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은 별에게

[플레이브] 나를 잊은 별에게 (1)

이곳은 소행성. 당신의 별에서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곳에서 편지를 씁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당신이 부르기 좋은 이름을 찾기 위해 며칠을, 그리고 서툰 편지를 고쳐보며 또 한참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진 글씨는 당신을 만날 날에 대한 떨림이라고 여겨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지나쳐온 과거에서, 혹은 먼 미래에서 언젠가 만나게 될 그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가 아는 미래에서 우리는 틀림없이 사랑하게 될테니까, 제 이름을 기억해주세요.

  혼돈 가운데에서 태어나 잊혀진 별을 돌보는 제 이름은 유하민입니다.


체육관 창고의 문이 약간의 소음과 함께 열리고, 서늘한 바람과 함께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예준은 문가로 다가오던 걸음걸이나 드리워진 그림자만으로도 그가 노아가 아니라는 걸 쉽게 알아챘다. 고개를 돌려 그를 확인하는 대신 느리게 눈을 깜빡이면 누가 들어도 투정에 가까운 숨소리를 내며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문이 닫혔다. 그리고 소년은 숨을 들이키는 순간 알아챈다. 아, 유하민이구나.

학생회를 다 두고 본다고 하더라도 빠끔히 시야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곁에 무릎을 댈 사람은 유하민, 한 사람이다. 소년의 낯 위에 응달처럼 하민의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제법 바투 붙은 하민의 낯을 툭 건들며 그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남는 손으로 슬그머니 책 사이로 꺼내둔 라이터를 숨긴 뒤에야 소년의 낯에 여상스러운 웃음기가 돌아왔다.

 

“학생회실에 갔는데, 형이 없길래요.”

 

마디가 있는 손이 가만히 소년의 곁을 짚었고, 하민은 곧 그에게로 쏟아질 것처럼 몸을 기울였다. 불쑥 커진 몸을 따라 제법 짧은 태가 나는 옷소매를 응시하던 소년의 눈이 가볍게 웃었다. 하민아, 하는 부름에 발을 까딱거리던 몸짓이 멎었다. 소년이 아는 한, 하민은 좀처럼 그의 부름에 네, 형. 하고 정갈하게 대답하는 법이 없다. 언제나처럼 큰 키를 숙여 낯을 가까이하고 예준이 형, 하고 웃었다. 꼭 눈을 맞춰야만 하는 사람처럼.

어리광이 많은가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은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전학을 와서 대뜸 ‘제가 형들보다 어리긴 한데, 저 웃는 거 보기 어려우실 거예요. 제가 웃음이 없는 편이라.’라고 했다던가. 가만 보면 얘도 진짜 웃긴 앤데 말이야. 상념에 잠긴 사이 하민은 그가 다른 생각에 빠진 게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인지 슬쩍 옷깃을 쥐고 살살 당겼다.

 

"예준이 형?"

"아. 다른 게 아니라……, 너 더 큰 것 같다고."

"그쵸. 저 이제 은호 형보다 시야가 좀 높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같은 게 아니라, 네가 더 크더라. 무던하게 던져준 한 마디에 그쵸, 하고 하민은 환한 얼굴을 했다. 이제 하민에게서는 긴장한 얼굴이나 예민한 기색의 소년을 찾아보기 어렵다. 몇 마디가 오가고, 천천히 그가 보이던 경계심이 허물어져 내리면서 드러나는 말랑한 구석들이 못내 남예준은 기꺼웠다. 어지럽게 머리맡에 놓여있던 문제집이며 숙제들을 밀어내면 하민이 기다렸다는 듯 조금 더 몸을 붙여왔다. 소년은 그걸 모르는 척, 제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소년의 작은 손짓에 먼지가 일었다. 어둑한 눈동자가 부유하는 먼지들을 잠시 시선에 두었다. 창고답게 널찍하지 못한 유리창과 그 사이를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온 햇살을 받은 먼지들은 막 태어난 어린 별들처럼 유약한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손을 허공에 두고 헤집으면 궤도를 잃고 추락할 것만 같았다. 가지런히 잠가둔 교복 아래에서 하민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가 꺼지기를 몇 번 반복했다. 무언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그는 떨치기가 어려웠다. 하민이 쉽게 곁에 눕지 못하자 예준은 몸을 뒤로 물리며 팔을 길게 뻗어두었다.

“이리 와, 하민아.”

같이 눕자. 소년은 곧잘 세 살 차이를 두고 퍽 다정한 체를, 어른인 체를 했다.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하민이 매점의 인파를 파고들고 있으면 서둘러 따라와서 지갑을 꺼내고는 했다. 어차피 학생이면 예준이나 하민이나 내는 돈이 푼돈에 가까운 걸 알면서도 소년은 꼭 그를 유난스럽게 챙겼다. 그러면서도 그는 끝끝내 하민의 마음을 한 번 묻는 법이 없었다. 정말, 어른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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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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