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브] 나를 잊은 별에게 (12)
세 사람의 위로 다정한 밤이 내려앉았다. 예준을 중심으로 창가에는 하민이, 거실 안쪽으로는 노아가 자리를 잡고 누웠다. 울었던 탓인지 하민이 가장 먼저 수마에 잠겼다. 이어 노아는 새근거리며 잠든 하민의 숨소리를 소년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예준의 가슴팍에 가만히 손을 얹고 다독였다. 나 지금 재우려고? 조용히 하고 눈 감아, 준아. 아니, 나 혼자서도 잘 자는데….
소년이 미약한 항변을 할 즈음에 노아는 자리에서 뒤척이며 흐트러진 예준의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요새 못 잤잖아, 너. 신경 쓰여서 그래. 난 어릴 때 엄마가 이렇게 해주면 잠 왔거든. 노아는 이런 식으로 예준의 무른 구석을 파고들었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년을 불가항력으로 만들었다. 그 점만 본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하민과 닮은 구석이 있다.
가지런히 잠근 파자마의 위로 툭툭 무심한 손길이 이어졌다. 그 손길을 따라 점차 노아의 숨이 느려졌고, 이내 잠에 빠져들며 예준의 어깨 근처로 머리가 툭 떨어졌다. 소년은 그의 노력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눈을 감은 채 간절히 잠을 청했다. 하지만 이른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소년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하민아.”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하민이 잠투정을 부리며 베개에 머리를 부볐다. 소년은 이어 노아를 불렀다. 공주야. 노아도 마찬가지였다. 응답과 유사한 잠투정을 내놓고는 그대로 입술 사이로 옅은 숨만 새근거릴 뿐이다. 안도한 소년은 몸을 일으켰다. 어쩐 일로 약이 필요 없나 했다. 한탄과 같은 생각을 삼켜내며 물잔에 가득 물을 받고, 처방받은 약 몇 개를 늘어놓았다.
한꺼번에 삼키는 방법도 있겠으나, 예준은 구태여 한 번에 하나의 알약을 삼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효능을 강박적으로 생각하고는 했다. 이건 심리적인 안정, 이건 불안감 완화, 그리고 이게 수면 유도…. 한 알씩 삼켜나가던 예준은 문득 자신의 방을 돌아봤다. 소년의 시선이 잠시 잠든 두 사람에게 날아들었다가 다시 멀어졌다. 조용한 걸음이 이어졌다. 잠시 자신의 방에 들어갔던 소년은 손을 꽉 움켜쥔 채 욕실로 향했다.
“잠이야 금방 오겠지. 넌 대체 뭐가 문제야.”
소년은 자신을 타박하면서도 욕실의 문을 닫고, 욕조에 앉아 세면대를 향해 물을 크게 틀어두었다. 손바닥 안에는 조각난 하민의 코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하민이가 얘기해줄지도 몰라. 아주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면. 그러면서도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파편을 다시 한 번 움켜쥐자 첨예하게 날 선 자리에 부드러운 살갗이 찢기며 선혈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하민의 것이라 불린 코어를 놓지 못했다. 손바닥 안에서 자신의 것과 다른 느린 맥박이 이어지고 있었다. 소년은 마른 욕조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남예준, 진짜 미친 생각 그만해….”
꿈속의 한 사람을 떠올린다. 정확히는 그가 응시하던, 굵은 연결관에 의해 부유하는 하민의 형상을. 알 수 있는 말들보다, 알 수 없는 말이 더 많은 꿈들이 그를 점차 조여오고 있었다. 어떤 날은 실험 일지와 같은 무료한 문장들이 이어졌고, 또 다른 날은 편지였다가, 회고록에 가까운 말들이 이어졌다. 모든 언어는 속죄에 가까웠다.
“하루만이라도 더 기다릴 수 있잖아….”
그러면서도 소년은 자신의 파자마 단추를 풀어내려갔다. 흰 살갗 위에 가만히 파편의 납작한 면을 가져다 대면 하민과 가슴팍을 마주 대고 안은 것처럼 맥박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정말 미쳐가는 걸까. 숨을 고른 소년이 날이 선 면에 굳어가는 자신의 핏자국을 손톱으로 긁어냈다. 이내 손바닥에 쥔 채 가슴팍을 향해 지그시 누르려는 순간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한노아였다.
“미친 새끼야.”
그는 분노한 얼굴로 다가와 예준의 손목을 붙잡았다. 코어의 날 선 면을 따라 베인 손바닥에서 뚝뚝 붉은 피가 떨어져 욕실을 어지럽게 적셨다. 잠에서 막 깨어난 모양인지 노아의 머리칼은 헝클어졌고, 놀란 탓에 선이 고운 눈매가 일그러진 채였다.
“내가 너 이럴 것 같아서 왔어. 알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대충 알겠는데,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지금 이 꼴을 하고서 그딴 말이 나와?”
노아를 밀어내려 했으나 피투성이인 손바닥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그의 손아귀 안에서 손목을 비트는 순간, 거칠게 저를 당기는 힘에 몸의 균형이 깨지며 도리어 욕조에 나동그라졌다.
“당장 나와.”
“노아야.”
손 끝에 걸린 코어를 간신히 붙잡자 그가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손짓했다. 그거 이리 내.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낚아채려고 손을 뻗은 순간 긴 팔이 뻗어져나와 노아의 몸을 구속했다.
“형, 형 무슨 일이예요.”
“이거 놔, 유하민. 괜히 얻어맞기 싫으면.”
소년은 노아를 가까스로 구속한 채 자신에게 시선을 둔 하민이 경악하는 것을 느꼈다. 아, 하민이 다 알아채고야 말았다. 자신의 불면을, 불안을, …그를 향한 불신을. 예준은 어떠한 변명을 하는 대신 입을 벌렸다. 꿈속의 남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폐허를 닮은 하민의 코어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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