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행방 中

하트가 아니더라도

베를린트에서, 아니 오스타니아에서 가장 발렌타인이라는 것과 인연이 없는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요르는 자신있게 나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발렌타인’이요…?”

“…뭐죠? 꼭 처음 들어 본 단어인 것 같은 그 반응은?”

겍, 카밀라가 질린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부서 여성 직원들 모두가 꺼리는 과장의 커피 시중은 요르가 ‘브라이어’이던 시절부터 맡고 있었고 그녀 뒤로 후배가 셋이나 들어왔으나 그 귀찮은 심부름의 담당은 안타깝게도 변하지 않았다. 요르의 탓은 아니었으나 그들이 그녀의 요령 없음을 알아본 탓이었다. 틈을 타서 탕비실에 모여드는 여직원들은 혼자서 커피를 타는 요르의 존재를 잊어가며, 가끔은 떠올려가며 자기들만의 화제로 영양가 없는 수다를 떠는 것이 따분한 일터에서의 몇 없는 낙이었다. 그러니까, 남친이 자꾸 만들어 달라고 눈치를 줘서 말이야. 정말 귀찮아. 그래서 어떡할 거야? 사서 포장만 바꾸고 내가 만들었다고 할 거야. 우와, 최악이네. 어차피 남자들은 멍청해서 그런 거 잘 몰라. 본인은 행복할걸? 샤론은 어떡할 건데? 대충 적당히 사서 남편이랑 애한테 하나씩 주려고. 의외로 성실하네? 안 그럼 뒷일이 귀찮아지니까. 카밀라는? 나는 뭐… 하던 대로 만들어서 주려고. 카밀라 남친은 좋겠다~ 나도 카밀라가 만든 거 받고 싶은데.  뭐?! 귀찮아! …뭐, 남으면 생각해보고. 아무튼, 요르 선배는 그 나이가 되도록 발렌타인데이를 모른다고요? 결혼도 했는데? 주전자의 물이 다 끓었을 무렵 자신의 비정상성이 다시금 도마 위에 오르자 멍하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요르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바, 발렌…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긴 한데요… 발… 발레? 요르는 과장의 전용 컵에 커피를 따르며 엉뚱한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으나 그녀의 후배들은 요르의 영문 모를 순진함을 그리 오래 기다려주지 못했다.

“설마, 요르 선배. 남편한테 기념일 챙긴 적 없어요? 연애 시절에도?”

“너무해~”

“그러고도 정말이지 잘도 결혼했네요.”

“아, 아뇨! 어… 어, 얼마 전에 1주년 결혼기념일(가짜)에 케이크를 같이 먹었어요! 딸기가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였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그러니까 그런 자랑은 됐다고 했잖아요. 선배네 부부 사정은 정말이지 안 궁금하다니까!”

“앗, 죄송해요…” 

한때 카밀라는 요르가 어떤 모진 말에도 상처받지 않는 따분한 로봇 같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는 로봇치고는 계산이 없었고 바보처럼 순진해서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면이 있었다. 그걸 꽤 나중에 깨달았다는 걸 스스로도 알았지만 굳이 곱씹지 않으려 애쓰기도 했다. 금방 조금 시무룩해져서 둥글게 말리는 그 작은 어깨를 애써 못 본 체하며 말을 이었다. …2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라고, 애인이나 남편, 사랑하는 사람한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에요.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요. 퉁명스럽던 말투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서서히 누그러지고 있었다. 이미 이 시점에서 이 곰탱이 같은 여자의 수작 아닌 수작에 휘말린 것이라고 카밀라가 깨달은 것은 조금 뒤 탕비실을 나선 이후의 이야기였다.

“사, 사랑하는 사람한테요…?!”

“고백하면서 초콜릿을 준다거나.”

“고백?!”

“작년 발렌타인데이에 남편이랑 데이트 안 했어요?”

“자, 작년은… 음……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로이드 씨가 14일 저녁에 데이트 하자고 해주셨는데… 설마 이게 발렌타인이라는 건가요?”

“…설마 그게 발렌타인일걸요.”

“선배 남편이 불쌍해~”

“좀 심하네요.”

“아우우…”

“몰랐으면 이제부터라도 남편한테 선물해보면 되잖아요? …뭐, 좋아할지도 모르죠.”

“…발렌타인데이에 ‘남편’에게 초콜릿을 주는 건 보통인가요?”

“지극히 보통이거든요? 오히려 지금껏 발렌타인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보통이 아니에요.“

초콜릿을 주는 건 보통…! 로이드 씨가 그날 데이트에 불러주신 것도 그게 바로 그날의 보통이기 때문이었군요! 이제야 알았네요… 남들 같은 ‘보통’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엇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대담한 구석이 있는 요르는 ‘보통’을 위해 발렌타인이라는 미지에도 기꺼이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문제는 도전 상대가 되어줄 동거인과 자신의 사이가 ‘보통’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었다. ‘데이트’는 그에게서 직접 배운 보통의 일이라 예외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해심 많은 그분이라도 보통이 아닌 관계에 보통 사람들이나 하는 일을 요구한다면 결례가 될 것이다. 떠올리기조차 부끄러워지는 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는 더더욱. 

“저, 카밀라 씨. 혹시 그, 사,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초콜릿은 줄 수 없나요? 그러니까… 만약 ‘사랑’이 아니라면… 초콜릿은 필요 없나요?“

…이게 이렇게 절박하게 물어보기까지 할 일인가. 카밀라는 요르가 이런 식으로 나올 때면 유독 마음이 약해져서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그게 영 내키지 않아서 매번 곤란했다.

“…꼭 그런 관계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 친구나 가족, 평소 신세 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초콜릿으로 감사를 전하기도 하니까요.”

“그렇군요…!”

정말 다행이라는 말은 몰래 속으로만 삼키려 했지만 요르의 얼굴에는 대체로 순간순간의 감정이 투명히 드러나서 안도와 기쁨을 만면에 피웠다.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고, 친구나 가족이라 하기도 어렵고, 한마디로는 설명이 어려운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관계지만 항상 신세 지고 있고 늘 감사한 분. 계약 남편이라고 명명하는 게 맞겠지만 그저 단순히 계약 관계로만 여기고 대할 수는 없을 정도로 과분한 분. 요르의 계약 남편은 요르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로이드는 평범한 사람치고는 평범한 사람과는 달랐다. 요르의 남들과 다르고 이상한 점마저 긍정해 주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남들과 다른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가족을 사랑하고,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부족하고 한심한  요르에게도 마음을 써 주는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사람. 로이드 포저. 그는 요르와는 달리 세심하고 요령이 좋은 사람이라 굳이 공들여 애쓰지 않고도 그 모든 다정함을 해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둔하고 서툰 자신은 아무리 애써봤자 그가 내게 해 주는 것만큼 그에게 할 수 없을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싶었다. 부족해도 보답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로 계약 남편과 계약한 적은 없는데도. 이미 계약 이상의 것을 그에게서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이드 씨라면 이해해 주시고 어쩌면 조금은 좋아해 주실지도 모른다. 요르가 그런 기대를 품게 만든 것도 그였다. 그렇다면 더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카밀라 씨. 그럼 그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은 ‘보통’ 어떻게 구하나요? 제일 좋은 걸 드리고 싶어요!”




호기롭게 도전한 보통의 허들이 너무 높아서 조금 포기하고 싶어진 건 요르에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발렌타인데이의 전날 저녁. 요르는 퇴근 후 오랜만에 카밀라의 부엌에 방문했다. 그럼 우리집에 오든가요. 제일 좋은 건 아닐지 몰라도 남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어차피 정해져 있거든요. 도미니크에게 선물할 초콜릿의 맛을 봐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담담히 말하는 카밀라의 얼굴이 조금 붉었다. 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요르는 이유가 핑계인 것도 모르고 그렇게 눈치 없이 초대 아닌 초대에 응했다.

이날 요르는 요리를 몇 번을 망치고 그때마다 혼이 나고 또 조금 많이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그녀의 손에서 탄생한 물질을 초콜릿이라고 겨우 인정받을 수 있었다. 드디어 손에 넣은 성공에 감격스러운 듯 환하게 웃는 요르에게 카밀라는 여전히 심드렁한 낯빛으로 말했다. 선배. 이건 그냥 초콜릿이에요. 네! 초콜릿이에요! 그러니까, 발렌타인데이엔 그냥 초콜릿으로는 부족하다고요. 네?! 뭐가 부족한가요? 하트예요. 하트…요? 네. 하트. 카밀라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하트와 초콜릿 사이의 연관성. 요르는 자신이 일생 고민해 본 적 없는 문제에 카밀라가 내놓을 모범답안을 기다렸다.


“카, 카밀라 씨… 이거… 전부 하트인데요?”

“네? 당연히 전부 하트죠. 그냥 의리로 주는 초콜릿이 아니잖아요? 남편인데.”

“아… 그, 그렇긴 한데요…….”

“선배네는 러브러브잖아요. 이 정도는 해야죠.”

“아웅!! 아니에요! 저희는 그냥… 싸우지 않고 사이가 좋을 뿐이고…”

“그게 러브러브예요. 짜증나네.”

러브러브. 부끄러운 그 말처럼 초콜릿을 담아서 굳히는 틀과 초콜릿을 포장할 상자는 모두 빠짐없이, 카밀라가 말한 대로 하트 모양이었다. 아무리 순진한 요르라 해도 그 형태에 담긴 의미를 모를 정도로 바보는 못 됐다. 그저 작고 가벼운 상자일 뿐이지만 평소의 감사를 담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다. 요르는 전하려던 감사는커녕 부담을 주고 마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요르가 속뜻이 의심스러운 선물이 가져올 배드 엔딩을 상상하며 꼭 망친 초콜릿처럼 울상을 짓고 있는 동안에도 사랑을 전하는 사랑스러운 모양의 초콜릿에서 달콤한 냄새가 주방에서 진동했다. 

그래도. 모양은 크게 상관 없겠죠. 로이드 씨는 이해해주실 거야. 맞아, 분명 그럴 거예요. 비록 부정하고 싶던 사심 바로 그 자체를 뜻하는 형태가 돼버렸지만 사심이나 속셈이 있는 건 절대 아니라고, 그 말을 꼭 함께 전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요르는 걸쭉한 초콜릿으로 하트 모양 틀을 가득 채웠다. 적당히 채워야 한다고 카밀라가 지시했지만 그 적당히라는 것의 정도를 몰라서 어설프게 실패하고 허둥거리기를 반복했다. 고마워요, 요르 씨. 요르의 머릿속을 채운 건 초콜릿의 수상하고 괴상한 생김새와는 관계없이 초콜릿을 받아 들고 지어줄 그의 멋진 미소와 온화한 음성이었다. 요르는 초콜릿에 곁들일 땅콩을 잘게 부수며 가슴 안쪽을 떠나지 않는 이유 모를 설렘을 가라앉혀보려 했지만, 이후 남동생이 사는 아파트에 들러 그 애를 위한 초콜릿을 손에 쥐여주고 나올 때가 되어서도 그 묘한 들뜸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심장 근처에 머물렀다. 늦은 밤 집으로 향하는 길, 요르의 가방 표면에는 불룩 튀어나온 하트의 실루엣이 선명했다. 요르 나름대로 열심히 숨겨볼 생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비밀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좋은 밤 되세요 요르 씨.”

“로이드 씨도 안녕히 주무세요.”

늘 하는 밤 인사가 딱히 특별할 이유도 없는데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 하나로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로이드 씨와의 데이트는 처음이 아니었고, 이제 전보다 익숙해질 법도 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건 아마 심장을 닮은 빨간 하트의 탓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에서 꺼내 고이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것을 요르는 이제야 다시 마주했다. 로이드 씨가 뭐라고 하실까요. 좋아해 주시면 좋을 텐데… 요르는 그런 생각을 기도처럼 외우며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는 어째서인지 아무리 달려도 몸이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아 그가 기다리고 있을 약속 장소에 도달하지 못했다. 분하고 분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잠에서 막 깼을 땐 맺혀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꿈속의 불행은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다.




 

14일의 오전. 요르는 선물을 들고 베를린트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로이드를 위한 것도, 하트도 초콜릿도 아니었다. 다만 속셈의 무게가 묵직했다. 그럼 이것도 보통인 걸까요. 그런 의문을 입 밖으로 내면 어떤 시선을 받는지, 스물일곱이 된 요르는 안다. 환영받지는 못해도 그저 남들만큼은 하고 싶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베를린트 시청의 전前 제1국장이 지병의 재발 때문에 입원한 게 얼마 전이다. 그 소식은 시청 내부에 빠르게 퍼져 마치 행사라도 치르는 것처럼 부서별로 돌아가며 그의 병문안을 빙자한 얼굴 한번 내비치기 쇼를 했다. 당장 죽을병이 아닌 이상 언제 정계에 다시 진출할지 모르고 언제 다시 나의 상사가, 상사의 지인이 될지도 모르는 자에게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눈에 비추고 이름을 귀에 읊어주는 것이 낫다는 계산을 제1국 소속 사무원 요르 포저를 제외한 모두가 하고 있었다. 요르의 상사 또한 무능하지만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그의 병실에 방문할 준비를 부하들에게 시켰다. 그 준비 중 하나였던 것이 선물과 꽃을 든 여자였다.

당일 요르 포저가 ‘여자’로 선택된 것은 상사가 그녀의 업무 능력을 높게 쳐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상사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몇 없는 여성 사무원이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말하지 않는 의중까지 수지타산으로 계산하지 않는 순진함을 순종으로 착각하는 남자는 요르의 주변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었고 요르는 그 착각에 개의치 않고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커피 시중과 자질구레한 우체국 혹은 은행 심부름에 이어 ‘여자’ 역할까지 받아들였다. 꽃과 선물을 운반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과장에게 넘겨준 후 적당히 병실 구석에 장식품처럼 서 있다가 또 나가보라는 손짓 하나에 나가 높으신 분들의 길고 지루한 이야기가 끝나기를 또 적당히 기다리는 것까지가 일이 과장과 여러 남자들에 달려온 ‘여자’의 일이었다.

병실 문을 닫음과 동시에 밀리가 재빨리 표정을 바꿨다. 으, 순 역겨운 아저씨들뿐이에요. 꽃향기라도 없었으면 분명 기분 나빠서 토했을 거예요. 선배는 시선 못 느꼈어요? 요르와 동행한 밀리는 조금 전까지 요르의 옆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밀리가 말한 그 묘하게 끈적한 시선을 요르도 못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살기가 아닌 이상 반응해 봐야 얻는 게 없었다. 밀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여튼 남자들은 술이랑 뇌물이랑 여자 없으면 일을 못 한다니까요.”

“어… 술은 없었는데요?”

“술은 퇴원하면 그때부터 바로예요.”

“그렇군요…”

“뭐 잘됐어요. 내일은 행사 때문에 온종일 바쁠 테니까. 오늘은 이런 거나 따라와서 좀 쉬어야죠.”

미리 예약해둔 디저트를 찾으러 가야 한다며 밀리가 유니폼 투피스 위에 퍼코트를 걸쳤다. 저녁에 남자친구에게 줄 선물이라고 했다. 역시 그게 보통이었군요… 어머, 선배. 이건 보통보다 훨씬 비싸고 좋은 거예요. 밀리가 단추를 다 잠그고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멜 때까지 요르는 보통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선배 남편, 여기서 일하는 의사 아니었어요? 잠깐 보러 가서 편하게 있어도 되잖아요. 어차피 저 사람들 나오려면 시간 좀 더 걸릴 거예요.”

“아, 아뇨! 나, 남편…은 일이 바쁠 거 같아서… 그리고 이따가 퇴근하면 데이트하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지금 벌써 만나러 가기는 조금……”

조금 민망하다고나 할지… 만나면 할 말을 모르겠다고 할지… 다급히 손사래 치던 요르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치맛단만 괜히 꽉 붙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필사적으로 뭔가를 견디고 있는 것 같아서, 밀리는 나이로도 경력으로도 인생의 단계로도 선배인 사람이 사실은 한참 초심자나 다름없었다는 걸 알아버린 후로는 전처럼 마음껏 비웃어 주기 어렵게 돼 버렸다. …뭐예요? 애들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아아~ 역시 선배 평소엔 재미없어.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선배도 적당히 놀고 계세요. 하고는 밀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훌쩍 떠나 긴 복도를 유유히 걸어갔다. 왼손을 팔랑팔랑 흔들면서 멀어지는 밀리의 뒷모습에 대고 요르가 꾸벅 인사를 했다. …요리도 일도 노는 것도 ‘적당히’군요. ‘보통’의 다음으로는 ‘적당히’가 요르의 어려운 숙제가 되어 주었다.





밀리가 떠난 지 10분이 되어가지만 요르는 여전히 병실 근처 3인용 의자의 가장 끝에 앉은 채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병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그들끼리의 은밀한 대화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드문드문 그녀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 일을 적당히 완수할 심산이었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 그 사람을 찾아온 사람. 저마다의 사정으로 같은 공간에 머물렀다가 가는 사람들이 가끔씩 시야 안에 들어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중 무엇도 담아두지 않고 흘려보내던 요르가 보이지 않는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말소리에 사로잡혔다. 속닥거리는 듯 작은 소리였지만 요르의 귀에는 단번에 들어왔다. 그들은 요르의 이름을 몇 번씩 불렀다. 하지만 그게 자신을 부르는 게 아니었다는 걸 요르는 이내 알았다. 요르에게는 그 이름을 빌려준 사람이 있었다.


아까 누가 또 포저 선생님 찾아가서 줬대.

초콜릿?

초콜릿.

받았대요?

받았을 리가.

아, 포저 선생님 초콜릿 같은 단 거 싫어하신다고 들은 거 같은데. 원래도 단 걸 즐겨 드시는 것 같진 않더라고요.

그거 다 아는데도 주려고 찾아간 사람들이 대단한 거야. 워낙 좋은 분이니까 뭐든 다 받아줄 줄 알고.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그래도 자기 분수를 알아야지.

다들 전부 속셈이 있으니까요. 선생님이 그걸 모르시겠어요? 받아줄 리가 없어요. 설령 초콜릿을 좋아하셨다고 해도 안 받았을걸요.

애 달린 남자한테 속셈이라니. 정말 싫다.

애 말고 유부남인 건 상관 없는 거예요?

원래 아내 달린 게 애 달린 것보다 나아. 갈아치우는 게 버리는 것보다 훨씬 쉽거든.


작은 말소리들은 점점 요르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대화 끝에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복도를 짧게 울렸다가 급히 자취를 감추듯 사라졌다. 사라진 소리와는 반대로, 코너를 돌면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은 요르의 존재를 눈치채고 이번에는 작게 놀란 기색을 숨기며 반대쪽 복도 멀리까지 빠르게 요르의 시야 밖으로 빠져 나갔다. 그들의 복장과 목에 걸린 사원증을 보아하니 이 병원의 직원인 것 같았다. 요르는 그들이 포저 선생님이라고 부른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만 병원에서의 그를 요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저 상상에 맡길 뿐이었다. 요르의 상상 속 그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흰 셔츠 위에 흰 가운을 걸치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런 모습이 요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무렵 직접 목격했던 구타 치료를 하는 그의 모습보다도 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상상 속 로이드의 미소와 그를 둘러싼 인물의 형상이 더욱 선명해졌다. 일터에서의 로이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대화를 방금 우연히 들은 덕이었다.

‘역시 로이드 씨는 직장에서도 인기가 많으시군요. 다들 로이드 씨의 좋은 점을 알고 계시는 거겠죠. 로이드 씨는 멋진 분이니까…’

로이드 씨는 언제나 어디서나 자상하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옅은 상상이었던 것이 짙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뒤이은 것은 뒤늦게 불현듯 요르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하는 또 다른 깨달음이었다. 

요르는 로이드에 대해 잘 몰랐다.

사실은 당연한 일이었다. 요르가 그에 대해 모르는 건 당연했다. 알 필요가 없었다. 서류상 부부인 로이드 포저와 요르는 생활공간을 공유하며 한 아이의 양육을 함께하는 협력 관계에 불과한 사이다. 따라서 그 이상 서로에게 갖는 관심은 불필요한 간섭이었다. 특히 요르는 ‘진짜’ 가족인 아냐와 로이드 사이에 개입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기 때문에 이해관계와 서류로 묶인 가짜 부부에게는 절로 유지되는 거리감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거리감이 가끔은 좁게,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깝게 느껴지는 때가 있는 것은 로이드가 요르에게 언제나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만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이 좋은 사람은 요르가 내색하지 않는 건 금방 알아주면서 자신의 일은 전혀 요르에게 내색하지 않는다. 사소한 힘듦이 그의 이유가 된 적 없고, 약한 소리 싫은 소리는 요르에게 들려주지 않는다. 부족한 요르에게 이상적인 아내 역할을 종용하지 않으면서 요르의 이상적인 남편 역할을 아주 자연스럽게 또 그게 아주 당연한 듯이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요르에게도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비록 생판 남은 아니게 되었지만 진짜 가족도 아니니까. 진짜 가족을 대하는 것만큼 그는 요르를 대할 수 없는 것이다.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것처럼 싫은 내색도 하지 않는 그에 대해 요르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고 물을 수 없던 것들도 많았다. 그러나 로이드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전부 로이드가 끝을 헤아릴 수 없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라, 요르는 그를 탓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이게 무슨 말이냐면, 요르는 로이드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전혀 몰랐다. 몰랐다는 사실에 자신이 이렇게 충격받을 줄도 몰랐다.  

초콜릿을 싫어하신다면, 그렇다면 분명 제가 드리는 것도…. 거절하시겠죠. 아니면 거절하기 미안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주시고는 혼자 곤란해 하실지도 몰라요. 새 로운 상상 속의 로이드 씨는 약간 곤란한 듯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못해 요르가 주는 것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요르의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는 로이드 씨가 제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요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요르에게는 마음을 읽는 초능력 같은 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데이트에는 불러준 그가 초콜릿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그에게 참고 억지로 먹게 하는 것도, 쓰레기통이나 다른 사람에게 몰래 버리게 하는 것도 그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할 것이라 생각하면 요르는 또 다시 아내로서의 자격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이제 그를 조금 알게 된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아니었다. 자신이 로이드 씨에 대해 아는 것보다 로이드 씨가 자신에 대해 알아주신 것이 더 많다. 회사의 동료보다 아내라는 자격을 가진 자신이 그에 대해 잘 모른다. 요르는 어쩐지 조금 슬퍼졌다.

‘나는 그저 내가 ‘보통’이 되고 싶었던 거예요. 보통이 되고 싶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려 해버린 거군요.’ 속셈 따위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속셈보다 더 큰 욕심이 있었던 거다. 

언제부터 자신은 그의 힘든 내색을 느끼고, 약한 소리 싫은 소리를 듣고 싶어진 걸까. 잘 모르겠다. 이것도 욕심일까. 요르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려 자기 발끝만 봤다.






병원은 요르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넓고, 로이드가 일하고 있는 정신과와 요르가 있는 곳은 다른 병동이다. 요르가 이곳에 방문하게 된 건 갑자기 정해진 일이라 로이드에게 알리지 못했다. 따라서 만날 일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렇기에 요르가 로이드를 마주친 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정확히는 요르의 일방적인 발견이었고, 그것은 분명 우연이었다.

병동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심부름으로 커피를 사서 돌아가는 길이던 요르를 멈춰 세운 건 친숙한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는 요르의 이름을 담지 않았지만 요르는 그 목소리를 향해 돌아섰다. 어쩌면 계속 기다리고 있던 목소리였다.

로이드 씨.

로이드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요르는 본래의 목적지를 잊고 그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홀린 듯 천천히 발을 옮겼다. 밀리에게 말한 건 핑계가 아니었다. 갑자기 만나면 어색할지도 모르고 할 말이 마땅치도 않을 텐데, 알면서도 그를 만나러 가는 걸음이 멈추진 않았다. 

분명 몇 발자국 남지 않았을 때, 그의 것이 아닌 다른 목소리가 함께 들려 왔다. 어라, 로이드 씨 혼자가 아니셨군요. 다른 의사 선생님이실까요.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요르는 소리 없이 서서히, 하지만 망설임 없이 모퉁이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일하는 중이든, 그를 잘 모르든, 그래도 역시 기회가 된다면 아주 잠깐이라도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요르가 ‘포저 선생님’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드디어 만난 현실의 포저 선생님은 옆얼굴만 겨우 보이는 뒷모습이었지만 요르는 자신이 만나고 싶었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어떤 여성과 함께였다. 또각, 하고 구두굽 소리가 났다. 여자는 한 발짝 더 가까이 로이드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선물 상자로 보이는 네모난 것을 로이드에게 건네자 그는 그것을 주저 않고 선뜻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하고 기쁜 듯 미소 짓는 입꼬리가 보였다. 역시 요르가 잘 아는 미소였다.  

그러나 요르에게 허용된 건 딱 거기까지였다. 봐서는 안 될 걸 보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 엄습했다.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참은 숨을 함부로 내쉴 수도 없었다. 들켜 버리니까. 감추고 싶은 것 전부. 죄책감과도 비슷하지만 조금 달랐다. 느닷없이 밀려온 높은 파도에 덮쳐진 것 같았다. 최대한 기척을 지우고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말 그대로 도망이었다. 현장의 목격자를 살려두지 않는 건 언제나 요르였다. 


생각에 빠진 채 걸으면 꼭 막다른 곳에 다다른다. 머리가 벽에 부딪히기 직전에 두 발이 멈춰선다.

‘…초콜릿이었어요.’

1미터도 되지 않던 둘 사이를 가로질러 로이드의 손에 들어온 그것은 요르가 언뜻 보기에도 세련된 포장지로 정갈히 싸여 있었다. 그 위에 붙은 라벨은 요르가 백화점에서 몇 번 스쳐 지나간 적 있는 고급 초콜릿 전문점의 로고였다. 모든 게 명백해서 다른 가능성의 여지는 없었다.

요르가 두 눈으로 본 것은 명백했지만 그것을 머릿속에서 소화시키는 데 시간이 걸렸다.

로이드는 흰 가운이 아니라 편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모두’라고 뭉뚱그릴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의 호의를 사기도 하지만 특정한 누군가 단 한 사람과의 거리가 아주 좁다. 싫어한다던 초콜릿은 흔쾌히 받았다. 어쩔 수 없다는 얼굴도, 곤란해 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요르는 어디서부터 의문을 가져야 할지 모를 정도로 의문이었다. 두 사람 사이 간격이 좁아질 때 숨을 들이켰다. 손과 손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서 혹여 닿을까 긴장했다. 그가 할 법한 말과 지을 법한 미소인 걸 알면서도 뭔가 거짓말처럼 이상했다. 요리 중 실수로 남은 작은 계란 껍데기가 가슴에 박힌 것처럼 따끔거리고 있었다. 정돈되지 않는 머릿속은 소란했다. 요르는 자신이 지금 무슨 마음인지 왜 이런 마음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신은 로이드 씨가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로이드 씨라면 당연히 기뻐해 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요르가 보고 싶었던 얼굴을 그가 보여준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이것마저 욕심이었나 생각하면 조금 서러워졌다. 

분수를 알아야지. 로이드가 들어본 적 없는 낮은 목소리로 요르에게 말했다. 그를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멋대로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요르도 알았지만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로이드는 지겹다는 듯 한숨 쉬었다. 

어딘가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그가 받는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알게 된 것 같았다. 사랑은 하트가 아니어도 전할 수 있었다. 요르의 하트가 사랑이 아닌 것처럼. 사랑 앞에서는 이유가 무력해졌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는 초콜릿을 싫어하는 이유와 거절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멋진 일이다. 그리고 그분은 사랑받기 마땅한 멋진 분이라는 걸 요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어느 것도 요르가 도망친 이유가 될 수 없어서 요르는 꼼짝없이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겨우 고개를 들어도 막다른 벽이었다. 무작정 멀리 달아난 탓에 요르는 돌아가는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야 했다. 거의 다 식어버린 커피는 환영받지 못했다.




사무실에 돌아온 요르는 남은 오후 시간을 내내 멍하니 보냈다.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리는 요르의 손가락은 자주 멈췄지만 이내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그 지겹고 익숙한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금방 퇴근 시간이 됐다. 약속 시간은 30분 후. 사람들은 특별하면서도 지극히 보통인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평소보다 서둘러 자리를 나섰다. 손에는 하나씩 작은 짐이 들려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요르는 모두가 퇴근하고 텅 비어버린 사무실에 혼자 남아있었다. 약속한 시각이 다가온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절로 울리던 두근거림이 사라졌다. 심장 박동을 잃어버린 듯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적막하고 어둑한 가운데 오래 망설인 끝에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 들었다. 어제와 같은 포장, 같은 모양인데 이제는 그 형태에 담긴 의미라는 것이 희미해 보였다. 의미도 없이 무용지물이 된 하트를 책상 서랍의 안쪽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요르는 아무런 사심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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