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正義를 무어라 定義할 것이냐.

강의실 매끄러운 백색 벽면은 더는 지워지지 않는 검은 잉크 자국이 선연했다. 올해로 딱 반 백 년을 살았다는 철학과 모 교수는 전부터 이 화이트보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보드 마카 자국이 심히 거슬린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판서로 강의를 진행했다. 학기의 반을 지난 시점, 교수는 어김없이 그 때 탄 벽면 앞에 서서 오래 묵은 고찰 하나에 대하여 논해보자 했다.

 

‘정의란 무엇인가.’

 

좌중을 주목시키고 써 내려간 주제였다. 정의, 두 글자의 위에는 직선 다섯 획이 추가로 그어져 正, 그 옆에 열셋의 획이 더 그어져 義란 글자가 쓰였다. 흑색 글씨에선 어딘지 모를 무게가 느껴졌다. 교수는 첫 번째 분단 맨 앞자리 학생부터, 너는 正義를 무어라 定義할 것이냐 물었다.

‘제가 생각하는 정의는….’ 갑작스레 치고 들어온 교수의 질문에 그들은 머리를 쥐어 짜내 어떻게든 그럴듯한 답을 내놓기 시작했다. 다섯, 넷, 셋… 영 모르겠다 답한 둘을 제치고, 마지막 하나. 문답은 어딘지 어설프게 이어져갔고, 마침내 N이 답을 내놓을 차례가 되었다.

 

“그래, 자네 차례군. N 군, 자네는 무어라 답할 건가?”

 

뒤꽁무니에 뚜껑 달고 있는 검정 보드마카가 N을 가리켰다. 지목된 N은 버릇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날 필요는 없다 했고, N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지나치게 단정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잠시간 침음을 흘렸다. 언제나 교수의 물음에 막힘없이 답하던 N이다. 허나 교수는 간만에 쉬이 답을 내놓지 못하는 제자에게 답을 재촉하는 대신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유예를 주었다.

 

“정의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그 구성원이 추구하는 옳고 바름을 일컫습니다. 또한 법이라는 울타리를 세울 때 전제되어야 하는 가장 밑바닥의 이념이기도 합니다.”

 

침묵 끝 유려한 목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막상 뱉어낸 목소리에는 숙고하던 모습과 반대로 망설임이 없었다. 앞의 학생들이 이만한 답을 내놓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N의 답이 가장 유창했다. 시선 몇 쌍이 N에게 쏠렸다. 그 중엔 교수의 시선 또한 있었다.

 

“이러한 정의의 속성은 그 어원이 된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의 모습에서 단편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린 두 눈은 편견 없는 객관을, 그 손에 들린 저울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꽉 쥔 검은 엄격함과 함께 …눈앞에 놓인 것을 균등하게 나눌 수 있는 예리함을 함께 보여줍니다.”

 

그 무엇보다 공정해야 하며, 흐트러지지 않는 완벽한 질서. 한참을 고민한 N은 그것이 정의라 했다. 그래, 좋다. 교수는 그리 대꾸했고 펜의 끝이 N 뒤의 학생을 향했다. 그렇다면 너는 정의가 무어라 생각하냐. N의 눈치를 보던 그는 N과 비슷한 답을 내놓았다. 그 뒤의 학생도, 그다음, 다음 학생도. 비슷한 답이 이어졌다. N이 내놓은 답은 그 어휘와 어투만 교묘하게 뒤바뀐 채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렇게 그날의 강의는 별다른 일 없이 끝이 났다. 문답이 끝난 후 교수는 이 오래된 고찰의 역사에 대하여 읊어주었다. 그리고 다음 수업까지 본인이 내놓은 답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있으라 하였다. 다음 강의 때 이 주제에 대하여 다시 논할 것이라 엄포했다. 과제는 없었다. 과제에 치여 사는 학부생들에게는 무엇보다 그게 중요했다.

 


N은 어떠한 사람인가. 그는 굴러가는 원처럼 모난 곳 없이 태어난 이었다. 그게 N의 천성이었다. 그의 심성의 형을 떠서 구현해낸다면 그 모형은 구에 가까울 것이었으며, 그 재질은 미미한 온도를 가지고 있는 물일 것이 틀림없었다. 끓지 않고 마냥 순환하기만 하는 미온수. 이기보단 이타를 생의 원칙으로 두고 움직이며, 자비와 관용을 교리로 삼은 선의 신봉자. 그게 N이었다.

그렇다면 N은, 정의와도 가까운 이라 할 수 있는가. 선과 정의는 별개의 개념이지 않던가. N은 감정에 휘둘리는 자였다. 그는 언제나 명확하게 약자의 편이었으며, 악한에게도 무디기 그지없었다. 그는 기울어진 저울이며, 무딘 칼날이었다. 두 눈을 가리는 대신 모든 것을 두루 살피는 인물이었다.

그 스스로 말하길, 정의는 흐트러지지 않는 완벽한 질서라 하였다. 객관을, 사심 없는 공정함을, 베일 듯한 엄격함을 정의의 속성으로 제시했다. 그래, N은 자신을 不正한 인물이라 여겨왔다. 정의를 동경하였으나, N은 자신이 스스로 규정한 그 기준에 닿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의의 기준을 차마 否定 하지는 않으니, N은 N이 알고 있는 그 어떠한 인물보다 부정한 이였다.

 


그 교수는 언제나 벽을 쳐 이목을 끄는 것으로 강의의 시작을 알렸다. 두통이 이는 정신 사나운 소음은 좌중을 집중시키기엔 딱 맞았으나, 당연하게도 그의 학생들은 단단한 벽에 주먹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그러나 요 몇 년간 그에게 그것이 싫다고 말한 학생은 없었다. 종종 학생들끼리 그 행위가 싫다고 얘기하기는 했으나, 감히 면전에 대고 그 말을 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N은 교수에게 처음으로 직접적인 불만을 표출한 학생이었다.

N은 단언컨대 교수가 가르치는 제자 중 가장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강의 도중 가장 많은 질문을 하는 학생, 언제나 정시에 과제를 제출하는 학생, 교수의 수업뿐 아니라 다른 강의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내는 학생, 교수와 가장 많은 면담을 가지는 학생… 그게 N이었다.

 

“자네는 어떻게 강의가 끝날 때마다 찾아오는 것 같아.”

 

교수는 그리 말하며 찻잔 하나를 N에게 내밀었다. 녹차 좋아하나? 교수가 물었다.

 

“…아하하. 항상 번거롭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N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받아들었다. 찻잔 위에는 녹차 티백이 둥둥 떠 있었고, 물은 너무나 뜨거웠다. 그는 살짝 혀를 내밀었다가 바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교수는 그 모습을 보고, 제 찻잔을 집어 들었다. N과 다르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차를 홀짝였다.

 

“죄송할 게 뭐 있나? 인상 깊어서 말한 것뿐이니 개의치 말게. 이렇게 적극적인 학생도 있어야 강의할 맛이 나는 거지. 그런데, 그래도 강의 끝나기 직전에 질문하는 건 좀 참아보는 건 어떤가. 자넨 항상 앞자리에 앉아서 모르겠지만, 뒤에서 쳐다보는 사람들 눈빛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나?”

“아…….”

“농담이었는데, 자넨 어째 무슨 말을 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군.”

“교수님께서도 농담 같은 것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자네 눈엔 내가 그렇게 보이나? 강의 때도 졸지 말라고 나름 농을 많이 친 것 같은데 말이야. 하긴, 자네들 입장에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재미가 없겠지.”

“아닙니다. …저는 교수님 강의가 좋은걸요. 설명도 잘해주시고, 수업하시는 내용 자체도 재미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부족한 탓에 항상 교수님을 귀찮게 하니 죄송할 따름이지요.”

“내 앞이라고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돼. 칭찬 말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없나? 난 오히려 그게 더 궁금하군. 내가 언제나 강의 내용에 대한 의견은 환영한다고 하지 않았나.”

“…저, 강의 내용과는 관계없는 내용이지만, 하나 있습니다. 강의 도중 벽 치는 걸 조금만 살살 해주셨으면… 합니다. 주제넘을 지 모르지만, 갑자기 큰 소리가 나서 놀라는 학생이 많습니다. 이것 말고는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저는 교수님의 수업을 좋아하고 있으니까요.”

 

허, 탁한 숨 뱉는 소리와 함께 교수의 입꼬리가 옆으로 찢어졌다.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그 N이 불만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놀라웠으나, 더 놀라운 건 그 내용이었다. 교수는 불쾌해서 그런 웃음을 지었는가? 그건 아니었다. 단지 놀랐을 뿐이다.

 

“N 군. 내가 강의를 한 지 몇 년이 되었는지 아는가?”

 

가벼운 소성이 둘 사이로 흘러 지나갔다. 한참 웃던 교수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강의할 때 칠판을 치는 것은 그의 버릇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몇 년 전부터 계속 수업을 할 때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내고, 그 반응을 살폈다고 했다. 누구 한 명이라도 싫다고 이야기하면 그 행동은 멈추었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 행동은 한 학기 내내 지속되었다. 교수는 이 사실을 매 학기 마지막 강의에서 밝혔다. 그가 정교수가 된 후에는 한 차례도 그의 행동을 싫다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교수는 그 이야기를 해주며 다시금 웃었다.

그는 모르는 사이에 실험의 대상이 된 것이 불쾌하지 않냐고 물었다. N은 고개를 저었다. 당혹스러운 것은 맞으나, 수업을 개선해준다 했으니 더 이상의 불만은 없다고 말했다. 교수는 다시 물었다. 왜 많은 학생들이 제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 같냐는 질문이었다.

 

“교수님은 좋은 분이시지만, 아무래도 그 직위에서 오는 부담감이 있지요. 이야기를 꺼냈다가 교수님께서 불쾌하지 않을까, 강의 방식에 괜한 참견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쉽게 얘기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교수는 그렇다면, 너는 ‘왜’ 제게 그 이야기를 했는가, 되물었다.

 

“그럼에도 얘기를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자네 같은 사람은 드물다네. 하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 내 수업에 나는 N 군 같은 학생이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했다네. 덕분에 이번 학기 수업은 간만에 조용히 할 수 있겠군. 잘 됐어. 사실 나도 그 소리를 별로 좋아하진 않거든.”

 

교수는 다음 강의 때 수업을 듣는 모두에게 이에 대한 것을 말하겠다고 했다. 더불어 앞으로도 새로운 불만이 생기면 다시 말하라 당부하며, 일리가 있다면 최대한 수용하겠다 약조했다. N은 다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차가 알맞게 식어있었다. N은 그것을 다 마시고 나서야 돌아갔다. 


강의실에 들어선 교수는 팔을 들어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 펴는 것으로 학생들을 주목시켰다. ‘정의란 무엇인가.’ 지난 수업과 같은 내용이 화이트보드 위에 적혔다. 正, 義. 교수는 한참 그것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갈 때쯤 예시 하나를 들어보자고 했다. 교수는 검은 보드마카를 내려두고 파란 펜으로 그 밑에 원 하나를 그렸다. A. 원에 이름이 붙었다.

 

“다들 지난 강의 때, 내가 던졌던 질문에 답을 했었지. 모두 본인이 무어라 답했는지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겠네.”

 

A는 피해자였다. 부당한 사회 제도의 피해자. 그러나 동시에 그는 질서를 흩트리고, 법을 어긴 범죄자이기도 했다. 교수는 A에 관해 설명하고 물었다.

 

“A는 사회로부터,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다. 누가 들어도 딱한 사정을 지니고 있다. 그는 생존을 위해 범법을 저질렀다. 너희는 이 자를 정해진 법에 따라 처벌할 수도 있고, 그의 안타까운 사정을 보고 죄를 눈감아 줄 수도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너희가 생각하기에 가장 정의로운 방법을 찾아오도록.”

 

교수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 리포트를 써오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N은 벽에 그려진 파란 원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그는 언제나 약자의 편이었으며, 악한에게도 무르기 그지없었다. 정의로운 방법이라. 어려웠다. 


N은 A에 대하여 생각했다. 자신은 이전에 무엇이 정의라 했던가. 편견 없는 객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엄격함과 균등함. 정의로운 이라면, A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법을 어긴 그를 처벌할까? 아무리 안타깝더라도 그가 부정한 짓을 저질렀기에,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그를 봐주는 것 또한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니 이 또한 부정의인가?

 

하지만.

 

정의로운, 옳고 바른 사회라면 그와 같은 약자를 배척해서는 안 되었다. 정의라는 이름 위에 세워진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했다. 그 구성원을 보호하지 않는 법과 사회는, 이미 객관을 잃은 눈이며 기울어진 저울이다. 이 칼은 예리하지만, 공정한 분배를 위한 것이 아닌 그 구성원을 찌르기 위해 벼려진 칼이다.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 N은 고찰했다. 그리고 끝내 답을 내렸다.

 


“N, 또 찾아왔군. 이젠 자네가 질문하지 않으면 섭섭할 지경이야.”

 

교수는 또 녹차를 내놓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 없다니까. 그렇게 죄송하면 날 그만 괴롭혀야지. 끌끌…. 그나저나 자네, 제출한 리포트를 읽어봤는데 말이야.”

“예.”

 

손에 쥔 찻잔은 여전히 뜨거웠다. 교수는 언제나 혀가 델 것 같이 뜨거운 차만 마셨다. N은 수색 옅은 녹차를 빤히 바라보다, 입김을 불어 차를 식히기 시작했다.

 

“의외의 답을 내놨더군. 내가 본 자네라면 A를 눈감아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자넨 사람이 퍽 무르지 않나.”

 

N은 A를 법대로 처벌하기를 택했다.

 

“그 방법이 가장 정의롭다 생각했습니다.”

 

A의 사정은 퍽 딱한 것이었으나, 그것 하나만으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질서를 흩트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A의 세계는 기울어진 세계였다. N은 문제에서 가장 부정의 한 것은 그러한 사회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정의는 사회가 추구하는 올바름이다. 그리고, 옳고 바름의 기준은 언제나 변한다. 법 아래에 깔린 이념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영원할지 모르나, 그 위에 쓰인 내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N은, A를 법대로 처벌하되, 또 다른 A가 생기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으므로 그것을 바꾸겠다고 하였다.

 

“자네는 너무, 착해. 순진하고.”

“저 같은 이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했다고 하셨지요.”

“그랬지.”

“선과 정의는 별개의 개념이지만. 선이 없는 정의는… 그 본질을 잃기 쉽다 생각합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고, 미련한 이상주의자 같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요. A의 세상뿐 아니라, 제가 지금 발 디디고 있는 현실 또한 많이 기울어져 있지 않습니까.”

 

저같이 무른 사람은 정의의 심판자 따위는 되지 못합니다. 대신 저는,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한 추가 되고 싶습니다. 꾸준히 약자의 편을 들고, 대신 소리를 내는 그런 존재 말이지요. N은 그리 말하며 반쯤 식은 차를 홀짝였다.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게 내 일인 것을.”

 

N은 그렇게 자리를 떠났다. N은 그 교수가 아는 인물 중 가장 정의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칼리가디고의 뼈' 메이저 아르카나 기반 합작 𝗔𝗥𝗖𝗔𝗡𝗔 제출작,

 11번 카드 〈정의〉를 주제로 썼습니다.

공백 포함 6,755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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