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은 별에게

[플레이브] 나를 잊은 별에게 (9)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결국 내가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어. 예준의 음성은 가지런했다. 하민은 그에게 아니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그가 과민한 것이라고 말해야할지 고민했다. 소년은 어떤 흔들림이나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는 단단한 목소리를 냈으나, 하민을 바라보는 시선만이 길을 잃은 아이처럼 정처없이 하민의 낯 위를 헤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한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어 하민은 도리어 불안해졌다. 저 희고 말간 얼굴 앞에서, 몇 번을 무너지고 마는 건지.

“일단, 마저 걸을까요.”

그래서 달래듯 그의 손을 이끌었다. 예준이 먼저 걸음을 뗄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하민은 그를 마주보고 서서 뒷걸음질로 걷기 시작했다. 고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소년이 결국 하민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와중에 하민이 은근슬쩍 소년의 손바닥 안에 감춰둔 그의 파편을 가져오려고 하는 순간, 예준이 자신의 교복 셔츠 앞주머니에 그것을 밀어넣고 손을 잡았다.

“네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어.”

“치사해. 그거 나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니였어요?”

두 손을 마주 잡은 소년들은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들의 발 끝에 달라붙은 그림자가 어느 들꽃과 스치고, 고르지 못한 보도블럭의 툭 튀어나온 부분을 넘어서며 나란한 궤도로 나아갔다. 하민은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 구름의 모양을, 지나가는 고양이의 색을, 내일 나올 급식의 이야기를 했다.

다행스럽게도 예준은 인내심을 갖고 하민의 말들을 경청했다. 이따금 끄덕임이나, 옅은 웃음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다는 태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준은 고요했다. 언젠가 하민을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웃음기가 적었고, 그저 흰 낯으로 하민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기다리는 말들을 내어주길 바라는 눈동자를 알면서도 하민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결국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 예준의 집 앞에 다다르고서야 하민이 입술을 짓이기며 눈을 내리깔았다.

“하민아.”

말해주지 않으면 난 영원히 너를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지내야 해. 소년이 뻗어진 나뭇가지처럼 흰 손끝으로 그의 턱 언저리를 건드렸다. 그게 제법 내키는 이야기라는 말을 삼켜낸 하민이 소년의 손바닥에 파고들어 뺨을 문질렀다. 유치한 소속감이라도 지금의 그에게는 간절했다.

“이상해요. 지금까지 한 번도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없었는데.”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방향을 잃은 물음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예준은 문득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아 가만히 제 가슴팍에 손을 얹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감해진 낯의 하민은 소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단, 그거 이리 줘요. 이미 그게 내가 갖고 있던 물건이란 건 알고 가져온 것 같으니까. 가라앉은 음성에 소년이 뒷걸음질하며 하민의 손을 놓았다. 하민은 순식간에 비어버린 손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소년이 남기고 간 체온이 쉽게 하민의 온도 아래에서 사그라들었다.

“가장 쉽게 해 줄 수 있는 말을 찾자면….”

이미 다 지나간 일이예요. 형. 고해의 앞에 두고자 하는 말로는 적절치 않았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민은 그렇게 말했다. 난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거 돌려주세요.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가슴팍에 숨겼던 하민의 파편을 꺼내 손에 소중하게 쥐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던, 지금은 소년의 손바닥에 몸을 감추고 있는 하민의 흔적. 예준의 손바닥 안에 감춰진 작은 보석의 조각을 닮은 무언가가 두근거리며 박동했다. 소년은 그걸 다시 하민에게 돌려주는 대신, 손에 가만히 쥔 채 꿈속의 하민을 생각했다.

“형의 꿈에서 나는 어땠어요?”

몇 번의 시공간을 넘어서면서도 예준의, 노아의, 은호의, 밤비의 곁에 자신을 조각내어 남겨두던 너.

“늘, 노력하고, 항상 어디서든 우리를 사랑해줬어. 지금처럼.”

우리와 영원을 노래하던 네가 궤도를 잃고 추락하는 별이 되어버린 너.

“…꿈속에서 형도, 내가 좋았어요?”

결국 찰나의 계절을 함께하더라도 우리가 함께이길 바라던 너.

“당연하지. 너는… 우리, 아니…. 내 하민이잖아.”

언제나, 어디서나 플레이브를 지켜내고 싶었던 너.

“하하, 이상하다. 왜 나 울지.”

점점 작아지던 너. …지독하게 어렸던 너.

“하민아.”

소년은 반복되는 꿈과 맞물린 시선 속에서 하민을 만나기 전 자신과 마주하고 말았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몰랐던, 오직 앞을 보고 달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닳아 어딘가 망가진 줄도 모르고 자신의 마음을 진창에 처박았던….

하민의 오늘은 남예준의 어제를 닮아있었다.

“이제… 혼자 버티지 말자. 플레이브 애들도 있고, 학생회 애들도 있고, 다 네 편이니까.”

“…….”

“그리고 말하기 힘든 주제면 내일이든 언제든 좋아.”

“형.”

“…네가 원하는 날, 원하는 순간에 편하게 얘기해도 돼.”

하민은 고개를 떨궜다. 어디선가 비를 예고하듯 우르릉, 하고 하늘이 울렸고 바닥에 어지럽게 점점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민의 신발 근처에 유난히 많은 비가 내렸다는 걸, 소년은 모르는 척 가만히 다가가 품에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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