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5)

009. 제 4구역 광산

[쥰은 그래서 이제 괜찮은거야?]

마력으로 불러낸 통신 아티펙트 너머로 히아센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늑대는 쥰의 방에서 조금 떨어진 테라스에 있었다. 방금까지 한바탕 난리가 있던 것 치고 날씨가 좋았다. 그게 어딘가 아이러니해서 점차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붉은 빛이 여자의 눈동자와 어딘가 닮아있었다.

'괜찮아. 그 사람들은 이제 여기 없어.'

이레시아가 아이를 끌어안았을 때 낮게 가라앉았던 눈이 떠올랐다.

그 말이 정말 쥰을 향해서만 했던 말일까.

'약속했잖아. 너를 무섭게 하는 건 내가 전부, 죽여버리겠다고.'

언제 쥰에게 그런 깜찍한 약속을 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뭐, 처음부터 쥰이 따르던 사람은 이레시아 한 사람뿐이었지.

두 사람이 무슨 이유에서 서로에게 끌리게 된 건지는 몰라도. 아니, 쥰은 부모를 잃은 부재에 그렇다고 쳐도 이레시아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 우는 게, 신경 쓰였으니까.'

2년 전, 사경을 헤매는 쥰을 보며 가만히 중얼거리던 음성이 귓가에 걸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쥰은 그저 몇 번 보고 지나쳤던 고아 중 한명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처음으로 절박한 감정을 내비쳤다.

그리고 끝자락에서 찾아낸 아이의 생사를 장담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레시아는 조용히 침묵했다. 아니, 조용히 침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순간 조금 내비쳤던 속내를 아직도 늑대는 기억하고 있었다.

'나도 그곳에 계속 혼자 있었으면 그랬을 건데... 그 사람이 찾으러 온 게 기뻐서.'

붉은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그게 닮아서...'

그리고 흐르는 눈물 같은 건 모르겠는 듯 그녀가 웃었다.

'... 그런데도 날 죽이려고 한 게 너무 웃겨서.'

테라스 난간을 잡고 있던 늑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곳이 어딘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 못했다.

그 여자 자신은 모르는 것 같이 보이지만, 쥰을 자신에게 빗대어 보고 있었다. 그럼 이레시아를 죽이려 한 자는 누구였을까.

이레시아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금방 진정됐어. 돌아가는 대로 쥰의 진료 상담 잡아줘."

[말 안해도 그러려고 했거든?]

너는 몰라도 쥰은 걱정되니까.

히아센이 퉁명스레 덧붙였다.

[템페스토한테 연락해둘게. 그 인간 안 그래도 요새 할 짓 없다고 혼자 만드라고라 해부하고 있더라.]

"여전히 미친놈이네."

[... 너만 할까. 이레시아는?]

"쥰이랑 같이 있어."

[아니. 그거 말고.]

히아센이 무얼 묻는지 알아챈 늑대가 입을 다물었다.

플라티나의 치료사인 템페스토는 쥰의 주치의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의 정신 치료도 담당하고 있었다.

[몇일 전에 또 그랬다며.]

티파의 도시로 떠나기 전날 있었던 일을 묻는 게 분명했다.

밤새 무슨 악몽을 꿨는지 모르겠지만 독한 술을 들이키는 걸 보고 그 손을 붙잡았었다. 그러자 또 묻는 말이란.

'너도 날...... 죽, 일 거야?'

엉망으로 갈라진 목소리가 떠오르자 늑대의 눈매가 작게 찌푸려졌다.

"... 어차피 기억 못해."

정말이였다. 그녀는 늘상 그다음 날이 되면 자기가 울었다는 것 조차 모르는 듯 했으니까.

죽이지 말라고 애원하던 말도, 잘못했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모두 잊어버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건, 모두 잊고 다음날이 되면 웃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이따금씩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늑대는 그게 뭔지 알고 있었다.

어딘가 고장 나버린 사람은 그런 식으로 제 속을 감추는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장 났다. 어딘가 한 구석이 뭉개져서 그 상처가 없던 원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그와 똑같이 말이다.

[정신은 육체보다 약해서 놔두면 곪아터질거야. 아무리 이레시아가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퍽이나. 그리고 오히려 제가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 숨기려 들겠지."

지금도 가면을 쓰고 뭐든 숨기려 드는 게 능숙한 여자인데.

같이 지내온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늑대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확실히 아는 거라곤 이레시아가 오버(Over)에서 꽤나 높은 신분이었다는 것과 누군가에게 죽을뻔한 것을 뿌리치고 도망쳤다는 것 정도였다.

[이레시아만 말하는게 아니야. 너도 마저 상담 치료 받아야 한다고 템페스토가 그러더라.]

"필요 없어. 그 자식한테 상담 받을 때마다 구역질이나."

속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구역질이 나고, 그렇다고 아무 말 안 하고 듣고만 있자니 구역질 나는 소리만 해댔다.

[왜? 뭐라는데?]

"너한테 말하고 싶지 않아."

[어련하시겠어...]

아티펙트 너머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느새 노을은 더 짙어져 황혼의 시간이 가까워갔다.

"됐고, 아까 말한 것들이나 최대한 빨리 알아봐."

[예예. 누구 말씀인데요.]

고집은 진짜 더럽게 세어.

히아센이 툴툴거리며 비아냥거렸지만 더 이상 그 문제를 꺼내진 않았다.

[그나저나 꺼림직하네. '현자의 돌'이라니. 너희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려고?]

"여관 사람 중에 실종 사건 관계자가 있는 것 같아서 거기부터 조사해 봐야지."

프리실라와 아이린의 실종된 조부. 거기부터 조사를 시작해야 했다. 늑대는 남은 잡담을 정리하고 통신 아티펙트를 닫았다.

록하트 산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어쩐지 탁한 듯 느껴졌다.

+++++

"여기에요."

아이린이 낡은 지도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 4구역 광산이라고 표시된 위치는 프리실라와 아이린의 조부가 실종됐다는 곳이었다.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고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히아센에게 부탁했던 정보를 받아보기 전까지 시간을 때우기엔 알맞은 장소였다. 가만히 지도를 주시하던 이레시아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여긴?"

"거긴 빈민가요. 언니, 정말 마법사가 아니에요? 하지만 아까 분명 마법을 썼잖아요."

그새를 못 참고 궁금증을 터트리는 아이린의 질문에 이레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가느다란 검지 손가락이 조그만 이마 위를 가볍게 올려 쳤다.

"아야!"

별안간 딱밤을 얻어맞은 아이린이 이마를 쥐어 잡았다.

"마법이 아니라 주술이란다, 꼬마야. 그리고 그 호칭 좀 어떻게 안될까?"

"우우... 하지만 그럼 뭐라고 불러야..."

"이레님이라고 부르렴."

"이레님, 저기 그러면..."

딱밤 한방으로는 아이린의 호기심을 억누르기에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이레시아는 팔짱을 끼며 짧은 한숨을 흘렸다. 원하는걸 말해 줄 때까지는 계속 조잘댈 거 같으니.

"그래. 도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니, 꼬마야?"

"마법이랑 주술이 뭐가 달라요? 마법이 아니랬잖아요."

뜬금 없이 제게 눈높이 교육이라도 바라는 걸까? 쥰과 마찬가지로 겁도 없이 희한한 꼬마였다. 아무리 그녀가 지금 매혹의 힘을 억누르고 있는 상태라 해도 어린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감이 좋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을 느끼고 거리를 두는 게 대부분인데. 넉살 좋은 것 만큼은 히아센과 비교해도 좋을 정도였다.

희안한 것을 본다는 눈으로 아이린을 응시하던 이레시아가 마침내 입술을 열었다.

"둘 다 마력을 사용한다는 뼈대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수식을 사용 유무의 차이지."

"수식이요?"

"수식을 써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는 드물어. 오히려 비효율적이라고 보는 이들도 적지 않지.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보이지 않는 팔 하나가 더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체내에 있는 마력을 움직이는 거니까."

"체내에 있는 마력?"

"내게 보여줬던 그 물방울. 수식을 써서 만들어냈던 거니, 꼬마야?"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머릿속에서 떠오른 것이 별안간 튀어나온 것뿐인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아이린이 고민에 휩싸였다.

"설명하기 어려운 게 당연해. 마법사들에게는 인간이 자유자재로 신체를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거든."

그러니 마법사에게 마력이란, 보이지 않는 팔 하나가 더 있는 느낌이라고 설명하는 게 가장 좋았다.

"반면에 주술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지. 체내에 있는 마력을 그대로 끌어다가 사용한다기 보다는, 그걸 가지고 무언가에 간섭한다고 설명하는 게 좋을까."

예컨데, 주술사들에게 마력이란 잉크와 같았다.

"주술사들의 마력은 수식을 토대로 움직이거든."

최대한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하며 이레시아가 파이프 담배를 집어 들었다. 곧이어 입에 늘상 달고 다니는 그 수식을 읊었다.

"Brevis(간략한). Lampas(등불)."

파이프 담배 끝에서 작은 수식이 아른거리더니 불씨가 일어났다.

"오오!"

아이린이 눈을 반짝거렸다.

"주술사에게 수식은 기본적인 대기의 흐름이나 중력, 저항력을 무력화 시키는 학문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편할까."

쉽게 말하자면 수학과 똑같다고 말할 수 있었다.

"대기 중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도 함께 떠다니고 있거든."

아무것도 없는 대기 중에서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먼저 대기의 성질부터 알아야 했다.

"평소의 대기는 아무것도 일으키고 싶지 않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과 서로 균형을 맞추면서 있기를 원하지. 우리는 그 흐름을 깨트리는 거야. 쉽게 말하자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두 물질 중에서 마력 쪽에 더 힘을 실어준다는 거지."

"힘을 실어준다니... 보이지도 않는 데 어떻게 힘을 실어준다는 거예요?"

아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연에는 자연의 섭리라는 게 있어. 진리 같은 거지. 우리는 그 대전제의 절대적인 공식에 반박하는 공식을 짜는 거야. 아무런 불씨도 없는 어느 공간에 수소와 산소가 밀집해있다... 라는 가정을 세우는 거야. 사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지."

물론 그 대전제의 절대적인 공식과 수식을 이해하는 건 각자의 기량에 따라 달랐다. 진리를 더 깊게 이해한 쪽이 더욱 강하고 순도 높은 마력을 끌어다가 쓸 수 있으니까.

"거기에 보이지 않는 먼지가 도화선이 되고, 술사가 내뱉는 마력어가 불씨가 된다는 가정이지."

"그게 가능해요?"

"절대적인 공식을 계속해서 비튼다고 생각하면 돼."

그리고 말에는 힘이 있지. 심지어 사람이 그냥 내뱉는 언어에도 미약한 힘이 있다고들 하는데, 술사가 내뱉는 말에 아무 힘도 없을 리가 없잖아?

"그러다가 어느 순간 팽팽하던 두 물질 중에서 한쪽에 조금이라도 힘이 실린다면..."

파이프 담배 연기가 뿌옇게 내뱉어졌다.

"자연적이지 못한 일이 일어나지."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굳이 왜 그런 귀찮은 중간 과정을 거치는 거냐고 묻는다면...

"술사가 가진 마력과 더불어 대기 중의 마력까지 합쳐진 거대한 섬광 따위도 쉽게 날릴 수 있다는 소리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연비가 좋다는 뜻이었다.

"와아..."

"대전제에 반박하는 공식에 답은 없어. 누가 어떻게 수식을 짜느냐에 따라서 달라지지."

그래서 주술사와 문제가 엉키는 일을 다들 성가셔하는 거였다. 만일 주술에 걸리면 풀고 싶어도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수식을 조합한 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이레시아는 제 발목에 걸린 족쇄의 주술을 떠올리며 말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봐도 성가신 수식이였다.

"어찌 보면 주술은 연금술과는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지."

"굉장해요! 저도 할 수 있을까요?"

"대전제에 대한 진리를 이해한다면 가능한 일이지."

"그럼 엄청나게 큰 마법도 마구 사용할 수 있겠네요?"

"글쎄..."

이레시아는 잠시 말을 고르며 파이프 담배를 내려놓았다.

"왜요? 수식이란 게 복잡해서요?"

"수식과 대전제의 진리를 떠나서, 마력을 운용하는데 중요한 건 가지고 있는 개개인이 가진 마력의 용량과 '사이드 이펙트'를 감당할 수 있느냐거든.

"사이드 이펙트?"

... 궁금한 게 정말 많은 꼬마네.

이레시아는 약간의 피곤함을 느꼈지만 인내심 있게 다시 입을 열었다.

"마법사나 주술사나 마력을 사용하는 건 똑같아. 그리고 그건 '진리'라고 하는 대전제를 흔들고 무너트리는 일이어서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사이드 이펙트'라고 하지."

마법사든 주술사든 연금술이든,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작은 마력을 쓰는 일에는 부작용이 없지만 큰 마력을 연속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사이드 이펙트'가 생겨. 몸에 부담이 오거나, 수식대로 마력이 움직여주지 않거나."

"그럼 마법사 언니... 아니, 이레님도 큰 마법은 한번 밖에 사용하지 못해요?"

아이린이 재빨리 그녀의 호칭을 정정하며 물었다. 이레시아가 눈매를 살짝 찡그렸지만 더 이상 잔소리를 덧붙이진 않았다.

"나야 수식 정도는 더 정밀하고 상세하게 바꿔서 마력을 움직일 수 있긴 하지만..."

똑똑.

이레시아가 말이 노크 소리에 멈췄다. 문밖에서는 늑대의 기척이 느껴졌다. 벌써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마력 운용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충분할 테니.

"나머지는 아카데미에서 배우도록 하렴 꼬마야."

이레시아가 아이린의 머리칼을 가볍게 흐트러트리고 일어났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는 너울 모자와 외투를 걸쳤다. 그리고 쥰의 이마에 키스를 떨어트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해가 졌으니, 움직일 시간이었다.

"다녀올 테니, 말 잘 듣고 있어, 아가."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린과 뚱한 얼굴의 쥰을 뒤로 하고 그녀가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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