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4)

008. 혹시 새끼 고양이 좋아하니?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이레시아가 프리실라에게 들은 건 약혼자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다. 설마하니 약혼자는 죽고, 조부는 이번 사건에 휘말려 실종 상태라는 건가? 게다가 아직 한참이나 어린 동생까지.

이레시아의 눈빛이 깊어졌다.

짊어지고 갈 것들은 많고, 앞날은 가시밭길이 따로 없는 여러모로 기구한 인생의 여자네. 게다가 아까 골목에서 위협했던 그 사내들은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그녀를 괴롭힐 것처럼 보였는데. 아름답고 가녀린 여자는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꽃길이 얼마나 이쁘려고 가시밭길이 이렇게 혹독할까... 라는 말도 이런 곳에 붙이긴 어려울 듯싶네.

아이린은 제 옷자락을 꾸깃꾸깃 붙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 거짓말 아니에요."

한참을 말이 없는 이레시아가 거절을 표하는 걸까 싶어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 프리실라 언니는... 경비원들이 할아버지를 찾아줄 거라고 했는데, 아직도 아무 소식도 없단 말이에요."

"울지 말아줄래? 우는 소리는 딱 질색이어서."

아이린은 얼른 소맷자락으로 벅벅 눈가를 닦아냈다. 그래도 한번 터진 눈물이 자꾸만 흘러 아이린은 한참을 훌쩍였다. 이레시아가 물끄러미 아이린을 내려다봤다.

원래 요 나이대 아이들은 잘 우나? 아니면, 인간의 아이들이 잘 우는 편인 건가?

"보통은 다들... 힝, 달래주는데... 프리실라 언니도 그렇고..."

아이린이 의지와 상관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이레시아를 힐끔거렸다.

"난 '보통'이 아닌가 보지. 그리고 우리 아가는 달래주면 더 울던데."

항상 저를 졸졸 쫓아다니는 울보가 한명 떠올라 그녀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원래도 잘 울지만 달래주면 오히려 더 눈물을 쏟으며 매달렸다.

그게 귀여워서 가끔은 일부러 울릴 때도 있긴 했지만.

두 어살 차이라...

이레시아가 눈앞의 꼬마를 한 차례 훑어봤다. 그녀의 눈 위로 흥미가 작게 올라와 앉았다.

"그래서 내가 도와주면 넌 뭘 해줄 거니, 꼬마야?"

"이레시아."

늑대가 그녀를 말리려 들었으나 이레시아는 뭐 어떠냐는 듯 웃어 보였다.

이미 죽어 송장이 됐을지 어떨지 모르지만, 어느 쪽이던 찾아주면 그만인 일 아닌가. 마침 실종자들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한 참이기도 하고.

"제 이름은 아이린이예요."

"그래, 꼬마."

제대로 불러줄 생각이 없거나, 이름 따위 기억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아 아이린이 입을 삐죽거렸지만 구시렁거리진 않았다. 오히려 제 부탁을 수락한 것에 안도하는 눈치였다.

"... 제가 뭘 해드릴까요."

"혹시 새끼 고양이 좋아하니?"

이레시아가 손에 든 파이프 담배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늑대가 작게 한숨 쉬는 게 들렸지만 그녀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작고, 경계심 많은 새끼 고양이가 있는데... 그 아이를 잠깐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거든."

아이린이 영문 모를 얼굴로 두 눈을 끔뻑거리다가, 종전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 정도야. 여관이다 보니 근처에 남은 잔반을 먹으러 오는 길고양이들도 많았다.

"할퀴거나 하나요?"

"아니. 그냥 잘 울어. 잘 숨고."

"그 정돈 괜찮아요. 저 좋아해요, 새끼 고양이."

"그래?"

"네. 귀엽잖아요."

그 대답을 기다린 걸까. 이레시아가 눈물 젖은 아이린의 뺨을 닦아주며 미소를 지었다. 마침 좋은 역할 하나가 비어 있었다.

아이린이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를지 모르겠지만.

+++++

그러니까 이 꿈은... 몸이 좋지 않거나 할 때면 찾아오는 열병 같은 거였다.

평소에는 바다 밑의 상자 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것이 허물어진 의식 위로 떠올라 이따금씩 그 뚜껑을 열어버리는 것이었다.

쥰은 자신을 침대 밑에 숨겨두고 괴이에게 목이 잘린 제 부모의 꿈을 꿨다. 그리고 기적처럼 목숨을 건진 게 우습게도 인신매매에 팔려 가 죽을 날을 기다리던 그날의 기억까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던 또래들이 한명씩 웬 사내들의 손에 끌려가 산채로 배가 갈렸다. 작은 아이들의 뱃속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신체들은 여러 곳으로 팔려 갔다.

그들의 죽기 전에 지르던 단말마를 쥰은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두 귀를 틀어막고 우는 일뿐이었다.

저들이 제 부모의 목을 자른 괴이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다음은.."

쥰은 제 앞에서 멈춘 그림자를 보고 겁에 질렸다. 쥰의 눈에 이미 그들은 괴이보다 더 무서운 괴물이었다. 이빨이 와들와들 부딪히고 바지에 실례를 했다. 남자의 손이 우악스럽게 쥰의 머리칼을 붙잡아 피가 흥건한 침대 위로 끌어올렸다.

진득한 피가 엉겨 붙은 침대 위에 팔다리가 묶였다. 눈앞에서 잘 갈린 칼이 번들거렸다. 그 날붙이가 자비 없이 내려 찍히는 순간 쥰이 비명을 질렀다.

"허억...!!!"

쥰이 식은땀을 잔뜩 흘리며 눈을 떴다. 아무도 없는 방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밖에서는 삐그덕거리는 계단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오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쥰은 달달달 이빨을 떨며 네발로 기어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눈물을 줄줄 흘리며 머리를 감싸 안았다.

'잘못했어요. 오지 마세요. 제발 오지 마요. 잘못했...'

그러나 발소리는 방문 앞에서 멈추는 게 들렸다. 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끼이익. 기어코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리고...

"히끅...!!"

쥰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숨을 들이마셨다.

"... 아가?"

이레시아가 멈칫하며 구석에 온몸을 욱여넣고 달달 떠는 쥰을 발견했다.

"아..."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그의 보호자가 보였다. 자신을 산채로 배를 가르려고 했던 남자들이 아니라.

"으아아앙!!!"

그녀가 놀란 얼굴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쥰이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그녀의 품에 안겨들었다. 숨이 넘어갈 듯 꺽꺽거리며 옷자락을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작은 온기가 그녀의 품을 파고들며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녀를 뒤따라 들어 오던 아이린은 놀라서 문 앞에 덩그러니 못 박혀있었다. 난생처음 듣는 괴로운 비명소리에 저도 모르게 두 귀를 틀어막았다. 머리칼이 쭈뼛 서고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

한참동안 이어지던 비명과 같은 울음이 점차 잦아들었다. 아이린은 바짝 굳은 몸짓으로 천천히 틀어막은 귀에서 손을 뗐다.

"히윽...! 히끅...!"

곧 넘어갈 것 같은 숨소리가 점차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흐으... 끅..."

그게 심장이 찌르르 떨리도록 안쓰러워서 이레시아는 쥰의 볼에 키스를 떨어트리며 속삭였다.

"괜찮아. 그 사람들은 이제 여기 없어."

새빨게진 눈가로 쥰이 그제서야 눈을 마주쳤다. 이레시아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약속했잖아. 너를 무섭게 하는 건 내가 전부..."

죽여버리겠다고.

아이린이 흠칫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쥰은 그 말이 무섭다기 보다는 오히려 안심되는 말로 들렸다. 아름다운 그의 보호자이자 가장 큰 안식처. 다른 이들에게는 손가락질 당하고 욕을 먹는 괴이일지라도.

차가운 손이 열이 오를 눈가를 쓸어내렸다. 그게 시원해서 쥰은 얼굴을 더 비비적거렸다.

"이, 레님..."

"그래. 여기 있어."

작게 딸꾹질을 하며 쥰이 긴장된 몸에 힘을 풀었다. 잔뜩 흐려졌던 눈동자에 점차 초점이 돌아오는 게 보였다. 이제 좀 안정된 듯싶었다.

이레시아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쥰을 안은 채 침대 이불을 끌어다 몸에 둘러주었다. 한바탕 발작해서인지 몸이 조금 찼다.

"이제 들어와도 돼."

그 말에 아이린은 번뜩 정신이 든 듯 몸을 움찔거렸다. 함께 문밖에 밀려나 있던 늑대는 그런 아이린을 한번 쓰다듬어 주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조심스레 쥰의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쥰. 괜찮아?"

"... 아오."

어디 갔었어.

쥰이 다시 눈을 글썽거리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늑대는 작은 손을 잡으며 눈가에 작게 주름을 잡았다.

"... 아오 아니라니까."

늑대가 한숨 섞인 어투로 중얼거렸다. 왜 남의 이름을 자꾸만 바꿔서 부르는지.

늑대씨라던지 늑대 울음소리라든지, 그의 이름과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다. 이레시아는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당신 이름은 쥰이 발음하기에는 좀 어려울걸?"

"너도 허구한 날 '늑대'라고 부르잖아."

"어머, 자기의 일족은 늑대의 후손이라고 불리던 자들이니까 영 틀린 말도 아닌걸."

"늑대 일족이 나 한명만 남아있는 건 아닐 텐데."

"그건 그렇지."

'플라티나'에 있는 늑대의 쌍둥이 동생을 떠올리자 이레시아의 눈매가 구겨졌다. 허구한 날 웃는 낯짝으로 제 성질을 긁어대는 얼굴이 떠올랐다. 늑대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 하는 짓은 영 딴판이었다.

"... 유랑이 당신의 반만 닮았어도 좋았을 거야."

"왜 그 녀석은 이름으로 부르지?"

"설마 질투해? 당신 이름은 침대 위에서 불러주잖아."

왜 또 얘기가 그렇게 빠지는 건지. 질투가 아니라 사람 이름을 멋대로 이상한 단어로 부르는 걸 지적하는 것인데. 사람 말을 전혀 들어먹지 않는 여자였다.

티격태격하는 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아이린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새끼 고양이라고 했던 건 그녀의 은유였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퍽 잘 울고, 잘 숨는다는 고양이가...

"아... 안녕?"

"?"

쥰이 표정을 찌푸리며 이레시아의 품에 얼굴을 폭하고 묻어버렸다.

"어디... 아파요?"

"... 죽이지 못한 과거가 자꾸만 이 아이를 찾아오거든."

그러니 잊을만하면 자꾸만 찾아와 그때와 똑같이 몇번이고 죽이려 드니 마음이 나을 틈이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경우는 시간을 되돌려 정말 수십번 죽은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아이에게 찾아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덜 아프다는 건 아니였다.

떠올릴 때마다 매번 현실일 테니까. 매번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아플 테니까.

이레시아는 가슴 언저리 어딘가가 까맣게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품 안의 아이가 안쓰러워서인지, 저 자신이 안쓰러워 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일단은 이 이상 상처가 곪지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쥰은 그녀와 지내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말을 잃은 채 였다. 그나마 틈틈이 동화책을 읽도록 시키고는 하지만 그녀 역시 한가하지 않은지라 옆에서 계속 봐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이레시아가 고개를 기울여 아이린을 내려다봤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옆에서 계속 말을 걸어주고, 챙겨주고. 동화책을 읽는 걸 도와주렴."

"... 동화책이요?"

이레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단기간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물며 의뢰를 나오면 그녀나 늑대나 여러모로 정신이 없어서 그 사이에 쥰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다른 때 같으면 히아센에게 부탁했을 텐데, 그는 이번 의뢰에 동행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쥰의 상태가 이러하니 고생 좀 하겠지만 말이지.

어딘가 비장하고 긴장된 얼굴로 아이린이 침을 집어삼키는 게 보였다.

"할 수 있겠니?"

"네!"

아이린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솔직히 비슷한 또래 아이가 이런 상태라 하면 도망쳐버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레시아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쥰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쥰은 금방이라도 다시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억지로 아이린을 보게 되었다. 딱 봐도 모르는 사람은 싫다는 게 얼굴 가득 담겨있었다.

"귀엽지? 인사하렴."

그런 쥰의 의사는 간단히 무시하며 그녀가 팔불출 같이 덧붙였다.

"쥰 디벨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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