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은 별에게

[플레이브] 나를 잊은 별에게 (11)

하민은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다. 소년은 이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비는 내리고, 젖은 교복은 세탁기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와중에 하민이 몸을 일으켰다. 예준이 형, 우산 빌려도 돼요? 지극히 정중하고 상식적인 질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준은 괜히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비가 많이 오니까. 날이 궂어진 만큼 가는 길도 멀고 외로울테니까. 또 한참 저녁이 되어가는 이 시간에 학생 혼자 나돌아다니기엔 세상이 험하니까.

 

“비가 많이 오는데, 하민아.”

 

그래서 예준은 우산을 내어주는 대신 그의 곁에 가만히 서서 들어오라는 듯 버티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고집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소년의 집에 있는 물건을 함부로 들고 쌩하니 가버리지 못할 성정임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주방에서 물소리가 멎더니 가만히 마주보고 선 하민과 예준에게 와 닿는 시선이 있다.

 

“준아, 하민이 자고 가는 거 아니였어?”

 

나 과일도 다 씻어왔는데. 아까는 참외더니, 이번에는 어디서 구해온 모양인지 포도를 오물거리다가 제법 널찍한 그릇을 품에 안고 하민에게 손짓했다. 병아리 얼굴 모양의 헤어밴드로 머리를 넘긴 노아는 동그랗게 드러난 이마를 문지르며 난감한 얼굴을 하다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오는 길에 예준이랑 싸웠어?”

“아니요, 그런 거 아니예요.”

“뭐가 문제야, 그럼.”

“그냥, 형들 쉬는데 방해 될까봐….”

“자고 가. 준이 표정 좀 봐라, 너 지금 나가면 쟤 오늘 밤에 잠 한숨도 못 잘 걸?”

 

하민이 눈을 데구르르 굴렸고, 그 틈을 타서 소년이 하민의 팔목을 붙잡아 가만히 제게로 당겼다. 노아 말이 맞아. 비가 저렇게 오는데. 집에서 누가 기다리는 거면, 나랑 노아가 잘 말씀드릴게.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민은 이렇다 할 거절의 말을 찾지 못한 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전화는 괜찮은데요, 하고 한참 침묵이 이어지다가 어렵게 문장을 매듭짓는다.

 

“정말 잠 못 자요?”

“…너 집에 들어갔다는 얘기 듣고서나 잘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의 말에 하민이 부끄러운 듯 웃으며 다시 집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소파 앞에 먼저 가서 앉아있던 노아가 핸드폰을 몇 번 만지자 웅장한 멜로디와 함께 벽에 걸린 텔레비전이 어두운 화면을 벗어났다. 예준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그 옆자리를 두들기자 노아가 조금 더 옆으로 자리를 옮겨주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

“뭐?”

 

한국인들 대부분이 소파 위에 앉는 게 아니라 그 앞 바닥에 앉는다더라. 에이, 그게 뭐야. 싱거워. 노아가 맥없이 웃으며 소년의 어깨에 잠깐 머리를 부비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예준의 취향을 고려한 모양인지 화려한 색감의 미장센과 다양한 노래가 이어졌다. 세 사람의 손이 이따금 과일이 담긴 그릇 위를 오갔고, 바닥을 보일 즈음 소년의 어깨에는 두 사람이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소년은 숨을 죽인 채 이따금 노아의, 하민의 머리에 뺨을 기대어봤다.

한노아, 일어나. 하민이도 일어나자. 작은 소리로 몸을 흔들며 말하자 잠기운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두 사람이 에준을 바라봤다. 하민은 미안한 얼굴로 서둘러 몸을 일으켰고, 노아는 머리를 기댄 그대로 물었다. 영화 끝났어? 응, 끝났지. 재밌었어? 나만 재밌었지, 나만. 서운한 티를 내며 말하자 노아가 씩 웃으며 그의 품에 잠시 기댔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좋아하는 거 보고 기분 풀었으면 좋겠길래….”

 

넌 이제 졸리지? 하는 말에 소년이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다 큰 사내놈 둘을 어깨에 이고 있으려니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책상 밀어두고 그냥 누워. 오늘은 다 같이 자자. 예준의 말에 노아가 반색을 하며 상을 정리해서 저만치 밀어두고, 이불을 끌고 나왔다. 두 사람이 이부자리를 펴는 동안 예준은 찌뿌둥한 몸을 길게 늘려가며 기지개를 켜고 칫솔을 물었다.

 

“아 맞아, 양치.”

“하민이도 양치해야지, 아직 안 쓴 거 있어. 금방 줄게.”

 

세 사람이 거울 안에 나란히 서 있었다. 입가에 가득 거품이 묻고, 번갈아 세면대 위에 거품을 뱉어내는 내내 그들은 시덥지않은 이야기와 잠든 탓에 미처 보지 못했던 영화의 줄거리를 예준에게서 들으며 키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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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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