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큰세문대] Reverie

(무료 공개) 큰문 앤솔로지 '큰문이 뜬 밤에 우리, 결혼합니다!' 수록 파트

* 설정과 다른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꽤 정겹다. 향수라도 불러일으킬 것처럼 깔끔하지도 않은 음질로 귀를 잔잔히 적시는 게, 세월이 참 길게도 흘렀나 싶다.

해결해야 할 것들을 미친 양 해나가던 삶. 그것이 생명을 부지할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안 표정들은 참 가관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예전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후련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털어놓았던 것 같다. 상태창을 소멸시키는 데 성공하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었을까, 무언가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미련 넘치게 과거에나 얽매이는 짓은 나답지 않다. 나이도 먹을 대로 먹었고, 지금은 앞으로의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다시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문대문대~ 진짜 도와줄 거 없어?”

나는 칼을 들어 녀석에게 보여 주었다.

“없어. 주위에 연락 돌린다면서 벌써 다 돌렸냐.”

녀석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웃으며 답했다.

“생각해 보니까 딱히 많이 부르지 않아도 될 것 같더라고. 축하 메시지에 답장은 좀 하고 부를 사람들은 이미 연락해 뒀지용.”

“그러냐.”

푸스스. 뒤에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어쩌지.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기대되는데.”

나는 녀석의 입에 채 썬 당근을 하나 물렸다. 묵직한 머리가 오른 어깨가 신경이 조금 쓰일 참이었다.

“그래. 평화롭고, 생각보다 더 나쁘지 않아.”

녀석이 무어라 답하려는 순간, 휴대폰에서 짧은 알림음이 들렸다. 메신저인 모양이었다.

“대신 봐 줄까?”

“그래.”

어차피 축하 문자겠지. 녀석이 휴대폰을 내 얼굴 앞에 가져다 댄다. 얼굴 인식에 성공한 잠금화면은 곧바로 풀리고, 녀석은 콧노래를 부르며 꼼지락댔다. 날이 날이다 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

“왜, 무슨 문자인데?”

표정이 점점 애매해진다. 짧게 고민을 하는지 가만히 화면을 쳐다보다, 곧 내게 화면을 보였다.

나는 주저 없이 납득했다.

 

*

 

음식 냄새가 집안을 채울 때 즈음, 방문객이 찾아왔다.

“우리 왔어.”

반가움이 여실히 느껴지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류청우는 배세진을 먼저 들여보내고 문을 조용히 닫았다.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잠시 울렸다.

“뭘 이렇게 들고 왔어요?”

박문대의 시선이 그들의 손으로 향했다.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는지, 배세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부정하듯 답했다. 이에 류청우는 느릿하게 웃으며 다른 멤버들이 오면 알려주겠다고 덧붙였다.

“일곱 명이 다 같이 모이는 건 오랜만이잖아.”

“그렇죠.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이세진의 얼굴에 진심이 스쳤다.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장기간의 단체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최적의 상황이란 몇 번이고 수정하여 도전해서 얻어낼 정도로 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십거리들이 넘쳐나는 연예계에서 아무런 상처 없이 몸집을 부풀리기는 불가능할 정도이며, 흠집조차 내지 않고 긴 시간 동안 날개를 펼치는 것은 가능한 이가 없다.

하지만, 최소한의 손실을 감수하여 최대의 이익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가까이에 있었다.

“그럼 잠깐 앉아 있으세요. 음... 알로에 주스라도 드실래요?”

박문대는 컵과 묵직한 페트병을 탁자 위에 두었다. 이제 두 명이 왔으니, 남은 사람은 셋 정도겠군. 박문대는 짧게 생각하다 시계로 눈을 돌렸다. 둘이 어지간히도 빨리 온 것이었다. 12시가 약속 시간인데, 그 누가 10시 49분에 올 생각을 한단 말인가.

“시간 잘못 아신 건 아니죠?”

“아, 아니야! 늦는 것보다는 일찍 오는 게 나으니까.”

“응. 동생들 기다리는 게 더 좋잖아. 그 시간 동안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손을 볼 수 있는 스케줄은 죄다 뒤로 미룬 모양이었다. 단독 예능이나 다른 프로그램들이 머리를 스쳤다.

그로부터 30분은 지났을까,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

“Hey~ 저 왔어요!”

“바보야, 형님들 다 계시는데 너무 그렇게 다니지 마!”

“괜찮으니까 일단 들어와라.”

“밖이 좀 춥지? 자자, 아현이도~”

“으, 응. 알겠어.”

문이 닫히는 소리 사이에 패딩 마찰음이 군데군데 끼어든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단란함이 괜히 가슴을 간질였다.

눈을 조금 옮기다 보면, 다들 손이 비어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주머니가 볼록하거나 손에 무언가를 든 녀석뿐이다. 괜히 이유를 짐작했다가 빗나가면 무안할 테니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자기들끼리 뭐라도 하겠지.

 

*

 

“형님들의 결혼기념일을 성대하게 감축드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진심을 담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김래빈을 시작으로, 다른 녀석들도 하나둘 선물을 원탁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크게 사둔 것이었다.

역시 구비하길 잘했군. 마치 틀에 꼭 맞춘 듯 들어맞는다.

이상한 위화감이 그의 머리를 스쳤지만, 정작 눈앞의 이들은 즐겁게 선물이나 까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문대문대~ 주인공이 빠지면 안 되지. 어딜 가려고~”

“나만 주인공이냐.”

이세진이 박문대의 어깨를 잡고 장난스레 흔들었다.

“그럼, 케이크를 잘라볼까.”

류청우가 케이크를 가져와 탁자 중앙에 두었다. 언제 가져온 건지, 접시와 포크도 인원수대로 준비되어 있다.

“날이 밝아서 촛불이 예쁘지는 않겠지만... 그, 그래도 귀여운 걸로 준비했어...!”

“어, 고맙다.”

그렇게 선아현이 꺼내 든 것은 각각 곰돌이 모양과 강아지 모양을 띤 초였다. 어디서 사 온 건지 털과 눈썹의 디테일까지 담겨 있다. 공장제 초로는 저런 것을 기대할 수 없을 테니, 주문 제작에 가까울까. 박문대는 오묘한 표정으로 노란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

 

그 이후로도 다양한 것들이 오고 갔다. 일일이 담기도 민망할 정도로 사소한 이야기부터 웃음을 야기하는 제대로 된 선물까지, 평범한 일상치고는 꽤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저녁에도, 여운은 고요히 집안을 채우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그대로네~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는 게 정말 맞나봐.”

“그러게. 연락은 자주 했지만, 얼굴 맞대는 건 오랜만인데.”

조금은 어색할 만도 했지만, 생각보다 더 잘 어울려서 약간 놀라기는 했다. 그래도 우려하던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으니 다행인 것이겠지. 박문대는 탁자 정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았다. 스카프나 화장품 같은 것들은 정리하기 편했지만, 인형은 어디에 배치해야 괜찮을지 조금 더 생각해야 했다.

시야가 뒤틀린 건 한순간이었다.

“이번엔 또 왜.”

“너무해~ 나름 결혼기념일이잖아.”

흑흑. 세진이는 슬퍼요~ 하며, 일부러 우는 소리가 위에서 들린다.

고개 뒤에 베개 대용으로 놓인 이세진의 허벅지가 나쁘지 않았다. 박문대는 몸을 살짝 움직여 소파 위에 다리까지 올린 뒤에야 한결 편안하다는 표정으로 이세진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기대 많이 했었지. 어땠냐.”

“물론 좋았지.”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이세진은 박문대의 어깨를 차분히 두드렸다. 누구를 애 취급하는 건지. 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웠지만, 소동물이 애꿎게 노려보는 듯한 이미지가 강해 오히려 귀엽게 느껴졌다.

“물론 오랜만에 멤버들을 만나서도 있지만, 이렇게 단란하게 결혼기념일을 보낼 줄은 몰랐거든. 물론 상상은 자주 해봤지만.”

눈빛이 묘하게 촉촉해진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가락이 간지럽기도 하고.

“잘 달려왔으니까 이러는 거지. 이상한 일도 많았고.”

“그렇긴 하지! 아주사 때도 그렇고, 그 이후도 그렇고. 꽤 파란만장했잖아?”

옛날 생각난다. 이세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들이지만, 돌이켜 보면 그렇게 나쁘지 않을... 아니다. 테스타로 데뷔하기 전에는 나쁜 일이 태반이었던 것 같은데. 데뷔하고 나서도 자주 일어났었고.

박문대가 그의 허벅지를 두어 번 툭툭 쳤다.

“밤에 바다나 보러 가자.”

사족 없이 간단하게 들려온 말에, 이세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아하하, 그게 뭐야. 그럼... 잠깐 이러고 있다가 나가자. 준비도 하고.”

가벼운 대답을 들은 그는 박문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없는 가족이 그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아니? 아무것도.”

 

*

 

밤바람은 언제나 차지만, 물가라면 더욱 서늘하다. 검은 이불을 덮은 채 푸름의 냉기를 잔잔히 풍기는 그 광경을 보고 나면, 가슴이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안 추워?”

“응. 네가 그렇게 난리를 피우면서 겉옷을 주는데, 어떻게 춥게 나올 수가 있겠냐.”

하도 따뜻하게 입어 곧 더울 지경인 박문대가 툴툴댔다.

“지금 모습 되게 마트료시카 같다.”

“뭐라고?”

“털 복슬한 강아... 흐악, 말로 하자. 말로!”

두툼한 옷에 손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둔탁했다. 달리기는 또 왜 빠른지, 신발이 산책로를 밟는 소리가 좁은 간격으로 울렸다.

“후... 잡혔네. 영화에서 나오는 ‘나 잡아봐라~’ 같은 건 아니지만. 나름 이것도 운치 있는 것 같고 좋다!”

“운치는 무슨.”

퉁명스러운 말이었지만, 은근한 티가 묻어나왔다. 수년을 동료로서, 연인으로서, 배우자로서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이 머리를 스친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간간이 꿈결 같다고 생각하지만, 분명 이런 것도 훗날에는 작은 추억으로 남아 있겠지.

코끝은 시리지만, 주머니에 담긴 두 손은 따뜻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 다른 손이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박문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세진을 보며 답했다.

“그래. 앞으로도 계속.”

“응, 사랑한다는 뜻이지? 나도~”

“...”

아무튼, 우리의 하루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아래는 후원 및 소장용 결제선입니다. 앤솔로지에도 담기지 않은 짤막한 후기가 있습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