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 콤플렉스 1/2
빵준 이능력
Q) 봄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A군: 벚꽃이요!
B양: 따뜻한 햇살?
C양: 우리를 천천히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인도하는, 멈출 수 없는 중간고사의 흐름입니다.
S군: 모내기요.
네?
모내기요.
쾅쾅쾅. 성준수가 못을 박았다. 우와, 밝다 밝아 대한민국 청년 농업의 미래! 전국 쌀 수급량을 책임질 것 같은, 참으로 든든하고 바람직한 대답이었다. 그것이 태어나서 호미질 한 번 안 해봤을 법한 남자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놀라울 뿐.
그러나 성준수는 진심이었다. 아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모내기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하나 같이 튀어나와 네 집 내 집 가리지 않고 모를 심어주는 정겨운 풍경의 가치를 말이다.
아무리 이앙기가 있다 한들 사람의 손길이 무용하진 않았다. 기계가 지나간 땅을 공글려주기도 해야 하고 모판도 리필해야 하고 기계가 못 다니는 귀퉁이는 직접 심어주기도 해야 하고 등등등. 그 또한 바쁘다 바빠 농경인의 삶을 깨우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성준수가 팔을 들어 올려 내리쬐는 뙤약볕을 가렸다. 덥다, 시발.... 때는 5월 초, 벌써부터 햇빛이 심상치 않았다. 후덥지근한 기운에 팔뚝까지 저지를 걷어붙였다. 흰 티셔츠를 펄럭이며 애써 더위를 쫓아본다.
동식이네 알제? 아니 여 온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는데 와 모르노? 거 아레께 소 탈출해가 뒤집어 진 데 있다이가. 어어 크다란 은행나무 있는 집. 오늘 그 집 품앗이 가니까네 이따 3시 쯤에 커피나 좀 시원하게 타온나.
오늘 아침 사장이 슈퍼를 나서며 당부한 말이었다. 아침 6시부터 카운터에 앉아 초파리를 잡던 성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슈퍼 알바가 배달도 하나. 의문을 가지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여가 아무리 깡촌이라지만 소비자의 요구에 맞게 써비쓰를 발전시키야 하는 거 아이가? 어? 트렌드- 트렌드에 맞게! 귀에 진물이 나도록 들은 사장님의 경영철학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성준수가 왼손에 들린 분홍 보자기를 내려다 보았다. 묵직한 보온병의 무게가 손에 감긴다. 가늘게 빠진 하얀 손가락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것 뿐인가? 애초에 성준수라는 존재 자체가 이곳과 어울리지 않았다. 아아 쪽쪽 빨며 성수동 돌아다닐 것 같은 얼굴로 보자기에 커피 배달하는 신세라니. 모든 빛을 반사하는 하얀 콘크리트 도로와 그를 따라 늘어진 이름 모를 잡초들. 사방을 가득 메운 논.논.논. 그곳을 거니는 도시적인 생김새의 남자는 대충 누끼 따다가 합성해놓은 듯 이질적이었다.
그러나 성준수는 익숙하게 길을 밟는다. 기억을 더듬어 사장님의 전언을 떠올려본다. 은행나무라... 기억대로라면 곧 나와야 하는데.
생각이 길어지기 전에 은행나무가 시야에 잡혔다. 커다란 은행나무가 딸린 주황지붕 집. 그 앞으로 널따란 논이 펼쳐져 있었다. 잔뜩 허리를 수그린 마을 사람들이 모를 심고 있었다. 털털털 이앙기가 돌아가는 소리에 어우러진 흥겨운 트로트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혹시나 아픈 건가 걱정도 했는데♪
"커피 왔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시끄러운 트롯 소리만 맴맴 맴돌았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성준수가 목소리를 키웠다. 너네 집은 연신내 난 지금 강남에♪
"커피 드세-"
"준수야."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가로막았다. 뭐야 환청인가. 귀를 털어내며 논 가까이 다가갔다. 가슴을 쿡 찌르는 목소리가 진득이 고막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게 누구십니까♪
"준수야...."
아, 씨발 또.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있는 것이라고는 질퍽이는 논, 커다란 이앙기, 저를 발견하고 반색하는 마을 아저씨들. 그리고 저기 홀로 선 커다란.......
.......
니가 왜 거기서 나와♪
깜빡깜빡. 손으로 눈을 비볐다. 낯익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그 녀석이었다. 강제로 도려내고 온 그 녀석. 순간을 담는 사진처럼 찰칵 녀석을 담아냈다. 흥겹게 보따리를 앗아가는 어르신들 손길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를 발견하고 환하게 뜨인 눈. 여전히 둥그런 머리. 맨들한 뺨에 묻은 진흙. 빳빳한 검은 정장 차림과 양손에 낀 노란색 고무장갑. 뭐? 고무장갑? 시선을 주욱 내리니 정강이까지 논에 잠긴 남색 장화가 보인다. 이제 보니 손에는 모까지 들려있었다. 너 지금... 뭐하냐?
영중이 힘차게 논을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덥썩 성준수를 끌어안는다. 전영중 몸에 있던 진흙이 덕지덕지 성준수에게 달라붙었다. 스읍,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전영중의 호흡이 목덜미에서 선연하게 느껴졌다.
"왜 이제 왔어 준수야.... 너 때문에 내가 팔자에도 없는 모도 심고. 사람들이 갑자기 나 끌고 가서 논에 던져놓는데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허리도 아프고 무릎도 아프고 나 너무 힘들어."
힘들긴 지랄. 마을 어르신들 들을까 조곤조곤 귓가에 찡찡대는 정성이 여전했다. 겉으로는 즐거운 척 맑은 웃음이나 띄워놓고 있겠지.
거칠게 영중의 몸을 떼어냈다. 뭐라고 조잘대는 건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장장 일 년하고도 반이었다. 지끈거리는 두통을 뒤로하고 변함없이 반듯한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 살폈다. 일종의 본능이었다. 바삐 움직이는 시선을 눈치챈 영중이 빙그르 웃으며 잔망을 떤다. 정말 준수야....
"한참 찾았잖아."
히어로 콤플렉스
'......오늘 서울 마포구 상공에 너비 3m의 S급 균열이 나타났습니다. 1년 만의 초대형 균열로, 다행히 곧바로 파견된 헌터......'
드르르륵. 불투명한 슈퍼 미닫이문이 열렸다. 시끄럽게 고막을 관통하는 티비 소리에 성준수가 얼굴을 찡그렸다. 곧장 카운터로 걸어가 티비를 껐다. 음량을 최대치로 올려놓는 것은 사장님의 오랜 버릇이었다. 그래야 잠을 쫓을 수 있다나 뭐라나.
"나 들어가도 돼?"
가련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온몸에 흙을 묻힌 채 문지방도 넘지 못하고 있는 전영중이 보였다.
"되겠냐?"
이게 누굴 고생시키려고. 거기서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죽는다. 단호하게 엄포를 놓은 성준수가 카운터 뒤편 골방으로 모습을 감췄다. 영중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수 손에 죽는 건 나쁘지 않은데.... 구태여 성준수 속을 뒤집어놓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데구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소박한 슈퍼였다. 중앙에 놓인 커다란 진열대 하나만으로도 내부가 가득 찼다. 벽을 따라 놓인 진열대에는 온갖 물품이 빈틈없이 꽉꽉 메워져 있었다. 꽤 실속 있는데? 향수를 자극하는 슈퍼 냄새도 마음에 들었다. 천천히 매장을 구경하던 시선이 준수가 사라진 나무문에 다다랐다. 제 집마냥 익숙하게 골방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영중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슈퍼와 성준수, 그리고 골방. 지지리도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뭐 하고 사나 했더니 여기서 알바라도 하는 건가. 성준수가 장사를 할 리는 없고. 나름의 결론을 도출하고 있을 때쯤 이번에는 엉뚱한 물건에 눈길이 사로잡혔다. 우산꽂이에 꽂혀있는 길쭉한 물체....
"폭죽?"
"뭐?"
타이밍 좋게 성준수가 등장했다. 한 손에 수건을 들고 쓰레빠를 신던 성준수가 전영중에게 되물었다.
"뭐라고?"
"아니 폭죽을 팔길래."
"아."
"아는 무슨 아야. 준수 너 저거 불법인 건 알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영중의 말에 준수가 귀찮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 더욱 자극받은 전영중이 쫑알거리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여기 시골이라고 너무 안일하게 구는 거 아니야? 불꽃놀이라도 하다가 사람들이 균열 터진 줄 알고 신고하면 어쩌려고."
"그럼 뭐 사장님이 잡혀가시겠지."
대충 대꾸한 성준수가 전영중을 지나쳐 슈퍼를 빠져나왔다. 영중이 그 뒤를 쭐레쭐레 따라간다.
"와, 준수야... 성실한 직원이라면 미리 언질을 줘야 하는 거야."
"좀 닥쳐라. 저거 네 입에 넣어서 터뜨리기 전에."
결국 살벌한 협박이 떨어졌다. 영중의 입가에 비실비실 미소가 피어올랐다.
성준수가 걸음을 멈춘 곳은 슈퍼 옆 수돗가였다. 근처 평상에 아무렇게나 수건을 던져둔 성준수가 호스를 집어 들었다. 수도꼭지를 돌리자 맑은 물이 콸콸 쏟아져나왔다. 정말 콸콸콸. 수압 무슨 일이지. 맞으면 피부 뚫리는 거 아니야? 멀뚱히 물줄기를 구경하는 영중에게 이윽고 당혹스러운 명령이 내려졌다.
"벗어."
뭐? 영중이 눈을 깜빡거렸다. 우리 준수 못 본 새에 좀.... 슬그머니 양손을 들어올려 가슴팍을 가렸다.
"아 씹, 좀! 지랄 좀 그만하고 벗으라고."
성준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와하하. 재밌다. 빵하고 웃으며 순순히 장화를 벗었다. 논두렁에서 구른 몸으로 실내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대충 물로 씻어두어야 했다. 종아리까지 바지를 걷어붙이자 성준수가 턱짓으로 셔츠를 가리켰다.
"등목해줄 테니까 위에도 벗어."
웬일로 서비스까지. 영중이 흔쾌히 정장자켓을 벗었다. 셔츠까지 벗어 내려두고 땅바닥에 손을 짚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중력을 받아 후드득 떨어진다. 아, 피 쏠려.... 영중이 생각한 그 순간.
"악! 성준, 야!"
얼음을 들이붓는 것 같았다. 이거 물 맞아? 형체 잡힌 고체가 와르르 떨어진 듯 등가죽이 얼얼했다.
"참아 새끼야. 이것도 못 참냐?"
헌터 가오 다 죽었네. 성준수가 쯧쯧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입꼬리는 하늘 높이 솟아있다. 부들거리는 영중의 꼴이 여간 재밌어야지. 호스를 휘휘 움직이며 물을 뿌리던 준수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영중이 곧바로 몸을 일으켜 탈탈 머리를 털어냈다.
"근데 너 옷은 있냐?"
"아니."
지극히 태연한 목소리다. 성준수가 허리춤에 손을 짚었다. 존나 어쩌잔 거지 이 새끼는.
"뭐야 그 표정은?"
"얼굴 치워라."
"너무하다 진짜...."
어쩐지 성격도 더 좆같아졌다. 원래 이렇게까지 빙글거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일단 내 옷 줄 테니까 들어가서 씻어."
"웅."
"웅은 진짜. 아오."
"근데 준수야. 나 궁금한 거 있는데."
"어."
"저분들 다 아는 사람?"
영중이 슬쩍 뒷편을 눈짓했다. 사람? 물음표를 띄우며 뒤를 돌아보니.
"점마가 그 유명한 헌터라꼬?"
"몸이 아주 그냥 성났네. 성났어."
"예. S급이라카데예. 전국에 딱 세 명 뿐이 없는."
슈퍼에서 조금 떨어진 길가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전영중을 구경하고 있었다. 졸지에 백주대낮 스트립쇼를 감행한 전영중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주섬주섬 옷을 챙겨 들었다. 은근슬쩍 발까지 옮겨 성준수 뒤로 몸을 숨긴다.
"아니 다들... 뭐 하시는 거예요."
"뭐하기는. 그냥 지나가다 들맀다. 서울서 유명한 손님이 왔다케서."
"그럼 이제 들어가세요. 얘가 뭔 구경거리도 아니고."
"에헤이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다꼬~"
성준수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일 년 치 피로가 몰려드는 기분이다. 이건 뭐 방법이 없었다. 그냥 자리를 뜨는 수밖에. 어차피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것은 전영중이지 제가 아니었다. 금방 멘탈을 다 잡고 뚜벅뚜벅 슈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에 아주머니의 수군거림이 따라붙는다. 유난이야 유난. 등짝 좀 본 거 가지고. 마누라가 따로 없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전영중이 입을 열었다.
"준수야, 마누라는 데려가야지."
*
피유우우우우웅. 하늘에서 하얀 불빛이 떨어졌다. 눈을 멀게 할 만큼 눈부시고 커다란 불덩이가 슈우우우웅 밤하늘을 쪼개며 가로질렀다. 하나 둘. 셋 넷. 비가 내리듯 쏟아진다. 우와, 엄마 저게 뭐예요? 소원을 빌어주는 별똥별이야. 우리 아들 소원 빌어볼까? 이례적으로 아름다운 유성비에 사람들의 마음이 술렁였다.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아름답게 반짝거린다. 지구인들의 소원이 하나둘 유성을 따라 떨어졌다. 다시 하나 둘, 그리고 셋 넷.
그 순간 밤하늘이 쪼개졌다. 정말로 뚝. 두 쪽이 났다. 짙은 먹색 하늘에 기다란 실금이 생겼다. 저게 뭐지? 술렁이는 사람들의 혼란을 먹은 틈이 점차 몸집을 키웠다. 주먹만 하던 높이가 사람이 들어갈 만큼 자라더니 순식간에 빌딩을 삼킬 만큼 거대해졌다. 그 틈 사이로 밤하늘보다 탁하고 짙은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난생처음 보는 순도 백퍼센트의 어둠. 아니, 어둠이 맞나? 머리털이 쭈뼛 설만큼 이상하고도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하나둘 뒷걸음 치기 시작했을 때, 검은 틈이 요동치며 거대한 덩어리를 툭하고 지상으로 뱉어냈다.
그것은 아주 끈적한 덩어리였다. 집채만 한 덩어리는 느리게 움직이며 근방의 모든 것을 녹여버렸다. 콘크리트 건물도, 아스팔트도, 높다란 가로수도, 그리고 인간도....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늘에서 덩어리들이 수도 없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동네 하나가 녹아내렸다.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원인도 정체도 알 수 없는 압도적인 재앙에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잡아먹혔다.
그러던 그때 땅에서 환한 빛무리가 솟아올랐다. 금빛이 감도는 신비로운 빛기둥이 전국, 아니 전세계 여기저기서 피어올랐다. 신이 강림하는 듯 아름다운 광경에 도망치던 사람들이 홀린 듯 걸음을 늦췄다. 이윽고 빛무리 속에서 신기한 빛을 두른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약속이라도 한 듯 괴생명체에게 달려들었다. 퍽. 그들이 휘두른 주먹에 불길이 피어났다. 사방에서 번개가 내리꽂히고 사람들이 날아다녔다. 괴물들이 하나둘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기나긴 싸움이었다. 끝없이 쏟아지는 덩어리를 베고 또 베고, 사람이 죽고 또 죽어 나갔다. 탈진한 초능력자가 쓰러져 위액을 토해내고 쉴 틈 없이 폭발음이 들렸다. 뒤늦게 지원 온 군부대에서 폭약을 던지고 총을 쏴갈긴지도 몇 시간째. 파도처럼 밀려오던 괴물들의 쓰나미가 모두 사라졌다. 폐허가 된 공간에서 초능력자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제가 어떻게 싸웠는지. '
'본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제 안에서 흑염룡이 -네?- 어떠한 힘이 깨어났다는 것이요.'
깨어난 초능력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몸속에서 어떤 힘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고. 정신을 차려보니 정신없이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고. 훗날 사람들은 이것을 각성이라 명명하고 그로 인해 초능력을 가지게 된 사람들을 헌터라고 불렀다. 공중에 생겨나는 틈. 지구밖에 존재하는 온갖 괴생명체를 끌고 들어오는 틈은 균열이라 이름 붙였다.
전세계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겨난 '1차 세계대균열' 이후 세계는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헌터를 중심으로 균열관리본부를 신설하고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하여 연구를 지속했다. 잊을만하면 생겨나는 균열을 공략하는 방법을 터득해냈다. 고강도의 훈련 아래 헌터들은 막강해졌다. 사람들은 점점 새로운 재앙에 익숙해졌다. 일상을 되찾았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균열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 성준수 어린이가 있다. 감명받은 얼굴로 어린이 필독서 <WHY? 균열>을 덮는다. 순수함이 똘똘 뭉친 동그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나도 커서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어야지. 초등학교 장래희망 순위 1위. 수많은 헌터 지망생 명단에 성준수가 이름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헌터라는 직업은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전적 요인인지, 하늘의 뜻인지, 단순히 후천적 발현인지 모를 능력의 각성에 달려있었다. 새파랗게 어린 성준수는 이런 불가항력에 굴하지 않는 어린이였지만.... 일단 멋있잖아. 파워레인저 놀이를 할 때면 꼭 레드를 고집할 만큼 멋있는 것에 환장하던 아이에게 헌터를 향한 동경이란 불가피한 감정이었다. 신비로운 빛에 휘감겨 초능력도 써대고 괴물도 무찌르고 사람도 구해내는데 이보다 더 멋있는 게 어딨어?
하지만 머리가 좀 커진 성준수는 생각한다. 이거 순사기 아니야.
유튜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오늘자 강남 헌터 각성 영상' 따위에서는 영롱한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고성과 피가 난무했다. 으아아악! 진정하세요! 제 몸 속에 들끓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폭주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거짓은 아니었다. 대규모 균열이 발생하기 전에는 정말 별똥별이 떨어진다던데. 초대 헌터들이 각성할 때는 정말 빛이 솟아올랐다던데. 당시 영상을 찾아본 성준수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하늘을 수놓는 별똥별, 이건 맞고. 헌터들을 휘감는 빛, 이건 좀 볼품없었다. 성능 불량 폭죽 같달까. 아주 가느다란 금빛 빛줄기가 힘없이 피융... 하늘로 쏘아졌다가 사라졌다.
힘없이 날아오른 빛줄기처럼 헌터의 삶은 마냥 숭고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아무리 빛무리니 유성비니 포장해도 현실은 수백 배 끔찍했다. 생사가 오가는 현장. 제 목숨 바쳐 시민을 구하는 영웅들. 국가안보가 고작 백 명 남짓한 사람들에게 달린 것부터가 기형적이었다.
그럼에도 헌터를 꿈꾸던 수많은 초등학생처럼 성준수는 꿈을 꿨다. 이것은 비단 초등학생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능력 좋은 헌터 돼서 부자 되기? 어른들의 소원이었다. 로또 당첨과 다를 게 없다고. 그리고 운 좋게도 성준수는 당첨에 성공한다.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영웅이 되어 괴물을 무찌른다. 도시를, 나아가 한 나라를 한 몸 바쳐 지켜냈다. 그 감각은 꽤나 달콤했다고... 성준수는 회상한다. 비록 지금은 슈퍼에서 알바나 하고 있지만.
성준수가 촉촉하게 젖어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S급 헌터, 대한민국의 미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주 빠안히. 살갗 하나하나를 발라먹을 듯 끈적한 눈빛으로. 시원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전영중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 시선을 받아냈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노란색 장판 위를 굴렀다. 슈퍼 뒤 쪽방, 사람 두 명 간신히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생활공간은 어째 바닥 수평도 맞지 않았다. 주르륵 물방울이 흘러 바닥에 앉은 성준수의 바지를 적셨다.
"너 여기 왜 왔냐."
"준수야, 내 몸 뚫어지겠다. 좀 부끄러운데."
"아니 여기 왜 왔냐고."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딴소리만 하고 있다. 성준수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굳혔다. 단번에 인상이 차가워진다. 고압적으로도 느껴지는 얼굴. 영중은 오랜만에 마주하는 성준수의 분노를 담담히 받아냈다. 태연하게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댔다. 마치 네 질문이 하등 쓸모없는 것이라는 듯이.
"글쎄...."
"대답 똑바로 안 하냐? 너 호출기는 어디다 버리고 왔어."
따가운 시선이 제 손목에 꽂혔다. 영중이 슬쩍 팔을 들어올려 왼손목을 확인한다. 그새 또 그걸 봤네. 저를 샅샅이 살펴주는 눈빛이 여전하다고 좋아해야 하는 건지, 결국 제게 화를 내는 이유가 같잖은 호출기 때문이라는 것에 화를 내야 하는지 마음을 종잡기 어려웠다.
"잃어버렸어."
"장난하냐?"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성준수가 비소를 흘렸다. 거짓말을 해도 성심성의껏 해야지. 호출기는 분실이 불가능했다. 잃어버리는 순간 곧바로 새것이 지급되기 때문이었다. 헌터에게 균열 발생 현황을 보고하고, 적재적소에 그들을 파견하는 중요한 물건. 균열관리업무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연락 수단이었다. 그걸 버리고 왔다는 것은 곧 전영중이 헌터의 의무를 저버렸다는 뜻이기도 했고.
"장난이라니? 사람이 살다 보면 잃어버릴 수도 있는 거지."
"지랄하고 앉아 있네. 네가 일부러 버리고 온 거 아니면 어떻게-"
짜증스레 쏘아붙이던 성준수가 말을 멈추었다. 눈이 가늘게 좁혀진다. 야, 너 설마....
"민간인 죽였냐?"
"뭐?"
"그래서 쫓겨났어? 뭔 징계 이런 거야?"
"아니 준수야. 넌 뭐 생각이...."
그렇게 과격해. 황당한 대답에 더 이상 대거리할 의욕도 나지 않았다. 표정 관리 하겠답시고 잔뜩 긴장해있던 안면근육에 힘이 풀렸다. 목에 수건을 걸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눈앞의 남자와 눈을 마주한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
"아니면 왜 호출기까지 버리고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이런 거에 너무 집착하는 남자 매력 없는데...."
진짜 지랄이었다. 성준수가 옆에 있던 베개를 날렸다. 퍽. 얻어맞은 영중이 실실 웃으며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대로 푹 옆으로 쓰러진다.
얼씨구. 이젠 또 애교질? 성준수가 눈썹을 까딱였다. 천장을 향해 몸을 튼 전영중이 그대로 베개를 머리 밑에 받쳤다. 누르스름하게 변한 천장에는 구석구석 곰팡이가 물들어 있었다. 모퉁이에는 거미줄까지 알뜰살뜰하게 입주해있다. 병 걸리기 딱 좋아 보이네. 씁쓸한 기분에 괜스레 입안에서 혀를 굴릴 때쯤 귓가에 다시 목소리가 박혔다.
"자고 가냐?"
"당연하지...."
"언제 갈 건데."
"......."
"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더 이상의 정보 갈취를 포기한 성준수가 벽장에 등을 기댔다. 매끈한 손가락으로 턱끝을 매만진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차마 꺼내지 못한 수많은 단어들이 어지러히 혀끝을 유영했다.
언젠간 만나리라 생각했었다. 단지 이렇게 맨몸으로 덜렁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것도 호출기까지 내버리고.
다른 건 몰라도 책임감 하나만큼은 끔찍한 녀석이다. 나라에 단 세 명뿐인 S급, 그 무거운 직책을 소홀히 할 놈이 아니었다. 성실 빼면 시체. 쓰러지는 한이 있더래도 제 몫만은 소화하던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덜컥 찾아올 줄이야. 지금 본부는 전영중 찾겠다고 난리 아닌 난리를 피우고 있을 게 분명했다.
가만히 전영중의 옆태를 더듬어 내려간다. 흐트러진 앞머리와 동그란 콧날, 말랑거리는 입술을 차근차근. 어쩐지 턱선은 더욱 날렵해졌다.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하고.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건지. 홀쭉해진 볼살을 보니 가슴이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묵직하게 아려왔다.
"근데 준수야...."
"왜."
"나야말로 묻고 싶다."
"뭘."
"내가 여기 왜 왔을 것 같아?"
덤덤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설마 내가 너 평생 못 찾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
영중의 입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꿈뻑. 영중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현실인지 확인하는 것처럼. 천장에 붙은 하얀 형광등 불빛이 아롱아롱 맴돌았다. 눈을 감아도 여전한 빛의 잔상이 매일 밤 아른거리던 이의 얼굴인 것만 같아서. 하얀 얼굴을 떠올리다 보면 울컥 치솟던 감정이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아니지. 그래, 아니어야지."
"......."
"네가 양심이 있으면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그렇게 사라져 놓고 찾지 말라고 하는 건 너무 잔인하잖아. 한 대 정도는 맞아줄 각오 하고 있어야 우리 준수답지."
신랄한 내용과 달리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실려있었다. 영중이 고개를 돌려 허름한 방 안에 들어앉은 야속한 이를 눈에 담았다. 옻칠이 다 벗겨진 옷장, 그 옆에 개켜진 얇은 이불. 낮은 좌식 책상 하나가 전부인 좁디좁은 방 안에 놓인 성준수. 그 모습이 너무나도 생경해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그럼 한 대 칠래?"
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준수야. 나 S급이야."
"알아."
"너 그 별 볼 일 없는 몸으로 한 대 맞으면 그냥 죽는다고."
"상관없어. 치고 싶으면 쳐."
이건 진짜 뭐지? 제가 자길 죽일 리 없다는 신뢰에서 비롯한 용기인지, 죽여보려면 죽여보라는 치기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기분이 좆같았다.
영중이 벌떡 일어나 품 안의 베개를 날렸다. 꽤 진심을 담아서 거세게 팔을 휘둘렀다. 맞아주겠다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퍽하는 소리와 함께 성준수가 몸을 웅크린다. 윽, 시발... 기어코 얄미운 입술에서 욕설이 비져나오자 만족스런 웃음이 샜다.
"나 잘 거니까 비켜."
전영중이 무릎으로 맨바닥을 쓸며 성준수에게 다가갔다. 성준수와 벽 사이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베개를 쑤셔놓는다.
"뭔 소리야. 여기서 둘이 어떻게 자."
"어떻게 자긴. 딱 싱글 침대 같고 좋네."
"그러니까 어떻게 자냐고."
"준수야... 그래서 같이 자는 거지. 아직도 몰라?"
모르긴 씨발. 제 허리를 옭아매는 팔뚝을 잡아당겼다. 존나 존심 상한다. 제가 어디 가서 힘으로 꿀리는 사람은 아닌데. S급 새끼의 몸뚱아리는 무쇠솥처럼 무겁기만 했다. 주르륵, 속수무책으로 몸이 끌려갔다. 졸지에 바닥에 눕게 된 성준수가 허탈하게 천장을 노려보는 사이 전영중이 더욱 강하게 허리를 조였다.
"아오, 시발. 숨 막혀 새끼야."
"참아, 준수야. 이것도 못 참아?"
아까 제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다. 대놓고 놀리는 행세에 성준수가 짜증스레 눈을 흘겼다. 몸을 뒤척이며 옆으로 돌아눕자 전영중이 아랑곳 않고 몸을 바짝 붙였다. 등짝으로 전영중의 둥글둥글한 눈코입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잘 거면 이불이라도 펴고 자던가."
"됐어. 잠깐 눈만 붙일 거야."
"그럼 좀 놓으라고. 나 슈퍼 봐야 돼."
아, 몰라몰라. 세체게 도리질 하는 전영중의 머리카락이 티셔츠에 마구 비벼졌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자포자기한 성준수가 몸의 힘을 늘어뜨렸다. 그 변화가 만족스러운지 영중의 팔에서도 힘이 풀린다.
간만에 찾아온 적막이었다. 새액 숨을 고르는 소리와 작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만 들리는 적막. 서로를 이루는 모든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이마 너머에 있는 성준수의 심장을 더듬어본다. 만질 수 없는 그것을 쓰다듬고, 냄새를 맡고, 씹어 삼켜 그 맛을 혀에 아로새기고.... 온몸이 나른하게 이완된다. 스르륵 눈이 감겼다. 이제서야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드디어 좀 살 것 같았다. 멈춰있던 심장이 다시 뛰는 것 같았다. 꽉 막혔던 허파에 새로운 숨이 들어온 것 같았다. 자리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일 년 반의 시간이 사르르 흩어졌다.
준수야, 나 너를 너무 오래 찾아다녔어. 매일 밤 너를 찾아 헤맸어. 네가 너무 밉고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
"야."
이마에서 진동이 울렸다. 영중이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잘 왔어."
"......."
"......."
"......."
"잘 찾아왔다고."
다시 푹 얼굴을 파묻었다. 넓은 등판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성준수 넌 진짜 최악이야. 왜 왔냐고 지랄하더니 이제는 잘 왔다고. 부러 힘을 줘 바투 달라붙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꿈을 꿨다. 하늘에서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따뜻한 온기를 가진 물방울이 투두둑. 그리고 또 툭.
가느다란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더니 폭우처럼 쏟아졌다. 세차게 영중을 강타했다. 눈을 떠 확인하고 싶은데 눈꺼풀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팔다리에 모래주머니가 달린 것 같았다. 정신이 몽롱했다. 그저 축 늘어진 채 뜨거운 물세례를 받아냈다. 물방울이 닿는 곳마다 칼로 피부를 도려내는 듯 화끈거렸다. 너무 뜨거워.... 전신에 화마가 들끓었다.
그렇게 비를 맞고, 또 맞고. 빗방울이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웅덩이들이 모여 작은 연못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이 다시 커다란 호수를 만들어낼 때까지. 영중은 따뜻한 물 속으로 침전했다. 온몸을 감싸는 기이한 물의 흐름을 느낀다. 물이 들어찬 고막이 웅웅 먹먹한 소리를 냈다. 그 사이로 고막을 둥둥 내리치는 듯 묵직한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전영중.... 시발 전영중. 눈 뜨라고.'
익숙한 목소리였다. 잔뜩 물기를 머금은 축축한 음성. 그 조화가 생경해서 난생처음 들어보는 것만 같은....
그리고 불현듯 영중은 깨달았다.
아, 이건 눈물인가.
어쩐지 피식 미소가 새어 나왔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대로 쭉 잠겨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잔뜩 긴장해 힘이 들어갔던 근육이 느슨하게 늘어진다. 따뜻한 물의 흐름, 그를 끌어당기는 중력에 온몸을 내맡긴다.
그대로 가라앉는다. 이것이 너의 눈물 속이라면 기꺼이 몸을 내맡길 수 있었다. 산소통 없이 뛰어들어 그 심해까지 낱낱이 파헤칠 테다. 폐부를 대신 채우는 바닷물을 기꺼이 받아들일 테다. 내 숨을 앗아가는 네 눈물을 생명수처럼 섬길 테다.
'하여간 말은 드럽게 안 들어 처먹지. 야, 눈 떠. 눈 뜨라고 시발놈아.'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나왔다. 죽을 때가 되면 원래 이런 건가. 주마등은 무슨, 그저 네 얼굴만이 생생해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네 하얀 얼굴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영중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희열감이 차올랐다. 준수야 우리는 드디어 길을 찾은 거야. 잘못된 길을 바로 잡는 거야. 그러니 나를 원망해. 네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나를 원망해. 네 눈물을 달디단 성수로 받아마시는 나를 죽도록 매도해.
그렇게 살아남아.
살아서 앞으로 달려나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영중이 끝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입속으로 울컥 물이 들이차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홀가분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아, 그래도 눈물은 닦아줄걸.
그렇게 영중은 가라앉았다. 그 아이의 눈물 속으로. 그 깊은 심해 속으로. 하염없이 침전한다.
하염없이, 또 하염없이.
*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번쩍 눈을 떴다. 곰팡이 슨 천장이 시야를 메운다. 땀을 한가득 흘렸는지 찝찝한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몸체를 덮은 허름한 이불을 손아귀에 쥐어보다 불현듯 떠올렸다. 성준수는 어딨지?
타는 듯한 갈증이 목을 죄어왔다. 벌떡 상체를 일으켜 이불을 걷어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인물을 찾으려 부리나케 방을 나서려는 순간.
"뭐야."
벌컥 나무문이 열리고 성준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깼냐?"
잔뜩 굳어있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 준수야. 난 또 너 없어진 줄 알고. 밀려오는 두통에 잠시 눈가를 찌푸리고 있자니 태평한 목소리가 끼어든다.
"비켜 봐. 이거 좀 들고 가게."
성준수의 손에는 둥근 철제 밥상이 들려있었다. 그 위에는 라면이 가득 담긴 양은냄비가 있다. 족히 4인분은 되어 보이는데. 그제서야 훅 라면 냄새가 몰려왔다.
"아침부터 라면? 이제 식단은 아예 안 하나 봐?"
"굳이 뭐."
굳이? 영중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빈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준수 너 이제 완전 물몸이잖아. 예전 생각하면 안 되지. 오히려 운동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야. 계속 시끄럽게 할 거면 비키기라도 해라."
라면 다 불어도 되면 계속 떠들고. 재잘거리는 영중에게 사나운 눈빛을 쏘아주며 방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대충 발로 이불을 밀어내고 밥상을 내려놓았다.
"빨리 와서 앉지?"
"입맛이 없어."
"뭔 개소리야. 니가 어떻게 입맛이 없어."
"......."
전영중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모욕적이다.
"준수 얼굴 봐서 속이 안 좋아."
"어제는 나 봐서 좋다며."
"허. 준수 진짜 뻔뻔하다. 내가 언제? 잘 왔다면서 분위기 요상하게 만든 건 너잖아."
"그건 다 니가 죽상이길래-"
"아, 그래서 마지못해 한 말이다 이건가?"
라면을 휘휘 젓던 성준수가 탁 소리를 내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분명 어젯밤에는 분위기가 괜찮지 않았나? 머리통 쓰다듬어주는 대로 골골거리며 잠도 잘 잤고. 어제 저녁부터 굶은 게 신경 쓰여서 라면까지 끓여왔더니만 언제 버튼이 눌린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니 하는 짓 보면 뻔하지. 내가 널 모르냐."
"어 존나 모르는 것 같은데?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데?"
"아 시발 영중아....... 그래 내가 착각했나 보다. 난 니가 존나 보고싶어서 너도 그럴 줄 알았지. 넌 별생각 없는 거 이제 알았으니까 제발 그만 와서 밥이나 먹어라. 어?"
성준수가 빤히 전영중과 눈을 맞췄다. 간절해 보일 정도로 뻐근한 눈빛이었다. 이게 놀리는 건지 진심인지.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열불이 피어오르다가도 제가 보고싶었다 말하는 성준수가 싫지 않아서. 전영중은 마지못해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머뭇거리며 젓가락까지 들어 올리자 성준수가 앞접시 가득 라면을 퍼줬다. 이미 퉁퉁 불어터진 게 얼마나 맛없어 보이는지. 영중이 후루룩 입안 가득 면발을 채워넣고 우물거렸다. 근데 준수....
"라면 맛은 그대로네...."
"그거 무슨 뜻인데."
전영중이 뜻모를 미소를 지었다. 존나 맛없어... 라면을 어떻게 이렇게 끓이지.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 젓가락질을 했다.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금세 그릇이 깨끗해졌다. 지지리도 맛없는 라면을 또 한 국자 퍼담는다. 마찬가지로 무아지경으로 라면을 동내고 있는 성준수를 은근슬쩍 곁눈질했다.
맛을 느끼고는 있는지 한없이 담담한 무표정. 예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밤새 균열 뺑뺑이 돌다 집에 돌아와 라면을 끓여먹던 나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성준수는 저런 표정으로 담담히 제 몫의 음식을 해치우곤 했다. 그것이 자기가 끓인 맛없는 한강라면이어도, 전영중이 끓인 채끝짜빠구리여도. 영중이 이것도 못 끓이냐며 면박을 주면 잔뜩 짜증을 내다가도, 실없는 장난에는 피식 입꼬리를 움직이곤 했다.
"...아침은 맨날 라면으로 때우는 거야?"
전영중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애틋함이 담뿍 담긴 목소리였다. 그릇에 코를 박고 있던 성준수가 눈동자를 들어 올린다.
"아니."
"그럼?"
"슈퍼 옆집 아주머니 있지. 어제 너 보고 몸 좋다고 하신 분."
어 그랬지.... 근데 갑자기 그 분은 왜? 전영중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종종 그 분 댁 가서 먹어. 인심이 워낙 좋으셔서."
내가 잘못들은 건가. 영중이 말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떨떠름히 준수의 얼굴을 살폈다.
"그분은 왜... 너한테 밥을 주는데?"
"아까 말했잖아. 인심 좋으신 분이라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낯선 사람을...."
"완전 공짜는 아니야. 그 집 농사 좀 거들어주고 그러지."
그래도.... 영중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시골 인심이 원래 이런 건가? 뻔뻔하게 남의 집에서 밥 얻어먹고 다니는 성준수가 낯설게 느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자꾸 나한테 따님 분 사진을 보여주더라."
"......."
"아주 착하고 머리도 좋고. 직업이 변호사래. 사진도 봤는데 귀여우시더라고."
얘가 미쳤나? 전영중은 양은 냄비를 들어올려 성준수를 후려쳐야 할지 고민했다. 뭐? 착하고 변호사에 귀여워? 제정신인가. 이런 새끼가 뭐가 안쓰럽다고 라면 처먹고 있는 모습에 가슴 아파하던 저 자신이 치욕스러웠다. 죽어. 성준수. 죽어. 죽어. 영중이 손에 힘을 주자 젓가락이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야 미친. 지금 그거 휜 거냐?"
"왜 너도 접어줄까?"
"아니 접긴 무슨. 그거나 다시 펴."
"왜 너 지금 뇌가 어디 한구석이 고장 난 것 같은데 내가 다시 맞춰줄게."
희번득 눈을 빛내며 전영중이 성큼 거리를 좁혔다. 팔을 뻗어 성준수의 머리를 붙잡는다.
"아, 씨발. 이거 놔라."
"놓긴 뭘 놔 준수야. 너나 이 손 떼지? 나 손목 부러지겠어."
"진짜 왜 지랄이야!"
"몰라? 그걸 몰라서 물어?"
전영중이 머리카락을 붙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가죽을 벗겨내는 고통에 성준수가 질끈 눈을 감고 소리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퍽퍽 다급히 전영중의 손목을 내려쳤다.
"아 시발 구라라고! 구라!"
"뭐?"
"거짓말이라고. 존나 선 보러 간 적도 없고 그 집에 아들밖에 없어!"
영중의 손아귀에 스르륵 힘이 풀렸다. 드디어 제 머리통을 사수하게 된 성준수가 머리를 감싼 채 뒤로 몸을 물렸다. 미친 무슨 농담을 못 하겠네.
"씨발 준수야... 넌 그게 농담이야?"
"......나도 니가 이렇게 회까닥 돌 줄은 몰랐지."
성준수가 덤덤히 해명했다. 하아.... 영중이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어 끔뻑끔뻑 천장과 눈을 맞춘다.
"야....... 미안."
"......."
"미안하다니까."
미안한 건 진심인지 준수의 목소리가 자못 진지했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조곤조곤. 오랜만에 제 눈치를 보는 성준수를 보면 달가워야 할 텐데 기운이 쏙 빠져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성준수."
"어?"
"저리 꺼져...."
어, 그래.... 잠시 벙긋거리던 성준수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사라졌다. 야무지게 밥상도 들고. 뭐라 할 것 없이 깔끔한 퇴장이었다. 가만히 그 꼴을 지켜보던 영중이 짜증스레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충 구겨진 이불 위에 푹 엎어진다.
가란다고 진짜 가냐....
*
전영중 이 미친새끼. 성준수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욕설을 애써 내리눌렀다. 대신 환멸어린 눈으로 제 옆에서 알짱거리는 등짝을 바라봤다.
전영중이 지랄병 도져서 온갖 지랄을 부리는 거. 그것은 유난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나 전영중은 상상 그 이상의 이유로 성준수를 성가시게 했고, 슬프지만 그 기행에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가 특히 심한 날에는 성준수 또한 분노를 참아내기 어려웠는데 바로 오늘이 그랬다.
선자리 농담 사건 이후, 전영중은 한동안 골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점심 때가 다 되도록 두문불출하는 꼴에 슈퍼 카운터를 지키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나무문을 태울 듯 노려보아도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하... 진짜 왜 그딴 농담을 해서는. 근데 이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지킬 앤 하이드처럼 생각을 뒤집으면서도 성준수는 한 가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전영중이 그런 농담했으면 죽도록 패고 싶겠다....
그래서 잠자코 영중을 기다렸다. 분명 그랬는데. 전영중 쫄쫄 굶는 꼴은 못 보는 사람이라. 성준수는 큰맘 먹고 나무문을 열어재꼈다.
'야, 밥은 먹어야....'
와그작.
과자봉지를 손에 든 전영중의 똘망똘망한 눈과 눈이 마주친다.
...와작.
걱정한 나만 등신이지.
'그런거 처먹지 말고 밥을 먹어야 할 거 아니야.'
구십키로에 ㅅㅂ 백키로 같은데 육박하는 남자를 질질 끌어 동네 유일의 백반집에 데려갔다. 공깃밥 7공기를 깨끗하게 비우는 걸 지켜보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닌 나이가 몇인데 볼에 가득 욱여먹냐. ...지금 시비 거는 거야?
밥을 먹어서인지 조금 유들해진 애를 데리고 슈퍼로 돌아와 아이스크림도 입에 물렸다. 평소였으면 이쯤에 화가 풀릴 만도 한데. 진열대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와중 대뜸 질문을 한다.
'준수는 지금이 좋아?'
'지금?'
'하는 일이라곤 파리지옥처럼 파리만 잡는 주제에 마을 사람들 심부름은 죄다 맡아서 하고 집이라고는 저 좁아터진 골방인 삶 말이야.'
'......'
그때 성준수는 강렬한 예감을 느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고.
점심시간도 지나고 한창 마을 어르신들이 새참 먹으러 갈 시간이었다. 커피 심부름을 위해 보온병 가득 믹스커피를 타는 성준수를 보고는.
'커피도 잘 타네. 완전 일등 신랑감이야. 장가 가도 되겠어.'
하.... 영중의 빈정거림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을 때에는.
'아 미안 많이 시끄러웠어? 준수 결혼식 뷔페 먹을 생각에 신나서 너무 떠들어버렸네.'
갖가지 지랄을 떨어댔다. 반나절 동안 전영중의 온갖 비아냥을 듣고 있으니 정신이 뇌를 출가할 것 같았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참을 인 한 자에 전영중 얼굴. 참을 인 두 자에 전영중 몸. 마지막 한 자에 그간의 정을 되새기며 간신히 충동을 다스렸다. ......무슨 충동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그런 그를 하늘이 도우신 걸까. 전영중과 성준수는 갑작스러운 아주머니의 부름으로 옆집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전영중은 무언가 신경 쓰이는지 아주머니 집에 도착해 일거리를 부여받는 순간까지 눈에 불을 켜도 성준수의 동태를 살폈다. 아무래도 아주머니가 몰래 주선을 시도할까 감시하는 듯했는데 성준수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 집 아들밖에 없다고....
아주머니가 도움을 요청한 일은 쑥 손질이었다. 봄철이라 사람들이 커다란 소쿠리를 들고 마을 곳곳에서 쑥을 채집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아주머니도 그 단골 손님 중 한 명이었다. 오늘도 크게 한탕 하셨는지 마당에 깔린 포대 위에 쑥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여 누런 잎들 있제? 여는 다 내삐리고 줄기 억센 것들만 다듬으면 된다.
한번 시범을 보여준 아주머니가 누가 붙잡을 새라 휑하니 사라졌다. 오늘 노인정에서 어버이날 파티를 한다 했나. 성준수는 익숙한 듯 마당 한켠에서 목욕탕 의자 두 개를 끌고왔다. 그리고는 조용히 손질을 시작한다. 멀거니 성준수를 쳐다보던 전영중이 주춤주춤 의자에 앉았다. 작은 쑥을 하나 집어들고 어설픈 손짓으로 줄기를 잘라낸다. 이거 진짜 버려도 되는 부분인가. 손짓 하나하나 망설이고 있는 그와 달리 성준수는 퍽 숙련된 솜씨로 쑥을 다듬고 있었다.
"이런 거 많이 해봤어?"
"뭐... 조금."
짧게 대답한 성준수가 묵묵히 손질을 이어갔다. 제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시골살이도 괜찮네. 성준수 네가 쑥 다듬는 모습도 보고."
"......."
"너 요리 개못하잖아. 여기서 살면 요리실력이 절로 늘겠어. 아니구나. 아까 라면도...."
"나 손에 칼 들었다."
성준수가 제 오른손에 들린 과도를 흔들었다. 칼날이 서슬퍼래 빛났다. 전영중이 어깨를 으쓱하며 제 손의 칼을 휙 던져올려 받았다.
"칼은 너만 있어? 따지고 보면 내가 칼은 더 잘썼지. 준수는 뭐랄까.... 도구를 사용하기보다 몸으로 들이박는 편이었잖아."
네네 맘대로 떠드세요. 영중을 조용히 시키는 것을 포기한 준수가 가볍게 도리질을 쳤다. 지금 전영중이 부리는 것은 개소리가 아니라 깜찍한 재롱이다....
"근데 준수야. 내가 생각해봤는데-"
"그만 생각해."
"아니 좀 들어봐. 여기 열정페이가 너무 심한 것 같아. 너 하는 거 보니까 하루이틀 해본 게 아닌 것 같아서.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옛정이 있지 이리저리 일손 거드느라 뛰어다니는 모습 보니까 나도 마음이-"
"야."
듣다 못 한 준수가 영중의 말을 끊었다. 영중이 비뚜름히 입꼬리를 올린다. 하여간 성준수. 자존심은 세서는. 굴하지 않고 더욱 박박 자존심을 긁어주려 다시 입을 연 순간.
"난 여기가 좋다."
성준수가 고백했다.
"나 빡치게 하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면서 까내리는 거 알겠는데. 난 여기가 좋다고. 사람도 별로 없고 시끄럽지도 않아서 좋아. 여기서 생기는 사건이라 해봤자 소가 탈출한다던가 슈퍼에 손님이 너무 안 온다던가 옆집 누구누구가 바람 펴서 이혼한다더라 이런거뿐이야."
"......."
"죽니 사니 하면서 살던 그때랑 다르게 평온해. 그래서 나도 마음이 편해져. 몰랐는데 이런 삶도 꽤 잘 맞는 것 같다."
"......."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떡잎이나 제대로 골라내. 이게 뭐냐? 어느 세월에 다 하려고."
허심탄회하게 제 마음을 늘어놓던 준수가 몸소 시범을 보여주었다. 이런 애들을 자르란 말이야. 어? 전영중은 그 손놀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곳이 좋다고 고백하던 성준수의 얼굴이 망막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거짓 한 톨 묻어있지 않는 담담한 얼굴. 종종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영중에게 제 마음을 꺼내보이던 것과 지독히도 닮아있었다. 두고 온 삶에 대한 미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위에서 돌연 토기가 차올랐다. 뱃속이 울렁울렁. 두개골까지 핑핑 어지럼증이 일었다.
지독한 침묵이 둘 사이를 가른다. 무아지경으로 쑥을 다듬던 성준수가 석연찮은 위화감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왜 또 말이 없어."
"......."
"어려워서 그래?"
하하하.... 영중에게서 매마른 웃음이 터져나왔다. 둥글게 휘어진 눈과 시선이 마주친다.
"어렵긴.... 이런 건 금방 터득하지."
"그럼 왜 그러는데...."
글쎄.... 영중이 씨익 뜻모를 미소를 지었다. 소용돌이치는 원망을 애써 삼켜냈다. 자칫하면 속을 게워낼 것 같았다. 찌르르 가슴을 관통하는 통증에 설핏 이마를 찡그렸다. 우리 준수 진짜 눈치 하나는 좆박았네....
"잘 사는 것 같아 다행이야. 좋아 보여. 나는 네 뒤치다꺼리 하느라 매일 개고생하는데 네가 행복하다니 뭐... 보람있다."
"......."
"솔직히 나도 너 허구한 날 피흘리고 링거 붙들고 사는 거. 좀 안쓰러웠거든.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처럼 풀이나 만지고 있는 게 훨씬 어울려."
"야......."
"그냥 이참에 평생 여기서 살아. 공기도 좋고 물도 좋고 너도 행복하다니까 됐지. 세상이 균열로 뒤덮여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멸망해서 이 지구가 사라져도 그냥 여기 촌구석에 처박혀서 살라고."
아, 시발.... 기어코 지뢰를 밟은 모양이었다. 심각한 낯으로 영중의 말을 되새김질 하던 준수가 언뜻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이내 미묘한 표정으로 영중을 응시한다. 질려버린 영중이 무표정으로 그 시선을 맞받아치고 있을 때.
"근데 내가 좀 뭔가 이상해서 그런데."
"어."
"우리 멸망하냐?"
영중이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메슥거리던 속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잠시 고장난 안면 근육을 재빨리 가다듬고 목소리를 낸다.
"아니?"
"맞네."
"아니라고."
"어, 맞네."
영중이 거칠게 머리를 헝클였다. 어떻게 해도 믿어주지 않을 눈치였다. 눈치는 밥 말아먹은 주제에 감은 또 좋아서.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잔뜩 짜증어린 시선을 쏘았다.
"맞다고 하면 어떡할 건데."
"어떡하긴 뭐... 죽어야지."
"뭐?"
"멸망한다며. 그럼 죽는 거잖아."
전영중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일 듯이 성준수를 노려본다.
"넌 죽겠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냐?"
"아니 그렇잖아. 예전의 나도 아니고. 지금 나는 힘도 뭣도 없는데."
"나 너 구하러 안 올 거야. 너 죽건 말건 신경도 안 쓸 거라고."
"당연히 넌 싸워야지. 날 구하러 올 게 아니라."
울컥 울화통이 치밀었다. 영중이 얼굴을 구겼다. 네 그 같잖은 영웅병을 왜 나한테까지 들먹여. 눈가가 시큰해졌다. 이성이 파스스 쪼개 흩어진다.
쏟아지는 유성. 거대한 입을 벌린 균열. 그 안에서 쏟아지는 괴물들. 그 앞에 무력하게 선 성준수. 갈기갈기 사지가 찢어지는 성준수. 끔찍한 참사가 비디오처럼 촤르르륵 머릿속에 재생된다.
"너는 진짜...."
영중이 침음을 흘렸다. 결심한 듯 탈탈탈 거칠게 손을 털어낸다. 재수 없는 새끼 죽을 때까지 쑥이나 다듬고 살아라. 뜬금없는 악담을 쏟아내고는 뻥하고 자리를 박찼다. 그대로 성큼성큼 대문을 넘어섰다. 남겨진 준수가 멍하니 영중이 사라진 자리를 응시했다. 정말 종잡을 수 없었는 흐름이었다. 왜 또 그러는 건데.... 무거운 숨이 터져나왔다. 한 바구니도 채우지 못한 쑥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본다.
"이건 언제 다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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