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행방 上

하트를 주세요

커피 취향이 단연코 블랙인 사람으로서는 초콜릿이라는 것과 인연이 없어야 했다. 그러나 맑은 블랙에 아내가 준비해주는 우유가 녹아들면서 커피도 제 상태도 이전과는 달리 혼탁해진 것과 관계가 있는 건지. 혹은 딸이 좋아하는 코코아를 위해(즉, 임무를 위해) 최고급 카카오 원두를 구하러 홀로 비경으로 떠나기까지 해야 했던 이래의 현상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자는 베를린트에 찾아온 지금 이 한심한 초콜릿의 계절이 그저 싫지만은 않았다. 거리에서도 직장에서도 누구든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조금씩은 들뜨는 다소 이 어리석은 나날에 남자는 유례없이 너그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연기하는 <로이드>라면 응당 그래야 할 일이었다.

“벌써부터 난리던데, 발렌타인 데이에 포저 선생님한테 초콜릿을 주고 싶다고.”

정기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모으고 주위를 소란하게 만드는 사람이 절대 정숙해야 하는 병원 복도를 지나고 있는데도 다들 이해하고 마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베를린트 종합병원의 최고 인기인, 로이드 포저였기 때문이다. 

“아하하… 그런가요? 몰랐네요.”

로이드가 병원에 부임한 이래로 그의 열렬한 인기는 꺼지지 않았고 그것에 대응하는 로이드의 겸손함과 인기에 도통 익숙해지지 못하는 듯한 표리일체의 순박한 태도는 가식과 거리가 멀었기에 오히려 그의 끝없이 치솟는 인기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 매번 쑥스러운 듯 어색하게 웃지만 자신을 향한 부담스러울 정도의 호의와 관심조차 성가셔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로이드의 성품을 그의 동료나 선배 의사들도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포저 군 자네, 초콜릿은 좋아하나? 보아하니 한두 개 받을 건 아닐 거 같은데. 부인한테는 비밀로 해야겠어?”

“하하, 글쎄요. 단 음식을 그리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만…”

로이드 포저는 상사의 짓궂은 질문도 허허실실 웃어넘기는 성격 좋은 호인이었으나 그의 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가끔 그답지 않을 정도로 단호할 때가 있었다.

“그래도… 저는 아내가 주는 것만 있으면 충분해서요. 웬만하면 다른 건 사양하고 싶네요. 물론 제 딸이나 아내에게도 주는 거라면 얼마든지 감사히 받겠지만요. 저희 집 여자들은 달콤한 디저트를 무척 좋아해서.”

로이드는 그렇게 말하던 중 곧 민망해진 듯 머리를 조금 긁적이며 웃었다. 로이드의 상사는 그런 로이드의 멋쩍은 미소를 보며 그가 언젠가 다 함께 디저트를 나눠 먹으며 행복하게 웃던 가족과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음을 읽어냈다. 그는 내심 자신의 통찰력에 감탄하며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동시에 VIP들과의 다음번 식사 자리에서 추천할 인재의 이름을 기억해두리라 재차 다짐했다.

훌륭한 인품과 능력을 갖추고도 가정에도 소홀함 없이 아내와 딸을 각별히 아끼는 이상적인 남자. 그런 남자를 보며 신은 불공평하다며 불평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을 아는 그의 동료들은 그저 혀를 내둘렀다.

“이야, 역시 애처가는 다르구먼. 나랑은 다르게 아내한테서 초콜릿을 받을 거라는 자신감이 넘치는 게.”

“애처가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그저 아내가 제게 해주는 것만큼 저도 하는 것뿐인데요. 자신감 넘치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지. 자네네는 한창 신혼인 잉꼬부부였지 참. 

“그러니까요. 이야, 젊음이 부러워.”

“그만 놀려주세요, 정말 부끄럽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 복도를 울리는 경쾌한 웃음소리가 사라질 때쯤에는 다시 공간을 가득 메우기가 반복되는 그런 화목하고 평화로운 나날. 그것들은 전부 로이드 포저의 것이었다.

가볍게 묵례 한 후 각자의 연구실을 향하는 동료들이 통로 저편으로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 로이드 포저의 이름이 적힌 연구실로 들어서지만 로이드 포저는 그곳에 이미 없다. 로이드 포저라는 가면 아래 숨은 남자의 진짜 얼굴은 애처가도 가족을 아끼는 친절하고 유능한 의사도 아니다. 상대에게 그렇게 보여 주고 상대가 철저히 믿게 만들었을 뿐. 그리고 그것이 곧 스파이의 임무였을 뿐이다. 스파이 <황혼>은 베를린트 종합병원의 진료과장이 다음 목요일 저녁에 VIP들과 식사 예정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다른 ‘높으신’ 의사들에 비해서는 덜 무능하고 덜 부정하지만 직업능력 외적 요소에 많이 휘둘리는 성향이라는 것까지도. 지난 수 주에 걸친 공작은 로이드 포저의 이름으로 고위층 인간들과의 인맥을 쌓기 위한 것이었다. VIP 환자 진료는 이제 막 시작한 수준이었다. 진료실에 가만히 앉아 그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만 하기보다는 직접 자신의 진료실로 끌어들여 보기로 한 것이다. 외부에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데스몬드와 내통하는 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경계심 강한 데스몬드와의 공통 인맥 혹은 공통 화제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위험도와 성공 가능성을 점쳐본 후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제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음 주 목요일은 요르 씨에게 정시 퇴근을 부탁하기로 했다. 그날은 <로이드 포저>도 과장의 권유로 함께 식사에 참석하게 될 게 분명했으니. 물론 집에 돌아가기 전 적당한 선물을 준비해 그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공들이는 것도 놓칠 수 없다. 사소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앞을 내다보고 계획하는 것이 남자의 일이다.

황혼은 손에 넣은 신뢰를 뒤로 하고 배신의 증거를 찾았다. 로이드의 개인 연구실에 들어설 때마다 자리를 비웠던 사이 도청기나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진 않았는지 확인하는 절차는 목숨과도 직결되므로 매번 방심할 수 없었다. 책상 상판 아래, 가족사진이 들은 액자 뒤, 서랍 안쪽 구석까지도 살펴 안전을 확인한 후 착석하자 문밖에서 제 존재를 알리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똑. 또똑똑. 같은 편이다.

“들어와.” 

그가 예상한 대로의 인물이 등장했다.

“회의가 생각보다 늦어지셨군요. 또 부장 때문인가요.”

“회의 내용은 다 듣고 있던 거 아니었나?”

“도중에 WISE에서 급한 연락이 와서요. 부장의 별 볼 일 없는 골프 실력 자랑보다는 가치가 있는 쪽을 우선했습니다.”

“…그렇군. 자네 판단이 옳았어.”

병원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포저 선생님’ 앞에서 호의 혹은 허튼 사심 가득한 얼빠진 얼굴 대신 쌀쌀맞아 보일 정도로 냉담한 태도를 취하는 은발의 사무원은 포저 선생님이 사실은 의사 선생님은커녕 로이드 포저조차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몇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번에 부장이 배정해준 VIP 진료 스케줄을 기존 임무 일정과 조정해야 하는데, 리스트에 따르면 아쉽게도 이 VIP는 데스몬드와는 커넥션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인물입니다. 사양할까요.”

“아니. 그대로 진행해줘. 누구든 어떤 경로로든 쓸모는 생기니까. 부장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도 않고. 임무 일정을 조정해야겠어.”

“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아, 잠깐 기다려, <밤의 장막>. 방에서 나가려던 것을 다급한 어조로 둘만의(라고 사무원은 찰나 생각했다) 비밀스러운 이름을 불린다 해도 그 코드네임의 주인은 긴장과 기대로 제 몸이 미세하게 떨린 것을 누구에게도 들킨 적 없는 실력자였다.

부탁할 게 하나 더 있어. 눈으로 진료 차트를 훑으며 머릿속에 정보를 집어넣는 동시에 그와는 전혀 다른 생각과 말을 하는 건 이미 한참 전부터 스파이의 거창하지 않은 특기였다.

“<포저 선생님>은 초콜릿을 싫어하더라는 소문이 원내에 돌았으면 좋겠는데.”

“! 그런 때군요. 알겠습니다.”

황혼의 유능한 협력자는 그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혼은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눈치 빠른 후배가 편리했지만 그 후배가 자신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수만가지 망상은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날 당일은 퇴근 후에 아내랑 단둘이서 오붓하게 데이트 할 거라는 것도 같이.”

“…그것도,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달 14일 즈음이면 관리관님이 슬슬 정기 보고로 호출하실 무렵인 것 같은데요.”

“당장 보고가 급한 건은 없는 것 같아서, 만약 호출이 들어오면 스케줄 조정 부탁하지.”

“관리관에게 한소리 듣는 건 저입니다만…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날 무슨 다른 일정이라도? 그때쯤 진행하고 계실 별도 임무는 없을 걸로 아는데.”

“별다른 임무가 따로 있는 건 아니고. 그날은 진짜로 요르 씨와 데이트라서.”

“허…”

협력자, 아니 또 다른 스파이는 생각과 감정이 읽히지 않는 특유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도 한껏 노려보는 매서운 눈매를 숨기지 않았다. 황혼은 역력히 느껴지는 후배의 불만에 순간 긴장했지만 이미 정한 뜻을 굽힐 생각은 없었다.

“또 소꿉놀이 같은 걸 하고 있다는 트집 잡아도 소용 없어. 이것도 엄연히 임무에 필요한 자원 활용이다.”

“그럼 일전의 보고서를 그 전에 다 끝내시는 게 좋겠군요. 오늘 새로 들어온 자료를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묘하게 평소보다 크게 울린 문 닫는 소리를 후배의 이해할 수 없는 반항으로 알아듣고 몸을 흠칫 떠는 것도 잠시. 포저 선생의 얼굴을 한 스파이는 진료 차트를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빛 아래 사는 자라면 모두가 기다려온 2월 14일.의 전날 밤. 요르 씨가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달달한 잔향과 함께 귀가한 건 그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뛰어난 동체시력으로 아주 짧은 찰나에 드러난 요르 씨의 가방 내부를 빠르게 훑어 그 안의 빨간 리본으로 묶인 투명한 비닐 포장과 금빛 리본이 둘러진 짙은 빨간색 하트 모양 상자를 포착했다. 비닐 안에는 견과류가 박힌 초콜릿과 쿠키가 얼핏 보였으므로 아냐의 것일 테고, 하트 모양 상자가 제 것인 게 분명했다. 어서 와요, 요르 씨. 조금 늦으셨네요. 황혼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로이드 포저의 온화한 미소로 요르를 맞이했다. 요르의 어설픈 비밀을 꿰뚫은 날카로운 눈매를 그렇게 금방 지워버렸지만 스파이는 속으로 여전히 궁리했다. 발렌타인을 겨냥해 베를린트 시내에서 시판되고 있는 모든 초콜릿은 그 상표와 포장, 가격대와 맛까지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요르 씨가 준비한 것은 그녀의 수제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황혼은 그렇게 쉽게 확신에 도달했다. 지난번처럼 직장 동료의 도움을 받은 듯하고. 냄새도 안전하니 큰 문제 없겠지. …지난번처럼 쓰러진다거나, 그런.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독극물 내성 훈련을 받아왔으니 목숨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음. 가늠하기 어려운 위험성은 여전히 존재했으나 답지 않게 얼버무렸다. 

“다녀왔습니다. 죄송해요, 카밀라 씨랑 얘기가 조금 길어지는 바람에… 오늘 설거지는 제가 다 할게요.”

“아니에요. 요르 씨가 동료분과 충분히 즐기고 오셨으면 된 거죠. 설거지는 제가 이미 했어요. 요르 씨는 쉬세요.”

“우으으… 감사해요…” 

요르 씨는 풀죽을 때면 자주 양손 검지 끝을 맞대고 손을 꼼지락거리곤 한다.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은 그 가느다란 손가락이 스파이는 조금 전부터 신경 쓰였다. 집에 들어올 때부터 눈에 띄게 뻣뻣했던 그녀의 행동과 손에 남아 있는 옅은 화상흔적, 자상들을 굳이 보지 않았더라도,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의 노력과 정성은 단순히 위장 아내 역할 수행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것은 거짓말로 살아가는 스파이의 거짓 아내가 된 사람이 가식이나 허울을 꾸미는 일에 서툴다는 것을 언젠가부터 자연히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녀의 본모습은 그녀가 보여주는 것 그 자체라는 사실이 황혼을 안도하게 하면서 동시에 마음 놓을 수 없게 했다.

스파이는 요르의 모든 것에서부터 그녀가 주는 순수하고 성실한 친애의 마음을 느꼈다. 그것은 스파이가 로이드 포저를 그런 마음의 대상이 되기에 마땅한 인간으로 연기했기 때문에. 그리고 요르 브라이어가 본래 그런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혼에게는 어느 쪽이어도 상관 없었다. 숨기고 있는 선물 상자가 사실 하트 모양인 것도, 이성 동거인에게 선물을 준비했다는 이유로 평소보다 눈에 띄게 수줍어하는 요르 씨도 그에게는 어떤 의미가 되지 않는다. 임무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임무의 협력자와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시간과 자원을 할애해 공들일 뿐이었다. 요르 씨에게서 받을 초콜릿은 이웃과 직장 동료들에게 사이좋은 부부 사이를 과시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을 것처럼.

“요르 씨.”

“흐아앗, ㄴ, 네?!”

짧게 밤 인사 후 작게 하품하며 이만 방으로 자러 들어가려는 요르 씨를 불러세우자 예상보다 더 높이 흠칫 튀어 오르는 몸에 얇은 잠옷 원피스 자락이 커튼처럼 살랑였다. 

“내일 저희 데이트. 잊지 않으셨죠? 아침에 말씀드리기엔 저희 둘 다 정신이 없을 것 같아서.”

“앗, 네…! 물론이죠. 기억하고 있어요. 데, ‘데이트’…”

“퇴근 후에 저희 단골 의상실 앞에서 뵐까요. 근처 레스토랑의 디너를 예약했거든요. 지난번에 제 동료가 추천해준 곳인데… 아, 요르 씨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제 마음대로 정해서 죄송해요.”

“네! 아, 아니에요! 저는 다 좋아요! 아니, 그러니까… 지금까지 로이드 씨가 데려가 주신 곳은 다 좋았어서…”

“그럼 다행이네요.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혹시라도 제가 늦으면 추우실 테니 밖에 있지 마시고 근처 실내에 들어가 계세요. 아직 쌀쌀하니까요.”

“그럴게요. 로이드 씨도요.”

“네. 좋은 밤 되세요 요르 씨.”

“로이드 씨도 안녕히 주무세요.”

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문을 닫는다. 오늘의 연극이 막을 내리는 소리였다. 다만 요르 씨가 잠자리가 평안하길 바란 것은 진심이었다. 혹여 그녀가 컨디션을 망치기라도 하면 데이트는 또 다시 엉망이 되고 이는 (위장)부부 사이의 불화로 치달아 결과적으로 임무마저 위태로워질 것이다. 늘 그렇듯, 부부의 위기, 가정의 위기는 곧 세계의 위기인 법. 결코 과장이 아니라 굳게 믿고 있는 무결점의 계산식을 도출한 황혼은 그에 걸맞은 발렌타인 디데이의 데이트라는 이름의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전략을 생각했다. 흠 없이 완벽한 식사 후에 이어질 산책 루트와 각종 타이밍, 내일의 기상 상태, 꽃다발의 크기와 무게, 요르 씨의 의상과 어울리는 색으로. 요르 씨에게 건네는 타이밍. 요르 씨가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초콜릿을 받아들며 로이드가 지어야 할 근사한 미소. 더 이상의 실패는 없도록 요르 씨의 모든 취향 가능성을 고려한 플랜B부터 Z는 두 명과 한 마리가 잠든 고요한 밤을 틈타 빈틈없이 정교해진다. 

그것은 하트모양 초콜릿을 손에 넣기 위해. 임무를 위해. 평화를 위해. 

그리고 마침내 14일. 황혼은 당연하지 않은 일에 직면한다.

그는 예정대로 퇴근 후 의상실 앞에서 요르 씨를 만났고 여전히 데이트 세 글자에 면역 없이 삐걱거리는 그녀를 익숙하게 에스코트해 식당으로 향하면서 그녀가 어깨에 멘 가방이 돌출된 형태와 그 내부를 빠르게 살폈다. 사람의 행색이나 소지품을 몰래 훑어 파악해 추리하는 건 스파이의 오래된 습관이자 직업병 같은 것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제 생각을 읽지도 못 할 요르 씨에게 속으로 같잖은 변명을 둘러댔다. 

그런데, 없다. 

없어. 

없다고? 

요르씨의 가방이 비었다. 아니, 있는 건 있는데, 있어야 할 것이 없다. 티슈, 화장품이 담긴 파우치, 지갑, 시청 직원증, <로이드>가 추천했던 책. 지난주까지 읽던 상편에 이어 하편이다. 아마 아냐가 몰래 넣었을 땅콩 한 알. 아니, 두 알? 펜, 그리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침까지만 해도 분명 요르 씨의 가방에 들어 있던 하트가, 빨간색 하트가, 초콜릿이 없다. 깨달음과 동시에 식은땀이 황혼의 목덜미와 등에 스민다. 그렇게 황혼의 정교한 이성에 균열이 일어난다. 너무도 당연해서 변수로 상정한 적조차 없는 변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당장 그의 눈앞에서 현실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상하다. 오늘 아침 요르 씨는 내가 보지 않는 사이에 아냐에게는 어제 그 초콜릿을 선물했는데. …그럼 「내」 것은? 초콜릿을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렸을 수도 있다. 미안하지만, 요르 씨라면 충분히 그럴 법해.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길거리에 흔하게 널린 가게 어디든 들어가서 새 것을 준비할 수도 있었을 거다. …오후에 들어온 긴급한 추가 임무 때문에 약속 시간 정시보다 8초 늦어진 게 원인인가? 그새 나한테 정이 떨어진 겁니까 요르 씨?! …아니, 설마, ‘요르 씨’가. 내게 그럴 리가.

황혼에겐 언제나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을 시행할 지략도 능력도 갖췄다. 만약 계획에 없던 돌발상황이 발생한다 해도 0.1초면 대안을 마련하고 배역에 맞는 적절한 대사를 한다. “어… 요르 씨?” 그게 미처 생각지도 못한 치명적인 비상사태라 해도. “네?” 그게 바로 스파이 <황혼>이다. “그…” “?” 그래야만 했다. “……식사, 기대되네요.” 그래야 했는데... “네! 정말 기대돼요!” 요르의 미소는 늘 그러하듯 부드럽게 은은히 그녀는 입가에 스며들었다. 어떤 어그러짐이나 그늘 없이. 그 다정하고도 다정한 곡선이 가끔은 남자의 마음 안쪽까지 간질이곤 했다. 

아. 어쩌면 혹시. 그 순간 어떤 합리적 추측이 황혼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어쩌면… 그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전부 말이 된다. 황혼의 과열된 생각 회로는 거센 소나기라도 맞은 듯 빠르게 식어 들었다. “감자랑 새우가 들어간 그라탕이 이곳의 추천메뉴라고 하더라고요.” 요르 씨의 수줍어하는 듯했던 얼굴도, 몇 시간 새에 사라진 초콜릿도. 하트 모양도. 완전히 어긋난 줄로만 알았던 균열 사이에 이렇게 간단히 맞아 들어가는 퍼즐 조각을 왜 이제서야 찾아낸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와아, 빨리 먹어 보고 싶어요.” 요르 씨의 직장에. 혹은 그녀의 근처 다른 어딘가에, 요르 씨가 손수 만든 초콜릿을 받은 사람이 있다. 하트 모양. 만일의 경우도 있지만, 우선은 남자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타당하겠지. 그리고 그 사람은 아마 요르 씨가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한때 황혼이 제 것이라 착각했던 요르 씨의 연애 감정이 진짜로 향하고 있는 사람. “디저트로 나오는 구운 시나몬 사과도 드셔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한심하게도 방심했을 뿐이다. 정말로 고려하지 않은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요르 씨가 다른 남자와 나를 구분하는 선을 긋고 나만을 제외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럴 수 있나. 아무리 로이드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내게 연애 감정이 전혀 없다고 해도… 요르 씨. 가정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다른 곳에서 연애 감정을 품을 수 있을 만큼 요령 있는 사람이었던가. 내가 아는 요르 씨라면 절대로. 물론 절대라는 건 절대 없다는 것을 무지로부터 도망쳐온 날부터 남자는 알고 있었다. 여러 방면으로 서툴고 요령 없는 요르 씨를 황혼은 잘 알았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도 감히 쉽게 모욕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황혼이 아는 그녀였다. 다만 동서 양국에서 누구보다 가장 이성적이어야 하는 인간인 <황혼>의 가장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누군가 지금의 황혼을 객관 또는 냉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질책한다면 그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짧지 않은 몇 개월의 시간 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인간을, 그것도 임무에 쓰이는 인적 자원을 파악하는 것에 실패해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 그것은 일류 스파이로서도 당장의 임무 추진에도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그래, 황혼은 인정해야 했다. 스파이 실격이다. 

결과적으로 겉 포장이 빨간색 하트가 되어 버린 것을 지나치게 부끄러워하며 이는 결코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운 그녀의 본심이 아니라 우연일 뿐이라며 내게 이렇다 저렇다 핑계를 대느라 바쁠 요르 씨의 모습을 상상한 것이 바로 지난 밤이다. 그런 그녀를 이해한다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 안심시키는 이상적이고 신뢰할 만한 동거인의 자리를 공고히 하려 했던 남자가 있었다. 지금은 어디에도 없는 남자였다. 남자는 자신이 지독하게 바보 같아졌다. 황혼이 믿는 건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으니 탓할 수 있는 것도 언제나 자기 자신이었다.

세간에 속하지 않는 고매하신 스파이는 한 번 이용하고 말 여자에게서 그저 심장의 모양을 빗대어 만든 형태일 뿐인 것을 얻지 못해 이토록 안달하고 침착을 잃고 있었다. 배신 아닌 배신으로 느껴질 것도 같아 황혼은 마음을 다잡았다. 위장 아내가 위장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위장이 아닌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표현했다는 것. 황혼에게 중요한 건 고작 그런 게 아니었다. 당연하다. 이 사실을 혹여 이웃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동료들이 알기라도 한다면. 아내한테 기념일 선물도 못 받는 남편, 여자 마음을 붙잡지 못한 한심한 남자로 낙인찍혀 이상적인 남편과 유능한 동료로서 지금껏 쌓아온 평판이 한순간에 무너지겠지. 화목한 가정도 임무도 평화도 전부 끝장이다. 그에게는 이런 게 진짜 문제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황혼은 갑자기 속이 탔다. 이는 요르 씨 본인에게도 위험부담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녀가 원하던 평온한 일상과는 가장 거리가 먼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과연 그녀는 감당할 수 있을까. 요르 씨에게 그저 동거인일 뿐인 남자가 그녀의 선택과 그로 인해 위협받을 안위를 염려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황혼에게 작전을 위해서라면 고작 우스워지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이 다 됐다. 0.1초.

레스토랑에 들어서기 전, 로이드가 한쪽 팔을 구부려 요르에게 내밀자 요르는 아차, 하더니 연습한 대로 남편의 단단한 팔을 조심스럽게 붙든다. 일순 로이드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어색한 몸짓에도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무수한 상상이 피어올랐다. 피어오른 먹구름 아래 그림자가 짙었다.

“예약했는데요. 포저입니다.”

“미스터, 그리고 미세스 포저시군요. 준비된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갔다. 창가 자리의 예약석, 흠 잡을 것 없이 완벽한 식사, 누가 봐도 화목한 신혼부부에게 어울리는 약간 큰 장미 꽃다발, 당황과 기쁨이 섞인 그녀의 얼굴, 주위의 선망하는 시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걷는 둘 사이의 적당한 거리.

단 하나만 빼고.

등을 타고 기어오르는 묘한 초조함과 안쪽에서 끓는 질투는 남자가 로이드라는 배역에 심취한 탓이었고, 어쩌면 그 초콜릿이 하트 모양만 아니었더라면 됐을 일이었다. 황혼에게는 핑계가 아니었다.

그 하트의 행방을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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