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터

Ator

자서전? by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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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제법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일을 취미로 하여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다듬으며, 파고드는 것을 좋아하는 필자와 같은 인간들이 그러한데, 그 중에서도 특히나 말하고 싶은 나 자신의 독특한 점은 거친 아름다움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깔끔하고 새하얀 빛으로 반짝이며, 얼룩 하나 없이 잘 관리된 백색 타일의 공간보다 세월을 타 껍질이 벗겨진 고목나무나 바닥의 판자따위를 손끝으로 느끼는 것이 좋고, 정제된 절제미를 강조한 글보다는 화자가 느낀 날것의 감상을 두서없이 늘어놓은 유년기 소년들의 일기장스러운 글을 더 좋아하는 것.

그렇다고 너무 난잡하면 정신이 사나워져 집중이 흐트러지니, 그야말로 '적당한 절제미가 담긴 야성의 느낌'을 좋아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마치 '심플하고 모던한 화려함', '절제한 듯 절제하지 않은', '무채색의 화사한' ⋯⋯같이 수많은 출판기관의 꾸밈작가들이 머리를 쥐어뜯을 수식어인데. 절제가 과해서도 안되고, 야성적인 느낌이 너무 과해도 안 된다! 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그 절묘한 중간지점이야말로 예술의 극치인 것이다. 흔히 주간지 일면에 실리는 '이상형 인기투표' 따위에 말을 얹으며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성이 풀어져있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평소엔 후줄근하던 남성이 말끔한 옷을 빼입고 나오는 것이 좋다' 같은 말을 하는 것에는 모두 저러한-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깊은 사연이 있는 법이다.

아주 어렸을 때 울다하의 투기장을 본 적이 있다. 당시의 편집자는 키가 무척이나 작았는데, 투기장을 둘러싼 관객석에 앉아서는 도저히 경기를 보지 못할 수준이었다. 고작해야 8세 언저리 되는 꼬맹이가 투기대회 따위에 관심을 가질 리 없으니 발판 하나 준비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왜 찾아갔지. 절제되지 않은-더도 말고 덜도 아닌 중간의 거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괴상한 취향이 그 당시에도 존재했던 게 아닐까?

충분히 자라나 이제는 투기장의 난간이 제 허리에 걸쳐지는 지경이 되었으나, 여전히 필자는 제 발로 투기장에 걸어들어간 적이 없다. 구경하기 위해서라 해도 영 내키지 않았고, 싸우기 위해서는 더더욱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늘진 장소에서는 늘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법. 감히 뭣모르고 들어갔다가 매서운 소리로 부딪히자 두쪽으로 부러진 칼날이 제 뺨을 스치기라도 한다면 어쩔 것인가. 살을 찢고 피가 터져나올 수록 커지는 사람들의 아우성과 환호는 자신에게 견뎌내기 힘든 것들이었다.


희망의 등불, 역전의 용사, 홍련의 해방자, 칠흑의 반역자, 종언의 결전자, 그리고 평범한 한 명의 모험가.

7성력의 에오르제아─갑작스럽게 붉어진 하늘, 쏟아져내리던 절망의 비. 세상을 좀먹던 위기를 종식하고 자랑스러운 땅으로 돌아온 우리의 '영웅'은 그 명성이 자자하다. 이는 이른바 종말 사태로 인한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라자한을 제외하고도 재앙을 직접적으로 공표하며 이주를 주도한 북해 제도의 샬레이안을 비롯한 '모든 땅'에 아우르는데, 정작 그 영웅이 세상을 구했다는 말을 제외. 세간에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거대한 괴수를 때려잡은 팔은 수백 번의 전투를 거쳐 그 근육의 굴곡이 마치 거대한 산맥같고, 몸집은 집채만해서 건장한 아우라족 남성만한 검을 한 손으로 잡아 휘두른다던가 하는 소문이 한창 거리를 뛰어노는 아이들 사이에 만연하니, 그 꼬마들은 자신들이 스쳐지나간 나무 뒷편에서 갓 구워져 보슬한 빵 하나를 씹어삼키던 외팔의 청년이 그 무시무시한 소문의 주인공이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 편집자, 제보자 익명 A와의 대화 도중 작성된 수기 일부 ─

건네받은 사진에는 처음 보는─ 그러나 거리 한복판을 나돌다보면 어딘가에서 쉬이 볼 수 있을 법한 인상의 휴런 족 청년 하나가 있었다. 초상을 찍는 것조차 낯선 듯 표정과 몸짓은 어색하게 굳어있고 한쪽 팔의 부자연스러운 공백을 덮은 코트가 구겨지듯 걸려있었으며, 고급진 와인의 향이 느껴질 법한 오묘한 자줏빛을 바탕으로 여러 색에 물든 머리칼이 보였다. 그 부자연스러운 태도의 청년은 그의 시점을 기준으로 우에 검정, 좌에 선명한 보랏빛을 품은 신비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흔히 오드아이라 떠도는 '홍채 이색증'으로써 당사자의 경우 우려와 달리 선천적인 특징일 뿐 시력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오늘의 제보자는 본인이 아니다. 제보자 ─이하 익명A씨에이터의 오랜 팬이자 친구다. 종말이 종식된 이후로도 그는 여타 다른 모험가들과 다르지 않은 여생을 살며 거리를 전전하고 있는데, 그런 그에 대해 세상에 폭로 각색하여 널리 알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본인을 찾았다는 것이다.

한참동안이나 양식서에 적힌 이력과 그의 행적을 살펴보았고, 익명A를 마주했다. "그러고보니 당사자분의 허가는 받으셨습니까?" 물론 허가의 여부따위는 사실 제게 그리 중요하진 않았지만, 일종의 보증표다. 이 이야기를 퍼트린다고 제가 그 영웅님께 호되게 혼나는 일 따위는 없겠지요? 하는 식의 암묵적인 확인이었다. 이렇게 재차 여러 번 확인하는 시늉이라도 하면 적어도 책임소재는 어느정도 지울 수 있게 되니까 말이다. 이 말을 한 이래로 이미 글러먹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사람의 호기심과 그로 인해 들끓는 흥분은 주체할 수 없고, 이것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창작자의 본질 그 자체 아니던가. 제아무리 창작윤리라는 말이 세상에 존재한다 해도 이 때가 아니면 대체 언제 이 거대한 소문 -대부분 황당할 정도로 부풀려진- 의 주인공을 파헤칠 수 있을까. 필자는 생각했다. 내일 목이 날아가더라도 별 수 없다고. 절대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물론 정말 날아갈 때가 온다면 부리나케 도망칠 것이다. 돈과 욕심이 아무리 소중해도 제 목숨보다 더할까. 이쯤되면 당신들도 슬슬 궁금할 것이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그 장대한 서사시가 지금부터 시작된다. 물론 엄청나게 축약된 버전으로.

참고로 에이터 씨 당사자의 의사는 결국 알 수 없었습니다만, 제보자 익명A씨와는 이미 협의를 거쳤으며
해당 문서의 모든 내용에 대하여 본인은 책임이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정말입니다! 저도 억울하다고요.
전 분명 거절했습니다!! 이래서 사람이 너무 유명해도 고생만 하고 좋을 거 하나 없다는 겁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돈이었단 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제가 언제 이런 큰 돈을 만지게 되겠습니까?


기본 인적사항

  • 이름 [ 에이터 ]

  • 종족 [ 휴런 - 중원 부족 ]

  • 나이 [ 불명 ]

  • 출신 [ 불명 ]

  • 소속 [ 前 새벽의 혈맹 ]

본명, 나이, 출신⋯⋯ 인적 사항 중 '불명'이 아닌 부분이 대체 뭡니까?
제대로 조사하셨다고요? 이게요?!

흔히들 투기장의 검투사들이라면 성난 황소 라우반이나 우락부락한 근육에 부담스러우리만치 큰 체격을 지닌 중후한 전사들을 떠올릴텐데, 이번에는 조금 경우가 달랐다. 인상적으로 각인되는 이미지는 분명 전자겠지만 어디까지나 그런 검투사들이 살아남기 용이할 뿐이지, 그렇지 않은 전사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 이번에 서술될 에이터라는 모험가도 그랬다.

올라간 눈꼬리와 눈썹은 그를 '평범한 휴런'의 인상에서 '조금 사나운 휴런'의 인상으로 만들었다. 치켜뜬 눈은 언제나 주변을 경계하며 자신을 보호하고 환경의 이상을 감지하며 기민하게 굴러갔는데, 이는 그가 평소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에 가깝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영웅' 아닌 '에이터'의 세상은 어땠을까.

그는 평범한 모험가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다. 사실 이러한 경우는 각종 매체나 소설 따위에서도 줄곧 등장하고는 한다.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마을 청년이 사실 마을에서 제일 가는 권력자" 였다던가 하는 일종의 클리셰 말이다. 어찌보면 에이터는 그런 클리셰의 산물이자 혹은 그 주인공 자체인 존재인데, 실제로 그가 주점과 길거리를 지나는 동안 그가 세상을 종말로부터 구원한 용사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는 한다. 특유의 버건디 와인을 닮은 머리칼이 적색과 같은 빛을 흘려보내도 그저 '얼굴이 반반하여 볼만한 독특한 머리색의 청년 하나'가 걸음하여 지나가는 수준 정도다. 왼쪽 귀에 착용한 귀걸이가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린다. 어딘가 거친 그의 품행과 상반되는 잘 세공된 노란 보석에 빨간 천이 늘어진 것이 특징이다. 모험가 이전에 몸 쓰는 일을 하던 탓인지 전체적으로 잘 잡힌 근육이 돋보이며, '평범한 선 치고는 볼만한' 특징을 지닌 반반한 외모에 걸맞게 의외로 코드 따위의 거추장스러운 복장도 고집하는데, 필자는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코트는 어디까지나 에이터 본인의 보호를 위한 장비에 불과하지 결코 그가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걸치는 용도는 아닐 것이라고.

어깨의 골격을 강조하기 위해 코트를 어깨에 걸치는 모험가야 숱하게 있다지만 생각을 조금만 전환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왜 옷을 입는가.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수치심을 알고 있기 때문인가? 물론 그 의견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옷은 반드시 그런 의도로만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실제로 그의 기록 대부분에서 코트가 단순 치장을 위한 차림새의 일부로 작용하는 경위 자체가 워낙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코트를 어디에 사용하느냐. 답은 간단하다. 무기다. 거추장스럽고 화려한 의상은 대부분 그럴만한 이유를 떠안는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길고 많은 장식이 늘어진 로브'의 대부분이 마법사의 에테르 순환을 용이하게 만드는 재질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투사에게도 옷가지란 대부분 자신의 무기 중 하나로 인식될 때가 어련히 있기 마련이다! 가령 상대의 얼굴을 덮는다던가, 감싸 질식시킨다던가, 물론 고─급 술 위에 불씨가 튀어서 젖은 옷을 덮어 불을 끄는 둥의 활용법도 있겠다만 이건 너무 아까우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워 말을 삼가도록 하겠다. 익명 A씨는 열기와 한기가 어지러이 나도는 밑바닥조차 마다하지 않는 비굴한 에이터의 처지를 비웃으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는 이름조차 없는 고아에 죄수 검투사 출신이었는데, 듣자하니 온갖 비열하고 더러운 일을 일삼으며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 다녔고, 덕분에 상인들의 한을 톡톡히 산 주제에 떳떳하게 살아가는 꼴이 같잖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넓은 다날란의 대지 한복판. 친지도 없이 홀로 쓰러져있던 소년은 한 상인의 손 아래에 구조되어 울다하라는 상업도시에 도착한다.
그러나 부가 권력이 되고, 갖지 못한 자는 나락으로 내쫓기는 울다하의 실태에 무일푼 상태로 정착한 소년이 과연 얼마나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고 살 수 있었을까?

소년은 점차 날카로워졌다. 자신을 칼처럼 벼르지 않는 이상 사방에서 독사들이 달려들어 자신을 병들게하고 살점을 얼마나 썩게 만들지 알 수 없는 처지였던 탓이다. 사기, 납치, 인신매매.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며 소년은 자신의 정신을 더욱 단련시켜야 했다. 잔혹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살아가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소년 자신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 악질적인 부호들의 눈을 피해 다날란 외곽과 진주거리 바닥을 전전하며 길 지나는 여행객들 앞에서 굴욕을 삼키며 구걸하고, 도둑질이나 약탈 따위까지 일삼으며 하루하루 간신히 생계를 이어갔다. 빵 하나와 음료 하나조차 마음 놓고 사지 못해 야위어가면서도 삶을 향한 갈망은 점점 커져만 갔고, 결국 어느 날 소년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온다. 사람들에게 붙잡혀 죄수 검투사 신분으로 투기장에 서게 된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낡은 검 하나만으로 대항했으나 결과는 당연하게도 처참한 완패. 항복을 선언한 이후에도 경기는 멈추지 않았고, 소년은 끝내 한 사람의 중재와 보호 속에서 겨우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삶 속 뿌리박힌 불신은 너무나도 깊었던 탓일까. 어느정도 몸이 회복되자 소년은 자신을 구해주었던 길드의 돈 될 만한 물건을 훔쳐 달아나려 했다고 한다. 물론 노련한 모험가들을 육성하는 길드에서 마스터의 역량을 무시하고 탈출을 강행한 탓에 볼품없이 붙잡혔고, 그 길로 검술 훈련까지 받게 되었다고.

평가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물불 안 가리는 타입', '불 속에 뛰어드는 나방', '앞뒤가 없는 녀석'. 일상생활에서도 쉬이 접할 수 있는 "미래 없는 듯한 행동을 일삼는 자식들" 에게나 붙을 수식어인데. 이는 전투와같이 생사가 직결된 상황에서도 줄곧 -어쩌면 더 많이- 쓰이고는 한다. 다만 평상시에는 접할 기회가 많이 없는 말들인데. 그건 싸움에 몸을 던지는 대부분의 모험가와 용병들이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과 신체의 보전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높은 보수를 받아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병원에서의 생활만으로 거덜나는 것이 현실이며─ 나아가 목숨을 잃을 경우 그간의 명성과 벌어들인 재화가 아무리 많다 해도 함께 땅에 묻혀 사라질 뿐인 탓이다. 누구도 자신의 수고와 그 보상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는다면 모를까.

에이터의 사고방식은 천박하다. 도덕적인 의식은 결여되어있다시피하며, 거친 언사와 그 배경이 되어있는 날카로운 경계심을 품고 있는데. 그럼에도 처세술에 능하고 어느정도 선량함과 호의적임을 표방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더 나은 영향을 준다는 것을 빠르게 학습한 덕분에 주변의 인물들을 살피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눈치가 크게 발달했다. 또한 타인에게 자신을 맞추는 것에 굉장히 능숙한데, 이건 소위 말하는 애인 대행-조건 만남이나 잠자리 등의 전제마저 포함한다. 이는 극한의 상황으로부터 고립되어 자라난 청소년이 성인이 된 유형들에게서 특히 자주 보이는데. 주로 윤리의식이 결여되어 살아남기 위한 행동에 의미를 크게 부여하지 않거나 부정하며, 도덕적인 경계로부터 멀어져 자신을 둘러싼 것에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하거나 이익을 위해 그를 숨기려 지나치게 평온한 모습을 위장하는 습관이 언뜻 이야기 속에서 엿보인다.

그는 상대가 악인이라 할지라도 특유의 친화력을 앞세워 스스럼없이 대할 줄 아는데, 이는 에이터가 악인조차 용납할 정도의 호인이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밑바닥부터 기어올라온 자신의 상황 탓으로 보인다. 그들과 자신을 같은 악인으로 여기는 탓인지, 혹은 자신이 그들을 타박할 처지가 아니라 여기기 때문인지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불안정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저질러온 경미한 범죄와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잔혹성의 범죄에는 어떻게든 차이가 있기 마련인데⋯⋯, 파고들기 시작하면 이건 주간지 칼럼이 아니라 범죄자의 심상분석서에 그치게 되므로 자세한 이야기는 삼가도록 하겠다. 애시당초 인간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법이라는 일종의 우리를 만들어 그 안에 개인을 종속시켜 살아가는 것은 아직까지도 쟁쟁한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가.

다만 이러한 '악인에 대한 경계가 희미하거나 도덕 · 윤리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 사회에서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데, 사실 나도 그렇다. 내 앞에 있는 이 제보자가 만약 제 손으로 사람을 몇이나 묻은 연쇄 살인마라 하여도 "오, 흥미롭네요." 이상의 감상을 갖지 않을 것이라서. 하지만 이건 그 행위를 옹호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데, 솔직한 의견을 내어보자면 현실감이 없고─ 마치 금방이라도 제 살갗이 벗겨질거라는 공포감이 너무나 멀리에 존재하는 것이 그 이유다. 혹은 그렇게 되어도 상관 없다고 여기게 되거나. 아니면 내가 너무 강해서 그런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언제건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여유가 있을 때. 이에 대한 견해는 언젠가 당사자에게 직접 듣고 싶다. 혹시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대처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저도 알려주시면⋯.

물론 후자의 경우에 전 해당되지 않습니다. 싸움이라곤 조금도 모른단 말입니다!
길거리에서 누가 어이, 돈 좀 있냐? 하며 불러세우면⋯⋯.
제 주머니에 꼭꼭 숨겨두었던 금화 다섯 닢이 든 주머니를 양 손으로 받쳐들고 볼품없이 떨고 있겠죠.


모험가로서의 전투방식은 마치 뒷골목의 개싸움을 방불케 하며, 빈민촌 구석에서 벌어지는 비명섞인 혈투나 불평등한 환경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발버둥치는 청년들이 상대의 눈에 흙과 모래 따위를 집어던지고, 칼 대신 돌이나 유리조각로 상대를 내리찍으며 제압하는 것에 훨씬 가까워보인다.

검을 들고 전투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날붙이 등의 무기가 대부분의 전시상황에서 상대적 우위를 갖기 쉬운 탓일 뿐, 손에 잡히는 것들이라면 대부분 자신의 무기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숙지가 잘 되어있는데. 웬만한 흉기를 어떻게 다루어야할지는 다 꿰어두고 있다고 무방할 정도라 한다. 그 중에서는 총도 있다. 마치 최근 세상에 드러난 건블레이드나 마나트리거를 발포할 때의 감각을 살려 사용하는 듯하며, 그것을 제외하고도 명중률 자체가 뛰어나 그야말로 사냥꾼 아닌 미친 개가 따로없다고. 활 또한 사용할 줄 알고 있으나 시위를 당기며 움직이는 것까지는 숙달되지 않은 모양이다. 마법같은 분야도 손은 뻗어뒀지만 근접 무기만큼 능숙히 다루지는 못하며, 영창하기 어렵다는 시답잖은 투덜임도 더해준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주체할 수 없는 상황의 흐름을 무척이나 경계하며 강한 반항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세간에서 그를 영웅이라 칭하게 만든 모든 행적들은 이러한 밑바탕이 받침되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갈 땐 가더라도 이 모양으로 만든 원흉은 파괴하겠다"는 결심같은 것 말이다.

모험은 언제나 돌발의 연속이다. 그럴 때마다 사람은 자신을 지탱하고 나아가게 할 원동력이나 목적을 설정하게 되는데, 이러한 유형의 경우 오히려 그 돌발에 대응하는 방식과 목표의 설정이 굉장히 단순해진다. 별다른 과정을 생략하고서 '너는 조지고 간다'를 실천하기만 해도 인생의 목적을 달성하고 성취감이나 안정을 얻을 수 있지 않은가. 물론 그만한 단점도 존재하는데, 당장 눈앞의 목표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다른 대부분의 것들에 쉬이 소홀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싸우기 위해 동료를 배신하는 전투광 같은 노선을 탈 수도 있다는 소리. 실제로도 에이터라는 인간은 그다지 자신이 타인에게 비치는 것을 달리 관심갖지 않는 성향의 인간이기 때문에 이와같은 상황은 언제라도 전개될 수 있다.

물론 에이터는 그러지 않았고, 라그나로크와 함께 북해로 귀환했다. 그는 너무나 험난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끝내 새벽과의 약속을 지켰고, 자신의 의지였는지 알 도리가 없으나 세상을 구했다. 굳이 책임감을 갖지 않더라도 의리마저 저버리진 않는 사람이라는 소리다. 물론 어느 정도는 의도치 않게.

자신을 돕는 사람에게 그것을 응당 갚을 줄 알고,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거든 원흉을 꺾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굳이 할 필요도 없는 일에 손 뻗지는 않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서는 유종의 미를 추구하고 훌륭하게 일을 마무리짓길 원하는데, 외부적인 요인으로 그 과정에 장애가 생기게 되면 그 원흉을 해결하는 데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조금 가볍게 말하자면 '의뢰서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돈 많이주니 받은 일감으로 사람을 죽였는데 그게 그 근방에서 시민들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던 소문의 연쇄 살인마' 거나 '추워서 남의 집 화덕에 불 떼웠더니 마찬가지로 추위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녹여 손 녹이게 만드는 사람'⋯같은 것이다.

그냥 정의로운 거 아냐? 싶겠지만 엄연히 다르다. 정의라는 단어는 여러 방면으로 사용되는데. 가장 보편적으로 세상에선 [ 사회와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 ] [ 사회 전체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법과 질서를 세우고, 구성원의 기회나 권리를 공평하게 보장하는 일. ] [ 바른 의의 ] 정도로 거론된다. 에이터라는 사람이 정의라는 개념을 어찌 생각할지 타자의 시선으로 알 방도야 없겠지만, 유년시절을 법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온 그에게 사회가 말하는 법과 정의가 과연 얼마나 와닿을지를 생각해보라. 에이터는 정의롭고자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손 닿는 곳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다면 눈길 한 번쯤 줘볼 법도 한데, 자기 손에 들린 빵을 떼어주기엔 굳이 그리하지 않을 것이란 소리. 만약 그에게 일행이 있다면 신임을 사기 위해서라도 그런 선의 아닌 선행을 할지 모르겠지만, 당장 주머니에 남은 주화도 몇 남지 않은 상황에 자신이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섭취하는 식량조차 노숙자에게 나누어주면─오히려 자신이 싸우지 못하게 될 것을 알고, 그 이후에 생길 문제들을 정리하며 냉정히 지나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하는 행위가 선행이나 정의 따위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또한 마다하지 않았겠지. 그건 에이터의 미래에 도움이 된다. 앞길을 순조로이 열 수 있게 하고, 사람들의 신임을 사기 쉽게 되어 영웅의 존재를 아는 상인이나 정치인, 죄인 무리를 명성 아래 어느정도 통제할 권리를 얻는다. 이는 정의롭고 사회에 헌신적인 인간상보다는 [ 현실적인 실리주의─개인주의적 성향. 그런데 이제, 본의아니게 정의로운 일을 하는⋯⋯. ] 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에이터가 가장 중요시 생각해야하는 것은 안정이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로 인해 인생에 굴곡이 생기는 것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노할지언정, 그를 자신의 원동력삼아 불태우며 냉정하게 나아갈 줄 안다. 좋은 생각이다. 쓰레기란 치우면 그만이 아닌가. 삶이란 어차피 사건의 연속이며 자신이 그 영원한 생존자일테니 진즉 체념했거나 마음 속 깊이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자리에 주저앉아 좌절하기에는 성미에 안 맞고, 분노의 목표를 확실하게 설정하는 타입이겠지. 게다가 그 분노가 불러일으켜지지 않으면 사람은 사람답게 살 수 없다. 모든 것에 체념하고 회의적으로만 살아가기에 우리 살 세상은 너무나 넓고, 인생은 긴데. 응당 아깝지 않겠는가? 누구나 따스한 집과 햇살 내리쬐는 길목을 자유로이 거닐 수 있는 자유를 희망한다. 어둡고 축축한 투기장의 흙바닥을 구르고, 살기 위해 버려진 치즈 한 조각을 씹어삼켜야하는 삶이 아니라.


여담으로 정작 인터뷰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것은 이 인터뷰를 마무리할 무렵 사무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존재 때문인데,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도망치지 못한 익명A는 창문으로 탈출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압당했다. 물론 필자는 다행스럽게도 마저 글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애시당초 방으로 들어선 그 존재는 이 타자기에 일말의 관심조차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서운하긴 했다. 저기요. 지금 그쪽 이야기 하는 중인데요⋯⋯. 울지 마라. 너는 훌륭한 타자기니까.

⋯⋯그리고 아마 익명A는 지금쯤 영웅의 앞에서 벌벌 떨며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을 것이다.

참으로 좋은 이야기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철없게도 차라리 철면피가 되어 사인 하나라도 부탁할 것을 그랬나 후회하게 된다.
훗날 이 종이는 구-새벽의 혈맹 진지, 현재는 전 회계가 운영하고 있다는 공방으로 전달되는데⋯⋯⋯.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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