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촉촉물만두
길고 부드러운 손이 연고를 바르고 드레싱을 마무리하는 동안 하민의 시선은 예준의 손바닥에서 떠나지 않았다. 예준의 손은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선의 집합을 이루고 있었다. 노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나 소년의 마음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왜 그랬을까. 또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소년을 신뢰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소년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손바닥에 쥐었을 때와 강하게 박동한 코어의 일부가 살아있는 것처럼 소년의 혀끝에 감기고, 이내 숨길을 타고 들어갔다. 태양을 삼킨 것처럼 숨이 달아올랐다. 예준이 목을 그러쥐자 노아가 대번에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하민을 밀쳐내고 소년을 감싸안았다. “남예준!” 당장 입 벌려. 강한 힘과 함께 턱주가리를 움키는 손이 있어
세 사람의 위로 다정한 밤이 내려앉았다. 예준을 중심으로 창가에는 하민이, 거실 안쪽으로는 노아가 자리를 잡고 누웠다. 울었던 탓인지 하민이 가장 먼저 수마에 잠겼다. 이어 노아는 새근거리며 잠든 하민의 숨소리를 소년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예준의 가슴팍에 가만히 손을 얹고 다독였다. 나 지금 재우려고? 조용히 하고 눈 감아, 준아. 아니, 나 혼자서
하민은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다. 소년은 이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비는 내리고, 젖은 교복은 세탁기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와중에 하민이 몸을 일으켰다. 예준이 형, 우산 빌려도 돼요? 지극히 정중하고 상식적인 질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준은 괜히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비가 많이 오니까. 날이 궂어진 만큼 가는 길도 멀고 외로울테니까.
“비 온다. 들어가자.” “노아 형 안에 있잖아요.” “…더 얘기하라고 안 할게.” “아니예요. 저 집에…. 일단, 코어부터 주세요.” 코어라고 하는 거구나. 손바닥 안에 꼭 쥐고 있던 코어에서는 여전히 하민의 것을 닮은 맥박이 느껴졌다. 그 때 창문이 벌컥 열리고 앳된 소년의 얼굴이 빠끔히 내밀어진다. 야, 남예준, 언제… 뭐야, 하민이도 있어? 그래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결국 내가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어. 예준의 음성은 가지런했다. 하민은 그에게 아니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그가 과민한 것이라고 말해야할지 고민했다. 소년은 어떤 흔들림이나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는 단단한 목소리를 냈으나, 하민을 바라보는 시선만이 길을 잃은 아이처럼 정처없이 하민의 낯 위를 헤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
소년은 하민의 손을 잡고 오래도록 걸었다. 그의 집 앞까지 느린 걸음으로 걷다가도 좀처럼 쉽게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여름을 목전에 둔 꽃들이 얼마나 흐드러지게 피어났는지, 하늘에 지나가던 구름이 고양이를, 돌고래를 닮았다는 등의 이야기들을 하며 하민과 눈길을 나란히 하고서 웃었다. 무엇이 소년을 이토록 머뭇거리도록 만들었을까. 하민은 어둑한 눈을
연습이 끝난 뒤 밴드부 전원이 의자 위로, 바닥으로 늘어졌다. 특히 드럼을 치는 은호가 젖은 턱 근처를 티셔츠를 끌어올려 땀을 훔쳐내더니 드럼 스틱으로 가볍게 탐탐 위를 쾅 두들기고 씩 웃었다. 깜짝 놀라 기타를 껴안고 잠깐 튀어올랐던 밤비를 보며 시원스럽게 묻는다. “형, 냉면 먹으러 갈래요?” “나랑…평양냉면, 먹을 거야?” “까짓 거 그러지 뭐.”
그 날 연습은 어딘가 어수선했다.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는 노아도 몇 번 박자를 놓치고, 목이 잠긴 예준의 시선이 악보가 아닌 어딘가를 자꾸만 부유하고, 맏형들이 흔들리자 곧장 밤비고 은호고 할 것 없이 흔들렸다. 뭐가 문제지? 땀에 젖은 머리칼을 넘긴 은호는 잠시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진짜 휴식. 더 하다가는 손이 터질 것 같아요.”
결국 예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가로 다가왔다. 연습 가야겠다. 마음이 상한 것 같은 얼굴에 노아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소년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서 끌었다. 자리를 내어주고, 턱짓하자 결국에는 또 노아의 뜻에 따라서 얌전히 앉는 예준이다. 소년이 숨을 씨근거렸다. 나도 이상하다는 거 알아. 아는데, 애들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거 보면 분명 내가
올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초입이 무더웠던 탓인지, 아니면 누구보다 사춘기를 조용히 넘길 것 같았던 소년이 엇나가는 모습을 목도한 탓인지.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었으나 노아의 시선은 종종 오래도록 예준의 낯에 따라붙어 있었다. 목 끝까지 강박적으로 채운 단추와 반듯한 넥타이, 각을 살려 다림질한 게 분명한 말끔한 셔츠와 바짓단. 소년을 이루고 있는
소년은 피부에 느껴지는 열감에 눈을 떴다. 처음 시야에 잡힌 건 조금 풀어진 넥타이와 반듯하게 자리 잡은 명찰이었다. 잠들었구나. 얼마나 잠들어 있었지? 시계를 확인하고자 몸을 일으키려다가 저보다 긴 팔에 가로막혀 몸이 도로 매트 위에 풀썩 넘어졌다. 도로 시야는 하민의 명찰 위로 내려앉는다. 소년과 같은 글씨체로 유, 하, 민. 하고 적혀진 걸 가만히 들
뻗어진 손이 부드럽게 검은 머리칼을 쓸어주며 숱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게 유난스럽게 자신에게만 허락된 건 아닐 것이라고 하민이 수없이 되새기는 동안 소년은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았다. 이젠 정말 나랑 있는 게 편한 모양이네, 하고 생각했다. 도리어 제 손바닥에 대고 머리를 부비는 모양새가 영 붙임성 좋은 들짐승의 형태와 닮아있어 묘한 생각이 들
이곳은 소행성. 당신의 별에서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곳에서 편지를 씁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당신이 부르기 좋은 이름을 찾기 위해 며칠을, 그리고 서툰 편지를 고쳐보며 또 한참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진 글씨는 당신을 만날 날에 대한 떨림이라고 여겨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지나쳐온 과거에서, 혹은 먼 미래에서 언젠가 만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