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은 별에게

[플레이브] 나를 잊은 별에게 (13)

소년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손바닥에 쥐었을 때와 강하게 박동한 코어의 일부가 살아있는 것처럼 소년의 혀끝에 감기고, 이내 숨길을 타고 들어갔다. 태양을 삼킨 것처럼 숨이 달아올랐다. 예준이 목을 그러쥐자 노아가 대번에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하민을 밀쳐내고 소년을 감싸안았다.

 

“남예준!”

 

당장 입 벌려. 강한 힘과 함께 턱주가리를 움키는 손이 있어 입이 벌어졌다. 소년은 말캉한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축였고, 이내 우악스럽게 움킨 손아귀에서 고개를 흔들어 빠져나왔다. 나 괜찮아. 그냥, 약 같은 거야. 어떤 성의도 없는 거짓말 앞에서 노아는 미간을 좁혔다. 한노아로서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소년을 몰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소년이 그에게 한꺼풀의 다정으로 덮어둔 비밀이, 하민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소년은 노아의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며 맥없이 웃었다. 정말 괜찮아, 그냥 잠이 안 와서 욕조에 있었어. 나 머리 복잡하면 그러는 거 알잖아. 남예준다운 말이다. 그리고 더없이 그를 낯선 도시에 홀로 남은 사람처럼 만들기에 충분한 말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한 소년의 집에서, 노아는 이방인이 되어 숱한 문장을 잃었다. 그는 엉망이 된 욕실을 한 번, 여전히 피가 흐르는 소년의 손을 한 번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고자 무던히도, 무던히도 애를 써야만 했다.

 

“나 눈 뒤집어지게 하고 싶은 거 아니면, 얌전히 손 씻고 나와.”

“…그럴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만이 현재를 견딜 수 있게 할 것 같았다. 그랬기에 노아는 예준의 방문을 열어젖히고 구급상자를 꺼냈다. 거실에는 얌전히 몸만 빠져나온 예준의 자리를 가운데에 두고 다급히 뛰어온 게 분명해 보이는 노아와 하민의 자리가 나란히 있었다. 이부자리 위로 시선을 두던 노아는 입술을 짓이기며 자신이 누워있던 자리를 대강 발로 걷어차듯 밀어냈다.

욕실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하민이 소년에게 무어라 말을 붙이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노아는 확신했다. 예준은, 답하지 않을 것이다. 욕실 문 앞에 서 있는 상대가 노아가 되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임을 안다. 하얀 구급상자를 열면 그가 채워놓은 것들이 가득했다. 포비딘 스틱을 시작으로 연고와 듀오덤까지 꺼내 일렬로 늘어놓은 뒤 오른편에 가위를 가지런히 놓은 후에야 노아는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한노아는 남예준을 신뢰한다. 그의 성격에 걸맞게 굴자면 당장 그를 병원으로 끌고 가는 게 속이 편했다. 하지만 상대가 소년이 되는 순간 그의 옳고 그름은 축을 잃는다. 간신히 소년의 소맷부리를 쥔 사람이 된 채 애걸하고 마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거, 알지 준아. 네가 무엇도 너를 채울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내가 너의 손 안에 나를 쥐어줬다는 걸, 너는 알지? 모든 애원의 종장에는 단 하나의 문장이 남는다. 나, 두고 가지 않을 거지.

문장의 무덤 속에 사는 소년으로 인하여 노아는 자연스럽게 묘지기가 되었다. 그의 마음 언저리에 자라난 날 선 말들을 잘라내고, 무뎌진 낯이 소리내어 웃게 되기까지 그 곁을 지켜왔다. 그래서 하민에게 기울어진 천칭처럼 구는 소년을 볼 때마다 마음 어딘가가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언제 또 꺼내왔어.”

“조용히 하고 와서 앉아. 유하민, 너도.”

“으응.”

 

말꼬리를 늘이며 다가오던 소년이 뒤를 돌아봤다. 하민에게 손짓이 이어진다. 하민은 화가 난 것 같기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기도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년이, 무뎌질 수밖에 없는 얼굴이다. 당장이라도 그를 붙잡고자 튀어나갈 것 같은 얼굴에 노아는 소년의 팔목을 붙잡아 힘있게 당겼다. 아이고. 맹하니 서 있던 몸은 쉽게 바닥으로 고꾸라지듯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유하민. 준이 잡고 있어.”

“……네, 형.”

 

제법 이 모든 상황이 익숙해보이는 노아의 곁에서 하민이 팔을 뻗어왔다. 어라, 하는 순간 하민은 소년의 몸을 단단히 구속했다. 벌어진 파자마의 사이로 가슴팍 중앙에 난 옅은 상처 위로 먼저 포비돈 스틱을 슥 문지르자 소년이 미간을 좁히며 엄살을 부렸다. 따가워, 너무 따가운데 이거? 일부러 누르는 거 아냐? 품을 빠져나가고자 바르작거리다가 손바닥의 상처가 벌어지자 소년은 신음을 삼키며 도리질했다. 하민의 어깨에 소년의 뒷머리가 문질러지며 머리칼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예준이 팔 못 움직이게 꽉 눌러.”

“나 지금 너무 세게 눌려있어서 아픈데.”

“엄살 부리지 마요, 형.”

 

예준은 달아나고 싶은 얼굴을 했다. 소년은 하민의 목덜미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피가 새어나오는 손바닥 위를 노아는 꼼꼼히 닦아내고, 그 위에 소독약을 문질러 발라주며 낯을 가까이했다. 소년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으나 노아도, 하민도 손속에 자비를 두는 법이 없었다. 이건 흉터 남겠다. 노아의 체념 섞인 음성과 함께 더운 숨이 상처 근처를 간질이자 그 자리에서 둥둥 북을 울리는 것 같은 맥박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희미하게 뛰는 또 다른 박동을 소년은 애써 외면하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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