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장
히스클리프 AU
아침 햇살이 비치는 복도는 조용했다. 아침부터 각자의 일에 여념이 없는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다니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잘 교육받은 태가 나 전혀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란은 저에게 향하는 인사를 가벼운 목례로 받으며 긴 복도를 걸었다. 젊은 나이에 저택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된 그는 할 일이 많은 편이었지만 그 일들을 시작하기 전, 아침마다 꼭 하는 일이 있었다. 침실들이 모여있는 3층의 안 쪽, 제법 고풍스러운 방의 문을 똑똑 두드리면 안쪽에서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이 저택의 도련님인 이엔이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해주었다.
"벌써 준비하셨네요..."
"이 정도도 혼자 못하는 어린애는 아니니까."
그는 이미 잠옷이 아니라 실내복 차림이었다. 란은 소리없이 웃으며 다가가 그의 옷차림을 다듬어주기 시작한다. 셔츠카라의 모양을 잡아주고, 옷자락을 정리해주는 등, 이전의 차림이 딱히 어수선한 것은 아니었지만 란이 다듬어주고 난 뒤에는 확실히 더욱 정돈되어 보였다. 이엔은 란의 손길이 저에게 닿는 이 순간이 좋으면서도, 매일 이른 아침마다 저를 위해 굳이 시간을 내는 것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바쁠텐데 굳이 이럴 필요까진 없대도."
"도련님... 바쁜 와중에 제 얼마 안되는 즐거움도 뺏어갈 생각이신지..."
란이 지나치게 심각한 표정을 지은 탓에 이엔은 머쓱해지고 말았다. 그 말 그대로, 이 순간은 그의 즐거움이었다. 산죠 란은 타고나기를 다소 무기력한 인간이었다. 대부분의 일들에는 그러려니하는 수동적 태도가 디폴트며, 가능한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겠다는 듯 어딘가에 크게 마음쓰는 일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저택에서 일하며 시키는 일은 워낙 잘 해내는 탓에 어느 순간 신임도 얻고 지금의 지위도 얻었지만 어쨌든 그와 '적극적'이라거나 '능동적'이라는 말은 꽤나 거리가 멀었다. 그런 그가 유달리 마음을 쓰는 일이 하나 있다면 이 저택의 도련님, 이엔과 관련된 일이었다. 저택의 그 누구도-다른 사용인들은 물론이고 가문원들까지- 그가 도련님에게 끔찍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옷차림을 모두 정리해준 그는 빗을 가져와 이엔의 머리카락을 빗어주기 시작했다. 손에 감기는 갈색 머리카락은 보들거려 감촉이 좋았다. 종종 그는 그 끝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란은 줄곧 도련님이 좋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저를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도, 기쁘다는 듯이 웃는 것도, 따뜻한 손도,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도. 그것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맹목적인 감정이었다. 그러나 란은 이 기이한 감정을 파헤치고 규명하고 부정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저 제멋대로 울렁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음미할 뿐.
어깨에 닿을락 말락한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끈으로 묶어주고 나면 오늘의 아침 단장은 끝이었다. 란은 잠시 이엔을 꼼꼼히 살피고 다정한 낯으로 그의 뺨에 스치듯이 손가락을 닿았다가 떼었다. 사용인치고는 지나치게 건방진 행동이었지만, 이엔은 타박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보단 닿았던 뺨이 옅게 달아오른다. 란은 그것을 보았는지 못보았는지. 집요하게 저의 도련님에게 시선을 두는 주제에 태연하게 미소를 건넨다.
"좋은 아침이에요, 도련님..."
"응. 란도 좋은 아침."
결백하게도 다정한 사용인인 것처럼 시선을 거두고 나면 으레 언제나 그렇듯이 하루를 여는 인사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여느 평범한 날들로부터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고, 둘에게는 지나치게 많은 일들이 있었다.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어느 절벽에 남아 있던 에리카 꽃과 두 사람의 발자국만이 그 시간들을 증명했다. 멀리, 더 멀리로 사라져가는 그 흔적이... 결혼식장에서 도망친 두 연인의 이야기가 요란하게 1면을 장식했던 신문이 닿지 않을 어느 곳에서는, 꽃향기가 어렴풋하게 남은 채로 오직 둘만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잠깐만, 란. 이제 집사도 아니잖아."
익숙하게 이엔의 옷차림을 정리해주는 손길이 잠시 멈췄다. 이엔은 아주 약간, 그러니까 정말로 조금만 불만이었다. 사용인이 아니라 동등한 연인으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란은 습관적으로 이엔을 챙겼다. 집사이던 시절과 조금도 다를바가 없는 손길이었다. 간간히 애정어린 입맞춤이 뺨에 와닿기는 했지만. 란은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곧 사르르 눈을 휘어 웃어보였다. 란이 이엔에게 약한 만큼, 이엔도 란에게 약했기 때문에 이렇게 웃어버리면 결국 이엔은 져주곤 했다. 이건 비겁하잖아! 라고 불만을 터트리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이건 내 즐거움인데..."
그리고 란의 손이 이엔의 목덜미에서 뺨 까지 자연스럽게 닿아왔다. 감싸오는 다정한 체온에 이엔의 뺨이 붉어진다. 란은 이번에는 제가 집요하게 시선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때도 딱히 집사라서 한 일 아니었고..."
말의 의미를 이해한 이엔이 확 얼굴을 붉혔다. 란은 작게 소리를 내서 웃었다. 얄밉게도 애정이 넘치고 잘생긴 웃음이었다. 다음으로 닿아오는 것은 입술이었다. 머리카락 끝에도, 뺨에도, 그리고 입술까지. 언젠가 그렇게도 바랐던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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