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행방 下 1/3
하트가 머무는 곳
* 어떤 모르는 남자가 나옵니다.
“어제 데이트는 잘했어요?”
업무 시작 시각 10분 전의 여직원 탈의실은 분주하다. 분주함을 틈타 카밀라는 립스틱을 고쳐 바르며 요르에게 슬쩍 물었다. 툭 내뱉는 말투가 무심했지만 캐비닛에 달린 거울을 보는 척 흘끔 요르의 표정을 살피는 눈빛은 차갑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남편이 좋아하던가요?” 어쩐지 낯간지러워지는 기분을 무마하려는 듯 립스틱 뚜껑을 닫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네?”
정작 그게 자기에게 하는 말인 줄 몰랐던 요르는 옷매무새를 정돈하다가 옆에서 날아오는 짜증 섞인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나서야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초콜릿이요. 그저께 선배가 우리 집 부엌에서 난리를 치고 간 그거.”
“아… 네.”
“어제 남편이 받고 좋아하더냐고요.”
어제 남편… 아. 말의 의미를 이해하자마자 요르의 눈동자가 말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 표정도 빠르게 변하다가 결국엔 모호하게 웃었다. 동시에 과연 맞게 웃고 있는 걸지 스스로를 조금 의심했다.
“네! 마, 많이 좋아해 주셨어요! …전부 카밀라 씨 덕분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색하게 올린 입꼬리가 고문처럼 버거웠다. 요르는 왠지 거짓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처음으로 거짓말을 한 어린애가 된 것처럼 떨렸다. 자신에게 속고 있는 눈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어서 금방 다시 데굴데굴 시선이 저 멀리 굴러갔다.
“...그럼 다행이고요. 다음에 선배가 저녁 사기로 한 거 잊지 않았죠. 먼저 갈게요.”
“……저, 카밀라 씨, 혹시…”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기… 어, 곧 업무 시작하네요! 빨리, 음, 서둘러야겠어요…”
분명 뭐가 있는 듯한데, 뭐가 없는 듯이 괜히 캐비닛 안을 뒤적이며 허둥대는 요르를 보며 조금 의아해 하던 카밀라는 시계를 확인하고 이내 요르를 남겨두고 탈의실을 나섰다. 늦지 않게 오세요. 과장이 아침부터 짜증 내면 귀찮다고요. 오늘 행사 준비 때문에 예민해 보이던데.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고, 캐비닛의 거울이 요르에게 알려주었다. 거울을 속일 수는 있지만 거울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적나라하게 비치는 진실 앞에서 요르는 인정했다. 속에 맺혀 있던 것이 있었나 보다. 무심코 목구멍을 비집고 나올 뻔한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 요르 자신도 정확히 가늠이 안 됐지만 그게 무엇이 됐든 어제 일을 모르는 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제. 다른 날처럼 흘러갈 예정이었던 평범한 하루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오히려 평범함이라고 믿었던 날이다.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고 있던 것이 허무해질 정도로 머릿속에 쏟아져 내리는 기억이 어제라는 말 하나로 간단히 불릴 수 있지만 간단히 정돈되지는 않는다는 게 어쩐지 조금 원망스러웠다. 그 미숙한 원망이 향한 건 요르 자신이었다. 제 안에 남은 응어리의 존재가 느껴졌다. 행선지를 잃어버린 하트는 진작에 버려진 줄 알았는데 그대로 속에 남아 있었다. 한때 헛된 기대가 부풀려주었던 상상은 이제 최악의 결말로 향하고 있었다. 갈 곳 없이 남겨진 하트는 그 지름길을 알려주었다. 혼자 기대하고 혼자 좌절해서 풀죽는 꼴이 우스웠지만 웃음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로이드 씨에게 폐를 끼치고 그를 실망시키는 일. 카밀라 씨의 노력을 헛되이 해 그녀를 서운하게 하는 일. 문제의 하트를 끝까지 숨긴다면 일어나지 않을 결말이라고 요르는 애써 믿어보기로 했다.
누군가를 위해 그 누군가를 속여보자고 결심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인데 상처가 아물지 않고 계속 덧나고 있는 기분이었다.
요르가 모르는 요르의 장점 중 하나는 때로 가식이 필요한 일을 가식 없이도 거뜬히 해내는 것이었다. 그것을, 가식을 몸에 두른 자들에게 가식이라 손가락질받을 때도 가끔은 있었으나 요르는 개의치 않았다. 요르는 이날 시청에서 열리는 대규모 행사에서 귀빈을 비롯한 예정된 방문객의 안내와 그 밖의 여러 잡무를 맡았다. 여직원들에게 흔히 주어지는 업무였으니 요르에게는 나름 익숙한 일이었다. 듣기로 대단하시다는 것 빼고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술과 허세와 그들을 향하는 무자비한 카메라 플래시 세례에도 가식의 도움 없이 끊임없이 웃고 또 끊임없이 인사하고 있으면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요르는 시청 공무원 요르 포저라는 작은 명찰을 달고 있을 때면 그 자격으로 하는 모든 일은 시민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남을 돕는 일에서는 도리어 기운을 얻었기 때문에 쉽게 지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모두가 자신 같은 것은 아니라는 걸 요르는 시청에 오고서 시간이 꽤 지난 후에야 알아차렸다. 누군가가 떠넘긴 잔업을 하는 건 한참도 전에 익숙해졌지만 같은 잔업을 하는 동료들의 불평을 옆에서 듣고 있다 보면 이게 보통과는 다른 거구나 느끼곤 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일을 하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일상이 당연해진 요르에게, 지금 요르의 옆에 있는 남자는 어쩐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안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남자였다. 남자에 대해 아는 건 그의 이름과 소속과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과, 매우 잘 웃는다는 사실. 요르는 그 미소가 가식인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요령 좋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지친 기색도 없이 내내 계속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요르는 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싫지 않은 기시감의 정체가 신경 쓰였다. 남자는 자신을 향하는 요르의 시선을 눈치채고 그 시선을 마주하는 데에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눈이 마주치면 남자는 슬며시 웃는다. 요르는 황급히 그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남자의 시선은 조금 더 요르에게 머무르다가 느리게 떠나갔다.
남자의 이름은 루안 노이만. 세무과 소속. 물결처럼 완만하게 굴곡진 갈색 머리에 회색이 조금 섞인 푸른 눈. 바로 얼마 전에 온 신입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청년의 살가운 인사에 어색하게 응하는 사람들은 요르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그를 처음 본 것 같았다. 애초에 루안을 제외하고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것도 그럴 게 이미 짜여있던 행사에 차출될 직원 명단이 영문 모를 사정으로 갑자기 변동된 것을 통보받은 게 바로 오늘 아침이다. 업무 시작 시각에 맞춰 여직원 탈의실에서 나오자마자 들려온 변동 소식에 카밀라와 밀리를 포함해 같은 과의 직원들과 함께 일할 예정이었던 요르는 느닷없이 홀로 떨어져 이곳에 불려 오게 되었다. 다른 직원들도 요르와 다를 바 없을 것이었다. 예정에도 없이 예정과는 다른 일을 하러 불려 왔지만 결국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기에 금방 각자의 일을 찾아 분주히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다른 부서의 신입 직원에게까지는 신경이 잘 미치지 않는 게 매정하기도 하지만 당연했다. 요르는 아는 선임도 없이 외딴곳에 떨어진 그가 걱정스러웠지만 그 걱정은 금방 무색해졌다. 제 주위의 반응이 마뜩잖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루안 노이만은 갓 들어온 신입답지 않게 태연해 보였다. 요르가 철제 접이식 의자를 한 팔에 다섯 개씩 끼워 들고 옮기던 것을(물론 그 이상도 들 수 있었지만 남은 개수가 얼마 없었다) 그가 능청스럽게 빼앗아 가 요르가 하던 것만큼 가뿐하게 마저 옮기는 것을 보면 태연함을 넘어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찰나에 본 그의 옆얼굴은 분명 웃고 있었다. 그렇게 빈손이 된 요르에게 주어진 건 수 페이지짜리 참석객 명부와 펜뿐이었다.
행사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누군가가 요르가 가진 것과 같은 명부를 들고 요르의 앞에 나타났다. 명부를 쥐고 있는 손은 아까 요르에게서 의자를 빼앗은 바로 그 손이었다. 실례합니다. 루안의 눈이 호를 그리며 빙긋 웃었다. 제 자리가 여기인 것 같아서요. 요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가 꺼내든 건 오늘 아침 변동된 직원 배치표. 요르 포저. 그리고 루안 노이만. 종이에 나란히 적힌 두 사람의 이름처럼 남자는, 그러니까 루안은 요르의 명찰에 눈길을 주지도 않고 그녀의 옆자리에 나란히 섰다. 포저 선배? 잘 부탁드립니다.
혼자서도 아주 의연한 신입과는 달리 사실 요르는 그가 찾아와 옆에 자리 잡은 순간부터 당황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남자가 자꾸 요르에게 웃기 때문이 아니라,
“저, 노이만 씨… 괜찮으시겠어요?”
“뭐가요?”
“제 옆에 계시는 거요.”
“음, 무슨 의미시죠?”
그때의 루안은 요르가 본 것 중 가장 웃음기가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요르가 그를 걱정할 일이 이제는 진짜로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앞으로 사람이 많이 와서 정신없을 거고, 그동안 내내 앉지도 못하거든요. 여기는 의자도 없어서...”
“아아…”
“어, 그러니까…”
입 밖으로 내고 나니 요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하찮은 걱정 같았지만 그 염려를 담은 목소리는 루안에게 꽤 다정하게 들렸다. 그 다정한 목소리만으로는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문득 깨닫고 엎지른 참견을 주워 담을 수도 없어 허둥거리고 있는 요르가 제게 어떤 마음으로 말해주었는지 루안은 알 것 같았다. 그는 요르를 가식으로 여기지도, 오해하지 않았다. 요르가 자신의 주제넘음을 자책하는 동안 루안은 그녀가 자신에게 한 것보다 훨씬 주제넘는 짓을 하고 싶어졌다.
“그럼 포저 선배는요? 괜찮으시겠어요?”
“저요? 저는.”
당연히 괜찮아요. 라 해야 했는데. 요르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정말로 당연히 괜찮은데도. 괜찮다고 말하는 건 언제나 준비돼 있었다. 그녀에게 괜찮냐고 물어봐 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지. 아니, 이제는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 처음 본 사람이 꼭 요르가 아는 어떤 사람처럼 그녀에게 말해줄 줄은 정말 몰랐다. 그것도 다름 아닌 남자가. 회사의 남자 직원들이란 신입이건 고참이건 연차에 상관없이 요르를 비롯한 사무원들을 무시하거나 애인 후보로만 본다는 견해를 들어본 적 있는 요르였지만 루안은 그 도식의 어느 쪽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아직은.
“괜찮아요. 저는 이런 건 많이 해봤고, 보기보다 튼튼하거든요.”
“전 처음이긴 하지만, 저도 꽤 튼튼해요. 보시다시피.”
루안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보라는 듯이 으쓱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오는 넓은 어깨가 든든해 보였다. 아마 그에게도 답은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방해가 되진 않을게요. 선배 옆에 있어도 될까요?” 다시 또 한 번 눈이 마주쳤다. 요르는 루안 노이만에 대해 하나 더 알게 되었다. 눈, 예쁜 색이군요. “……괜찮아요. 당연히.”
행사 종료 후 참석자들에게 증정하는 선물은 베를린트 시의 로고가 인쇄된 고급 종이가방에 담겨 있다. 성의라는 이름은 누구에게는 혐의 없는 기념품이겠지만 누구에게는 흑심을 숨긴 뇌물로 작용할 것이다. 끝도 없이 입장하던 사람들 수만큼 끝도 없이 선물이 책상 위에 쌓여 있었다. 문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객들에게 선물을 건네는 직원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그중에서도 자기가 좀 튼튼하다고 자부한 사람들이 특히 바쁘게 움직였다.
정말로 튼튼하신 분인가 보네요. 요르가 루안에게 가진 어떤 감상은 거기서 시작했다. 튼튼하고 성실한 사람 같았다. 일을 소홀히 하는 기색이 없는. 그와 동시에 요르는 그에게 배려받고 있음을 느꼈다. 배려가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고 편안하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행사의 모든 뒷정리까지 마무리 된 후에야 평소보다 늦은 점심시간이 주어진다. 오늘 요르의 점심은 로이드가 이른 아침부터 준비해준 도시락이다. 남편이 손수 싸준 도시락을 가방에서 꺼내는 날이면 어쩐지 동료 직원들의 이목이 쏠리는 게 눈치 없는 요르에게도 느껴져서 요르는 영문도 모르고 서글퍼하며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곤 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눈빛에 섞인 질투를 읽지 못하고 ‘보통’이 아닌 자신을 나무라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원래는 아내인 제가 로이드 씨에게 싸드리는 게 보통인 거겠죠. 제가 부족한 아내라서… 남몰래 조금 훌쩍이며 도시락을 가지러 사무실로 향하는 요르의 힘없이 처진 어깨를 누군가가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점심 같이 드실래요? 사실 요르는 루안이 뒤에서 다가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닿았을 때는 그인 걸 알면서도 조금 놀랐다.
“죄송해요. 오늘은 도시락을 가져와서…”
“어, 우연이네요. 저도예요. 짠.”
어디서 벌써 가져온 건지 소박한 자체 효과음과 함께 그가 들어 올려 보여준 손에는 적당한 크기의 런치박스가 들려 있었다. 그럼 도시락 같이 드실래요? 물론 선배가 괜찮으시다면... 한 번도 거절당한 적 없는 것처럼 빙글빙글 능청스럽게 웃는 얼굴은 요르에게서 거절을 모르는 말로 만들었다. 하려 했던 말을 잃어버리고 주저하던 입술이 우물쭈물 움직였다.
“아… 그럼...”
“그럼. 도시락 가지고 10분 후에 야외 카페테리아에서 만나요. 제가 먼저 가서 좋은 자리 맡아둘게요.”
기다릴게요. 만족스러운 듯 눈매는 아까보다도 더 부드럽게 휘었다. 그의 산뜻한 목소리가 요르를 끈덕지게 옭아맸다. 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해 끄덕인 것은 아니었다. 일방적인 선언에 더 가까운 약속을 얻어낸 루안은 카페테리아를 향했다. 그 발걸음이 무척 가벼워 보였다.
…노이만 씨. 점심 도시락이 많이 기대되시는 걸까요. 후후. 저도 로이드 씨의 도시락이 기대되네요. 요르는 루안을 수상하게 여기지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그에 대해 잘못 짚은 줄도 몰랐다. 다시 만날 약속을 위해 반대 방향을 향했다. 루안을 흉내 내듯 가벼운 걸음이었다.
“그 도시락. 남편분이 만들어준 건가요?”
“네! 나, 남편은 요리를 굉장히 잘하거든요.”
“선배는 오믈렛을 좋아하세요?”
오늘의 도시락 메뉴에 대해 아주 사소한 대화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도 요르의 성실한 동거인의 존재를 알아차릴 정도로 루안은 눈치가 빨랐다. 반대로 요르는 그의 웃는 눈매가 미세하게 가늘어지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로 기민하진 못한 사람이었다.
오믈렛은 아냐가, 저희 딸이 좋아하는 메뉴인데, 평소에 집에서 먹는 것보다 조금 달달하게 만들어 주신 거예요. 건강을 생각해서 자주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지만 제가 단 음식을 좋아해서 가끔은 이렇게 도시락으로 싸 주시거든요. 아, 물론 아냐에게는 비밀이지만요. 이 미니 타르트도 간식으로 챙겨주신 건데, 제가 좋아하는 사과 타르트예요. 둘 다 제가 좋아한다고 말씀드린 적은 따로 없는데, 감사하게도 알고 이렇게 챙겨주셔서 정말, 아… 그게. 요르는 쉬지 않고 말하다가 돌연 말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상하게 말이 없던 루안의 표정을 뒤늦게 살폈기 때문이다. 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조금 들떠버리는 건 유리가 요르의 유일한 가족일 때부터 이어진 오래된 습관이었다. 자랑할 생각은 전혀 없이 요르가 알고 느끼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요르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매번 절대 호의적이라고 할 수 없는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루안은 그들만큼 요르에게 질색하거나 요르의 이야기를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얼떨떨한 것 같기도 하고 당황스러운 것 같기도 하였는데, 확실한 건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신이 또 보통이 아닌 일을 저질러 버린 줄 알고 겸연쩍어진 요르는 두 개의 도시락과 루안의 얼굴을 몇 번 번갈아 보면서 화제를 돌릴 만한 적당한 말을 골랐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제 얘기만 했죠. 음. 음… 노이만 씨 도시락도 정말 맛있어 보이네요…! 아하하…”
그러나 루안은 요르에게 자신의 도시락 메뉴를 소개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남편이 있으셨군요. 그리고 따님도.”
“네에…”
루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금방 다시 웃는 낯으로 돌아왔지만 요르는 이제야 그의 웃는 얼굴 뒤의 진짜 속내를 알아차렸다. …라고 생각했다.
‘설마. 저한테 유부녀 분위기가 전혀 안 났던 걸까요?! 보통 사람들보다는 많이 부족해 보여서 남편이 있는 여자로는 전혀 안 보였던 거겠죠. …로이드 씨의 아내로서 아직도 한참 부족하군요……’
불안정한 균열을 살짝만 스쳐도 요르의 자책은 바로 재생된다. 급격히 눈썹이 축 처지고 울상이 된 요르는 찔끔 나오려는 눈물을 삼키며 포크로 괜히 오믈렛을 가볍게 쿡쿡 찔렀다. 미안해요, 오믈렛 씨…
“결혼한 지 오래되셨어요?”
“몇 달 전...이 아니라, 1년 전쯤에 했어요.”
“그렇구나. 손에 반지가 없으셔서… 못 알아봤네요.”
“그, 그런가요?”
반지라면 받았는데… 받은 그것이 마음이 아픈 안타까운 환자분들을 구타 요법으로 치료해 드릴 때 쓴 수류탄의 안전핀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그것이 보통의 반지가 아니라는 것은 요르도 알았다.) 뒷말을 얼버무렸다. 루안은 슬그머니 왼손을 시야 아래로 내리는 요르의 어색한 몸짓을 놓치지 않았으나 모르는 척했다. 아는 척하는 것보다 모르는 척 상황을 지켜보는 쪽이 훨씬 더 승산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이렇게 도시락도 싸주시고. 남편분이 선배를 많이 사랑하시나 보다.”
“그, 그런 걸까요…”
사랑… 약간 흐릿해졌으나 아직 잊히지 않은 사랑의 실루엣들이 다시 살아났다. 그들은 요르가 한 것처럼 요르에게서 달아나지 않는다. … 사이가 좋으신가봐요. 남편분이 … 많이 사랑하시나보다. 요르가 거듭 되새겨 견고해진 확신에 루안이 동조해 주었다. 사랑받고 있나 봐요. 이상하게도 그의 미소에 로이드의 미소가 겹쳐 보였다. 아니에요. 사랑하지 않아도 기꺼이 시간과 정성을 할애해 주시는 분이세요. 도시락이든 데이트든 뭐든. 그런 말은 지금 적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르도 그냥 습관처럼 웃었다.
“노이만 씨는 제가 아는 분이랑 되게 닮으신 것 같아요.”
“아는 분?”
“좋은 분이에요. 노이만 씨처럼 잘 웃으시는.”
그 말에 루안은 반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그렇게 잠시 말이 없었다. 정적의 의미를 불쾌함이나 곤란함으로 요르가 멋대로 정의내리기 전에 그가 다시 살짝 웃었다. 요르의 안 좋은 버릇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사람. 좋은 사람이에요?”
“네. 엄청.”
요르는 정답을 아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했다.
“그렇구나. 다행이네요.”
“...다행…?”
요르는 무엇이 다행이라는 건지 모르는 채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루안은 요르에게 대꾸하지도 더는 묻지도 않고 다만 말없이 푸실리 샐러드의 방울토마토를 하나 입에 넣었다. 그래도 웃는 건지, 웃음이 나지는 않는 건지. 메마른 그의 입가를 바라보다가 요르도 따라서 오믈렛을 한입 먹었다. 꼭꼭 씹어 입안에서 식재료가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조화를 음미했다. 잘못 끼어들어 간 딱딱한 잔여물은 없었다. 역시 오늘도 맛있어요. 맛있다는 말 이상으로. 참으로 사치스러운 나날이라고 요르는 인정했다. 제게 도시락을 만들어준 사람을 생각했다. 그는 요르에게 과분한 사치의 나날을 누리게 해주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른 아침이든 해 질 녘이든 부엌에 솟은 그 넓은 등을 보면 요르는 안심했다. 그답지 않게 조금 투박해 보이는 손은 능숙하게 식재료를 다듬고 세심하게 가족을 돌봤다. 큰 손바닥 아래 흐트러지는 아이의 가는 머리칼과 개의 흰 털을 지켜보는 것을 요르는 남몰래 행복으로 삼았다. 입안에 남아 있는 달콤함은 분명 행복의 맛이었다.
로이드 씨는 지금 뭘 하고 계실까요. 이미 점심은 드셨을까요. 바쁠 땐 끼니를 거르기도 하시는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즐겨 입는 차분한 녹색 수트를 입고 역 앞 갈림길에서 요르에게 인사하며 일터로 떠나는 모습. 집에 돌아와서는 지친 내색도 없이 요르를 반기거나 요르에게 귀가를 알리는 모습. 매사 성실하고 약속에 충실하며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 요르가 아는 건 로이드의 그런 모습이다. 매일 조금씩 변주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요르가 그에게서 받고 있는 믿음과 안정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하루의 짧은 이별과 재회 사이의 공백를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요르는 모르지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의 손에 딸의 작은 손과 아끼는 반려견의 리드줄과는 다른 무엇이 쥐어지고, 그가 웃고, 이내 그것이 사랑이라 깨달아 이유도 모른 채로 도망치기 전까지는.
요르는 그날 로이드와의 데이트 내내 그의 멋지게 웃는 얼굴을 따라 했다. 그 죄 없는 미소에 묻지 못할 의문을 품으며 자신의 분수를 잊지 않으려 노력했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한동안 말이 없던 루안은 무언가 떠올린 듯 작게 읊조렸다. 혼잣말치고는 요르의 주의를 끌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요르와 눈을 맞춰왔다.
“어제 초콜릿은 그 좋은 분께 주셨나요.”
“네에?! 어어, 음, 초콜릿…말인가요?”
튀어나온 건 자기가 듣기에도 바보 같은 반응이어서 요르는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약점을 찔린 듯 심장은 잠시 잊었던 박동을 기억해 내며 세차게 뛰었다. 반면 루안은 요르의 흔들리는 불안정한 눈동자를 여전히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발렌타인’이었잖아요. …혹시 모르시나요?”
“아, 아뇨…! 알아요! ‘발렌타인’ 전날에는 초콜릿을 직접 만들어서 준비했는걸요. 다들 ‘보통’ 하시는 대로, 하트 모양으로…”
…사실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됐지만요… 하지 않았어도 됐을 솔직한 고백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와 뭉개지는 발음으로 어색하게 부려 본 허세의 뒤를 이었다.
“와, 직접 만든 하트 모양 초콜릿이라. 받는 분도 좋으셨겠어요. 그 좋은 분이 받고 기뻐하셨죠?”
아무래도 천성인지, 넉살 좋게 눈웃음 흘리는 그를 보며 요르는 처음으로 그에게 조금 의아해졌다.
“초콜릿은 남편한테 주는 게 보통 아닌가요? 저 같은 유부녀는.”
그 좋은 분이 남편이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루안이 이번에는 애매하게 웃었다.
“아… 그렇겠죠. 그런데… 다들 자기 배우자 말고도 따로 있기 마련이니까요. 좋아하는 사람이나, 애인이라든가. 그것도 충분히 보통이잖아요.”
“보통…이라고요?”
“네. 보통.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요. 그래서, 선배는요?”
“보통…”
그토록 원하던 것을 이토록 보잘것없는 것처럼 입에 담은 적이 있었나. 요르는 왜곡된 보통의 정의를 의심하기보다는 가장 보통의 인간. 그러니까 그녀가 아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을 새로운 보통의 공식에 대입했다. 로이드 포저는 누구보다 평범하고, 그래서 요르가 동경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존재라서 그와 그의 선택은 언제나 요르에게 신뢰할 수 있는 정답이 되어 주었고 요르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지금 요르는 그가 어떤 이에게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다는 더없이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요르는 달콤한 오믈렛의 맛을 상기했다. 맛있는 식사도, 곧 다시 만날 것을 알고 나누는 인사와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반겨주는 온기와 다른 이의 흔적도. 매일을 지탱하는 크고 작은 약속들도. 전부 요르의 일상이 되어버린 것들이다. 분명 더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필요 없는 지금의 생활을 잃을까 봐 두려운 것이다. 요르를 그 집에서 나가게 할 수 있는 건 요르를 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였다. 그것이 요르가 그의 사랑을 목도하고 도망친 이유였을 것이다. 지겨울 정도로 되풀이되어 온 진부한 이유였지만 그게 아니라면 요르는 도무지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이렇게 눈물이 날 것 같은 이유. 비참하고 처량한 이유. 가슴 안쪽이 날카로운 모서리로 짓눌리는 것처럼 아픈 이유를. 길 잃은 하트가 아직도 나 이곳에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군요. 보통이군요…”
그분이 하는 사랑도 내가 시달리는 이 감정도.
보통 사람도, 그와 보통의 관계도 아닌 자신에게는 분명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해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이해해 주는 것처럼. 요르는 납득했다. 요르는 그렇게 짐작하여 단 한 사람에게 흘러가는 자신의 의식과 감각에 결론을 지었다.
“선배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에요. 선배 남편이 부족했겠죠.”
루안은 요르의 무엇도 아닌 대답을 무엇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그러나 왜일까. 그의 말에서 쓸쓸함이 옅게 묻어났다. 그럼에도 차분한 음성이었다. 요르를 이해한다는 듯, 그녀의 쓸쓸함을 가늠하여 위로해 주려는 것처럼. 하지만 그 건방진 배려가 요르에게는 안타까운 오답으로 들렸다. 그는 아마 요르가 깨달은 정답을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로이드 씨는 좋은 분이세요. 그분께 부족한 점은 없어요.”
그렇게 좋은 사람이니까, 사랑받는 거예요. 가족에게도. 누구에게나. 그러니까 나도, 로이드 씨에게 뭐든 돌려드리고 싶었던 거예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완벽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런 걸 꾸며내는 요령 좋은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거든요.”
루안의 희미한 미소가 꼭 자조처럼 보였다. 그는 로이드 포저가 한낱 좋은 사람 연기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에게 요르가 속고 있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요르는 이제 어쩐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중요한 건 좋아하는 사람이냐는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남편은 선배에게 정말 그런 사람인가요.”
사랑하는 사람… 요르의 퇴색된 하트는 의미를 잃어버리기 전에도 사랑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그랬다 하더라도, 그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를 기쁘게 할 수도 없는 것에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을 수 없었다. 부질없는 가정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 있는 거죠.”
“그런 거, …”
아니에요. 해야 하는 말은 분명한데 하지 못했다. 요르는 역시 또다시 로이드 포저의 생각을 했고, 소화되지 않는 그의 생각으로 목구멍이 꽉 막혀 버렸다. 맞아요. 다른 사람이 있어요.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요르에게는 거짓말보다 어려운 말이다.
로이드 씨에게는 ‘다른 사람’이 있다. 하지만 진짜 아내도 무엇도 아닌 자신이 감히 그렇게 칭할 자격은 없다는 걸 알아서 요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조금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견디는 게 요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자 갑자기 분위기가 조금 변했다. 정확히는 루안이 조금 변했다.
“아까 저한테 닮았다고 한 사람. 그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냥 좋은 사람인가요. 아니면 선배가 좋아하는 사람인가요?”
루안의 입에서 달려 나온 말은 루안이 하는 말 같지 않았다.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요르는 그렇게 느꼈다.
“선배가 직접 만든 초콜릿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하트 모양.”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루안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요르는 궁금해졌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단호하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요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래서 요르는 오히려 물어보고 싶어졌다. 제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까요. 아니, 사랑할 수 있을까요. 사랑해도 될까요.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로이드 씨처럼. 사랑을 해도 될까요. 지금 요르의 물음에 답해줄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이다. 피를 머리부터 뒤집어쓴 여자가 고개를 젓는다. 여자에게는 상처 하나 없다. 검은 드레스와 손안의 금빛 가시를 타고 피가 흘러 내린다. 바닥에 흥건히 고인 피 웅덩이에 요르의 표정 없는 얼굴이 비친다. 그렇다면 저는 사랑하고 싶은 걸까요. 여자는 아무런 말이 없다. 사랑받고 싶은 걸까요. 로이드 씨처럼. 여자는 잠시 뭐라 말할 것처럼 하다가 끝내 답하지 않고 그림자와 하나가 된 것처럼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여자는 도망쳤지만 요르는 도망칠 수 없다. 이번마저 도망칠 수는 없다. 도망치면 어떻게 될지 안다.
“다들 ‘그런’ 보통이시라고 해도, 저는 아니에요. 저는 애초에 보통을 잘 모르고. ‘그런’ 보통이 될 생각도 전혀 없어요. 그리고…”
그래요. 아무리 그게 보통이라고 해도. 지금의 포저 가가 아닌 다른 곳에 눈을 돌리는 건, 로이드 씨를. 아냐를. 모두를 배신하는 일이 될 테니까. ……그렇다면 저는 로이드 씨께 배신당한 걸까요. 도달하고 싶지 않았던 깨달음에 이르러 요르는 심장이 무겁게 뛰었다. 두근두근. 하고. 심장의 무게만큼 무거운 입술이 떨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건 저예요.”
“…남편이 사랑하는 사람이 선배가 아니라서 그렇다는 말인가요?”
요르는 움찔 입술을 떨었다. 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눈치가 빠른 그는 요르 본인이 말하면서도 그 말에 담긴 줄 몰랐던 희미한 의미를 바로 선명히 간파했다. 왈칵하고 눈앞까지 차오른 게 물기인지 열기인지 분간하기도 전에 요르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우리는 집을 나서면 사랑하는 부부여야 했다. 요르 브라이어가 잠시 포저의 성을 빌리고 있는 동안은, 요르 포저는 로이드 포저를 사랑하는 아내여야 한다. 반대로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역시. 두 사람은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다. 서로가 아닌 자신을 위해 나눈 약속이었다. 사람은 타인을 위해 약속하지 않는다. 요르는 자기 자신과 자신보다 소중한 동생을 위해 약속했다. 약속이 지속되는 중에 요르에게는 자신보다 소중한 게 늘었다. 돌아갈 수 있는 곳과 그곳에 머무는 이들. 그들은 요르에게 타인이 아니게 됐다. 그렇게 약속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전보다 견고해지고 요르에게 소중해졌다. 그것은 외면할 수 없는 진심이었다. 오직 요르 혼자만의 다짐이라 해도. 요르의 소중한 이가 되어버린 사람이 요르와의 약속을 배반한 것을 알아 버렸어도. 그는 여전히 요르의 소중하고 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일 것처럼.
그래서 요르는 이제서라도 루안에게 긍정할 수 없다. 긍정하면 약속을 어기는 것이 되고 부정은 곧 모순이 된다. 도망치지 않기로 했지만 어느 길을 골라도 막다른 길인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슬퍼지는 것이라고 요르는 생각했다. 약속한 역할을 완벽히 해낼 수도. 약속 없이도 소중한 것을 지킬 수도 없는 형편없는 자신 때문에. 그새 끝까지 차오른 물기인지 열기인지가 새어 나오려 하기에 두 눈을 찡그렸다.
“저는 로이드 씨뿐이에요.”
제 목소리가 너무나 나약하게 들린 탓에 결국 찡그린 두 눈을 꼭 감아버렸다. 요르는 이렇게 연약해질 수 있는 자신을 몰랐다. 나는 언제나 튼튼하고, 강하고, 괜찮았는데. 왜 이렇게 무력해지는 기분이 들까요. 그를 생각하면 강해지던 순간이 아직도 내 안에는 생생한데. 지금은 로이드 씨를 생각하면… 답답해요. 통증에는 강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칼로 가슴을 깊게 베였을 때도 느끼지 못한 통증이 지금에 와서야 느껴지는 듯 가슴 안쪽에서 욱신거리는 아픔이 퍼졌다. 마침내 심장을 도려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요르의 하트가 시린 칼날로 변한 것처럼.
“로이드 씨께 드리고 싶었어요. 저는.”
초콜릿이든 뭐든, 그분이 기뻐해 주신다면 뭐든지. 로이드와 약속한 적 없는 요르의 일방적인 마음이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물어 확인할 필요 없는 흔들림 없는 결심이었다.
요르는 로이드 포저가 될 수 없다. 그와 같은 경치를 볼 수 없고 그가 아는 것을 전부 알 수도 없다. 로이드 포저가 빌려준 가족의 이름과 방 한 칸을 차지하고 그의 시야 변두리에 거슬리듯 존재하며 그의 일상 일부를 구성하는 게 요르가 하는 전부다. 그러나 인사와 감사와 사과를 거듭하며 한 겹씩 정교하게 덧대어져 가는 일상 속에서 요르는 점차 로이드의 일부가 되어간다. 로이드 포저가 고른 경치 안에 존재하고 로이드 포저의 속마음을 조금 엿보기도 한다. 그래서 요르에게 점차 욕심이란 것이 자라난 것일지도 모른다. 초콜릿은 그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평범함으로 포장되고 감사라는 리본으로 묶인 뇌물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고작 그것의 달콤함 따위로는 그가 주는 행복의 맛과 견줄 수 없다. 로이드 씨가 만들어 주시는 오믈렛은 사심이나 사랑이 담겨 있지 않아도 달고 맛있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르는 그를 알고 싶었고. 그의 시선 안에 머물고 싶었고. 그에게 전하고 싶었고. 그를 기쁘게 하고 싶었다. 욕심이라 경멸당한다 해도. 그가 하는 사랑 앞에서는 비할 바 없이 작아지고 초라해져도.
요르는 고백한다.
“…정말 그분뿐이에요.”
남자에게는 그것이 마치 절절한 사랑의 고백처럼 들렸다. 그녀의 고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 조율되지 않은 울림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니더라도 모두가 그녀를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착각과 기대로 점철된 마음을 타인의 것이라 여기며, 남자는 이 사심 한 점 없이 사랑스러운 고백과 사랑스러운 여자가 자신을 망치고 머릿속을 헤집도록 둘 수는 없었다. 무릎을 굽혀서 요르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자신의 예쁜 눈동자 색은 요르의 소중한 사람을 닮았기에 예쁘다는 것을 요르에게 알려주었다. 남자의 고백은 간결했다.
“미안해요.”
“...뭐가요?”
“울지 마세요.”
“저 안 울어요...”
“정말로요.”
“네.”
“그런데 왜 떨고 계세요.”
“......”
“...울리고 싶지 않은데.”
두고 가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루안은 금방이라도 그렇게 할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의 손대지 않은 샐러드에 뚜껑이 덮였다.
“앞으로는 잘 못 뵐 거예요. 혹시 마주쳐도 모르는 척할 테니까 선배도 말 걸지 마세요.”
“왜, 왜요?”
“제가 차였으니까요.”
고백과도 같은 말에는 그저 요르를 놀리고 싶고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불순한 마음이 가득했다. 정작 요르는 영문을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등을 돌렸다.
“초콜릿이 아직 남아있었다면 내가 받고 싶었어요.”
“……”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거죠. 선배가 주고 싶었던 사람은 정해져 있으니까.”
“......”
“질투했어요.”
요르는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는 뒷모습을 붙잡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신 떠난 그의 말에 아직까지 붙들려 있었다.
남편이 사랑하는 사람이 선배가 아니라서 그렇다는 말인가요?
질투했어요.
창에 뿌옇게 김이 서리듯 장면은 떠오른다. 요르는 손에 든 것을 앞으로 건넨다. 혼자 오래 망설이느라 포장에는 그새 주름이 졌다. 그것을 망설임 없이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다정하게 웃으며 요르의 이름을 불러준다. 기뻐요. 경계하는 법을 모르는 듯이 환한 웃음을 요르에게 보여주었다. 요르는 초콜릿보다 훨씬 짙고 달콤한 냄새가 그에게서 나는 것만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이 장면을 요르는 다른 누군가의 시선을 빌려서 보고 있다. 모퉁이 너머에 숨죽이고 있는 누군가의 손에는 전해야 하는 사랑이 남아 애태우고 있다. 아마 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슬퍼하고 질투할 것이다. 이 사람은 로이드 씨를 사랑하니까. 그래도 결국 로이드 씨는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에게 사랑을 줄 줄 아는 건 이 사람이니까.
그러나 요르는 곧 자신이 아주 비겁하고 부끄러운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애태우고 슬퍼하고 질투한 것은 그 사람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요르의 마음이다.
……왜?
느긋하게 자문자답하고 있기에는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는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고 오믈렛은 절반이나 남아있었다. 타르트는 손도 대지 못했다. 음식을 남기면 로이드 씨가 걱정하실 텐데. 당장 그것보다 요르에게 중요한 건 없어서 남은 음식을 전부 먹어 치우고 도시락통을 깨끗하게 비웠다. 버려 버린다는 편리한 선택지는 없었다.
오른손은 타이프라이터에 올려둔 채 왼손만 슬며시 책상 서랍 안으로 넣었다.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어제 이후로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혹시 조용히 사라지지 않을까. 이대로 계속 가만히 둔다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럼 발렌타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도 잠시 했었지만 손에 스친 약간 거슬한 리본의 감촉이 요르를 현실로 돌려보냈다.
‘그것’을 조심스레 좌우로 쓸어보았다. 손끝으로도 느껴지는 그 볼품없음이 생생해서 요르는 조금 더 괴로워졌다.
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고 있는데도. 이건 뭘까. 도무지 알 수 없다. 대체 뭐길래 자신을 들뜨게 했고, 설레게 했고, 작아지게 하고, 약하게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이대로 들고 나가서 커다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기는 아주 쉬울 텐데. 그 쉬운 일을 할 수가 없다. 사라지지도 버려지지도 않는다.
그럼… 이대로도 계속 여기 남아있을 셈인가요.
남아서 영원히 나를 괴롭힐 건가요.
요르는 예감했다. 이 하트가 향할 수 있는 곳은 처음부터 오직 한 곳이었다고.
하트의 행방 中
하트가 아니더라도
Briar in the garden
정원의 브라이어 / 2024. 9. 21. 디페스타에 참가한 스파이패밀리 통합 쁘띠존 'MISSION: 오퍼레이션 《쁘띠존》을 완수하라'에 엽서 전프레 협력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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