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브] 나를 잊은 별에게 (14)
길고 부드러운 손이 연고를 바르고 드레싱을 마무리하는 동안 하민의 시선은 예준의 손바닥에서 떠나지 않았다. 예준의 손은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선의 집합을 이루고 있었다. 노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나 소년의 마음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왜 그랬을까. 또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소년을 신뢰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 노아에게는 사람을 재단하여 판단하는 것보다 날 것 그대로를 수용하는 편이 더 쉬웠다.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남예준은 그에게 어려운 사람에 속했다. 한 문장의 말을 위해 무던히 가슴 언저리에서 다듬고, 날 선 자리를 꺾어 건네는 행위를 노아는 다정이라 부르지 않았다. 너 그거 다 자기만족이야. 언젠가 단둘이 누워서 했던 말에 소년은 아픈 얼굴을 했으나 구태여 노아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 날의 예준은 침몰하는 섬처럼 말했다. 맞아. 나는, 내가 필요한 말을 남에게 해주는 사람이야.
“노아야.”
“뭐. 왜. 뭐.”
“미안해.”
드레싱이 끝난 뒤로도 붙잡힌 손 대신 소년이 반대편 손을 뻗어 노아의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히 정돈해줬다. 이어 그 손은 나비 날갯짓처럼 하느작거리며 하민의 어깨로 날아들었다. 하민이도 놀랐겠다. 미안해. 어렵지 않게 사과를 하고 소년은 먼저 열려있던 구급상자를 정리했다. 이어 탈피 껍질처럼 남은 치료의 흔적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집어드는 순간 하민이 손을 뻗어 그를 가로막았다.
“제가 할게요.”
“손님인데 정리를 하게 둘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제가, 할게요. 진짜로요. 휴지통 어디 있는지도 알아요.”
“난 구급상자 두고 올테니까, 남예준 너는 가서 빨리 얌전히 누워.”
소년은 이 모든 상황이 지나치게 자신에게 상냥하고,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들의 잠을 깨워 미안하다는 감상이 이 소란에 대한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숨죽여 움직였다. 예준이 자리로 가서 가지런히 놓인 이불을 덮고 앉자 그 뒤에야 각자 가야할 방향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아는 예준의 방을 나와 그의 곁에 곧장 앉았다.
“얌전히 누우라니까 왜 앉아있어. 반항하는거야?”
“저를 기르는 토끼처럼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여긴 제 집입니다. 한노아 씨.”
두 사람이 아웅다웅 말을 주고받는 사이 하민이 다가와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소년의 손은 노아의 손끝에 닿은 채였다. 그가 곁에 앉자 소년은 그제야 자리에 먼저 머리를 대고 누웠다. 하민은 고개를 돌려 예준의 반듯한 옆얼굴을 바라봤다. 한노아가 하지 못하는 말을, 하민은 입술 너머로 꺼내어두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인사 해줄거죠?”
“응?”
“인사 해줄거죠. 예준이 형.”
예준은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것처럼 하민을 응시하며 웃었다. 내일 집에 안 보낸다고 하면 안심이 되겠어? 장난스러운 말에 소년의 팔이 붙잡혔다. 하민은 새카만 눈으로 소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 이런 순간들을 예준은 견디기가 버겁다.
“어디 안 간다는 얘기 듣고 싶은 줄 알잖아요.”
평소라면 장난스럽게 끼어들었을 노아도 가만히 예준의 얼굴에 시선을 두고 있다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입술을 달싹였으나 쉽게 음성이 나오지 않아 소년은 그저 웃고 말았다.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자 대답. 하고 단호한 요구가 떨어졌다. 노아가 옅은 웃음소리와 함께 예준의 어깨 근처에 이마를 기댄 채 속삭였다.
“대답하라잖아, 준아. 공주도 기대 중이야.”
“아니 내가 내 집에서, 어딜 간다고….”
“진짜 이럴 거예요?”
결국 소년은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는 말을 꺼내놓았다. 여기에 있을게. 아침이 와도, 내일도, 모레도. 어디 멀리 안 갈게. 약속해요? 그래, 약속해. 여전히 하민의 눈에는 불신이 깃들어 있었다. 진짜요? 하고 재차 묻는 하민을 향해 소년은 손을 뻗어 뺨을 어루만졌다.
“언제든, 네가 돌아보면 찾을 수 있는 자리에 있을게. 약속해.”
야, 남예준. 그럼 나는. 그 말에 예준이 노아를 돌아보며 작게 웃었다. 너랑 하민이 같이 나 기다릴 거잖아. 아냐? 기묘한 확신이 어린 말에 노아가 괜히 그의 옆구리를 찔러보고 팔을 둘러 허리를 껴안았다. 두 사람에게 둘러싸인 예준이 먼저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에 우리 다 졸겠다. 주말이니까 아예 늦잠을 잘까? 작게 소곤거리는 말에 두 사람이 나란히 끄덕였다.
“잘 자.”
“준이도 잘 자.”
“안녕히 주무세요, 형들.”
세 사람은 꼭 하나인 것처럼 서로의 손과 품에 엉킨 채 잠들었다. 제각각이던 호흡이 나란한 박자가 되었을 때, 소년의 손끝이 글리치처럼 흩어졌다가 돌아왔다. 창밖으로 천천히 새벽이 물러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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