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놀이
문득 맛있는 냄새가 코 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면 창 밖에서는 하얀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한 사람분의 체온이 빠져나간 이불 속은 서늘했다. 좀 더 잠들어있고 싶은 마음과 이엔을 찾으러 나가려는 마음이 한 차례 싸우는 듯 했지만 란은 미련없이 침대 밖으로 발을 뻗는다. 아직 잠이 덜 깬 탓에 조금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부엌까지 가는게 어렵지는 않았다.
"형님, 벌써 깼어요?"
"응... 이엔이 없으니까..."
잠에 취해 웅얼거리며 말해도 이엔은 금방 알아듣곤 웃어버리고 만다. 좀 더 주무셔도 되는데... 그렇게 말은 하지만 제 허리에 감겨오는 팔과, 어깨에 기대오는 그와, 뺨을 간지럽히는 숨결이 좋아서 무심코 숨을 들이쉰다. 란은 잠을 쫓아내며 이엔의 머리카락 사이에 코를 부볐다. 품 안에 꼭 맞게 들어오는 따뜻한 온기가 좋아서 이대로 잠들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취사를 끝낸 밥통이 요란하게 울었다. 테이블 위에는 깨끗하게 닦아 내어놓은 도시락 통이 보였고, 여러 재료들이 여기저기에 올라와 있었다. 이엔만 시킬 수는 없지...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눈 앞이 선명해져 온다.
"씻고 올게... 혼자 하지 말고 있어..."
"괜찮다니까요."
"근데 이엔..."
"네?"
"너한테서 참기름 냄새 나..."
드러난 목을 소리없이 한차례 물어보자 이엔이 입을 다물고 형님... 하고 란을 불러왔다. 란은 즐거운 듯이 웃어버린다.
차 뒷자리에 돗자리와 피크닉바구니를 싣고 나면, 마치 정해둔 것처럼 란은 운전석에 이엔은 조수석에 올라탄다. 정해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꽤 오랫동안 란의 옆자리는 언제나 이엔이었으니까. 란은 몸을 기울여 이엔의 안전벨트를 직접 매어주고 멀어지기 직전 뺨에 꾹 입술을 누른다. 이엔은 뺨을 붉히고 란은 웃어버리는 평소대로의 루틴이었다. 이엔은 종종(대부분은) 부끄러워했지만 란이라고 해서 일부러 이엔을 부끄럽게 만드는 건 아니었다.-사실 그럴때도 종종, 아니 꽤 자주 있지만- 그냥 이엔을 보고 있노라면 치솟는 사랑스러움에 꼭 입술을 맞대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었다. 그것은 작고 귀여운 강아지를 볼 때나, 아주 어린 호즈노미야의 아이들을 볼때의 느낌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달랐다.
"벌써 봄이네... 시간 참 빨라..."
"형님... 그렇게 말하니까 할아버지 같잖아요."
"그런가... 아직 젊은이인데도..."
"그러니까 그런 단어가요."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차 안. 창 밖으로는 풍경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건물들, 나무들, 사람들... 일견 그러한 풍경, 정확히는 앞을 바라보고 있어도 란의 신경은 이엔에게로 온통 쏠려 있었다. 혼자 있을 때처럼 온전히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은데, 사고를 내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엔이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엔이 곁에 있은 뒤로 그는 예전처럼 넘어지는 일도 꽤 줄어들었다. 그가 그의 현실을 붙잡아주기 때문이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차를 세웠다.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럴만도 한 것이 봄의 주말이었다. 폭죽이 터지듯 분홍빛 꽃잎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고작해야 꽃잎 하나. 그러나 셀 수도 없을만치 많은 그 하나들이 모여 하늘도, 마음도 꽉 채워주고는 했다. 뒷좌석에서 돗자리와 피크닉 바구니를 꺼내들고 잠시 사람들을 지나쳐 걸었다. 꽃 구경이 아니라 사람 구경인걸지도. 다행히 얼마 걷지 않아 적당한 자리를 발견한다. 두 사람이 앉을 돗자리는 그리 넓진 않았다. 그러니 꼭 붙어앉는다고 해도 이상해보이지는 않으리라.
"사람 진짜 많네..."
"그래도 꽃은 잘 보이잖아요."
"그것도 맞고..."
란은 몸을 뒤로 제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하늘에 분홍색 꽃잎이 흩날리는 색깔은 지나치게 선명해서 꼭 자연의 것이 아닌 기분이었다. 기분 좋은 정도의 바람이 불어오고, 부드러운 꽃향기가 흘러오고...
"졸리네..."
"꽃놀이까지 와서요?"
"꽃놀이를 왔으니까, 지... 평화롭잖아..."
그렇다고 잠들 생각은 없지만... 기껏 나들이를 나왔는데 잠들어버리는 건 아까운 짓이라고 생각하며 란은 몸을 기울여 이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엔의 뺨이 살짝 붉어졌지만, 지지 않겠다는 듯 그가 팔을 끌어안으며 꼭 붙어온다. 둘만의 나들이이기 때문일까, 사람이 많았지만 어쩐지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콧노래가 흘러나올 정도로 들떠보였다.
"귀여워라..."
"혹시 제 얘기예요?"
"이엔 말고 뭐가 또 귀엽지... 들떠 있는 게 귀여워..."
"그, 그야 오랜만에 놀러나왔으니까요..."
한차례 바람이 불고, 사람들 위로 꽃잎비가 떨어져 내렸다. 요란스럽게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들 한껏 시끄러운 사이에 두 사람은 고요하게 서로에게 기대어 있었다. 기실 두 사람에게 요란스러운 것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타고난 천성이 둘 다 얌전하기 때문이었다. 호즈노미야 아이들이라도 껴 있었다면 떠들썩했을 테지만, 오늘은 온전히 두 사람만의 시간이었다. 호즈노미야의 아이들을 정말 좋아하지만 연인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을 굳이 깨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같이 있다는거니까. 10여년 전부터 함께 있으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진 덕이었다. 그정도면 질릴 법도 한데, 서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된 다음부터는 또 새로운 감각이었다. 때때로 란은 그 전까지의 자신은 사실 아무것도 몰랐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행복할 수 있었는데도. 불행에 겨워 눈 앞에 놓여진 것들을 못본 척 해왔던 것이 아닐까 하고. 꽃잎을 바라보는 이엔의 금색 눈동자에 언뜻 분홍색이 섞여들었다. 황홀하게 뒤섞이는 색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엔이 눈을 맞춰온다. 살짝 웃는다. 란은 여태껏 생각하던 것을 뒤로 미뤄버리고 저도 웃었다.
어디 상한데 없이 한 송이 그대로 떨어진 꽃도 그리 찾기 어렵진 않았다. 란은 제 엄지손톱만한 그 꽃을 줍더니 냉큼 이엔의 머리카락 사이에 꽂아주었다. 작은 꽃이긴 하지만 앙증맞은게 아주 어울렸다. 하긴 뭐든 안 어울리겠어. 옆에 후유코가 있었다면 그렇게 말하면서 아예 시선을 피해버렸을 텐데. 어쨌든 두 사람 뿐이기에 그걸 지적해줄 사람이 없었다. 마음껏 귀엽다고 속삭여주면, 이엔은 뺨을 붉히면서 란을 조금 타박하다가, 저만 꽃을 끼울수는 없다며 얼른 꽃잎 사이를 헤쳐 멀쩡한 꽃을 한송이 또 가져오는 것이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콕 박힌 깜찍한 꽃은 상당히 눈에 띄었다.
"형님... 너무 귀여워요..."
거의 감탄에 가까운 그 말에 란은 그저 웃어버리는 것이었다. 딱히 자신이 귀엽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말할 때 이엔의 금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좋아서 란은 기쁘게 웃었다. 이엔은 한참이나 초롱초롱 눈을 빛내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형님, 여기 보세요~"
ㅡ찰칵!
까맣게 반질거리는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면, 곧 셔터음이 들리고 이엔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형님을 찍으면 멋있게 나와요."
"너무 띄워주는 거 아냐?"
"진짜라니까요!"
맹목적인 애정. 그건 아주 단 맛이 났다.
"같이도 찍자."
이렇게 찍는건가... 어설프게 카메라를 들고 팔을 쭉 뻗으면 이엔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는다. 그렇게 찍으면 사진 다 흔들릴텐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굳이 만류하지는 않았다. 카메라에 저장공간은 넉넉하니까, 흔들린 사진이 몇 장 찍혀있는대도 나쁘진 않을테니까. 두어번 셔터를 누르고 있으면, 란의 손에 들려있던 카메라는 이엔에게로 다시 넘어가고, 얼굴을 딱 붙인 채 몇 장이나 사진을 찍었다. 셔터음이 들리는 순간 그의 뺨에 입을 맞춘 란때문에 이엔이 놀란 표정을 지었고, 애정섞인 타박을 피하는 척 지나가는 사람에게 사진을 부탁한다. 사진을 소중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이 순간이 아주 소중해서 간직하고픈 마음 자체를 가진 적이 그다지 없었다. 그저 흘러갈 뿐인 시간들. 그렇기에 란은 저를 조명하는 렌즈가 어쩐지 어색했다. 익숙해진 것은 함께 앉아 현상한 사진을 보았을 때.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이엔의 미소가 지나치게 생생했기에, 그 때부터 평범한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이유를 깨달아버린 것이었다.
"이엔... 너무 많이 싸온 거 아냐?"
"부족한 것보단 남는게 낫잖아요..."
부족하면 간식이라도 사먹으면 되지. 란은 그렇게 말하며 3층 찬합의 제일 위쪽에 담겨있는 계란말이를 쏙 입에 넣었다. 입 안에 적당히 퍼지는 단맛과 폭신한 계란맛이 딱 적절하게 맛있었다. 이럴수가... 계란말이를 달게 만드는 이엔 귀여워... 새삼스럽게 이엔의 귀여움에 취해 있으면 이엔이 핀잔을 주듯 란을 쿡 찔러온다.
"형님은 진짜 별게 다 귀엽대요."
"귀여운걸 귀엽다고 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담..."
확실히 이엔이 힘을 준 도시락은 온갖 캐릭터 모양인데다, 색도 알록달록해서 귀여웠다. 란도 요리를 잘 하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데코에는 관심이 없어 흑미밥에 장조림에 고사리나물같은 원컬러 밥상을 차려올때가 잦았기 때문에 이엔의 이런 실력은 더욱 빛을 발했다. 지금 이 도시락도, 란이 만든 부분과 이엔이 만든 부분은 경계선이 아주 뚜렷해서 쉽게 구분이 가능했다. 이엔은 란이 만든 그런 요리들도 좋아했지만. 이엔은 베이컨으로 감싼 주먹밥을 란의 입에 쏙 집어넣는 것으로 귀여워 타령을 원천 차단해버렸다. 그 뒤로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꽁냥거리는 시간이었다. 란 한 입, 이엔 한 입. 서로의 손은 서로를 먹여주기에 바빴다. 식당 같은데서야 앞테이블이나, 옆테이블이나, 뒤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애써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짓이었지만 들뜬 봄날에는 아무런 문제도 되질 않았다.
"와... 여기서 살아도 되겠다..."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그야... 이엔이 있잖아..."
로맨틱을 가장해봤자 이상한 소리는 이상한 소리였다. 딱히 정말 진심이 아니라 농담이라는 것을 알기에-이걸 모르는 사람들은 그 특유의 진지하고 매가리없는 어투에 낚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엔은 그냥 다시 란의 입에 디저트로 싸온 과일을 밀어넣어줄 뿐이었다. 란은 살짝 눈을 휘며 웃고는 딸기를 쥐고 있는 이엔의 검지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화들짝 놀라는 이엔의 표정이 좋았다. 이엔은 상냥한 아이지만, 남들한테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는 편은 아니니까. 저에게만 지어보이는 표정이 좋아서 자꾸만 짓궂게 굴어 버렸다.
별달리 특별한 걸 하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치게 빨리 흘러간다. 이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시간이 잘 흐르지 않던 좁은 방의 기억이 란에게 아직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주황색 하늘 사이로 또 옅은 분홍색의 꽃잎이 흩어져간다. 어떤 단어로 그 색을 표현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보다가 란은 이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만 정리할까?"
"그게 좋겠어요. 내일도 출근하셔야 하고..."
하긴, 그는 글을 쓰지만 실상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알지 못했다. 그걸 알았더라면 제일 먼저 이엔의 사랑스러움을 온 세상에 알렸을 테니까.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며 란은 옅게 웃었다. 이엔은 란의 그 표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잠깐 기울였지만, 그가 실없이 구는 건 하루이틀도 아니었다. 곧 두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는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 애초에 그리 많은 흔적을 남기는 편은 아니라서 치우는 게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지만. 란은 손을 뻗어 이엔의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을 살짝 떼어내 주었다.
"아, 붙었었나 보네요. 고마워요, 형님."
이엔은 예쁘게 웃었고, 란은 떼어낸 꽃잎을 손끝으로 뭉개본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흩어져간다.
"이엔... 좋아해."
결국 또 내어놓는 것은 흔하디 흔한 한 마디. 그럼에도 이엔은 꼭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을 지어주었다.
"저도 좋아해요, 형님."
흔하다는 것은 곧 익숙하다는 것과도 같았다. 익숙하게 건네져오는 애정어린 목소리에 란 또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저 이 목소리를 계속 들을 수만 있다면. 그걸 바라며 란은 사랑으로 반짝이는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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