躺在星星地上
상아수영 기념일 합작, 수능을 주제로 썼습니다.
1.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한파의 시작이 십일월 셋째 주의 목요일이라 정의된 것은 올해로 몇 해째이던가. …겨울이라는 계절은 본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었나. 시시한 의문들은 수학(受學)이 끝난 뒤에야 밀려들기 시작했다. 한수영은 시기가 빨랐다면 더욱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십이 년 내내 단 한 번도 고찰해보지 않은 문제들이 갑자기 밀려드는 것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답을 알지 못한다 해도 아무런 지장 없을 문제의 답이, 이렇게까지 궁금할 일인가.
길 잃은 영하의 공기가 자리를 찾아 뒤척였다. 휘이. 휘이이. 산만한 소음이 바람에 섞여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귀를 스쳐 가는 풍성이 아렸다. 바람이 멀겋게 식은 면(面)을 훑었다. 한수영은, 언젠가는 티 없는 백색이었을 건물에 시선을 고정했다. 건물의 외벽은 수많은 청춘들이 짓밟고 간 자국이 선연했다. 머루 같은 눈동자가 때 탄 흔적을 몇 번이고 훑었다.
건물 위로는 붉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중이었다. 홍진과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추락하는 해가 건물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노을빛에 갇힌 건물은 적막했다. 한수영은 그 고요한 공간 안에 갇힌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연습을 했다.
얼어붙은 공기를 입안에서 한껏 달구고, 혀를 굴리며, 유상아. 유상아, 유상아…. 익숙한 그 이름이 오히려 낯설어질 만큼, 몇 번이고 되뇌었다. 부드럽게 허공을 가르는 유. 상, 입안에서 가볍게 터지고 울린다. 마지막 감탄사 같은 글자는 아쉬운 듯이, 아…, 숨을 거두어간다. 한수영은 그 이름을 부르는 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밤 내내, 그 이름을 부르는 연습을 한 까닭이다. 허나,
“수영아.”
유상아를 마주 보고서는 그 이름 세자를 제대로 발음해 본 일은 드물었다.
“나 데리러 온 거야?”
그에 비해 유상아는 언제나 한수영의 이름자를 또렷하게 발음했다. 먼 곳에서 단숨에 한수영을 찾아 시선에 담았고, 무리 없이 그를 호명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한수영은 오랜 기간 고찰했지만,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니라고 하면 어쩌려고.”
물결처럼 밀려온 적색이 유상아를 덮었다. 빛나는 햇살이 시야를 가렸다. 안개가 퍼진 것만 같이 부연 시야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한수영은 크게 눈을 깜빡였다. 엇나간 초점이 다시 유상아에게 맞춰질 때, 그제야 멈춘 것 같은 도시의 풍경이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래 기다렸지.”
얇은 입술이 느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유상아는 만면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는 답을 골랐다. 유상아는 대충하는 질문에도 언제나 성의껏 답을 고심했다. 한수영은 유상아를 보고, 그러는 것마저 유상아 답다고 했다.
“별로 안 기다렸어.”
한수영이 숨을 터뜨리며 웃었다.
“진짜?”
“어. 나도 봤거든. 수능.”
한수영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유상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얀 손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했다.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빛을 받을 때마다 금빛으로 일렁였다. 유상아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수영은 유상아의 어깨에 걸쳐진 가방 뺏어 들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어차피 너 기다리면서 할 것도 없었어.”
…그리고 원래 원서비 아까워서 보려고 했었어. 후자는 변명이었다. 한수영이 변명하고 있다는 것을 유상아는 알고 있었다. 유상아가 그리움에 대해 말하는 시를 풀 때, 한수영은 그리움에 대한 시를 썼다. 풀리지 않는 문제에 공식을 대입할 때, 그는 공식을 대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글을 썼다. 법칙 아래 놓인 것들을 이해하려 했을 때, 한수영은, 그 밖의 것들에 대하여 말했다.
“…글 쓴다며. 어제도 늦게 잤잖아.”
“입시 하는 내내 질리도록 썼는데 무슨.”
“그래서 입시 끝나면 제일 먼저 입시용 아닌 글 쓸 거라고 했잖아.”
한수영은 유상아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훌륭한 작가였다. 유상아만의 생각 아니었는지, 한수영은 1지망을 수석으로 합격했다. 한수영은 이 시험을 볼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한수영이 여기 있는 이유는 자신이었다. 오만하게 보일지 모르겠으나, 어차피 그것이 사실이었다.
“그건 나중에 써도 되는 거고. 됐어, 가자.”
너 나랑 갈 곳 있어. 말하며 유상아를 잡아끄는 한수영의 손끝에는 단호함이 묻어있었다. 그는 황혼에 잠긴 학교를 뒤로 한 채, 산만한 인공조명 속으로 몸을 던졌다. 교문을 나서자마자 소음이 두 사람을 덮쳤다. 밖은 너무 시끄러웠고, 소음의 주원인은 오늘 시험이었다.
조금만 뛰자. 우리 저거 타야 해. 푸른 빛이 도는 버스를 집요하게 응시하며 한수영이 말했다. 한수영은 목적지도, 이유도 고지하지 않았다. 우리 어디가? 유상아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유상아는 한수영이 왜 그렇게 급하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가보면 알아.”
인파를 헤치며 그가 대꾸했다.
두 사람은 간신히 버스의 문턱에 발을 걸치고 몸을 밀어 넣었다. 두 명이라는 한수영의 간결한 말 한마디로 두 명 분의 금액이 그의 지갑에서 빠져나갔다. 낭랑한 기계음이 재차 그 사실을 상기시켜주었다. 유상아는 그제야 시험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교실에서 나온 후로, 그것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다.
“정말 어디 가는지 안 알려줄 거야?”
“어.”
그러니까 그만 궁금해하지 그래. 그 말을 끝으로 한수영은 아예 입을 다물었다. 신호가 바뀌고,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잿빛의 모조지가 낯선 교실의 익숙한 나무 책상을 덮었다. 옥색의 플라스틱 샤프가 그 위로 굴러갔다. 한수영은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눈동자를 부산스레 굴렸다. 감독관의 이름이 쓰인 명찰이 흔들렸지만, 사실 이름은 보이지도 않았다.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 하나 별이여.」
한수영은 정자로 시의 한 구절을 기입했다. 드디어 시험이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한수영의 표정에는 위기감이 없었다. 검은 단발의 소녀는 오히려 여유가 넘쳐 보였다. 촌스러운 글씨체로 적힌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억지로 손에 쥐어진 필기구는 평소에 쓰던 것보다 살짝 무거웠다. 한수영은 그것을 계속해서 손끝에서 돌리며 천천히 시험지를 넘겼다.
손끝으로 정갈하게 인쇄된 글자를 쓸어내리고, 흑연으로 그것들을 분해하며, 한수영은 유상아를 생각했다. 유상아는 언제나 타종과 동시에 얇은 손가락으로 시험지의 처음부터 끝까지 빠르게 훑었다. 그는 날카로운 샤프의 끝으로 종이를 마구 긁어가며 지문의 글자들을 전부 삼켜버릴 것처럼 시험을 쳤다. 한수영은 유상아를 잠시 흉내 내 보았으나, 적성에 맞는 방법은 아니었다.
대신 한수영은 천천히 글자들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시험지를 뒤적거리며 마음에 드는 글을 찾아 읽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맨 마지막 장의 시였다. 한수영은 그것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종종 교실의 창살이, 새장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던 까닭이다. 자유로이 숨을 쉬는데도, 가끔, 호흡하기 너무 힘들 때가 있었던, 까닭이다. 불안의 근원을 깨달은 까닭이다.
한수영은 유상아가, 새가 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새』
새는 새장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매번 머리를 부딪치고 날개를 상하고 나야 보이는,
창살 사이의 간격보다 큰, 몸뚱어리.
하늘과 산이 보이고 울음 실은 공기가 자유로이 드나드는
그러나 살랑거리며 날개를 굳게 다리에 매달아놓는,
그 적당한 간격은 슬프다.
그 창살의 간격보다 넓은 몸은 슬프다.
넓게, 힘차게 뻗을 날개가 있고
날개를 힘껏 떠받쳐줄 공기가 있지만
새는 다만 네 발 달린 짐승처럼 걷는다
부지런히 걸어 다리가 굵어지고 튼튼해져서
닭처럼 날개가 귀찮아질 때까지 걷는다.
새장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날지 않고
닭처럼 모이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걸으면서, 가끔, 창살 사이를 채우고 있는 바람을
부리로 쪼아본다, 아직도 벽이 아니고
공기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유리보다도 더 환하고 선명하게 전망이 보이고
울음 소리 숨내음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고안된 공기,
그 최첨단 신소재의 부드러운 질감을 음미하려는 듯.
김기택, 『바늘구멍 속의 폭풍』, 문학과 지성사, 1994
2.
겨울이라는 명목하에, 어둠은 기승을 부렸다. 한 정거장 나아갈 때마다, 하늘은 색을 잃었다. 유상아는 창을 열어 한기를 가득 들이켰다. 폐부 끝까지 남김없이 겨울의 공기가 들어찼다. 유상아는 한참이나 느린 호흡을 반복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버스가 흔들리는 대로, 같이 흔들리며 바람을 맞았다. 뺨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바깥의 풍경은 흘러가고,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목적지로 착실히 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유상아는 어딘지 모르게 편안해졌다.
“겨울이라 그런가, 해가 너무 빨리 진다.”
오랜 정적 끝에 유상아가 꺼낸 말이었다. 유상아는 창밖의 어둠을 만지고 싶기라도 한 듯, 손끝으로 유리를 두드렸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간간히 이 계절에 대한 노래가 들려왔고, 드문드문 자동차의 경적음이 빈자리에 들어앉았다.
“유상아.”
한수영은 몇번이고 숨을 고른 끝에, 마지막 호흡에 그 이름을 함께 담아 내뱉었다. 고저 없는 음성이 매끄럽게 둘 사이의 틈을 메꾸었다.
“왜, 추워?”
아직 온기를 잃지 않은 손이 한수영의 뺨을 감쌌다. 한수영은 그 손길이 익숙하다는 듯이, 그와 손을 겹치며 시선을 얽었다. 그의 입술이 뱉어낸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마천루가 뭔지 알아?”
가지런히 오려낸 종잇조각들이 유상아의 손끝에서 펄럭였다. 가차 없이 그어진 붉은 색의 대각선이 유독 눈에 띄었다. 유상아는 입술을 꽉 물었다. 이건 자신의 과오였다. 마킹을 잘못한 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실수, 단순한 계산 오류, 잘못된 공식을 넣어서 틀린 것도 있었으며, 방법을 알고 있지만, 시간이 모자라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서 틀린 문제도 있었다.
이 문제 하나하나가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부족함이었다, 손에 들린 종이 쪼가리들은 낯부끄러울 정도로 멍청했던 순간의 박제였다. 유상아는 그것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직시하고 싶지 않았지만, 기꺼이 마주했다. 실수하지 않을 때까지, 모르는 공식이 없어질 때까지, 시간이 남을 때까지, …부족함이 없을 때까지.
유려하게 뻗은 손가락이, 애틋하게 종이 위를 쓸었다. 유상아는 큰 결심 끝에, 그것을 구겼다. 구기고, 찢어서, 버려버렸다. 매 교시, 종이 울리기 직전, 유상아는 마지막 남겨두었던 12년 공부의 흔적을 하나씩 털어냈다.
“…괜찮아.”
다시는 볼 일 없는 것들이다.
“괜찮아.”
유상아는 본인이 기억하는, 최고점을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어떠한 오류도 없는 풀이와 답. 그때와 똑같이 해낼 수 있다.
“할 수 있는 실수는 다 해봤으니까.”
이미 수없이 해냈으니까.
“이제 안 할 수 있어.”
저런 종이 쪼가리에 미련을 둘 필요 없다. 그곳에 적혀있는 것 모두 어차피 전부 내 머릿속에 있는 지식이니까.
“고층 건물이잖아.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건물.”
“거기로 갈 거야.”
목적지가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 일인가, 유상아는 한수영을 향해 되물으며 생각했다.
“어디인지는 아는 거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건물.
한수영에게는 수학이라는 과목을 수학(受學)한 기억이 없었다. 그렇기에 고작 백 분으로는 문제를 풀어내기 부족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백 분이 아니라 백날을 줘도 풀어낼 자신이 없었다. 낯선 숫자의 배열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씨발….”
바닥 깔아주러 온 건 아닌데. 한수영은 들릴 듯 말듯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무리 내가 수포자라지만, 1번 정도는 풀 수 있을 줄 알았지. 한수영은 자신이 오만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곧 노선을 틀었다. … 딱 한 문제만 풀다. 1번이든 뭐든,
하지만 한수영의 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가지런히 인쇄된 숫자의 틈 사이로 계속해서 수마(睡魔)가 빠져나왔다. 밤을 새우고 온 탓에, 견딜 수 없이 졸렸다. 결국, 한수영은 시험지를 다시 덮고, 그 위로 엎드렸다. 고작 백 분은 문제를 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나, 밀린 잠을 보충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야, 너 정말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물어보는 건 아니지?”
3.
푹 자고 일어나니 피로는 가셨지만, 기분은 오히려 바닥을 쳤다. 전부 꿈에 유상아가 나온 탓이다. 꿈속의 유상아는 지긋지긋한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고, 익숙한 형으로 웃었으며, 혼자였다. 꿈의 배경은 교실이었다. 교실에 책상이 있었다. 책상은 볕이 잘 드는 창 아래 놓여 있었다. 햇빛은 따뜻했으나, 창살의 그림자는 깊었다.
꿈속의 유상아에게는 날개가 있었다.
유상아의 도시락은 밋밋하게 그지없었다. 잘 다진 야채가 들어간 죽과, 함께 먹을 몇 가지 반찬. 유상아는 수저로 죽을 떠서 입에 넣으며 왜인지 모를 불쾌감을 느꼈다. 지금까지의 시험은 너무도 순조로웠다. 풀 수 있는 문제만 나왔고, 그래서 전부 풀었다. 틀린 답을 적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원래 수능을 보면 전부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유상아는 주위를 훑었다. 씹히지도 않을 만큼 묽은 죽을 구태여 나이만큼 열아홉 번씩 씹어서 삼키며 다른 이들을 보았다. 다른 이들은 그런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유상아는 싸 온 죽을 다 먹고, 빈 도시락통을 정리할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왜 그렇게, 불쾌했는지 깨달았다. 온전한 자신의 편이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이가, 이곳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있는 줄 알았으면 혼자 밥 먹지 말걸.”
“혼자 먹었어?”
“응.”
“시험 보는 데 방해될까 봐 일부러 안 갔는데.”
“나 보러오지. 그러면 시험 더 잘 쳤을지도 몰라.”
“…야, 너….”
“농담이야. 수영아, 나 시험 안 망쳤어. 걱정 마.”
“…진짜?”
“모르는 문제 없었어.”
“진짜?!”
“응.”
“미친… 유상아 만점 받으면 어떡해? 야, 빨리 인터뷰 뭐라고 할지 생각해 놔. 교과서 위주로 어쩌고 그런 식상한 거 말고.”
“뭐라고 할까?”
“수능 만점 받으면 천재 미소녀랑 사귈 수 있다고 해.”
“정말 그래도 돼?”
“너 하는 거 봐서.”
유상아의 손은 여전히 한수영의 뺨을 감싸고 있었다. 지금 가장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두 개에 이천 원짜리 삼각김밥, 거기에 튀김 우동 컵라면. 이 조촐한 식단이 한수영의 수능 도시락 메뉴였다. 한수영을 알고 있는 그 누구도 그가 수능을 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당연히 메뉴를 고심해줄 이 또한 없었다.
‘네가 아무리 잘났어도 대학 입시는 모르는 거야! 수시 다 떨어지면 뭐, 재수라도 할래? 수능 성적표는 있어야 정시를 넣을 거 아니야.’
한수영의 손에 볼펜을 쥐여주며 그의 담임이 했던 말이었다. 그때는 차라리 저주를 퍼붓지 그러냐고 속으로 욕을 했던 것 같은데, 인제 와서 보니 선견지명이었다. 역시 고3 담임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게 맞기는 하는가 보다. 죽어도 볼 일이 없는 시험이라 생각했는데.
그 한수영이, 결국 수능을 봤다는 말을 들으면, 담임은 뭐라고 할까. 어차피 자기는 붙었으니 바닥이라도 깔아주려고 간 거냐고 하려나. 그러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맞는 말이라, 적극적으로 반박을 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한수영은 손에 쥔 삼각김밥을 버릇처럼, 씹지도 않고 삼키며 시시콜콜한 생각을 했다. 쉬지 않고 망상을 하는 것은, 직전에 꾼 꿈을 머릿속에서 떨쳐내기 위함이 컸다.
“근데 아직도 표정이 왜 이렇게 어두워.”
나 시험 잘 봤다니까? 유상아는 말하며 한수영의 뺨을 꾹 눌렀다. 시험을 잘 봤다는 말에도, 한수영은 뭔가 탐탁치 않아 보였다.
“…내가 마음대로 끌고 온 거잖아.”
한수영의 답지 않은 발언에, 유상아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너랑 가면 어디든 좋은데.”
“거짓말하고 있네.”
“거짓말 아니야.”
“넌 가끔 존나 답답하게 굴어.”
“수영아. 나 억지로 좋다고 하는 거 아니야.”
“…….”
“왜 자꾸 나를 걱정해?”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부정한다고 해도, 유상아는 그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한수영의 눈동자가, 유상아를 빤히 응시했다. 망설이던 입술이 결국 퉁명스럽게 뱉어냈다.
“지금까지 나한테 싫다는 말 한 번도 한 적 없잖아.”
“그건 너라서 그런 거고.”
유상아는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알아. 알고 있어.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꿈에 관해 이야기 하기로 결심했다. 유상아. 내가 아까 꿈을 꿨거든. 한수영은 최대한, 이것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무슨 꿈?”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여전히 다정했다. 너한테 날개가 생겼어. 한수영은 말하면서도 이것이 터무니없는 얘기라 생각했다. 유상아는 느리게 질문했다. 내가 너를 두고 날아갔냐고. 그 목소리에는 흥미가 서려 있었다.
“야, 그랬으면 가만 안 뒀지.”
“그럼?”
“…너한테 날개가 있는데, 네가 아무 데도 안 갔어.”
유상아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한수영이 꾼 꿈의 내용은, 국어 시험의 마지막 지문과 같았다. 이 사람은, 사랑스럽게도,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세계가 좁아질까 봐, 연인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 갇혀버릴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지막 지문 때문이구나.”
유상아는 그런 한수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얼마나 다정하고 쓸모없는 걱정인가.
“전부터 생각한 거야. 고등학교 3년 내내.”
“수영아.”
한수영. 유상아는 힘을 주어 한수영의 이름을 불렀다. 또렷한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얌전하고 예쁜 유상아 보다는 수능 만점 받고 전교 1등 하는 유상아가 더 마음에 들어. 내가 3년 내내 죽어라 공부한 이유는 그거야. 오늘 시험에서, 모르는 문제 하나도 없었어. 나는 내가 만족할 만큼 열심히 했어. 만족할 만큼의 결과도 얻었고. 적당히 하지 않아서 후회한 적 없어.”
“…….”
그리고,
“수영아. 난 이미 새장 밖이야.”
네가 항상 나를 밖으로 꺼냈잖아.
『답안지의 필적 확인란에 다음의 문구를 정자로 기재하시오.』
한때는 넓은 벌판이었을 도시의 동쪽의 끝에 닿을 것처럼, 숨이 차도록 달리면, 맑은 강물 수면 위로 도시의 조명이 별빛처럼 어른거리는 모양이 보일 테다. 서울의 마천루는 이 많은 별이 내린 도시의 동남쪽에 서있다. 강의 줄기 근처에 뿌리를 내린 건축물은 확실히 거대하고 높았으나, 그 정점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늘에 닿을 정도는 못 되는데.”
한수영의 비웃음에, 유상아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높이 두었다. 시선의 끝은 건물의 옥상이 아닌 서울의 달을 향해 있었다. 반 조금 넘게 찬 달의 모양새가, 오늘따라 유독 새롭게만 느껴졌다. 곧, 빛은 더 깊어지고, 하늘을 채운 면적은 더욱 넓어지리라. 그의 낯에 조용하고, 은근하게 미소가 걸쳐졌다.
“그래도 올라가 보고 싶어.”
지상에서 민간인이 갈 수 있는 최고층까지 올라가는 데까지, 딱 육십초가 걸렸다. 올라가는 승강기의 내부는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둘은 그것을 두고 마치 다른 공간으로 전송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라며 웃어댔다.
“이렇게 별거 없는 줄 알았으면 옆에 있는 놀이동산을 갈 걸 그랬어.”
“왜. 난 마음에 드는데.”
이만큼 높은 곳은 처음 올라와 보거든. 유상아는 달뜬 목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언제 또 이 도시를 발밑에 둬볼 수 있겠어.”
도시의 빛은, 별의 모조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서 있는 사람에게 밤하늘에 누운 것만 같다는 감상을 줄 정도로 찬란했다. 유상아는 그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 올려줄 수 있어.”
한수영은 대꾸하며 유상아를 응시했다. 화려한 서울의 야경 속에서도, 제일 찬란한 건 그였다. 그의 등 뒤로 뻗은 강의 줄기가, 그 줄기를 따라 순환하는 빛의 흐름이, 마치 거대한 날개와도 같았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뭐.”
“내가 그래서 너를 사랑해.”
너는 내가 원하면 어디로든 날 데려가 줄 테니까. 유상아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으며, 눈동자는 맑은 별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어 있었다. 그는 가볍게 날아갈 것만 같은 목소리로 제 연인을 호명했다.
“수영아.”
그리고 손을 뻗었다. 언제나 한수영이 그랬던 것처럼. 도시의 빛이 둥글게 뭉치며 유상아의 손에 이끌려 나온 한수영의 눈을 밝혔다. 시야에 펼쳐진 큰 강은 바다와 같았고, 넓은 하늘은 어둠에 잠식당한 와중에도 희미하게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이, 예고 없이 한수영의 가슴에 들어찼다.
“이게 정말 별거 아니야?”
답이 너무나도 뻔했기에, 이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아직도 내가 걱정돼?”
한수영은 고개를 저었다.
· 상아수영 기념일 합작, 『 너와 함께한 1년, 365일』 에 [수능]을 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
· 수능에 사용된 문학 작품의 구절을 따오거나, 오마주하였습니다. 몇 개나 발견하셨을까요?
· 합작 페이지 링크입니다. https://sangsu1365.wixsite.com/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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