 얼음주머니를 운반하던 그는 눈이 맞자 흠칫 놀랐다.
"이걸 머리랑 같이 넣어두겠습니다. 내일까지는 싱싱하게 보관할 수 있을 겁니다."
이아영의 차에서 가져왔던 대형 비닐봉투에 얼음주머니를 넣었다. 그녀는 아무 거리낌도 없이 잘린 머리를 들어올렸다. 테이블에 흘렀던 피로 엉망이 된 얼굴이 보였다.
"얼굴을 좀 닦아드리죠."
근처에 각티슈가 있어 몇 장을 뽑아 건넸다. 그녀는 받아들지 않았다.
"당신 얼굴을 먼저 닦아야 할 것 같은데요."
"아뇨, 이 정도는......"
"그럼 당신이 닦아주시죠. 제가 머리를 받치고 있을 테니, 자."
눈을 감은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이마부터 턱 끝까지 자신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땀이 삐질삐질 나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뽑아든 티슈로 사자의 얼굴을 닦았다.
"아......"
은수의 뒤에서 이쪽을 쳐다보던 서진이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냈다.
"자, 장갑에, 묻......"
여전히 작아서 분간하기 어려운 목소리였지만 주위가 조용한 덕에 잘 들렸다.
"괜찮습니다. 버리겠습니다."
"버, 버려도, 되나......"
"괜찮을 겁니다."
얼굴이 깨끗해진 걸 확인하고 그녀는 얼음주머니 위로 이아영의 머리를 떨어뜨렸다. 한층 무거워진 대형 비닐봉투의 손잡이를 묶어 완전히 밀봉한다.
"선생님. 사람이 변사한 게 발견된 이상 경찰의 출동은 불가결해집니다."
다음과 같은 합의가 이루어졌다. 경찰이 갤러리 안으로 들어오면 조사에 적당히 참여한다. 그 후 선생님이 이건 자신이 벌인 짓이라고 자백한다. 모두의 시선이 선생님에게 쏠렸을 때, 은수와 서진 두 사람은 머리를 갖고 갤러리 밖으로 도망친다.
"머리는 저희 차에 실어두겠습니다. 도주 이후 납골당에 도착하면 사진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은 제자도 아닌 단순한 직원들이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는가에 대해 일말의 의심을 품고 있으셨던 듯했다. 하지만 그들 외에 기댈 이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곳에 모인 네 사람 중 멀리 도망칠 수 있는 자가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은수와 서진 뿐이니까.
두 사람은 냉각된 머리가 담긴 봉투를 들고 갤러리 1층으로 사라졌다.
스승과 제자만이 남았다.
초록색 목장갑에 묻은 혈흔을 내려다본다. 본드가 묻어 얼룩덜룩한 장갑에 새빨간 것이 묻으니 상당히 눈에 튄다. 장갑을 벗어 안팎을 뒤집었다. 이건 처리해야한다. 안에 돌이라도 넣어서 절벽 아래로 던져버리자.
"선생님."
고개를 들어올린 선생님과 시선이 맞았다. 동공이 작아진다.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나무야, 넌......"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선생님."
휠체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피비린내가 확 끼친다. 바지에 혈흔이 묻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녀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당혹과 동정과 공포가 어울리지 않게 배색된 얼굴이다.
"저는 그 사람을 꼭 찾아야합니다. 그 사람 하나 찾기 위해 해 보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나무야......"
"선생님, 부탁입니다. 강요는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선생님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힌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제가 찾고 있는 사람은......"
기차 시간이 될 때까지 카페에서 나가지 못했다. 유신이 피곤하다며 잠깐 눈을 붙이겠다고 한 탓이다. 카페 모퉁이 소파 좌석에 앉아있던 그녀는 벽에 몸을 기대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나무의 의사는 물론 묻지 않았다. 사람 목을 자른 주제에 의사를 묻길 원하는 건 가당치 않은 일이긴 하지만.
진상을 쏟아내듯이 말한 나무도 몽롱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는 가시지 않을 진득한 피로였다. 옅게 잠들었던 차에 깨워져 사람 목을 잘랐으니 피로가 없는 게 이상하다. 본래는 적어도 여덟 시까지 푹 잘 생각이었지만, 센서 오작동이라는 끔찍한 우연으로 다섯 시에 깨 버린 것이다. 모든 일을 끝마치고 침대에 누운 게 두 시 넘어서였으니 세 시간도 자지 못했다.
아무튼 몽롱했다. 억지로 깨워져 비틀비틀 객실 밖으로 나가 자신이 벌인 일을 다시 확인하고 있으니 어째 현실과 꿈의 경계가 불명확해진 기분이 들었다. 실은 제가 사람 목을 자른 건 꿈이고, 지금 이것도 꿈의 연장이 아닐까. 몽중몽에서 깨어나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제 작품이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는 사실 하나만은......
아니, 제 연출이 사람들에게 쇼크를 안겼다는 사실 하나만은 유쾌해서 견딜 수 없었다.
목을 잘랐을 때 느꼈던 모독적인 희열이 다시금 신경을 타고 올랐다. 코피가 났다. 작자의 의도를 열심히 설파했다. 그 때만은 자신이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나. 나의 작품을 인정받는다는 게 이렇게나 기분이 좋은 일이었나.
그건 인정이 아니라 단순한 쇼크였을 텐데도......
은밀한 자기과시욕이다.
옛날, 소년 시절 반상 앞에서 그것을 비쳐보였다가 머리가 깨져 죽을 뻔했다.
반상을 떠난 뒤로는 결코 티를 낸 적이 없다.
자신의 욕망을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
욕망의 표출은 언젠가 약점이 된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선생님에게 그 사람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 사람을 찾고 싶다는 욕구를 피력했다.
땀이 계속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잘 자네."
유신은 그로부터 구십 분 후 깨어났다.
상경하는 기차에서는 나무가 잠을 청했다. 유신은 잠을 잔 건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목적지에 도착해 나무가 눈을 떴을 때는 잠을 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제가 자는 동안 경찰에 신고를 했을 리는 없으니 유튜브로 재미있는 영상이라도 보면서 시간을 때우지 않았을까.
"와, 백도화 씨도 부산으로 휴가를 오셨었네."
역에 세워둔 유신의 샛노란 페라리에 시동을 걸어 주차장을 나섰다. 차주는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는다.
"그러신 것 같더라."
"봐봐, 바다 사진이야."
때마침 신호에 걸려 유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새파랗기만 한 사진이다. 바다와 하늘만이 깨끗한 해상도로 찍혀있다. 수평선 아래에서 너울대는 파도가 하늘과의 경계를 명확히 한다. 사진과 함께 실린 글은 '이제야 태풍이 갰네'
"한 시간 전에 올라왔어."
"재미없으셨겠네. 기껏 휴가 내서 오셨는데 태풍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하고."
"다른 사람 얘기처럼 그러긴."
신호가 바뀌었다. 차체를 움직인다. 앞유리 너머로 화창하게 갠 봄날의 하늘이 보인다. 얼마 없는 구름이 바람을 타고 느리게 흘러간다.
조수석의 유신도 스마트폰의 액정에서 시선을 떼고 그저 흘러만 가는 하늘을 올려다 본다.
그녀는 문득 물었다.
"그거 말이야, 송 군. 정말로 죽어 있었던 거지?"
나무는 웬일로 바보 같은 질문을 다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리고 나무는 웬일로 바보 같은 대답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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