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은 별에게

[플레이브] 나를 잊은 별에게 (10)

“비 온다. 들어가자.”

“노아 형 안에 있잖아요.”

“…더 얘기하라고 안 할게.”

“아니예요. 저 집에…. 일단, 코어부터 주세요.”

 

코어라고 하는 거구나. 손바닥 안에 꼭 쥐고 있던 코어에서는 여전히 하민의 것을 닮은 맥박이 느껴졌다. 그 때 창문이 벌컥 열리고 앳된 소년의 얼굴이 빠끔히 내밀어진다. 야, 남예준, 언제… 뭐야, 하민이도 있어? 그래서 언제 들어올건데? 한 손에 참외를 콕 찍어놓은 포크를 흔든 소년이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사이 예준은 서둘러 자기 주머니 안에 하민의 코어를 숨겼다.

 

“비 다 맞으면서 뭐 해. 빨리 들어와.”

 

그래, 하민아. 비 그칠 때까지만 있다가 가. 소년이 달래듯이 말하며 하민의 등을 살살 밀었다. 진짜 비가 그칠 때까지만 있다가 갈 거예요. 다짐하듯 꺼낸 말에 예준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였다. 2층에 있는 자취방으로 올라가는 동안 두 사람이 다시 손을 잡는 일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삭아삭 참외를 씹으며 삐딱하게 문가에 기대어 선 노아가 있다. 잠깐 사이에 흠뻑 젖은 두 사람의 꼴을 보다가 머리칼을 넘기며 한숨을 삼키는 동작이,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보였으나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앞에 수건 하나씩을 내밀며 웅얼거렸다.

 

“닦고 들어와. 물 흘리면 죽는다 진짜.”

“여기 내 집인데, 노아야.”

“조용. 공주 지금 예민해요.”

 

두 사람이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는 동안 하민은 얌전한 고양이처럼 꼼꼼하게 머리를 털고, 얼굴과 손발의 물기를 닦아냈다. 노아는 얼른 칭찬처럼 하민의 입에다가 참외를 하나 물려주었다. 얼른 들어와. 야, 봤냐 남예준? 하민이처럼 깔끔하게 닦고 들어오란 말이야. 그 말에 소년이 입을 삐죽 내밀며 궁시렁거렸다. 이런 순간들의 소년은, 하민과 단 둘이 있을 때와 달리 그를 마치 제 또래처럼 보이게 했다.

예준이 어린 들짐승처럼 수건 위에 낯을 대강 문지르고 발을 들이려하자 노아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어어, 레드아이즈 짜식아. 밥 먹고 싶으면 빨리 제대로 닦아라. 하고 장난스럽게 핀잔을 주었다. 어차피 내가 닦으면 될텐데 오늘따라 왜 잔소리가 심할까, 우리 노아가. 맥없이 웃는 소년의 위로 수건이 덮어졌다. 고개를 들면 붉은 눈가를 한 하민의 낯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노아가. 그 말이 하민의 손을 투박하게 만들었다.

 

“감기 걸려요, 형.”

“그런 것 치고 날 너무 거칠게 다루고 있지 않니…?”

 

뭐가요. 심술이 가득한 말투로 말하자 예준이 웃음을 터트리며 하민을 가볍게 껴안았다가 놓아줬다. 옷 갈아입고, 밥 먹자. 서둘러 들어가려는 예준을 보던 하민은 가볍게 현관 근처에서 몸을 낮췄다. 무릎 하나를 바닥에 댄 그는 소년의 앞에 수건을 깔아주고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발 잘 닦고 들어와야죠.”

“아니 이상해, 내가 집주인이라니까?”

 

예준의 호소에 하민은 웃음을 꾹 참으며 돌아섰다. 노아가 방에서 나오며 가지런히 접힌 옷 한 벌을 하민에게 내어주었다. 이거 입고 나와. 교복은 한 번 세탁해서 가져가는 게 좋겠다. 이거 봐라. 물 먹어가지고 살 다 비치는 거. 노아가 하민의 흰 교복 셔츠 끝을 붙잡아 살살 흔들었다.

 

“저기 욕실이니까, 가서 옷 갈아입고 나와.”

“네, 형.”

 

단정한 대답에 예준의 눈이 가만히 하민과 노아 사이를 오갔으나 하민은 모르는 척 욕실로 들어갔다. 괜히 남은 물기만 꾹꾹 눌러 닦아내는 동안 노아가 다가와 귀 언저리에 소근거렸다. 얘기는, 좀 했어? 애 운 것 같던데 네가 울린 거 아니지? 연달아 묻는 말에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말 안해줘서 잘 몰라. 비 그치면 간다니까, 뭐 아는 척 하지 말고.”

“어차피 내일 새벽까지 비 온 대. 아님 하민이랑 있게 내가 나가줄까?”

“아냐, 그냥…. 일단 나도 옷 갈아입고 나올게.”

 

예준이 방으로 들어간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노아가 발끝으로 괜히 물기가 스민 바닥을 문질러보고 자리를 벗어났다. 하여간 남예준, 생각이 너무 많단 말이야. 노아는 소년을 기다리며 한가득 해뒀던 김치볶음밥을 세 사람 몫으로 나누어두고, 젓가락과 숟가락을 가지런히 놓은 뒤 정작 자신은 소파 앞에 대강 앉아 고개를 젖혀 몸을 기대고 있었다.

 

“형?”

“어어, 예준이 옷인데 안 작아? 내 건 더 작겠길래 그거 꺼냈는데.”

“잘 맞아요. 그런데 예준이 형은요?”

“걔도 옷 갈아입어야지. 야, 근데 하민아.”

 

너 진짜 웃긴다. 나는 그냥 형이고 예준이는 예준이 형이야? 부러 서운한 티를 내며 말하자 하민이 눈을 굴리며 애매하게 웃었다. 아니, 예준이 형은 그냥, 어감이 좋잖아요. 아, 노아 형도 어감 좋거든? 빨리 불러봐. 부러 웃음기를 더하며 말하는데 예준이 가벼운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나오며 웃었다. 보기 좋네.

 

“둘이 먼저 먹고 있지, 기다렸어?”

“야, 밥상에 사람이 다 앉아야 먹는 맛이 나지.”

 

노아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자 하민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심코 하민이 소년을 바라보며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예준은 순순히 그 곁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노아가 놓아둔 식기를 옮겨 하민의 옆에 앉자, 노아가 식탁에 턱을 괴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남예준, 너가 그럴 줄 알았다.”

 

예준은 민망한 듯 웃으며 노아와 눈을 맞췄다. 마주 보고 먹고 싶어서 그랬어, 정말이야. 소년의 말에 노아는 역시 그렇지? 이제 빨리 밥 먹자. 기다리다가 배고파서 죽는 줄 알았어. 하고 웃었다. 예준은 곁에 앉은 하민을 달래듯 가만히 식탁 아래에서 손을 잡았다. 소년은 다감한 낯을 하고서 남은 손으로 숟가락을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게. 맛있다. 하민아, 너도 얼른 먹자.”

“네에….”

 

저를 달래는 몸짓을 알기에 하민은 귀가 벌개진 채 묵묵히 밥을 먹었다. 근데 하민이 왼손잡이였어? 몰랐네. 하는 노아의 말이 있기 전까지 하민은 서툰 숟가락질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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