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뮤렌 리다프카

Nimuren Lydaphca

자서전? by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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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시인을 아는가? 시인은 고작 몇 자, 몇 줄 밖에 되지 않는 줄글들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들이 읊는 마음을 느끼고, 그들의 움직이는 입과 손을 보고, 그 사이에 흘려왔을 땀과 눈물을 이해하면 어느새 당신도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필자는 시를 제법 좋아한다. 시인들은 언제나 자신의 인생을 사는 주제에 타자에게 그것을 보이기 위해 평생이라는 미련한 시간을 할애한다. 간혹가다 타인 그 자체가 되어있을 때도 있었다.

오늘 적게 될 자는 음유시인이다. 노래와 함께 자신의 시를 전하는 사람이다. 타인이 남겨왔거나 누군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읊어진 추모시일 수도 있다. 생명이 살았던 곳 어느 땅이던 그들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장소에서 불리는 음유시인이란 조금 더 특별한 존재들인데, 그녀가 사는 곳에서 세간에 나도는 음유시인의 정의란 이렇다.

다채로운 시와 노래를 불러 아군을 지원하는 고대의 궁병. '음유시인'이라고 하면 여행을 다니며 각지의 술집이나 연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연상할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궁수를 그렇게 불렀다. 고대 궁병은 전장에서 활시위를 튕기며, 시가를 읊조렸다고 한다. 공포심을 떨치기 위해,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그리고 죽은 전우를 기리기 위해⋯⋯⋯ 이리하여 목숨 걸고 싸우는 전장에서 읊조리는 시가에는 사람의 혼을 진정시키는 힘이 깃들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파이널 판타지 XIV 공식 홈페이지─


그야말로 그녀다운 악곡 선정이다. 그녀가 살아오며 다져온 자신의 기반, 쉬이 말하자면 취향이 고스란히 돋보인다.

"여기가 바로 소문에 의하면, 주간 레이븐에서 은퇴한 기자가 인터뷰를 해준다는 석판 주소일까?"

입이 떡 벌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주간 레이븐에서 은퇴한 적도 없었고 애시당초 그곳에 취직한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일해보지 않은 일터에서 은퇴했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듣기로 그녀는 지인의 소개를 통해 나를 만났다. 첫 인상에 눈으로 각인된 것은 날개처럼 부드럽게 뺨을 감싸 내려오는 머리칼이다. 필자가 전달받은 그녀의 인적사항 도표에는 이러한 문장이 있었는데. [ 머물기를 택한 새, 날개쉬는 음유시인. ] 이다. 그야말로 그 짧은 머리말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던가. 당신이 이 글을 통해 알게 될 그녀는 새장 안에 머무는 가여운 다친 새가 아니다. 누구보다 자유분방하고, 하늘을 사랑하며, 시원한 바람에 자신의 노래를 태워 보낼 수 있는 종달새다. 날갯짓을 할 수 있음에도 머무르는 것은 그녀의 미련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기원된 여유일 것이다.

당사자에게도 이야기했지만, 돈만 던져주고 괴상한 자세만 취하며 제 시간을 뽑아먹던 누군가와는 확실히 다르더군요.
정말이지 감동적이었습니다. 왜 제 인생에는 이런 손님들이 이제야 찾아오고 있는 걸까요?

여기까지 방문한 당신은 니뮤렌 리다프카라는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관계는 또 어떤가. 친우인가, 혹은 동경의 대상인가? 사실 바보같은 질문이다. 많은 이들이 이 글을 읽게 되는 계기 자체가 그녀를 알기 위함이겠지. 분명 독파하기로 결정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굉장히 살갑게, 그리고 친근하게 사람을 대할 줄 안다. 누군가의 기분을 파악하는 것에도 능통하며 사람에 대처하는 방법도 잘 아는 것 같다. 아마도 그녀의 직업적 특성이나 천성의 이유로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그녀가 그 모든 일에 자신의 '과한 신경과 힘'을 쏟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노력을 하지 않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아주 자연스럽고 거칠지 않게, 마치 녹음이 번진 숲 속─그늘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을 맞으며 잎사귀의 노래를 자아내는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처럼.

그녀는 검은장막 숲 남부삼림과 동부 다날란 경계 사이의 작은 부락에서 태어났다. 도표에 적힌 문장들을 인용하여 그녀의 외견을 서술하자면, 백조의 깃털을 연상시키는 새하얀 백발, 그녀의 출생을 증명하듯─선명하고 크게 자리잡은 검은 동공. 그리고 마치 일식을 연상시키는 하얀 홍채. 겨울 속에 핀 붉은 꽃잎처럼 하얀 피부, 고혹적인 입술과, 왼쪽 눈 아래에 자리잡은 눈물점. 이성으로서의 욕망을 가지지 않았다 한들 누구라도 한 번쯤 숨을 멈추고 돌아보게 만드는, 그야말로 시선을 휘어잡는 외모.
이러한 외관에 걸맞게 필자가 보는 니뮤렌은 자신의 우위점을 굉장히 잘 아는 것 같았다. 이른 바 자신의 특징을 어떻게 다루어야 매력적일지 잘 아는 사람. 자기 관리로 인해 다듬어진 것인지, 선천적으로 우위에 서 있던 미모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분명 이러한 것들을 유지하고 부각시키려면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관리해야하는지 꿰어두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첨언하자면 이 편집자는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내걸고 내 시원찮은 글방에 찾아왔을 때, 도대체 왜 루비길 국제시장의 무대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환호를 받으며 노래하고 춤춰야 할 가희가 여기에 있는가 착각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녀는 실제로도 실력있는 음유시인이자 많은 이들의 뮤즈였기 때문에, 실제로 그러했다면 '내 사무실에 어떻게 도달했을까' 가 아니라 '수없이 밀려드는 스케줄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생각한다. '자유와 행복은 동일할까?' '행복한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인가?' '나도 자유를 찾으면 행복해질까?' 누구도 그 답을 알지 못하겠지만, 필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자유와 행복은 동일하지 않다." "행복한 사람이 반드시 자유롭지는 않다. 반대로, 자유로운 사람이 반드시 행복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자유를 찾으면서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삶에서 승리한 사람들이다." 모두가 삶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자기 나름대로의 목표를 설정하고 나아갈 때. 사람들은 필자의 두 눈에서 그 순간 삶에게 승리한 것이다. 나는 그녀와 이야기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그녀에 대한 것을 수 없이 생각하며 떠올렸다. 이 사람 또한 그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쥔 사람이로구나.

우리는 사실 누구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삶은 언제나 우리를 괴롭게 만들겠지만, 동시에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저는 이 말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안일한 생각이라 꼬집으실 수도 있겠지만 긍정적이면 좋은 게 좋은거지요.

어쩌면 당신이 가장 잘 알고, 또 알아야 하는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행복과 성공의 단맛은 실패를 발판삼아 뛰어오른 사람들에게 더욱 크게 다가오는 법. 무엇보다 가벼운 그녀의 두 발이 언젠가 날갯짓하기 위해 뛰어오르기를 기대하며 줄을 잇는다. 시인의 노래를 외치며 살아가는 그녀에게, 언젠가 니뮤렌 리다프카(가명)를 위한 노래가 탄생하기를 기대한다.


기본 인적사항

  • 이름 [ 니뮤렌 리다프카 ]

  • 나이 [ 34 ]

  • 성별 [ 시스젠더 여성 ]

  • 종족 및 부족 [ 미코테 ─ 달의 수호자 ]

  • 현재 거주지 [ 신원 보호를 위하여 검열처리됨. 누가 물어봐도 함부로 알려주지 마십쇼. ]

  • 신장 및 체중 [ 약 1.7얄름 , 숙녀의 체중을 함부로 적어둘 수는 없습니다⋯. ]

방랑자

니뮤렌 리다프카는 제법 장난스러운 사람이다. 특히 그녀가 나에게 이 의뢰를 부탁하며 하는 소리가 가관이었는데, 동의서에 적힌 [ 유잼추구 ─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거든 문의 주세요. ] 문항을 확인하고서 뱉는 말이, "마음에 드는 동의서네." 였기 때문이다. 정작 그녀의 도표를 읽는 내내 도저히 딴지를 걸 구석이 없으니 원하는 장면은 많이 첨가하지 못했다만, "특히 완전 재미있게 넣어달라"는 인상적인 답변은 차마 적기를 참고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까, 아니면 '천성이 가벼우며 호수 보기를 수프 그릇 보듯 하는 사람'인 걸까. 자세한 것은 미궁 속으로⋯⋯.

그녀에 대해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거나, 많은 것을 나눈 사이에서는 또 다르게 느껴질까? 니뮤렌은 간혹가다 깊은 외로움을 담은 눈으로 검은장막 숲 남부 삼림과 동부 다날란의 경계지, 어느 길목에서 멍하니 서 있을 때가 있다고 한다. 그녀가 태어난 곳이다. 걸음을 몇 발자국 옮기는 것만으로도 푸르른 녹음이 뿌리내린 거대하고 울창한 은혜의 땅과, 후덥하고 메마른 역사와 함께 사막의 대지를 가로지를 수 있는 곳.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때때로 향수를 느낀다고 한다. 자신이 고향에 있을 적에 보아왔던 것, 들어왔던 것들을 생각하며 고향 땅이 자신이 발걸음하는 곳과 다르고, 돌아간다 하여도 그 시절의 모습일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것이다. 이 '타지 생활의 스트레스로 고향을 생각하거나, 추억에 잠겨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을 뜻하는 향수병이라는 단어는 굳이 분류하자면 의학적으로 볼 때 우울증에 가까운데. 니뮤렌이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자신의 터전이었을 부락을 추억하며 무엇을 떠올리는지는 타자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니뮤렌에게 '향수병을 알고있느냐' 묻자 그녀는 질문이 있으면 찾아오겠다던 말을 단 몇 초 사이에 번복하는 꼴을 보며 호탕하게 웃더니 "방랑자들의 경계대상 제1순위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녀가 문맥을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이란 미미해보였기에 자신을 방랑자라고 지칭하는 듯한 언동에 대하여 질문하니 "날개를 쉬며 땅에 앉으니 보이는 것들도 생각보다 많이 있더라." 하더라.

방랑자 라는게 꼭 거창한 것은 없고, 내가 34년을 살면서 느낀 바로는 사람은 모두 인생을 방랑하고 있다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랑자의 모습에서는 많이 내려놓은 모양이라고 봐. 머물기를 택한 새, 날개쉬는 음유시인 이라는 칭호를 얻은 건 글쎄, 역시 그것도 제 3자 입장에서 본거지만 나는 그게 적당하다고 생각하거든. 오랜 기간 돌아다닌 방랑을 잠시 쉬게 되었달까.

사유는 놀랍게도, 편집자 씨가 적어준 이유처럼 사랑이 그 이유긴 하지! 하하. 그 대목을 아까 읽으면서 깜짝 놀랐지 뭐야.

─방랑자이고 싶었던 음유시인. 니뮤렌 리다프카와 편집자의 인터뷰 중에서─

평가

아마도 그녀는 여전히 모험을 하고싶다. 하지만 자신이 머문 자리를 떠나기엔 발치에 놓인 자갈이 마치 보석처럼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그 자리에 솟아난 물이 몇이나 되는 새의 목을 축이게 했는지도 안다. 호기심 많은 어린 새처럼 내려앉은 땅이 무서운 짐승들로 가득한, 줄기 따가운 가시밭길이 아니었음을 알자, 그녀는 날개가 발달해 상대적으로 빈약한 다리를 가진 몸으로 거침없이 그 위를 걸어보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수많은 온기도 보았을 것이다. 아마도 사랑같은 것. 그러고보면 사랑은 뭘까? 6온즈 폭약처럼 심장을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거? ⋯⋯잠깐! 진지하게 생각한 게 아니니 너무 나무라지 마십쇼.

아까 내가 상술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행복과 성공의 단맛은 실패를 발판삼아 뛰어오른 사람들에게 더욱 크게 다가오는 법. 그러니까 수없이 돌아다닌 끝에 찾아낸 식당마다 싱겁거나 너무 짠 맛을 반복한 나머지, 맛집 투어를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주저앉은 자리에 길거리 노점에서 파는 기성품 맥주와 치즈 안주를 찾아냈을 때처럼. 그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도전할 기회가 많다. 자신을 붙잡을 것이 없기 때문인데, 이러한 특성 때문에 오히려 길을 헤매이기도 쉽고, 그대로 실패하여 구덩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거나 다리가 부러져 불구가 되는 일도 많다. 그럼에도 무사히 빠져나온다면 성취감과 안도감을 얻고,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또 다른 도전'을 향한 욕구를 불태우는데. 니뮤렌은 이러한 자신의 욕구에 솔직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는, 이른 바 자신만의 모험을 자신의 욕구로 흡수한 사람훌륭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아끼던 한정판 병을 깨트렸는데, "너무 아쉬워. 한정판이었는데." "이렇게 좌절하기만 하기도 좀 그렇지. 새 한정판이라도 찾아볼까?" 하는 것처럼.

그녀의 세상은 드넓고 줄기처럼 뻗어있는 수많은 호기심과 선택의 갈림길이다. 어느 쪽을 들여다보던 니뮤렌의 욕망대로 선택하고 나아갈 수 있지만, 나아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의 막막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당신이 방랑을 좀 즐겨보았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방이 나무로 빽빽한 숲이나 허허벌판만 펼쳐있는 사막지대에서, 해는 뉘엿뉘엿 져가기만 하는데 내 두 다리는 방향을 잃고, 머리는 이성을 잃고, 준비해두었던 식량과 물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그런 극한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가끔 자신에게 펼쳐진 앞날이 조난일 것임을 상정하는 것만으로도 큰 공포를 느끼고는 한다. 내가 알고있던 장소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그 어디에도 나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조난당했다는 사실도, 당신이 어디에서 왔고 가족은 있는지, 이야기를 전해줄 수는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평생 그 자리에서 썩어야만 할 수도, 무일푼으로 타지에 들어가 울며 겨자먹기로 새 생활을 시작해야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감이 생긴다. 니뮤렌은 그 자리에서 불을 피우기를 선택했다. 자신에게 있는 부싯돌과 땔감으로 쓸만한 천옷, 주변의 메마른 나뭇가지 등을 모아 그 자리에 불을 피우고 해가 뜨는 내일이 되면 새 길을 찾아 나서기로 생각했다. 그렇게 나아가기 시작한 길에는 오아시스도 있었고, 모래먼지를 막기 위해 두건을 뒤집어쓰고 지나가다 음식 따위를 건네주는 행상인도 있었을 터다. 사람 사는 마을에 도착해 길을 찾을 수 있을 즈음에는 먼지로 엉망이 된 머리와 옷에, 아끼던 옷도 '의도치 않게' 잃어왔으나, 그 장소에서만 짤 수 있는 특이한 옷감으로 된 옷을 선물받고, 집에 들여보내준 덕에 맑은 물로 샤워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하프를 연주하며 새 친구와 술도 얻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여행객이 자신과 같이 길을 잃어 죽어갔는지를 듣고 그들을 위한 시를 짜 유족들의 마음을 달래며, 자신 또한 그 감사로 위안을 얻어 웃음을 보인다.

그러나 그 많은 온기로도 치유되지 못할 상처가 없진 않았으므로, 마음 깊은 곳에 우울이 잠들어있기에 조증과 같이 갑자기 멍을 때리거나, 잘 웃다가도 조용해져 추억에 잠기고 무언가를 그리워하거나 오른손을 꼼지락거리는 등 이상전조를 보일 때가 있을텐데, 그런 순간에 그녀에게 음악을 연주해달라 제안한다면 과연 어떤 음악이 나오게 될까. 음유시인이 연주하는 노래는 현을 뜯는 손끝의 아주 작은 떨림만으로도 수많은 분위기로 변화한다. 자신의 한 손가락에서 열 가지가 넘는 음을 뽑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인데. 그 노래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을 찾는 건 아닐까? 아니, 이건 너무 편견어린 생각이다.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괴담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간단한 얘기다. 숲 사이에서 소리치면 메아리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 마치 숲이 자신에게 답을 알려주듯이. 장소가 친구이자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건 이러한 관점에서 기반된다. 방랑자들도 한켠으로는 자신의 장소-사람과 사물 무관-를 찾고싶어한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의지할 곳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는 소리다. 무엇보다도 자유롭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음유시인은 자신의 관객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시와 노랫구절을 알아도 들어줄 이가 없다면 결국 자신의 대에서 끊겨 묻혀 사라지기 마련 아닌가. 시를 사랑하고 노래를 사랑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그보다 슬플 일이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의 흔적을 찾고 싶은데 아무리 거금을 들여보아도 짝퉁 필사본이나 엉터리 편집본만 간간히 보이는 현실의 모습에 절망하듯이.

그러니 당신들은 꼭 명심하라. 진품과 가짜를 판가름하는 건 당신들의 영혼이다. 결코 속지 말아라. 아무리 희귀한 시집의 사본이라 하여도 집을 팔 생각은 하지도 말라. 절대 내 얘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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