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 콤플렉스 2/2

빵준 이능력AU

"심리적 요인 같네요."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가 두 손을 모았다. 영중은 왠지 취조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종종 이런 경우가 있어요. 헌터들의 이능력은 기(氣)에서 비롯되니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면 능력 운용이 어렵게 되기도 하죠."

영중이 가만히 여자의 말을 들었다. 귀담아듣는 척 지긋이 의사와 눈을 맞춘다.

"더욱이 영중 씨는 특이 케이스니까 심리적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할 수도 있구요."

"그럼 별다른 방안은 없는 건가요?"

"지금에서야 그렇죠.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나오니까요. 능력 운용 훈련에 집중하는 방법 외에는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여자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려 다시 한번 진료차트를 확인했다. 영중이 토독 제 손등을 두드렸다. 모든 것이 정상이라니. 검진 결과가 믿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해 제 안의 기운을 읽어본다. 숨을 크게 내뱉으며 심장 뒤편의 작은 그릇에 정신을 기울였다.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나 분에 넘치게 샘솟던 기운이 텅 비어버린 기분.

"아무것도 안 느껴져요."

"그러니까 심리적 요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예요. 영중 씨, 상담은 제대로 받고 있나요?"

영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담이야 뭐 꾸준히 받고 있었다. 실효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 속에만 담아두면 병나는 거 알고 있죠? 가만 보면 영중 씨는 너무 몸을 혹사시켜서 제가 걱정이 많습니다."

키보드를 두드려 몇 자 적어 내리던 여자가 영중에게 연민 어린 시선을 보냈다. 살짝 입꼬리를 올려 받아줄 생각도 들지 않은 영중이 가만히 여자의 시선을 받아냈다.

"저도 영중 씨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니까요. 어려운 일은 털어놔도 좋아요."

"......."

"상담할 때도 이렇게 입 꾹 다물고 계신 건 아니죠?"

여자의 농담에 영중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하... 저 그래도 성실한 편인데.

"성실한 게 능사가 아니니까요."

"매번 그 소리시네요...."

"영중 씨를 보면 누구라도 그럴 거예요."

"......."

"그럼 마지막으로 궁금한 점?"

음... 여자의 말에 영중이 입술을 축였다. 뜸을 들이다 눈을 마주친다.

"선생님은 왜 이 일을 하고 계세요?"

예상 외의 질문에 여자가 눈을 키웠다.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생각에 빠진다.

"어릴 적부터 그냥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진부하지만 아픈 사람들 도와줄 수 있다는 게 좀 멋지기도 하고."

답을 내린 여자가 씨익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삶에 만족감이 충만한 이의 얼굴이었다.

"영중 씨는요?"

"......글쎄요."

살풋 눈매를 접어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여자가 공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부분 발길이 닿는 대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런가요."

"그렇죠."

잠시 침묵하던 영중이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게요? 네. 감사합니다. 꾸벅 예의 바르게 인사를 마치고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후우, 묵혔던 숨을 크게 내쉬어본다. 삐비빅- 삐비빅- 기다렸다는 듯이 호출이 울린다. 왼쪽 손목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영중이 알림을 껐다. 본부장님께 향할 시간이었다.

히어로 콤플렉스

'너넨 이 일 왜 하냐?'

언젠가 영중이 물었다. 팀원들과 함께 헬기를 타고 균열 발생지로 날아가던 중이었다. 간만에 터진 A급 균열이었지만, 거주지 외곽 지역에 위치해 난이도가 높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다들 긴장한 기색도 없이 (아니면 긴장을 달래는 건지) 핸드폰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그 시절 원중 팀 인기 게임은 모두의 마블이었다. 랜드마크 건설! 심심찮게 울리는 성우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영중은 동떨어진 외딴섬처럼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다 물은 것이다. 너네 이 일 왜 하냐고.

질문을 들은 재석은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당연히 각성했으니까죠? 다른 팀원들은 영중의 말을 고이 씹은 채 핸드폰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아!! 서울 밟았어!! 이거 다 영중 형 때문이에요. 갑자기 이상한 말은 왜 해가지고. 재석의 뻔뻔한 행태에는 기가 찼다. 재석아, 네 뻘소리 때문에 작전 날려 먹는 게 더 큰 문제야.... 별다른 소득도 없이 쿠사리만 먹은 전영중이 작게 도리질을 쳤다. 얘네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근데 전 멋있어서 해요. 총도 쏠 수 있고 완전 개이득.'

재석이 어깨를 들썩였다. 씨익 웃는 얼굴이 퍽 즐거워 보였다. 영중이 재석의 대답을 곱씹었다. 멋있어서라....

영중 또한 헌터를 동경한 적 있었다. 그 나이대 남자아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외골수 기질 발휘되어 헌터 이름 줄줄 외는 아이는 아니었어도 영중은 여느 어린아이처럼 헌터를 동경했다.

다만 그는 현실감각이 뛰어났다. 물 떠 놓고 기도한다고 이뤄질 바람이 아닌 것을 진작에 깨달았다. 소꿉친구라는 놈은 허구한 날 헌터가 되겠다며 떠들어댔지만.... 전영중은 진심으로 성준수가 걱정스러웠다. 이러다 나중에 각성 못 하면 어쩌려고? 어린애의 시선으로도 성준수는 꿈에 미친놈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영중은 어쩐지 헌터가 아닌 준수를 상상할 수 없었다. 성준수라면 어떻게든 각성을 할 것 같았다. 준수네 부모님이 <우리 아이 헌터 만드는 법> 같은 강의를 듣고 다니진 않았으며, 성준수 또한 비과학적인 각성 사교육 따위를 수강하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그러했다. 그만큼 전영중에게 헌터 성준수란 당연한 진리처럼 다가왔다는 뜻이다. 이게 세뇌인지 뭔지. 종종 헛웃음이 나왔지만 영중은 내심 인정했다. 성준수만큼 영웅 놀이가 잘 어울리는 놈은 없다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나란히 학원에 가던 길이었다. 훌쩍 커버린 키로 남들보다 높은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고등학교 시절. 평소와 같이 시답지 않은 일로 투닥거리며 길을 걷던 성준수가 돌연 가슴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야, 성준수 왜 그래? 당황하며 황급히 낯을 살피려던 순간 뇌를 쪼개는 이명이 들려왔다. 가슴을 쿵 때리는 통증과 함께 암전.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기억 나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영중은 이미 병원에 옮겨진 상태였고, 멍하니 입원실 티비 속 막장 드라마를 응시하는 그에게는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환자분 D급 헌터로 각성하셨어요.'

'네?'

'당분간 좀 어지러우실 수 있어요. 그건 각성 후에 보이는 흔한 증상이라 많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너무 심하면 약 처방해드릴 테니 그거 드시면 되구요. 퇴원 후에는 균관부 가서 정밀 검사 받으셔야 해요.'

'저기 죄송한데요. 착오가 있는 것 같아요. 분명 그때 각성한 건 성준수....'

'아, 친구분은 S급 각성하셨어요. 환자분도 D급 각성한 것 맞아요.'

네...? 혼란스러워 보이는 영중의 모습에도 간호사는 굳건했다. 절대 아닐 리 없다는 강건한 눈빛이었다. 어지럽게 움직이는 동공을 숨기지 못하는 영중에게 친절한 미소를 띠며 꿋꿋이 설명을 이어갔다. 균관부 관련 내용은 문자 갈 테니까 참고하세요. 이내 후련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붙잡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영중이 제 가슴께를 더듬었다.

각성을 했다니. 이 몸 안에 능력이 잠재워져 있다니. 온 신경을 기울여 몸속을 탐색해 보아도 아무런 특이점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제 몸이, 인생이 뒤바뀌었다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영중은 훗날 균관부에 출석해 정식 검사를 받은 후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애초에 D급이란 그런 것이었다. 스스로 제 능력을 느끼기 어려울 만큼 미약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괴물 하나를 무찌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힘. 다른 헌터들을 보조하는 것이 최선인 지위였다. 일반인으로서 평화로운 삶을 선택하는 이들도 절반에 이를 정도였다.

반면 성준수는 달랐다. 영중이 기운을 인지하는 것조차 버거워 훈련을 거듭할 동안 준수는 넘쳐흐르는 힘을 다독이느라 고역을 치러야 했다. 각성 당시에도 주변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지. 제가 나고 자란 동네의 일부가 폭삭 주저앉은 꼴을 본 영중은 머리끝까지 내달리는 소름을 감내해야 했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신에 대한 당혹감과 함께.

영중은 종종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도시를 주저앉히는 S급의 폭주 안에서 어떻게 안전할 수 있었나. 두뇌가 비상하다며 날고 기는 연구진들도 마땅한 이유를 대지 못했다. 아마 영중과 준수의 고유능력이 일으킨 우연이라며 추측할 뿐. 다들 운이 좋았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영중은 쉬이 납득할 수 없었다. 이 보잘것없는 힘이 뭐라고. 스스로에 대한 자조보다는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영중의 능력은 '재생'이었다. 살아있는 동식물 혹은 물체 일부를 본래 상태로 되돌릴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복구 능력. 허구한 날 도시 부수고 다니는 헌터들에게는 이래저래 쏠쏠한 능력이었다. 거기다 치유까지 되니 얼마나 좋아?

국내 유일무이 치유계 헌터였다. 전 세계를 다 뒤져도 몇 없는 능력이다. 어디에 써먹을지 머리 굴리는 것만으로도 바쁜 것이 정상이었다. 하필 그런 희귀 이능력자가 종이 베인 상처 하나 치료하면 진이 빠지는 D등급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하지만 기억하자. 처음으로 하늘이 갈라지던 날에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다행히 영중의 도처에는 그를 도와줄 파트너가 있었다. 무려 S급의 먼치킨 파트너. 성준수의 능력은 에너지 조절이었다. 원하는 방식으로 에너지를 조정하는 것은 물론, 일정 한도 내로 에너지를 증폭하거나 감소할 수 있었다. 그 범위 내에는 타인의 이능력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대한민국에 불행하게도 그 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그의 개차반인 성질머리처럼.

상성이 맞아야 능력을 컨트롤해줄 텐데, 좀처럼 맞는 파트너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좋네. 남 뒤치다꺼리하는 게 질색인 솔플러버 성준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날아다녔다. 그러다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전영중과 성준수의 능력 상성이 무려 431%에나 달한다는 것을.

어떻게 100%가 넘죠...? 영중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을 때 연구원들은 그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저희도 모르겠고, 일단 두 분 합이 잘 맞으니 같이 다니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다소 무책임해 보이는 발언에도 영중과 준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힐러를 제대로 굴릴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일반 D급 헌터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루하루가 펼쳐졌다. 성준수와 함께 B급 이상 균열을 파훼했다. 성준수가 열심히 괴수를 터뜨리고 짓뭉갤 동안 후방에서 잔챙이를 처리했다. 중간중간 무너진 건물도 복구해주고, 다친 사람도 손봐주다 보면 쿨타임이 돌았다. 그럼 다시 능력 충전받고 업무를 반복한다. 소꿉친구 경력 덕분인지 말하지 않아도 합이 척척 맞았다. 때가 되면 찰떡같이 서로의 곁에 서 있었다. 너무 좋다 못해 배꼽까지 맞추게 된 것이 불행 아닌 불행이었지만....

괴상한 별명도 갖게 되었다. 성준수의 키링남. 키링은 뭔 시발 놈의 키링. 이렇게 커다란 키링 봤냐? 이 별명에 성준수는 항상 눈살을 찌푸리곤 했다. 반면 영중은 그 별명이 꽤 마음에 들었다. 빼도 박도 없는 성준수의 것이 된 기분이라.

혹자는 그에게 묻곤 했다. 성준수가 재수 없지 않냐고. 적선 받는 것도 아니고 S급한테 빌붙어 사는 - 대놓고 이렇게 말하진 않았으나 속내야 뻔했다 - 기분은 어떠냐고. 그때마다 영중은 착잡한 얼굴을 지어냈다. 자존심 당연히 상하지. 통장에 꽂히는 돈을 봐도 내 돈이 아닌 것 같다.... 쓰기 무서울 정도야. 진지한 목소리로 응수하면 다들 뭐 씹은 표정이 되어 돌아서곤 했다. 그 추한 뒷모습에 속으로 코웃음까지 쳐주고 나면, 이상하게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예 자존심 상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괴물을 쓰러뜨리는 성준수를 보면 어떤 헌터든 질투를 느낄 터였다.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성준수는 상상했던 것보다 멋있었기에.... 내가 성준수라면 저렇게 목숨 바쳐 뛰어들 수 있을까. 이런 미련한 생각이나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운이 좋은 인생이었다. 어쩌다 성준수 옆에서 살아남고, 어쩌다 희소 능력을 타고나고, 어쩌다 성준수와 페어를 맺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영웅 소리를 듣고 있었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이채를 띠던 성준수의 눈동자. 그 반짝거리는 것에 비친 내 눈동자는...... 어떻더라?

그래서 더욱 현재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실제로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그의 힘이 기꺼웠다. 존재의 필요를 인정받는 감각은 꽤나 중독적이라서. 무지막지한 운의 힘을 빌렸으니 남은 것은 노력뿐이었다. 하루하루가 증명을 위한 시험대였다. 뭐 열심히 단련하지 않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으니까. 공격계 헌터에게 짐이 되는 것은 더더욱 질색이었다. 각종 무술은 물론 이능력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뒤처진 등급의 격차를 메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죽기 살기로 해내야 했다. 우리 준수 퇴물 소리 듣지 않으려면 내가 열심히 해야지. 가뜩이나 준수는 체력도 구리잖아. 나라도 내 몸 지켜야지 별 수 있나. 아 씹, 누가 뭐래냐?

분명 그렇게 노력해 유지한 자리었다. 이제는 성준수의 도움 없이 홀로 설 능력까지 갖춰졌다. 혼자서도 제 몫의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왜이리 가슴이 허하기만 한지.

영중이 눈앞에 놓인 한 폭의 그림을 응시했다. 건강을 빌어준다는 소나무 그림. 영중이 두 팔을 다 벌려도 담지 못할 만큼 거대한 그림이 벽면 한쪽을 꽉 채우고 있었다.

"영중아, 우린 아직 네가 필요하다. 네가 있어야 애들도 안심하지 않겠냐."

"......."

"전영중. 듣고 있어?"

네네.... 영중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성의 없는 움직임에 눈앞의 남자가 보란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곧이다. 대규모 유성비가 관측됐어. 지난번보다 큰 규모로 예측된다. 알지 않나? 지난 대균열이 어땠는지. 자국 헌터 1/3이 순직했다. 이번엔 더욱 쉽지 않을 거야. 무사히 클리어하기 위해선 헌터 한 명 한 명의 전력이 중요해. 그중에서도 너 같은 S급은 말할 것도 없지."

"본부장님."

"......."

"아시잖아요. 저 일 못합니다."

담담한 어조였다. 기어코 마주한 시선에는 살짝 어깨를 으쓱이기까지 한다. 어이구 소리가 절로 나는 광경에 본부장이 질끈 눈을 감았다. 멍청한 얼굴로 훈련에 들어가 우왕좌왕하던 꼴이 아직 선한데 어느새 커서 항명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뒷골이 당겼다. 저놈 속이야 말이 아니겠다만 끝까지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모습은 가당찮은 짓이라. 본부장이 소파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낮게 목소리를 내리깔며 만반의 준비를 마친다.

"전영중 헌터. 이건 자네가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

"당장 투입 가능한 헌터 규모가 얼마나 될 것 같나? 그중에서도 실전 경험 풍부한 인재들은? 직접 뛰지는 못하더라도 자네만큼 현장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어. 이런 상황에서 자네가 빠져버린다면 남은 요원들의 사기는 바닥을 구르겠지. 누구보다 그걸 잘 알고 있지 않나?"

영중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습관적으로 끌어올리던 입꼬리도 내버려둔 채였다. 얼핏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 그 뒤에서 영중은 혼란스러운 속마음을 되새겼다. 아뇨, 본부장님.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정말로요....

"그래도 저는 못 합니다."

"전 헌터."

이만 가보겠습니다. 전영중이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부장실을 나선다. 전영중! 그를 붙잡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듯이.

거침없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정처 없이 내키는 대로 걸음을 일삼았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사념들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다.

그는 이제 정말 알 수 없었다. 왜 세상과 맞서 싸워야 하는지. 이 지겨운 영웅 놀이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살아남기 위해서? 걔가 떠넘긴 이 지긋지긋한 삶을 연명하기 위해서?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허울뿐인 삶이었다. 시체가 된 것 같았다. 그날 잠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줄곧 느끼는 감정이었다. 단 한 순간도 전영중으로서 숨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성준수의 생명을 빨아먹는 듯한 기분. 그런 더러운 기분을 느끼면서도, 걔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오직 그것뿐이라서. 전영중은 성준수의 흔적을 배불리 집어삼켰다. 꼭두각시가 된 것처럼 전장을 헤집었다. 링거를 주렁주렁 매다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계속 싸우고, 괴수를 죽이고, 사람을 살리고, 타인의  삶을 복구하고....

숭고한 직업정신마저 넝마가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긍지 또한 처박힌 지 오래였다. 그런데 지금. 그 녀석의 마지막 흔적까지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지금. 영중은 삶을 짓누르는 허무를 느낀다. 이제 너를 느낄 수가 없는데. 완전히 사라져버렸는데....

"전영중."

그때였다. 정신없이 헤매던 상념 속에서 누군가 영중을 끄집어냈다.

"들었다. 본부장실 갔다 왔다믄서."

"재유...."

가라앉은 영중의 시선이 재유와 맞부딪힌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원중팀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나 보다. 영중이 그 속에 선 이질적인 존재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하얀 연구원 가운을 입은 진재유. 피와 체액을 세탁하기 용이하도록 온통 검은색으로 만들어진 제 정복과 대비되는 차림새였다.

"오랜만이다.... 어쩐 일이야?"

"네 소식 듣고 내 맘 편히 있을 수 있겠나."

의뭉스러운 말에 영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걱정돼서 그런 거라면 신경 안 써도 돼. 별일 아니야. 단순 컨디션 난조래."

"컨디션 난조는 무슨. 연구동까지 소문 다 났다. 금마 제정신 아니라고."

남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건가. 영중이 자조 섞인 미소를 흘렸다.

"우리도 너 땜에 비상이다. 위에서는 자꾸 쪼아대는데 내도 원인을 알아야지."

"음, 그건 좀 미안하게 됐는데."

민망한 듯 볼을 긁적이는 영중을 보며 재유가 작게 한숨을 흘렸다. 임마 빈말하는 습관은 영 고쳐지질 않네.

"그건 됐고.... 니 바쁘나?"

"나?"

영중이 동그랗게 눈을 키웠다. 부러 눈을 끔뻑여도 재유는 쉬이 힌트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저 아랫입술을 살짝 감쳐물다 제 머리를 헝클였다. 워낙 격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라. 처음 목격하는 재유의 격한 감정에 영중은 놀란 속내를 숨겨야 했다.

"이게 맞는지 모르겠는데. 너 이러는 거 나도 더 이상 못 보겠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니 준수 보고 싶지 않나."

뭐라고...? 영중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준수가 어딨는지 알고 있었어? 아니 애초에 성준수가.... 밀려오는 혼란스러움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벙긋거리는 영중에게 재유가 결심한 듯 단호히 말을 이었다.

"내가 알려줄게. 준수 어딨는지."

*

"야, 너 괜찮냐?"

성준수가 전영중의 팔을 잡아챘다. 뚝뚝. 땅에 떨어지는 피를 보고는 황급히 영중을 일으켜 세웠다. 제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전영중의 피. 별것 아닌 상처임이 분명한데도 식겁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시야가 울렁인다. 쿨럭, 입에서 피를 토해내던 전영중. 제 옷을 적시던 그 붉은 피비린내가 파도처럼 기억으로 덧씌워졌다.

"힘 좀 풀어 준수야. 너 때문에 더 아프다."

영중이 살살 엄살을 부렸다. 그 투정 어린 말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아, 시발....

"너 미쳤냐? 정신을 얻다 팔고 있길래 손을 잘라먹어."

"과장이 좀 심하다? 잘리진 않았어."

"자랑이다 새끼야. 그럼 피가 이렇게 나는데 이게 정상이냐?"

버럭 화를 내니 슬그머니 눈길을 피한다. 요즘 틈만 나면 멍을 때리는가 싶더니 결국 이 사달이 났다. 괭이로 마늘 캐라니까 손을 자르고 있어.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손가락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S급 신체가 다칠 정도니 그 세기를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영중의 손을 파먹은 괭이는 댕강 부러진 상태였다. 옆에서 함께 마늘을 캐던 아주머니가 나동그라진 괭이를 주워들었다. 에고, 인자 못 써먹긋네.

"당장 치료해."

"되게 맡겨둔 듯이 구네."

"이게 내 손이냐? 네 손이지. 빨리 치료하라고. 피 존나 나잖아."

걱정어린 재촉에도 영중은 묵묵부답이었다. 어쭈? 가만히 저를 쳐다보고만 있는 꼴에 준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정돈 껌이잖아. 빨리 치료하라고."

"싫어."

"아니 너-"

"준수 네가 해줘."

결국 황당한 부탁이 튀어나왔다. 영중아 진짜 무슨 개소리야....

"내가 어떻게 치료해."

"그것도 못 해?"

"난 네가 아니잖아."

"연고 발라주고 밴드 붙여주고. 그런 거 해달란 거야."

존나 성가신 새끼. 걱정이 쏙 들어가게 하는 성질머리였다. 방금 전까지 흥분에 달아올랐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대신 답답증이 그 자리를 메꿨다. 더 빠르고 좋은 방법이 있는데 내가 왜 너한테 연고를 발라주고 있어야 하냐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투정이었다.

"존나 이해가 안 간다 영중아...."

"나였으면 그냥 빨리해주고 말겠다."

"......."

"빨리. 나 너무 아퍼...."

아프긴 지랄.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니 눈썹까지 축 늘어뜨리며 능청을 떨어댄다. 아침부터 남자 두 명이서 손 붙잡고 온갖 염병을 떨어대는 꼴을 지켜보던 아주머니가 언성을 높였다.

"염병들 허고 있네. 그냥 후딱 끄지라!"

거보라며 빙글거리는 전영중에게 욕을 담은 눈빛을 쏘았다. 따갑게 박히는 아주머니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서둘러 영중을 데리고 마늘밭을 벗어났다. 씨발 진짜... 이 새끼 때문에 쪽팔려서 제 명에 못 살겠다.

마늘밭은 슈퍼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덕분에 슈퍼로 향하는 동안 다른 주민들에게 이 꼴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핏방울을 뚝뚝 흘리며 잉잉거리는 거구의 남정네와 짜증은 내지만 왠지 싫지 않아 보이는 또 다른 거구의 남성. 비록 점심 때만 되더라도 온마을에 헌터 총각 손가락이 잘렸더랬다, 아니다 손이 잘렸다, 슈퍼 총각이 팔 잘린 사람에게 빨리 팔 붙이라며 무섭게 성을 냈다 어쩐다 하는 소문이 퍼지겠지만.....

성준수가 전영중을 수돗가 앞에 바로 세웠다. 일단 여기서 물로 씻어. 명령어를 입력하고는 홀로 슈퍼 안으로 들어간다. 혼자 남겨진 전영중은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소심하게 수도꼭지를 돌려 손가락을 씻어냈다. 일전의 수압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관계로... 지극히 조심스러워진 행동이었다.

"나 다 씻었어."

드르륵 슈퍼 문을 연 영중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슈퍼 구석에서 박스와 씨름하고 있는 성준수가 보였다. 씨바꺼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뜯어놓는 건데. 부욱 박스를 찢어 마데카솔 스무 묶음을 꺼내 들었다. 그중 하나와 옆에 있는 대일밴드를 집어 들고 영중에게 다가왔다.

"그거 막 써도 돼?"

"돈 내면 다 돼."

호탕한 대답이었다. 그렇구나.... 의문이 말끔히 해소된 영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봐봐."

성준수가 전영중의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제 손에 쥐고 이리저리 살펴본다. 다행히 상처 자체는 그리 깊지 않은 듯했다. 하긴 S급 신체인데 걱정은 무슨. 성준수가 연고를 뜯어 환부에 덧발랐다. 약지로 벅벅 고르게 펴 바른다. 벅벅....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닌가...."

"시끄러."

친히 노동력을 낭비해주고 있는데 불만이 많았다. 가볍게 영중의 시비를 끊어낸 준수가 이번엔 밴드 하나를 꺼내 들어 대충 손가락에 둘렀다. 끝부분이 덜렁거리는 조악한 맺음새였지만 영중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좋냐?"

"웅."

참나. 피식 웃은 성준수가 곧바로 주변을 정리했다. 골방에서 현금을 꺼내와 돈통을 채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준수 - 마데카솔, 대일밴드.' 착실하게 거래장부도 작성한다.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전영중이 온 후로 벌어지는 정신없는 하루들이 낯설었다. 한평생 쟤랑 이렇게 지지고 볶았다는 사실이 아득해질 만큼.

쑥 다듬다 극대노 사건 이후, 영중은 미적지근한 태도를 고수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행보였다. 떡잎 골라내며 화해 시나리오를 모색하던 노력이 무색하게 전영중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묻는 것이다. 우리 저녁 뭐 먹어?

찝찝한 결말이었다. 잔뜩 토라져 성준수가 골머리 앓게 한 기억이 증발한 것처럼 무탈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전영중은 여전히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준수의 옆자리를 고집했으며, 심부름 갔다 오는 그를 대신해 슈퍼를 봐주기도 했다. 마을 어르신들 부탁에 일손을 거들어주고 동네 꼬마들을 놀아주고.... 얼마나 마을을 들쑤시고 다녔는지 온 동네에 영중의 칭찬이 자자했다. 일 년 넘게 거주한 성준수보다 더욱 끈끈한 정을 나누고 있었다. 저녁마다 이집 저집에서 찬거리를 얻어오는 영중을 보면 얼마나 황당한지. 기가 차서 바라보면 한술 더 떠 이런 농담까지 건넨다.

'나 여기에 그냥 눌러 앉을까?'

가만보니 완전 농담은 아닌 것 같지만.

전영중은 성준수와 너무 다른 사고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성준수와 달리 전영중의 속내에는 또 다른 속내가 겹겹이 쌓여있었다. 그 견고하고도 유동적인 심층을 파헤치겠다고 드릴을 손에 쥐는 순간, 파사삭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다. 하는 수 없이 돌다리를 두드리는 것처럼 이리 건드려보고 저리 건드려보며 한 겹씩 부수다 보면 새로운 층이 생겨났다. 존나게 성가신 새끼. 오랜 세월을 무기 삼아 관심법 휘두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요행은 어디까지나 요행이다. 다른 새끼였으면 진작에 때려치우고 상종 안 했을 놈을 굳이 옆구리에 끼고 들여다보고 있는 건 이 죽일 놈의 애정 때문에.... 입에 담기에도 낯간지러운 감정 덕분이었다.

그리하여 성준수는 인내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구는 전영중이 직접 입을 열어줄 때까지. 네 말마따나 멸망한다는 세계를 놔두고 왜 이곳으로 찾아왔는지. 하루아침에 훌쩍 나타나 제 옆을 서성이는지. 바깥일에는 관심 없는 척 이곳에 눌러 앉겠다고 말하면서도 왜 밤마다 몰래 핸드폰을 들고 나가는지. 아무렇지 않은 척 댕그랗게 떠 보이는 눈깔이 오히려 무슨 일이 있다는 반증 같아서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오지랖을 애써 내리눌렀다. 어쩌면 성준수가, 그 자신이 전영중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것도 같아서.

근데 영중아... 나 이 정도면 많이 참은 거 아니냐.

"전영중."

성준수가 성큼 영중에게 다가섰다. 먼지털이를 손에 쥐고 시키지도 않은 청소를 하던 전영중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의문을 담은 눈동자.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면 직접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반면 영중은 기껏 불러놓고 기분 나쁜 표정으로 - 전영중 개인의견이다 - 쳐다보기만 하는 성준수 때문에 입이 근질거렸다. 말 대신 눈썹을 들어 올려 속내를 전했다. 왜? 라고.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대화의 운을 텄다. 성준수 딴에는 다정한 서두를 끊은 듯한데... 문제는 그 방식이 조금 잘못되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지금 나 꼽주는 거야? 꺼지라고?"

"아니, 씹....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니가 요즘 존나 죽상이니까 그렇지."

영중의 왼쪽 입꼬리가 비뚜름히 올라갔다. 그니까 네 말은 내 표정이 존나 구려서 꼴도 보기 싫다는 거네. 시발 말이 왜 그렇게 되지? 고작 몇 마디 만에 대화가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래, 그러니까 서울로 꺼지라는 거잖아."

"그게 아니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네 몸 챙기라고. 손 잘라먹을 뻔했으면서 말이 많다?"

"손이 잘리긴 무슨. 그리고 준수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여기보다 서울이 수백 배는 더 위험해. 내가 거기서 구르는 건 괜찮고 여기서 다치는 건 안 된다 이거야?"

아니.... 성준수가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이게 아닌데. 무언가 잘못되었다. 사이렌이 윙윙 머리를 울려댔지만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직설적일 뿐 대화 스킬은 F급에 달하는 성준수가 빚은 난관이었다. 영중이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면 준수의 의도를 알아차려 주었을 테지만.... 

성준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돌려 말하는 재주는 없었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방법밖에.

"아니 씹 그냥...."

"그냥 뭐."

"그냥 너 걱정된다고...."

죽상으로 앉아서 멍때리는 거 꼴도 보기 싫고 존나 신경 쓰인다고.

영중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형형히 빛나던 눈에 힘이 빠졌다. 드물게 보이는 한 방 먹은 얼굴. 이거다. 정답을 맞힌 성준수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니까 준수가 걱정이 됐구나...."

데구르르. 영중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굴러다녔다. 저 멀리 시선을 피한다. 분위기가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오랜만에 피부에 달라붙는 간지러운 공기가 낯설었다. 새끼 부끄러운가 보지? 자칫하면 미소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단디 입매를 단속했다. 여기서 웃으면 좆된다....

"준수가 걱정을 했네...."

"......."

"걱정을...."

"......."

"나 버리고 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걱...."

"야."

"......."

"적당히 해라?"

민망한 기분에 아무 소리나 주워섬기던 영중이 혀를 멈췄다. 싸늘한 시선이 매섭게 날아와 꽂힌다. 간질거리던 분위기가 10초 만에 박살 났다.

머쓱하게 시선을 돌린 전영중이 툭툭 제 턱을 두드렸다. 꼿꼿하게 마주 날아오는 성준수의 시선. 그 눈빛이 얼마나 기꺼우면서도 고까운지. 저를 걱정했다는 말에 마음이 누그러지면서도 철저하게 외면하고 싶어졌다. 성준수가 제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도록. 이런 나쁜 버릇을 들인 것도 따지고 보면 성준수 아닌가? 영중이 잠자코 생각한다. 그 반항심리를 성준수가 눈치 못 챘을 리도 없었다.

"됐다. 가서 마늘이나 캐."

성준수가 훠이 손을 저었다. 애초에 바로 말해줄 것이란 기대조차 없었다.

"왜? 걱정된다며."

"어. 근데 어차피 넌 뭐 하나 제대로 털어놓을 생각도 없잖아."

"네가 원하면 해줄 수도 있지."

곧바로 코웃음이 날아왔다. 이젠 대꾸도 하지 않는다. 영중에게서 먼지털이를 앗아간 성준수가 미련 없이 골방 너머로 사라졌다. 흥미가 완전히 떨어진 모습이다. 청소했다고 칭찬은 못 해줄망정 먼지털이는 왜 뺏어가는데? 아니, 그것보다도....

"너는? 넌 뭐 하는데 나만 가."

"난 갈 데 있어."

"어디."

"학교."

학교...?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얼이 빠졌다. 방금전까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도 잊어버릴 만큼 황당한 대답이었다. 웬 학교? 영중이 서둘러 방 안으로 따라붙었다. 성준수는 그새 티셔츠를 벗어던지고 단정한 셔츠를 꿰어 입고 있었다. 농담은 아닌지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머리까지 정돈한다.

사람이 뭐 이리 독단적이지. 심통이 난 전영중이 삐딱하게 벽에 기대 성준수의 그루밍을 지켜보았다. 머리는 왜 저렇게 만져대?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도 않고 양껏 노려보고 있자니 성준수에게서 뜻밖의 제안이 날아왔다.

"너도 따라오던가."

*

논을 따라 거닐다 보면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이 들곤 했다. 녹음이 우거진 산과 들, 지저귀는 새소리, 생명을 심고 가꾸는 주민들. 늘 죽음에게 곁을 내어주던 삶을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평온한 삶이었다. 도심 속에서는 찾기 어려운 새로운 종류의 활력이 넘쳐흘렀다. 마치 균열 따위는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영중은 정말 이곳에 있으면 균열이나 멸망 같은 문제들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뭐 어느 정도 근거 있는 말이기도 하고. 이상하게 시골에는 균열이 잘 발생하지 않는다지. 균열의 발생빈도가 인구 밀도에 비례한다는 가설은 오래 전에 입증된 정론이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는 균열이 인구 청소를 위한 현상이라 주장하지만 글쎄.... 하지만 영중은 일정 부분 동의했다. 자연이 내뿜는 생명력은 쉬이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균열은 이 싱그러움을 견디지 못해 도심 속으로 침투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죽음이 아닌 생명을 키워내는 공간.

영중은 이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알 것 같았다. 성준수가 왜 이곳을 좋아하는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는 별개로.

이곳에서 지켜본 성준수는 헌터 생활에 일말의 미련조차 없어 보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슈퍼를 보고, 마을 주민들을 도와드리고. 툴툴거리긴 하지만 밭에서 일손을 도우며 뿌듯한 미소를 짓곤 하는 성준수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삶에 익숙해 보이는 성준수가 지독히도 미워지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너는 그동안 이렇게 살고 있었구나.... 그리고 헛된 상상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만약 다른 세대를 타고났다면 지금보다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하고.

"성준수."

"왜."

"우리 언제까지 걸어야 해? 벌써 삼십분째야."

"야. 다 큰 형이 너보다 어리광이 많다."

안 그러냐? 성준수가 제 품에 안긴 작은 생명체에게 하소연했다.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정수리만 내보이던 아이가 빼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내 동의한다는 듯 흘끔 영중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허, 참. 둘이서 짝짜꿍치며 잘도 따돌린다.

그러니까 이건 영중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뜬금없이 등교를 선언한 이후, 성준수는 슈퍼를 나서자마자 먼저 옆옆옆옆집으로 향했다. 저 왔어요. 대문을 두드리고 거침없이 남의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가늠할 새도 없었다. 어영부영 따라 들어간 곳에는 작은 손으로 낑낑거리며 신발을 신고 있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오늘도 너무 감사해요. 하루 이틀 벌어진 일이 아닌지 아이의 어머니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멋쩍게 웃는 성준수를 보며 1차 충격을 받은 사이, 성준수가 능숙하게 번쩍 아이를 들어 올렸다. 2차 충격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이가 외치는 인사말에는 귀여운 듯 (3차 충격) 웃었다. 입을 떡 벌린 채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영중의 손에는 어느새 책가방이 들려있었다. 졸지에 7살 가방 셔틀을 하게 된 전영중이 대문을 나서는 성준수를 어리둥절 따라갔다.

한 걸음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영중은 당황스러운 속내를 다스려야 했다. 아이를 돌보는 성준수라니. 이곳에 와서 마주한 그 어떤 모습보다 충격적이었다. 원래 이렇게 애를 잘 다뤘나? 여동생이 있긴 하지만.... 어제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곧잘 스몰토크를 나누는 모습은 낯설다 못해 괴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반면 아이는 낯선 사람이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신나서 준수에게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놓다가도 영중과 눈이 마주치면 푹 어깨 너머로 숨어버렸다. 호기심은 지울 수 없는지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들어 올려 영중을 살피는데... 친해지겠다고 영중이 무해한 미소를 지어주면 다시 쏙 얼굴을 숨겨버렸다. 내가 무섭게 생겼나....

"민성이는 맨날 걸어서 학교 가는 거야?"

"......."

또 씹혔다. 벌써 다섯 번째였다. 대화를 이어보려는 갖은 노력에도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래 민성아 이제 닥칠게.... 영중이 씁쓸하게 가방을 고쳐 안았다. 큭큭거리는 성준수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온다.

"......학교 아닌데."

"어?"

"학교 아니라 유치원이에요."

드디어 대답이 돌아왔다. 영중이 감동으로 눈을 반짝였다. 이게 뭐라고 기뻐지는지. 비록 그의 착오를 바로잡아준 것뿐이었지만....

"그럼 맨날 유치원 걸어가는 거야?"

"......목요일에만 준수 형아랑 같이 가요. 원래는 아빠가 태워다줘요."

"그래? 대단하네. 걸어가기 힘들 텐데."

민성이 부끄러운지 다시 얼굴을 감췄다. 귀여워라.... 별거 아닌 몸짓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영중의 얼굴에 준수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학교는 곧 모습을 드러냈다. 병설 유치원에 민성이를 내려주자 예의 바르게 꾸벅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준수 형. 성준수가 민성의 머리를 헝클였다. 공부 열심히 해라. 네. 내용만은 다소 딱딱한 대화가 끝나고 나자 드디어 적막이었다. 어깨가 뻐근한지 휘휘 오른 어깨를 돌리며 스트레칭하는 성준수에게 전영중이 운을 틔웠다.

"언제 다시 돌아가냐...."

"집? 지금 안 갈 건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영중은 정말 신물이 날 것 같았다. 좀 미리 설명해주면 안 되냐고. 불만을 담아 쳐다보니 대답 대신 다리를 움직인다. 일단 따라와 보라는 뜻이다.

행선지는 학교 안이었다. 이제 막 아이들이 등교를 마칠 시간인데도 건물은 소란스럽기보다 고요했다. 활기찬 아이들을 품고 있다고는 느껴지지 않는 공기였다. 아무래도 시골에 위치한 분교니까 아이들이 많지 않겠지. 초록색 칠판과 열 맞춰 놓인 책걸상. 복도 창문 너머로 보이는 빈 교실의 풍경을 속속들이 눈에 담았다. 간만에 학교에 오니 아무래도 색다른 기분이라.

교실을 구경하는 영중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준수가 입을 열었다. 답지 않게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내가...종종 강의를 하거든."

"강의...?"

"균열 관련 교육이야. 균열 비상 대피 교육이나 헌터 관련된 것들. 아무리 여기가 시골이래도 그렇지 교육이 잘 안되어있더라."

"......."

"그래서 내가 가끔 와서 애들 교육도 해주고. 대피 훈련도 하고 그래."

쿵.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영중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머리가 멍해진다. 물속에 빠진 것처럼 귓가가 먹먹했다.

"오늘은 마침 너도 있으니까. 애들도 실습해보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너만 괜찮으면 같이 수업도...."

"......."

"야. 전영중."

께름직한 느낌에 성준수가 전영중을 불러세웠다. 이렇게 조용히 있을 애가 아닌데.... 준수가 강의? 겨우 세 마디 하는 인터뷰도 더듬는 주제에? 시비를 걸며 놀릴 것이라 추측한 것과 달리 영중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너 왜 그래?"

"어?"

"왜 갑자기 멍을 때려."

".....그냥 좀 어지럽네."

영중이 가볍게 고개를 털며 이마를 짚었다. 딱 봐도 어딘가 아파 보이는 꼴에 성준수가 걱정스럽게 얼굴을 기울였다. 어지러? 갑자기 왜.

"이제 괜찮아. 그래서 뭐라고?"

"......너 괜찮으면 같이 수업하자고."

그래... 그러자. 영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심쩍은 눈초리로 영중의 낯을 살핀다. 얘가 갑자기 왜 이리 비실거리는지. 괜찮은 거 맞냐고 되물어보려는 찰나, 교실 문이 열리며 시끄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준수 쌤이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성준수를 발견하고 하나둘 인사를 건넨다.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게... 강의를 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준수가 반가운지 와글와글 몰려들던 아이들이 멀뚱히 서 있는 영중을 보고 얼어붙었다. 이윽고 와아악! 경탄 어린 비명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전영중이다!"

라고....

야, 전영중이 너네 친구냐? 헌터님이라 해야지. 성준수가 아이들을 꾸짖었다. 초등학교 선생으로서는 훌륭하지 못한 어휘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미 흥분한 아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인지 호기심 어린 눈빛이 영중에게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안녕, 얘들아...."

영중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꺄르르 웃으며 자지러진다. 반응 장난 없네. 옆에서 허탈한 웃음이 날아왔다. 의외라는 듯 빤히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이런 순수하고도 과분한 경탄은 영중으로서도 드문 일이라.

"인기 좋다?"

"난 연예인병 걸려서 꽁꽁 싸매던 누구랑 다르잖아."

얼굴 내보내지 말라며 개지랄 떨던 먼 과거의 성준수를 떠올렸다. 지가 무슨 스파이더맨이야? 얼굴 없는 영웅놀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성준수는 매스컴에 얼굴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인기를 얻는 것은 그의 역할이 아니라 생각하는 듯했다. 가려진다고 가려질 외모가 아니라 종내에는 포기했지만.... 똥을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며 (무서워서 맞다) 매스미디어에서만은 성준수의 얼굴을 꼬박꼬박 모자이크해주곤 했다.

성준수가 불만스럽게 영중의 말을 곱씹었다. 연예인병 걸린 건 자기 아닌가? 정신없게 매달리는 아이들 때문에 더 깊은 사고는 그만두어야 했다.

전례없는 아수라장은 담임 선생님이 나타나고 나서야 잦아들었다. 잠시 대면한 것만으로도 카리스마가 물씬 풍기는 선생님은 능숙하게 아이들을 이끌며 교실에 들어갔다. 영중이 어색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성준수가 짠 커리큘럼은 별거 없었다. 중간에 부를 테니 앞에 나와서 능력 좀 갈겨달란 소리였다. 준수야 내가 무슨... 서커스단이야? 아이들을 의식해 차마 뱉어내지 못한 말이었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담임선생님과 함께 교실 뒤편에 자리 잡았다. 진짜... 어색해서 죽고 싶다.

걱정과 달리 아이들은 곧잘 수업에 집중했다. 한두 마디 하고 버퍼링 걸리는 거 아닌가 싶었던 성준수 또한 꽤 능숙하게 수업을 이어 나갔다. 진지한 얼굴로, 무려 시청각 자료까지 준비해 놓고서. 슬라이드에 적힌 괴수들의 특성에 따른 대응법을 착실하고 차분하게 설명해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영중이 신기한 눈으로 준수의 자취를 쫓았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빛과 손짓, 열띠게 제 지식을 설파하는 목소리까지 빠짐없이 머릿속에 담아냈다. 그러다 성준수와, 그 반짝이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울렁.

뱃속이 울렁거렸다.

아, 시발....

영중이 침음을 흘렸다. 고개를 내리 숙이며 얼굴을 가렸다.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울렁울렁. 걷잡을 수 없이 토기가 치밀었다. 아이들에게 수업을 해주고 있다고, 복도에서 담담하게 말문을 트던 성준수의 목소리가 윙윙 귓가를 어지럽혔다. 다시금 물속에 잠긴 것처럼 머리가 먹먹해졌다.

급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이목이 쏠렸다.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온몸의 피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 공간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진통제를 과하게 주입한 것처럼 시야가 어지러웠다. 자리를 박차고 교실을 뛰어나갔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걸음이 닿는 대로 다리를 움직였다.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 슈퍼, 슈퍼로 가야 하는데.... 헤롱한 정신으로 길을 찾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하얀 콘트리트 도로를 따라, 샛길을 따라, 풀숲을 해치며.... 정신없이 헤매는 동안에도 강의를 하던 성준수의 반짝거리던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그 위로 생기로 반짝이던 11살 성준수의 눈동자가 겹쳐진다.

난 커서 헌터가 될 거야.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목소리가 웅웅 머릿속을 울렸다. 아주 센 헌터가 돼서 사람들을 구해줄 거야. 그 목소리를 따라 거세게 심장이 요동쳤다.

모두 버렸다고 생각했다. 다 뒤로 하고 훌쩍 떠나버렸다고. 이곳이 좋다고, 편하다고 말하는 표정에서는 거짓을 엿볼 수 없어서. 모든 걸 다 털어버린 줄만 알았는데....

성준수 넌... 어떻게 여기서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사람을 구하겠다고 말하는 거야.

영중이 질끈 눈을 감았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덜덜덜 애써 가슴을 부여잡은 손가락이 떨려왔다.

성준수는 원래 이런 놈이었다. 포기를 모르는 새끼였다. 제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도 망설임 없이 괴수에게 달려다 몸을 들이박는 놈이었다.

그래도 시발 준수야.... 다 털어버렸어야지. 다 버리고 떠났으면 그만 잊었어야지. 그 되도 않는 꿈 붙잡고 시골에서 발버둥 치고 있을 게 아니라. 조그마한 어린애들 상대로 수업 같은 걸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이제 자격도 없는 헌터 노릇하겠다고 설치지 말고 그냥....

그냥....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어딘지 모를 들판에 누워있었다. 후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저도 모르는 새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뻑뻑해진 눈가를 비볐다. 그를 괴롭히는 잔상을 괴롭히려 부러 새파란 하늘을 눈에 담았다.

얼마큼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멍하니 눈으로 구름의 움직임을 쫓았다.

"전영중!"

그때였다. 멀리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야차 같은 얼굴을 한 성준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풀썩 영중의 옆에 무릎을 꿇는다. 급하게 뺨을 끌어당겨 영중의 상태를 살폈다. 영중이 멍한 눈으로 제 시야를 가득 메운 이를 바라보았다. 애써 세팅한 머리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너 진짜, 하... 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성준수가 거칠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교실을 뛰쳐나가질 않나. 서둘러 찾아간 슈퍼에도 영중은 보이지 않았다. 되는대로 사람들을 붙잡아 행방을 물었지만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었다. 얼마나 동네를 들쑤시고 다녔는지.... 근데 넌....

푸스스 영중이 웃음을 흘렸다. 재밌냐? 차오르는 말을 삭였다. 피골이 상접한 게 무슨 죽을병이라도 걸린 사람 같아 보여서.

"너 어디 아파?"

걱정스러운 말에는 영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어디가 아픈데. 아니 시발 넌 아프면 병원을 가던가 왜...."

당장 일어나 병원 가게. 잡아끄는 몸짓에도 영중은 협조할 기색이 없었다. 꿋꿋하게 버팅기며 누워있는다. 이 새끼가 너무 아파서 미쳐버린 건가....

"안 미쳤는데."

"그걸 누가 믿어 시발."

니 꼴을 봐라. 성준수가 성질을 부렸다.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이 잔뜩 좁아 들었다. 그 표정에 영중은 이상하게도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 자신조차 뜻 모를 웃음이었다. 사람이 너무 짜증 나면 원래 웃음이 나오는 건가....

"나 많이 아픈가 봐...."

"그래 보여 미친놈아."

그냥 영중은 계속 그런 기분이 들었다. 성준수에게 끝도 없이 패배하는 기분. 정작 성준수는 그를 이기려든 적 없지만....

"준수야...."

"왜."

거진 해탈한 대답이었다. 그리하여 이건 작은 심술이다. 너도 좆 돼봐라. 뭐, 그런 거. 성준수 때문에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자신이 너무 짜증나니까.

"나 능력이 안 나와."

"...뭐?"

"능력이 안 나온다고."

쉬이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었다. 능력이 왜 안 나와. 버퍼링이 걸린 성준수가 고장난 태엽 인형처럼 영중의 말을 곱씹었다.

"아무것도 안 느껴져. 각성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아."

준수의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세차게 요동치는 동공을 마주하니 이제 좀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는 전영중과 달리 성준수는 혼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영중아... 전영중.

아득해지는 정신에 질끈 눈을 감았다.

"그거 원래 내꺼잖아...."

*

눈 떠보니 S급이 되어있었습니다.

단연코 영중은 이런 삼류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한 적 없었다. 뭐, 대부분의 판타지 소설 주인공은 영문도 모른 채 제 눈앞에 닥친 운명을 헤쳐 나가야 했으니 영중과 비슷한 처지였을 테다.

마지막 기억은 전장 속이었다. 오랜만에 서울에 출몰한 S급 균열. 성준수 키링남답게 세트로 파견된 전영중은 후방에서 열심히 헌터들을 치료하는 중이었다. 기나긴 전투였다. 서울지부 헌터들만으로는 부족해 외부 지원까지 나올 정도로 격렬했던 전투. 성준수에게 능력 충전 받을 틈도 없던 전영중은 오로지 피지컬만으로 전장을 헤매고 있었다.

전투가 막바지로 치달았다. 파도처럼 밀려오던 괴물들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균열 내부로 침투한 핵처리반이 무사히 핵을 파괴했단 신호였다. 쿠구구궁. 굉음과 함께 마지막 발악을 하며 요동치는 균열을 보며 영중은 오늘도 무사히 임무를 끝마쳤다 생각했다. 갑작스런 고통이 어깨에 작열하기 전까지는.

급작스런 습격이었다. 독성을 가진 괴수의 손톱이 영중의 어깻죽지를 파고들었다. 온몸의 장기가 녹아드는 고통이 어깨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목구멍부터 발끝까지 모든 세포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쿨럭. 마른 잇새로 피를 토해내며 주저앉았을 때, 가물거리는 눈 사이로 보이는 것은 놀란 성준수의 얼굴. 최전방에 있어야 할 놈이 왜 여기까지....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영중은 S급이 되어있었다.

드물게 존재한다는 2차 각성. 그런 행운은 아니었다. 바라지도 않았던 강요였다. 누군가 강행한 독단이 남긴 결과였다.

눈을 뜨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제 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방대한 이능력이 몸속을 휘젓고 있었다. 이러다 몸이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은 과분한 농도의 힘. 영중은 그 힘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제 안을 헤집어 놓으며 영중의 이능력을 이끌어준 기운이었으니까.

사람들은 영중에게 말하곤 했다. 성준수가 그를 살렸다고. 폭주로 인해 장기부터 녹아내리고 있던 영중을 살리기 위해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제물로 바쳤다고. 학계에 한 번도 보고된 적 없던 케이스였다. 이능력 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 말이다. 전영중은 2개의 고유 능력을 가진 인류 최초의 케이스가 되었다. 연구진들은 둘의 상성이 워낙 좋아 준수의 것이 영중의 몸속에 갇힐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자기들도 말하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듯한 눈치였지만....

곧바로 병실을 뛰쳐나갔다. 성준수, 성준수를 찾아야 했다. 이능력 전이라니. 그럼 성준수는 어떻게 됐다는 건데. 온 병동을 들쑤시고 다니는 전영중을 다급하게 붙잡은 사람들이 이야기했다. 성준수는 사라졌다고. 누구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고.

실로 좆같은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꿈을, 평생을 강제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은.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영중은 이왕이면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영웅이 된 성준수를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련이라면 차고 넘쳤다. 성준수랑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 노후까지 성준수와 지지고 볶을 생각만 가득하던 전영중에게 인생은 쉬이 놓아버릴 수 있는 동아줄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도 않았을 뿐이지.

강요받은 영웅의 삶을 기계처럼 영위했다. 상급 던전을 돌고, 최전방에 나서서 괴수를 처리하고. 누구보다 먼저 앞장서 위험에 뛰어들었다. 제 혈관을 타고 유영하는 성준수를 매일 밤 아로새겼다. 그 흔적을 탐하고, 증오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다 보면...... 묻고 싶어졌다. 왜 그랬냐고.

왜 나를 살렸어.

왜 그랬어 준수야.

*

"언제부터 그랬냐?"

"한 달 정도...."

성준수가 후우 낮게 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듯 충혈된 안구를 손가락으로 꾹 내리눌렀다.

전영중이 제 몸 상태를 고백했을 때부터 성준수는 줄곧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중이 직접 대일밴드를 뜯어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를 보여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장난하는 거면 죽여버리겠다고 눈을 부라리기까지 했다. 언제나 빠르게 현실에 수긍하고 타개책을 찾아내던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그후로는 끝없는 테스트 지옥이 이어졌다. 100m 5초만에 주파하기. 공중부양하기. 돌멩이 던져서 바위 부수기. 전기 모아서 백만볼트 쏘기 등등등. 온갖 방법으로 영중을 시험했다. 영중은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불만을 늘어뜨리면서도 족족 준수의 놀음에 응해주었다. 결과는 당연히 실패. 전영중의 눈 밑이 푹 꺼져 반쯤 죽어버린 행색을 하고 나서야 성준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슈퍼로 돌아왔을 때에는 어느덧 점심을 한참 지나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돌연 자취를 감춘 슈퍼 알바 때문에 화가 난 사장님이 대체 어딜 쏘다닌 거냐며 잔소리를 했다. 성준수가 죄송하다고 꾸벅 머리를 숙였다. 심히 지쳐 보이는 몰골을 확인하고는 들어가서 쉬라며 안배를 배풀어주셨지만....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를 마친 둘이 낡은 몸을 이끌고 골방에 몸을 뉘었다.

"이유는 뭐래?"

"그냥 심리적인 이유라는데...."

"아픈 건 아니고? 너 뭐 병 걸린 거 아니야?"

성준수가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다 정상이면 애가 왜 능력을 못 쓰냐고. 전영중이 하도 수상하게 굴길래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했지만,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한 문제였다.

"너는 내가 아팠으면 좋겠나 봐...?"

누구는 능력 잃어버리고 싶어서 잃어버렸나? 멋대로 주고 간 주제에 권리 행세하듯이 성질부리는 게 웃기기도 하고. 영중이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그게 아니라 상황이 말이 안 되니까..."

"그래 그러시겠지."

얄궂게 빈정거리며 준수에게서 애써 고개를 돌렸다. 분명 제 얼굴인데도 표정을 관리하기 어려웠다.

"나도 답답해 준수야. 검진은 계속하는데 정상이라고만 하니까...."

그럼 결국 모든 게 내 문제란 뜻인데.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가던 영중이 끝내 뒷말을 삼켰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자신을 몰아세워 놓고도 성준수에게 약한 마음 하나 보여주기 싫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근데 솔직히 이거 다 너 때문이잖아. 난 뭐 잃어버리고 싶어서 잃어버렸나? 감정이 이리 튀고 저리 튀었다. 열이 뻗친 영중이 단숨에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원망을 담은 시선으로 준수를 노려보면, 혼란스러운지 안광이 죽어있어도 눅진눅진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어서... 차마 그 얼굴에까지 성질내고 싶지 않아졌다.

성준수가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온갖 감정이 점철된 영중을 한참이고 바라보다... 난데없이 훅 거리를 좁혔다.

"뭐, 뭐야?"

"가만히 좀 있어 봐."

뒤통수를 잡아채 이마를 맞댔다. 지척에 놓인 날카롭고 잘생긴 눈매에 꿀꺽 영중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영중에게 집중했다. 목덜미를 잡았던 손을 내려 등을 쓸어내렸다. 티셔츠 속에 침입하는 차가운 손에 영중이 다급하게 준수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니, 준수야."

"씁, 닥쳐봐 좀. 집중 좀 하게."

영중의 몸이 바닥으로 밀쳐졌다.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영중의 몸을 샅샅이 훑어내린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심장이 쿵쿵 달음박질했다.

"너 능력 남아있었어...?"

달싹거리는 입술에 성준수의 것이 스쳤다. 조금. 성준수가 대답을 흘렸다. 영중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게 퍽 만족스러운지 성준수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마음껏 영중을 진찰했다. 차가운 손바닥이 심장 위를 덮었다. 온 신경을 집중해 영중의 기운을 탐색했다. 넘쳐흐르는 이능이 손바닥 너머로 팔딱거렸다.

본래 성준수 것이었던 기운은 영중의 것과 섞여 기운차게 영중의 몸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분명 정상인데.... 성준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기운의 흐름. 그중 하나를 골라내 끌어당겨 본다. 원래 이렇게 잘 안되는 건가. D급은커녕 E급으로 강등된 성준수로서는 능력을 제 손아귀에 쥐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미간이 왈칵 일그러진다. 어느덧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아직도 아무것도 안 느껴져?"

영중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라이 시팔. 옷 속에서 손을 빼낸 성준수가 전영중의 가슴팍에 푹 머리를 기댔다. 제가 기운을 좀 헤집어놓으면 전영중이 변화를 느낄 수 있을까 싶었는데... 괜히 힘만 존나 뺐다. 귓가를 울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숨을 골라본다. 근데 얘 지금....

"너 심장 존나 시끄럽다."

"...당연하지...."

영중이 팔로 제 눈가를 가렸다. 고개를 들어 영중의 반응을 살폈다. 숙맥처럼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였다. 새끼가 고작 이런 거 가지고 귀엽게 구냐. 준수가 큭큭 웃음을 흘렸다. 그 작은 소리가 뭐라고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전영중...."

"왜...."

"너 회사 잘린 건 아니지?"

"뭐?"

"본부에서 너 내쫓았나 싶어서."

민망했던 기분이 싹 달아났다. 영중이 황당한 얼굴로 제 가슴팍에 놓인 정수리를 쳐다보았다.

"나 같은 능력자를 왜 잘라."

지금 위에서는 나 필요하다고 안달 났어. 답지 않게 거들먹거리는 목소리에 성준수가 코웃음을 쳤다. 전영중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마주 웃었다.

"안 쫓겨났고 잘못한 것도 없어. 그냥 온 거야."

"......."

"재유가 너 여깄다고 알려주잖아."

역시 재유였나. 준수가 가만히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하긴 그의 거처를 아는 사람은 재유가 유일했다. 단숨에 능력을 잃어버려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준수를 돌봐준 은인. 재유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몰래 잠적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곧 유성비가 내린다더라. 대균열이 예상된다는데... 솔직히 가능성이 너무 없잖아. 전투 가능한 S급이 고작 둘이야. 십 년 전에는 다섯 명이었는데도 겨우 클리어했잖아."

그래서 그냥 왔어.... 영중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서울에서부터 싸들고 온 볼품없는 고민이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대의를 져버리는 게 말이 되냐고. 당장 올라가서 훈련이나 하라고 그를 한 대 쥐어박는데도 가만히 맞아줄 생각이었다. 제가 넘겨준 능력을 고작 이렇게 방치한다고 화를 내도 별수 없었다.

전영중은 성준수가 아니었으니까. 앞뒤 재지 않고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겁 없지 못했으니까. 사명감에 휩싸여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성준수 네가 없는 세상 살아가는 게 더 무서워서. 비겁하게 줄행랑친 인간이니까.

"그럼 됐다."

"...뭐가 됐는데. 우리 다 죽을 수도 있다니까?"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

"일단 너도 백수는 아니란 거잖아."

넌 지금 그게 중요해? 영중이 뾰족하게 눈을 치켜떴다. 성준수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한다. 강직한 눈동자에서는 곤란한 기색 하나 섞여 있지 않았다. 진심이라는 확신을 주는 올곧은 눈빛. 마주하면 매번 저 자신이 바보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

"자기도 백수면서 누가 누굴 걱정한다고...."

"내가 왜 백수야. 알바하잖아."

네네. 그러시던지요. 영중이 모른 척 딴청을 부렸다. 손으로는 성준수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혼날 줄 알았는데.... 멍하니 천장으로 시선을 올렸다. 곧 바스러질 듯 점멸하는 형광등을 눈에 담는다.

"준수야...."

"......."

"넌 후회 안 해?"

"어."

"......."

"안 해."

영중이 힘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런 질문을 던진 자신이 진저리가 나면서도 성준수가 내놓는 대답이 퍽... 위안이 되었다. 비로소 영중이 눈을 감았다. 나직한 숨을 내뱉는다. 달콤한 단잠에 빠져들었다.

*

색색. 고요한 공기 속에 숨소리가 울렸다. 가만히 앉아 잠에 빠진 영중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청소도 하고, 손님 응대도 하느라 소란스러웠을 텐데 깊은 잠에 빠진 영중은 좀처럼 깨어날 기색이 없었다. 많이 피곤했나 보지. 영중의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조심스레 쓸어 넘겼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은 벌써 어둑해졌다. 밥은 먹고 재워야 하는 거 아닌가. 골방을 벗어나 슈퍼 밖 평상에 올라앉았다. 시원한 밤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후우.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컴컴한 밤하늘 속에서 하얀 반달이 은은하게 자태를 빛내고 있었다. 한참이고 그 밝은 빛에 젖어 들고 있으면 속삭이던 영중의 목소리가 되풀이된다.

'후회 안 해?'

후회라.... 신발 앞코로 툭 돌멩이를 굴렸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인생을 바친 꿈을, 그렇게도 사랑했던 순간들을. 아직도 꿈에서 그는 하늘을 달리며 균열에 잡아먹힌 도심을 구하고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도망치듯 이곳으로 잠적한 것도, 전영중을 두고 떠나온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럼에도 후회하냐는 대답에는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아니라고, 그는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허울뿐인 말이라 치부할지 몰라도 그의 진심은 그러했다.

잊을 수 없는 감각이었다. 피를 토하고 있는 전영중을 발견했을 때, 온몸에 피가 차게 식어버리는 느낌.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균열이나 목숨을 위협하는 괴수 따위는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전영중만이 선명했다. 자각하기도 전에 이미 영중에게 온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꺼져가는 영중의 기운을 붙들어 회복력을 끌어올렸다. 녹아내리는 장기를 직접 어루만지며 그의 기운을 밀어 넣고 또 밀어 넣고.... 한계까지 능력을 뽑아냈다. 그들을 둘러싸고 웅웅, 거센 돌풍이 휘몰아쳤다. 폭주의 전조였다. 성준수 너까지 죽을 셈이야? 만류하는 손길을 외면했다. 폭주한대도 상관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하면....

그러던 순간 탈력감과 함께 능력이 영중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제 능력이 영중에게 귀속되는 느낌.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음에도 두려움보다는 강렬한 직감이 뇌리를 관통했다. 성공했다고.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그조차 알 수 없지만... 전영중을 살린 것 같다고. 황홀한 안도감. 그것이 성준수가 기억하는 그날의 마지막이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성준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능력 전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현상. 그러나 병실에서 눈을 떠 텅 비어버린 몸을 직시했을 때도 성준수는 두렵지 않았다. 그리하여 확신한다.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그는 똑같이 전영중을 살렸을 것이라고.

내가 이렇게 로맨틱한 사람이었다니. 새롭게 발견한 자신의 면모가 놀라웠다. 뭐 결과론적으로 S급이랑 치유계 헌터 모두 지켰으니 된 거 아닌가? 하는 대책 없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뭐 해?"

슈퍼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났다. 잠에서 덜 깬 얼굴을 한 전영중이 눈을 부비며 제게 다가오고 있었다.

"깼어?"

"응."

영중이 준수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제 막 잠에서 깬 따끈따끈한 피부에게는 밤바람이 너무 서늘한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날씨 좋네...."

"추워서 벌벌 떨면서 무슨."

"방금 일어나서 그래."

영중이 푹 준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졸음이 담긴 눈으로 풍경을 구경했다. 밤하늘에 수 놓인 자그마한 별들. 걸리는 건물 하나 없이 널찍하게 펼쳐진 논밭.... 그리고....

"저건 왜 저깄어?"

영중이 가늘게 눈을 좁혔다. 손가락을 들어 올려 전봇대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폭죽 더미를 가리킨다.

"갖다 버리려고."

"왜? 아깝게."

"아니 네가 갖다 버리라며. 불법이라고."

"내가 언제 갖다 버리라 그랬어. 그냥 불법이라 그랬지."

아오, 진짜 말을 말아야지. 눈을 뜨자마자 곧바로 기막힌 시비를 걸어댄다. 이 새끼 머리는 버퍼링도 안 걸리나. 

"너무 아까운데...."

영중이 작게 중얼거리며 전봇대 쪽으로 다가갔다. 팔길이만큼 기다란 폭죽은 물론 분수 폭죽, 스파클라까지 다양한 종류의 폭죽이 무더기로 버려져 있었다. 25연발 슈퍼 파이어볼. 영중은 네모난 박스 형태로 된 폭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건 뭐 폭탄 아닌가? 속에 낱개로 된 폭죽이 들어있는 줄 알았는데, 옆에 굵은 심지가 붙어있는 것이 박스 자체가 하나의 폭죽인 것 같았다.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준수야, 우리 이거 해보자."

성준수가 구태여 말을 아꼈다.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뜻이었다.

"너 이런 거 본 적 있어? 얘가 그냥 하나래. 불꽃 겁나 클 것 같은데."

"야.... 이런 거 터뜨리면 신고 들어온다면서요. 동네 사람들 다 깨울 일 있냐? 오밤중에?"

"멀리 가서 하면 되지. 아까 보니까 공터도 많더만."

도통 말이 안 통했다.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게, 조금 전까지 잠에 취해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성준수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곧 죽을 거라 그런가. 유난히 지랄 맞은 것 같다.

"빨리 가서 라이터 가져 와."

이제는 심부름까지 시킨다. 성준수가 털레털레 힘없이 슈퍼로 돌아갔다. 전영중 때문에 뭘 하는 건지. 카운터에 뒹굴어 다니는 라이터 중 하나를 집어 들고 슈퍼를 나섰을 때였다.

쿠우우웅!

땅을 울리는 커다란 굉음이 고막을 강타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듣곤 했던 익숙한 소리. 마찬가지로 놀란 얼굴을 한 영중과 눈이 마주쳤다. 착각이 아니었다. 찢어진 하늘이 울부짖는 소리.

어딘가에서 균열이 열리고 있었다.

번쩍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9시 방향. 시야 끝, 저 먼 곳 하늘 어딘가에 갈라진 틈이 보였다. 곧바로 괴물을 뱉어내려는지 무시무시한 기운을 발산하며 요동치는 틈이.

"아, 시발."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다. 옛날이었으면 달음박질해 하늘을 날아올랐을 테지만... 황급히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옆집 담장 앞에 놓인 오토바이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발견한 순간, 누가 뭐랄 것 없이 오토바이를 향해 달려갔다.

다행히 키가 꽂혀있었다. 곧바로 안장에 엉덩이를 붙인 성준수 뒤로 영중이 자리를 잡았다. 다급하게 허리를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성준수가 삼발이를 올리고 시동을 걸었다.

"근데 준수 너 면허 있어?'

"아니."

뭐? 영중이 동그랗게 눈을 키웠다. 아니, 잠깐만! 성준수가 곧바로 엑셀을 당겼다. 부아아앙. 엔진소리와 함께 오토바이가 내달렸다.

상당한 속도감이었다. 앞을 때리는 바람에 좀처럼 눈을 뜨기 힘들었다. 시발, 이러다 사고로 죽는 건 아니겠지.... 성준수를 생명줄처럼 꼭 붙든 채 억지로 눈을 떠 균열의 움직임을 살폈다. 균열의 성장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괴물을 토해낼 시간이 머지않은 듯했다. 성준수 또한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더욱 빠르게 속도를 올렸다. 영중이 품 안에 갇힌 폭죽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하도 급하게 뛰어오느라 손에 들고 있는 것도 잊어버렸다.

균열이 터진 곳은 아침에 방문했던 학교 근처였다. 어느덧 입을 벌린 균열 내부가 보일 만큼 가까워졌다. 균열의 크기를 보아 위험도는 D급 정도. 난이도 있는 균열은 아니었지만 빠른 속도로 성장한 균열 속에서 이미 너무 많은 괴수들이 밀려 나온 것이 문제였다. 얼핏 느껴지는 정도로는 스물. 불과 5분 만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근데....

"성준수 뭐해!"

성준수가 좀처럼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영중이 목이 터져라 목청을 높였다. 브레이크! 브레이크 밟으라고!

"시발! 뭐가 브레이큰지 모르겠다고!"

뒤이어 절망적인 소식이 들어왔다. 대체 시동은 어떻게 알고 건 거야. 입씨름하는 새에 현장과 점점 더 가까워졌다. 야, 꽉 잡아! 당부까지 하는 것을 보니 그는 이미 어떤 결심을 마친 것 같았다.... 멀리서 그들을 기다리는 괴수를 향해 방향을 튼다. 전방 5m, 3m, 2m... 쾅!

오토바이가 하나둘 괴물들을 들이박았다. 괴물이 흘리는 검은 체액이 온몸으로 쏟아졌다. 앞으로 셋, 넷. 몇 마리를 더 들이박고 나자 기적적으로 오토바이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합을 맞춘 듯 오토바이를 버리고 뛰어내렸다. 데구르르르 땅에 부딪힌 충격에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준수 괜찮아?"

영중이 몸을 일으켜 준수의 상태를 살폈다. 으으윽... 신음을 흘리면서도 곧잘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니 별다른 부상은 입지 않은 것 같았다. 물몸으로 몸빵이라니. 성준수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잔소리하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그들이 처한 상황이 좋지만은 않아서 영중이 입을 다물고 전방을 주시했다.

방금 전 사고로 죽어버린 괴물이 둘. 큰 소란을 듣고 사방에 퍼져있던 괴물이 몰려오는 중이었다. 2미터쯤 되는 괴물들은 팔다리가 달린 인간형 몬스터였다. 검은색의 끈적한 진흙으로 뒤덮여 지나가는 곳마다 뚝뚝 점도 높은 덩어리가 떨어졌다. 얼굴에는 눈과 코가 없었는데, 대신 그 자리를 거대한 입이 차지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비위가 상하는 역한 몰골이었다.

비록 능력을 쓸 수 없다해도 강화된 S급 신체로는 눈앞의 괴물들은 손쉽게 해치울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성준수인데.... 그순간 휘리릭 옆으로 무언가 날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야! 연장 받아!"

던져진 것은 낫이었다. 이런 건 어디서 주워 온 거야? 성준수는 이미 양손에 쌍검을 쥐듯 낫을 들어 올린 채 돌진하고 있었다. 저 미친새끼. 영중이 눈살을 찌푸리며 제 몫의 무기를 들어올려 쫘악 아가리를 벌리고 다가오는 괴물의 입에 처박았다. 콰트특. 그대로 힘을 주어 괴물의 가슴팍까지 갈라버리자 파스스 먼지가 되어 흩어진다. 오, 운 좋았고. 괴물의 핵이 가슴 속에 있는 모양이었다.

약점을 알았으니 처리하는 것은 쉬웠다. 영중이 왼발에 힘을 실어 도약했다. 머리 위로 뻗어오는 괴물의 팔을 낫으로 잘라내고 주먹에 힘을 쥐어 몸통에 쑤셔 넣었다. 꾸드득거리는 끔찍한 감각과 함께 괴물의 심장을 움켜쥐어 퍼뜨렸다. 바로 몸을 숙여 뒤에서 날아오는 괴물의 입을 피하고, 심장을 베어냈다.

무아지경에 빠진 것은 성준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D급이라 그런가? 일반인이 된 몸뚱아리로도 나름대로 싸울만했다. 전영중과 달리 이미 몸뚱아리에는 이런저런 생채기가 가득했지만 말이다. 있는 힘껏 낫을 휘둘러 제게 아가리를 벌리는 괴물의 심장을 꿰뚫었다. 툭. 투욱. 기분 나쁜 액체가 머리 위로 떨어진다. 아, 존나 더럽게. 성준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날아오는 괴물에게 발을 날렸다.

오랜 휴식기를 지냈음에도, 갈고닦았던 실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제게 쏟아지는 괴물을 하나둘 해치우며 전영중이 흘끗 성준수를 확인했다. 축제라도 벌이는 것처럼 신나게 날뛰는 모습에 그제야 좀 안심이 되었다.

하나, 바로 또 하나. 쉴 틈 없이 괴물의 심장을 베어냈다. 벌써 끝이 보이고 있었다. 문제는 균열 사이로 또 꿀렁꿀렁 괴물들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이었지. 아니, 여기 지부는 일 안 하나? 왜 아직까지.... 성준수가 이를 악물며 땅을 박찼다. 그때였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뒤에서 괴물 하나가 빠르게 성준수에게 달려들었다. 아, 시발 못 피할 것 같은데. 어깨 한쪽을 내어줄 작정으로 우선 눈앞의 괴물에게 낫을 휘두르는데,

"성준수!"

제 등 뒤로 전영중이 달려들었다. 까득. 뼈가 부딪히는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보이는 것은 희열감에 가득 찬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전영중.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같은.... 어깻죽지를 물려놓고도 환희에 찬 눈깔을 뜨는 전영중을 마주한 순간, 속에서 욱하고 묵직한 것이 치밀어올랐다. 이 개또라이 새끼가....

영중이 곧바로 제 어깨를 문 괴물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리고는 힘껏 잔소리를 한다.

"준수 미쳤어? 좀 적당히 뒤로 빠져있어야 할 거 아니야."

일반인 주제에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건 대체 어디서 배워온 거야? 네가 아직도 S급인 줄 알아? 종알종알 떠들어대는 목소리가 시끄럽게 머리를 울렸다. 그 턱주가리를 주먹으로 때려 닥치게 만들고 싶었으나.... 쿠구구궁. 다시금 균열이 요동쳤다. 곧 새로운 괴물들이 몰려올 것이라는 신호였다.

정신을 차린 성준수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싸울 수는 없었다. 균열을 파훼하려면 내부의 핵을 파괴해야 했다. D급 균열이니 폭발력 있는 물체를 내부에 던져넣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떠올린 준수가 온갖 체액으로 웅덩이가 파인 들판을 매의 눈으로 살폈다. 오토바이 옆에 나동그라진 커다란 불꽃놀이용 폭죽이 시야에 들어왔다. 냅다 발을 놀려 폭죽에게 다가갔다. 상태를 살펴보니 아직 심지도 살아있는 게,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듯했다. 폭죽을 주운 성준수가 요리조리 발 빠르게 괴수를 피해 가며 전영중에게 소리쳤다.

"전영중! 우리 이거 터뜨리자."

영중이 까딱 눈썹을 추켜세웠다. 단번에 성준수의 계책을 이해한 듯했다. 하지만... 

"고작 그걸로 균열이 닫힌다고?"

"그러니까 폭발력을 높여야지."

"그걸 어떻게 해!"

"네가 해야지!"

빨리 저것들이나 처리해. 성준수의 말에 전영중이 마지막으로 남은 괴수 서너 마리에게 무기를 휘둘렀다. S급 신체에는 상대가 안 되는 건지, 몇 합 만에 괴물들이 파스스 먼지가 되어 흩어진다.

"그냥 낫을 던져보는 건?"

"되겠냐?"

"아니 나 능력 못 쓴다고 준수야...."

"내가 도와줄게."

"......."

"일단 뭐든 해봐야 할 거 아니야."

성준수의 눈빛이 단호하게 빛났다. 성준수 너는 진짜.... 그가 너무 짜증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언으로 떨어진 허락을 느낀 준수가 영중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내가 네 능력을 끌어올려 볼게. 내가 막 헤집어 놓으면 분명 네 몸도 반응할 거야. 네 에너지를 느낄 수 있게 되면, 그때 폭죽에 힘을 밀어 넣어."

"안 되면?"

"안 되면 시발 그냥 지원 올 때까지 존나 싸워야지."

영중에게 라이터를 건넨 성준수가 마지막으로 균열에 시선을 던졌다. 곧이라도 괴물이 뛰쳐나올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열기를 반복했다. 성준수가 두 눈을 감아 영중의 몸에 기운을 집중했다. 영중의 몸을 유영하는 기운의 줄기를 잡아챘다. 끙... 잇새로 신음이 샜다. 이거 싸울 때보다 더 힘든 것 같은데. 영중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비강을 파고드는 피냄새.... 다시는 맡고 싶지 않았던 냄새에 간절함을 끌어올려 본다.

손안에 들어온 에너지가 마음대로 운기 되지 않았다. 준수의 어깨를 감싼 영중이 차가운 시선으로 균열을 노려보았다. 이내 눈을 감아 자신의 내면에 집중했다. 성준수가 헤집고 있는 제 기운을 느끼기 위해서.

그때였다. 균열이 비명을 쏟아냈다. 꿈틀꿈틀 움직이는 괴수들이 틈 사이로 꾸물꾸물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아, 조금만 더하면. 더하면 될 것 같은데. 성준수가 질끈 눈을 감았다.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영중의 에너지를 손끝으로 끌어내리는 순간,

영중이 번쩍 눈을 떴다. 오랜만이었다. 제 손아귀에 이능력이 느껴지는 것은.

성준수가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이끌어준 이능을 놓쳐버리기 전에, 영중이 재빨리 폭죽에 불을 붙였다. 폭죽 속에서 느껴지는 열기를 끌어올리며, 까마득히 벌어진 균열 사이로 폭죽을 집어던졌다.

치기어린 계획이었다.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안에서 폭죽이 제대로 터질지도 알 수 없는 무모한 계획. 빠르게 공중을 날아간 폭죽이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퍼버버벙! 굉음과 함께 균열 속에서 번쩍 빛이 발했다. 괴로운 듯 격렬하게 요동친다. 빠져나오려던 괴수들이 균열 내부로 빨려 들어갔다. 성공이다! 짜릿한 쾌감이 몸을 스치던 순간,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균열이 입을 다물었다. 고요한 적막과 함께 컴컴한 밤하늘이 별을 빛냈다.

"하아...."

영중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상하게도 진이 빠졌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던 에너지가 파스스 흩어졌다. 성준수가 기껏 모아준 이능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제 몸을 탐색해도 이전과 그대로. 신비로운 이능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는 전영중에게 성준수가 비척거리며 몸을 이끌고 다가왔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영중의 어깨를 붙들어 환부를 살핀다. 시바꺼 그러게 그때 왜 끼어들어서.... 쯧 혀를 차며 영중의 어깨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왜 끼어들었냐고...? 영중이 멍하니 준수의 말을 곱씹었다. 왜 끼어들었냐니. 내가 왜....

"그럼 너는? 너는 날 왜 살렸는데."

"......."

"나야말로 너한테 묻고 싶다.... 날 왜 살린 거야?"

영중이 원망을 담아 눈을 치켜떴다. 가슴 속에서 울분이 치밀었다. 성준수가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일반인이면서 뭐라도 된 양 무모하게 부딪히는 성준수도, 제게 모든 걸 떠넘기고 돌연 잠적한 성준수도. 일 년 반, 기나긴 세월 동안 품었던 의문을 토해냈다.

"오늘도 그래. 네가 아직 뭐라도 되는 것 같아? 여기 있는 것도 존나 마음에 안 들었어. 이런 깡촌에서 구질구질하게 애들이나 가르치고 있고. 그렇게 미련이 남을 거였으면 나한테 이 능력을 주지 말았어야지. 그런 사명감 따위로 날 구할 게 아니라 좆같은 영웅행세는 니가 평생하고 살았어야지!"

피를 토하는 것 같았다. 성준수는 그렇게 느꼈다. 어느새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주르륵 눈물을 흘리고 있는 꼴을 보자니 더더욱. 무엇이 이 녀석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왜 살렸냐고 발악하게 만든 원인이 누구인지 성준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전영중...

"야. 너는 안 그랬을 것 같냐?"

"......."

"그때 네가 아니라 내가 죽을 뻔했어도 너는 안 그랬을 것 같냐고."

"......."

"너를 왜 살렸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 너 죽지 말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내라고. 저딴 새끼들한테 어깨 물어 뜯기면서 개죽음 당하지 말고 악착같이 싸우다 죽으라고 그런 거야. 아까처럼 내 목숨 한번 구하면서 드디어 대신 죽을 수 있겠다고 기뻐하지 말고."

저 대신 어깨를 찢기던 전영중을 떠올렸다. 드디어 해냈다고 희열감으로 눈을 빛내던 그 좆같은 눈동자를. 성준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목을 긁어내는 목소리로 분노를 쏟아내던 방금 전과는 달리 나직한 목소리로 타이른다.

"영중아. 내가 무슨 대단한 사명감이 있어서 널 구한 것 같냐?"

"......."

"그냥 내가 존나 이기적인 놈이라 너 살린 거야. 폭주가 와서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수가 있더라도 너 살리고 싶어서."

성준수가 푹 전영중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달뜬 영중의 숨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대체 넌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어렵고 무서워서 이러는데...."

사실 너도 신경 쓰이잖아. 당장이라도 서울 올라가서 대균열인지 뭔지 막아보고 싶잖아. 밤마다 몰래 전화하러 나가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냐고. 보나 마나 원중팀 애들 잘 있는지, 대응 준비는 잘되고 있는지 그거 확인하고 있었겠지. 멸망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새끼가 어떻게 방금처럼 물불 안 가리고 싸우겠다며 뛰어드는데....

"전영중...."

"......."

"다들 숭고한 신념에 갇혀서 이러고 사는 거 아니야. 그딴 거 신경 쓰라고 너 살려낸 것도 아니고."

"......."

"그러니까  네 좆대로 하고 싶은 거 하라고."

영중이 거세게 숨을 내쉬었다. 성준수 너는 정말... 한결같은 놈이구나. 영중이 바라는 것. 그가 바라는 것은 딱 하나였다. 성준수가 없는 세상, 그걸 견딜 수 없어 이곳으로 도망쳐온 것이었다. 제 안에 유일하게 살아 숨 쉬던 네 흔적을 느낄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랑 함께 멸망 속으로 뛰어들었으면 좋겠어. 우리의 끝이 죽음이어도 나와 함께하기를 선택했으면 좋겠어. 네가 만약 죽어야 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면, 그 자리가 내 옆이면 좋겠어. 네가 내 세상을 끝내줬으면 좋겠어.

".....네가 같이 갔으면 좋겠어."

영중이 짧은 문장을 토해냈다. 지독히도 이기적인 부탁이었다. 일반인과 다름없는 사람에게 함께 멸망을 이겨보자고 말하는 것은. 그런데도 성준수는 드디어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후련한 웃음을 내보였다. 어깨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려 영중의 뺨을 감싸 쥔다.

"그래. 같이 가자."

무릎을 털고 일어나 영중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중이 물끄러미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손을 맞잡았다. 강한 힘이 그를 일으켜 세운다.

"가자 이제."

"어딜?"

"본부 가야지."

이렇게 바로 간다고?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영중에게 준수가 답답하다는 듯 설명을 이어갔다. 곧 대균열이라면서 빨리 가야 할 거 아니야.

"너 그러고 보니 여기 어떻게 왔냐. 면허 땄어?"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왔지...."

영중의 대답에 준수가 귀찮다는 듯 눈매를 찌푸린다. 그러더니 들판 한쪽에 쓰러져 희미한 존재감을 뽐내는 오토바이에 시선을 던졌다. 아니, 준수 설마....

"저거 타고 가려고?"

"어."

"그냥 내일 일어나서-"

"됐어. 저거 타고 가. 운전은 네가 해라."

무작정 오토바이를 일으키고는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크게 부서진 부분은 없어 보였다.

"연습도 계속해보면 좋잖아. 내가 네 능력 끌어올려 볼 테니까 아까처럼 감잡히면 힘으로 오토바이 조종하고."

"그게 말이야 쉽지...."

영중이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운전대를 잡고 앉았다. 아까와 달리 영중의 뒤에 자리 잡은 성준수가 꽉 영중의 허리를 붙든다. 뺨으로 고동하는 영중의 심장 소리를 느꼈다. 팔딱거리는 그의 이능에 집중하면서....

두 이능력자를 태운 오토바이가 엔진을 울렸다. 부드럽게 출발하며 싸움의 흔적이 가득한 공터를 내달린다. 너무 느리잖아. 더 빨리 달리라고. 아 쫌! 제발! 영중이 볼멘소리를 했다. 키득키득 준수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흩어진다.

그날 밤,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유성비가 쏟아졌다. 대균열의 시작을 알리는,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눈부신 별똥별이 하나둘 밤하늘을 수놓았다. 미친 이미 늦은 거 아니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능력자들이 부리나케 속도를 높였다. 그중 한 명이 종종 본래의 힘을 되찾을 때마다 번쩍거리는 섬광이 하늘 위로 쏘아졌다. 불꽃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알록달록한 빛깔들이. 형형색색의 빛에 휘감긴 오토바이가 밤하늘을 날아올랐다. 유성비를 집어삼킬 것처럼 눈부신 빛이 하늘 위로 수도 없이 쏘아졌다. 하나둘, 그리고 셋 넷. 멸망의 격전지에 도착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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