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골파티

엔란 by 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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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 토독하고 경쾌한 소리가 창문을 두드린다. 종이 서류에 시선을 두고 있던 란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보았다. 한 방울, 두 방울 창문을 따라 또르륵 떨어져내리던 빗방울이 곧 굵어지더니 유리를 온통 적시고 만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곧 퇴근 시간이기는 했다. 이엔은 이미 집에 들어갔을 시간이긴 한데... 잠깐 고민해보던 란은 휴대폰을 꺼내 느릿느릿 이엔에게 메신저를 보내본다. 비오는 것 같은데 어디야? 밖이면 데리러 갈까? 오타를 내지 않기 위해 짧은 문장임에도 신중하게 작성하게 된다. 스마트폰은 터치식이라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오타가 나버린단 말이지... 누구에겐지 모를 변명을 하며 전송을 누르면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온다.

[전 집이에요!]

그리고 귀여운 강아지 이모티콘. 이모티콘까지 꼭 닮은걸 쓴다니까... 란은 다정한 표정으로 잠시동안 그 이모티콘을 바라보았다. 퇴근을 위해서는 계속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만. 그는 곧 휴대폰을 내려두고 보고 있던 서류를 다시 집어들었다. 이걸 끝내면 집에 가서 이엔을 꼭 끌어안을 수 있으니까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오늘도 제 일만은 금방 해치우고-절대 야근이나 잔업만은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가장 먼저 사무실을 나선다. 칼퇴를 고수하는 그의 태도에 초반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냥 집을 좋아하는 사람 정도로 굳어졌기 때문에 같이 저녁을 먹자거나 권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차에 탈 때쯤에 란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톡, 토독. 톡. 라디오 소리 대신 시원한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주의깊게 운전을 했다. 전에는 옆에 누군가를 태우지 않으면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었지만, 이엔과 함께 지내면서 나름 제 보신에도 신경쓰게 된 란이었다. 운전에는 제법 능숙한 덕에 여태 작은 사고도 낸 적이 없지만. 신호등을 따라 잠시 멈춰선 란은 빗소리에 맞춰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문득 오늘 저녁 메뉴로는 전골을 끓여도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무슨 상관관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제법 좋은 생각이라고 믿은 그는 바로 집으로 가기 전에 근처의 슈퍼마켓에 잠시 차를 멈췄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한 손에 장 본 것을 들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들듯 달려온 이엔은 우선은 란을 꼭 끌어안으며 어서오라고 인사를 건넸다. 란은 제 품으로 뛰어드는 따뜻한 체온에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끼며 사르르 웃어버리고 말았다. 다녀왔어. 보고싶었어요. 나도 보고싶었어. 기껏해야 출근했다 퇴근하는 거면서 한달은 출장다녀온 사람인척 인사를 나누다가, 이엔은 뒤늦게서야 란 손에 들린 봉투를 발견했다.

"이건 웬 거예요?"

"아... 저녁에 전골 할까 하고..."

"저랑 같이 가시지..."

"저녁이 너무 늦어질까봐... 이엔 배고프면 안 되잖아..."

조금 불만스러워보이는 이엔에게 가볍게 볼 뽀뽀를 남기고 란은 장 본 것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이엔은 언제 불만스러워했냐는 듯 뺨을 살짝 붉히고는 후다닥 그 봉투를 제가 잡았다.

"준비해두고 있을테니까 씻고 나오세요!"

"아, 맡겨도 되려나..."

"당연하죠."

"그럼 부탁할게... 금방 씻고 나올테니까..."

차를 타고 다녔기에 비를 거의 맞지는 않았지만 왔다갔다 하면서 조금쯤 젖어버리기는 했다. 머리끝부분이 살짝 젖어 곱슬거리고 있었다.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란은 순순히 욕실로 향했다. 잠시 후에, 이엔이 재료를 손질하고, 가스 버너를 꺼내둘 즈음에 란은 뽀송하게 김이 오르는 채로 욕실에서 나온다. 금방 말렸기 때문인지 습도가 높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머리가 복슬거리는 기분이었다. 이엔은 그 모습에 잠시 마음속으로 귀여워하고 만다.

"아, 준비 끝났어? 이엔한테만 맡겨서 미안하네..."

"별 거 하지도 않았는데요. 머리 잘 말린 것 맞죠? 잘 안 말리면 감기걸린다구요."

"잘 말렸어... 만져봐봐."

이엔의 손을 가져와 제 머리 위에 얹어두면, 이엔은 짐짓 엄하게 검사라도 하는 듯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준다. 란은 조금 기분좋은듯 고르릉 소리라도 낼 것 같은 표정이었다.

"형님.... 너무 귀여워...."

"이젠 마음 속으로 말하지도 않는구나..."

"하지만 귀엽단 말이에요!"

"그래그래, 난 귀여워..."

란은 대답하면서 재료들을 냄비 안에 차곡차곡 쌓아 넣었다. 고기와 채소, 버섯과 두부, 곤약 등을 잘 쌓아두고 나니 금방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거실에 가득 퍼진다. 육수가 끓어오르는 소리가 언뜻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와도 비슷했다. 이엔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끓기를 기다리던 란은 그 소리의 비슷함을 깨닫고 아, 하는 소리를 내버린다.

"왜 생각났나 했더니..."

"네? 뭐가요?"

"비오는 날에는 왠지 전골이 먹고싶잖아... 왜 그런가 아까 생각해봤는데 이유를 모르겠는거야... 근데 지금 들어보니까 전골 끓는 소리랑 빗소리랑 비슷해서 그런 걸지도..."

"그러고보니 좀 비슷한 것 같긴 하네요."

"과학적인 이유가 있었네..."

"별로 과학은 아니지 않나요..."

뭐 비슷한 거지... 란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집어 들곤 미리 풀어둔 계란에 콕 찍었다. 그리고 제 입이 아니라 이엔의 입으로 쏙 넣어준다. 이엔은 아기새마냥 입을 벌려 란이 주는 대로 받아 먹었다. 이엔이 우물거리는 걸 보면서 란은 흐믓한 표정을 짓고 만다. 그 뒤로는 평소와 같이 꽁냥꽁냥이었다. 자기 손으로 자기가 먹는 일은 거의 없이, 서로 먹여주면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었다. 매일 이맘때쯤이면 항상 비슷한 분위기였지만 매번 새로운 것처럼 두 사람은 애정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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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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