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애정
아마테라 / 조각글
아침부터 사무실이 여느 때 이상으로 떠들썩했다. 출근과 동시에 사원 두 명이 기다렸다는 듯 함께 청첩장을 돌린 탓이었다. 사내 커플, 비밀 연애, 심지어 속도 위반! 늘 얌전하게 일만 하는 듯 보였던 두 사원이 던진 폭탄에 무료한 직장인들은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달아올랐다. 사장이 웬 소란인가 싶어 사장실을 나온 줄도 모르고 모두가 예비 신혼부부 달달 볶기에 여념이 없었다. 언제부터 만났대? 애는 몇 주째야? 세상에,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고백은 누가 먼저 했어? 프러포즈는 당연히 신랑 쪽에서? 청혼할 때 뭐라고 하던?
왁자지껄한 사무실을 바라보며 사장은 심드렁하게 문틀에 기대어 섰다. 진풍경이구만. 흥밋거리를 빽빽하게 둘러싼 사람들이 꼭 먹잇감에 달려드는 개미 떼 같았다. 이해는 가지만 좀 심한데? 요새 일을 너무 빡세게 줬나. 몰아치던 상황은 질문 지옥에 갇힌 예비 신부가 마침내 사장을 발견하고서야 끝이 났다.
“사장님!”
그의 명랑한 외침을 듣자마자 뒤를 돌아본 개미 떼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르르 해산했다. 단 몇 초만에 사무실은 천연덕스럽게도 평소의 풍경을 되찾았다. 예비 신랑 역시 신부와 눈짓을 나누고 제 자리로 향했다.
혼자 남은 신부는 달리듯 사장 앞에 다가와 섰다.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그가 두 손을 들어 청첩장을 내밀었다.
“여기요. 사장님 드릴 건 특별히 주문 제작했어요!”
“전부 주문 제작이잖아.”
“스페셜 오더를 넣었다는 얘기죠.”
흐응, 그래. 사장은 적당히 응수하고 금빛 테두리가 든 새하얀 종이를 앞뒤로 살폈다. 종이 너머를 흘긋 곁눈질하니 예비 신부는 떠나지 않고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청첩장에서 눈을 떼고 말없이 기다리는 사장에게,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날이니까 여쭤보는 건데요. 사장님은 결혼 생각 없으세요?”
사장은 오랜 동료의 긴장한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곧장 떠오른 생각 하나가 여과 장치를 거치지 않고 고스란히 입 밖으로 새었다.
“우와, 뜬금없어.”
“뭐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았어요.”
동료는 다소 맥이 빠진 기색으로 한숨을 터뜨렸다. 습관대로 검지를 들어 옆머리를 꼬면서 그가 비죽비죽 부연했다.
“그냥 저도 그렇고 저 사람도 그렇고. 다들 이 나이쯤 되면 그런 생각을 하니까요.”
“나이 얘기 하지 말랬지.”
“슬슬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다든가, 결혼해서 서로를 책임질 동반자가 생기면 좋겠다든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뭐 아이를 갖고 싶다든가. 어렴풋하게라도 바라고들 하니까. 사장님도 그러신 거면 좋은 사람을 소개해 드리려고 했어요.”
“뭐? 네가 왜?”
배배 감긴 머리칼이 아래를 향해 죽 당겨졌다.
“그냥, 결혼해 버렸잖아요. 제가.”
마주본 두 눈이 죄인의 것처럼 내리깔렸다.
“절대 안 할 거라고 했었는데. 그래서 헤어졌는데.”
마지막 문장은 개미 소리만큼이나 작았다. 키보드 소리와 가습기 소리, 에어컨이 작동하는 소리와 공기 청정기 돌아가는 소리, 바쁜 업무 확인과 지시가 어지럽게 뒤섞인 사무실에서는 누구도 듣지 못할 만큼.
사장은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는 이내 우하하 경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예비 신부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야, 뭐야. 그걸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어? 완전 옛날 일을!”
몸과 함께 흔들리던 눈동자가 서서히 안도감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손을 거둔 사장이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올렸다. 다시 청첩장에 시선을 꽂으면서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말이지, 사장님도 지금은 결혼할 마음이 없습니다. 나만으로 충분해.”
예비 신부는 비로소 완전히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배시시 미소 짓고는 사장의 함의와 조금 다른 대답을 돌려주었다.
“하긴 결혼도 육아도 어쨌든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결정이니까요. 사장님 같은 분은 굳이 그런 게 필요하지 않겠네요.”
사장은 그의 말을 정정하는 대신 마땅한 인사로 화답했다. 결혼 축하해. 옛 연인이 한 손으로 배를 감싸며 기쁘게 뺨을 붉혔다. 감사해요, 사장님.
예비 신부가 사라진 자리를 짧게 바라본 사장이 몸을 돌려 사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작은 목재 문을 닫자 모든 소음이 순식간에 아득해졌다.
사장은 문고리를 쥔 채로 멈추었다. 그리고 무심코 혼잣말했다.
“아이?”
어떤 기억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밀려나 버리는 밤이면 테라는 으레 술잔을 들었다. 잦은 일은 아니었지만 드문 일도 아니었다.
옛 연인이자 오랜 동료에게 청첩장을 받은 날 역시 다르지 않았다. 테라에게는 그저 언제나의 밤에 불과했다. 다른 점은 손등이 닿을 만큼 가까운 자리에 대작 상대가 있다는 것뿐.
“아마히코. 넌 결혼할 생각 없어?”
약간의 취기와 약간의 우울, 약간의 체온. 그것이 테라에게 약간은 답지 않은 질문을 입에 담도록 만들었다. 곧은 자세로 목 안에 술잔을 털어 넣던 대작 상대가 의아한 듯이 그를 살폈다.
“의외인데요. 테라 씨가 그런 질문을 하시다니.”
“대답하기 싫으면 됐어…….”
“으음, 술에 취한 테라 씨. 신선한 섹시다. 별로 곤란하다고 느낀 것은 아닙니다.”
신음은 왜 내는 거야. 진짜 질릴 정도로 변태라니까. 일상처럼 튀어나갈 뻔한 말을 테라는 술과 함께 삼켰다. 괜히 반응을 보여 야밤에 변태를 즐겁게 해 주고 싶지 않았다. 익숙한 움직임으로 테라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면서 아마히코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뭐라고 할까, 결혼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딱히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굳이 대답을 드리자면 예정은 전무라고 해야겠죠. 저는 세상 모든 변태 분들의 애인이니까.”
술병을 쥔 다섯 손가락 위에서 두 개의 반지가 부엌 조명을 받아 엷은 빛을 냈다. 테라는 홀린 듯 시선을 움직였다. 중지와 소지. 오늘도 역시 약지에는 안 끼었네.
“뭐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건성건성 대답을 내뱉다가 그는 희미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나 되짚을 새도 없이 대작 상대가 즉각 반응했다. 짐짓 슬픈 척 늘어뜨린 눈썹이 가증스러웠다.
“섹시한 반응이네요.”
“표정이랑 말이 안 맞잖아, 이봐.”
“섹시하지만 제 답변이 테라 씨께 도움이 되어 드리지는 못한 듯하여.”
테라는 긍정도 부정도 않았다. 아마히코도 그에게 반응을 요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간 서로 팔꿈치를 부딪히며 나란히 술을 들이켰다. 홀짝이는 소리만이 식탁 위를 흘러갔다.
“아마히코, 너 원래 왼손으로 술 마셨던가?”
“어떨까요?”
짧은 정적. 작은 웃음 뒤로 뼈대가 두드러진 손등이 테라의 손목을 스쳤다. 모호한 말보다 더 분명한 대답이었다. 테라가 고개를 돌리자 조금 더 큰 웃음소리가 뺨에 따라붙어 왔다. 망할, 체할 것 같아. 술기운으로 화끈거리는 뺨을 문지르며 테라는 느릿하게 화제를 바꾸었다.
“그럼 말이야. 아이를 키울 생각도 없는 거야?”
숨처럼 가늘게 이어지던 웃음이 뚝 끊겼다.
테라가 손을 내리고 대작 상대를 돌아보았다. 생경하리만치 기묘한 빛을 띤 하늘색 눈동자는 미소 한 점 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주했다기보다 부딪혔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 눈으로, 아마히코가 지극히 상냥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 눈이 곁에 앉은 이가 아닌 기억과 거울 속의 무언가를 향한 것임을 테라는 쉬이 알아차렸다. 슬프도록 쉬웠다.
“아, 그래.”
나는 있어. 술잔 테두리를 만지작거리면서 테라가 입속으로 말을 굴렸다. 테라 군을 닮은 아이라니, 엄청나게 사랑스러울 텐데.
사실은 닮지 않아도 사랑스러울 텐데.
뜨거운 손끝이 그의 눈꺼풀을 어루만졌다. 테라는 차오르던 생각에서 깨어나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두 개의 반지를 낀 손가락 사이사이 조명에 빛나는 머리칼이 실타래처럼 흘러내리다 약지를 휘감았다. 그것을 아는 듯도 모르는 듯도 한 얼굴로 아마히코가 빙긋 웃었다.
“부모가 될 마음은 없지만, 테라 씨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의 대부가 되어 주고 싶네요.”
긴 정적.
테라가 간신히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
“누가 시켜 준대?”
“하지만 진심인 걸요.”
아마히코의 눈동자가 보기 싫게 일렁거렸다. 그 순간 그는 정말로 상처라도 입은 사람처럼 굴었다. 금이 간 하늘색 틈새에 짙은 빛이 드리웠다. 지긋지긋하도록 친숙하고도 숨막히도록 거대한 무엇. 압도적인 애정, 혹은 친의, 어쩌면 유대감.
그 모든 것이 테라를 내리눌렀다. 그러니까 체할 것 같다고. 테라는 테이블 위로 쾅 이마를 처박았다. 아마히코가 식겁하여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 정말.
나는 왜 매번 최악의 인간에게만 사랑을 느끼고 마는 걸까.
“넌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야, 아마히코.”
“예에? 테라 씨, 아마히코가 뭔가 잘못을 했습니까? 죄송하지만 전혀 짐작이 안 가는데요!”
바보같이 수선을 떠는 소리를 들어도 체한 듯한 감각은 가실 줄 몰랐다. 커다란 손바닥이 안절부절 못하고 등을 쓸어 오는 게 느껴졌다. 어지러운 기분으로 테라가 두 눈을 감았다. 자고 일어나면 이 바보와 술을 마신 일도 쓸데없는 대화를 나눈 일도 전부 잊어버리겠지. 이 불편한 기분까지도. 자자. 일단 자자.
등을 쓸던 손이 움직임을 바꾸어 그를 토닥였다. 낮은 목소리가 어둠을 파고들었다.
“좋은 꿈을 꾸세요, 테라 씨.”
차라리 악몽을 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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