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브] 나를 잊은 별에게 (8)
소년은 하민의 손을 잡고 오래도록 걸었다. 그의 집 앞까지 느린 걸음으로 걷다가도 좀처럼 쉽게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여름을 목전에 둔 꽃들이 얼마나 흐드러지게 피어났는지, 하늘에 지나가던 구름이 고양이를, 돌고래를 닮았다는 등의 이야기들을 하며 하민과 눈길을 나란히 하고서 웃었다. 무엇이 소년을 이토록 머뭇거리도록 만들었을까. 하민은 어둑한 눈을 하고서 그의 옆얼굴을 이따금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차라리 말을 해요. 하민은 근래에 들어 유난히 가라앉은 예준을 보며 그를 다그치고 싶다는 생각을 곧잘 했다. 왜 말을 안 해줘요. 나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이만큼 나한테 시간을 내어준다는 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 아닌가요. 형이 이럴 때마다 밀쳐지는 기분이 들어요. 하지만 소년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분명 옅은 웃음소리와 함께 ‘하민아.’하고 그를 부르겠지. 그리고 잠겨 죽어도 좋을 만큼 지독하게 다정스러운 얼굴을 할 게 분명했다. 그 끝도 모르는 다정에 종종 숨이 막혔다. 마치, 물에 잠긴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다 왔네, 벌써.”
그래, 지금처럼 아쉬운 얼굴을 하고서 소년은 하민을 본다. 그렇게 하민의 입술 아래에서 잠들어 무덤으로 자리잡은 문장들은 하나의 종착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민은 언제고 소년이 있는 곳으로, ‘우리’가 있을 곳으로 향해 가는데 그 모든 것들은 언제나 어디론가 훌쩍 사라질 것처럼 느껴져서, 나보다 모두가 한참 어른이라서, 눈이 부신 사람들이라서 자신만 과거에 남겨두고 가버릴 것만 같아서 불안하다고 그에게 쏟아내어 붙들고 싶었다. 소년의 다정이라면, 그를 위해 자리를 내어줄 것을 알기에. 이다지도 나약한 자신의 마음을 목도하고 만 하민은 문득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이제 집에 들어가야지, 하민아.”
오늘도 그가 하려던 말은 먼 어드메로 날아가고 말았구나. 하민은 먼저 손을 놓으려는 소년의 손끝을 붙잡아 다시 한 번 깍지를 채웠다. 이번엔 제가 형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충동적으로 그가 꺼낸 말에 예준의 시선이 고요히 하민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닿았다. 반듯한 이마와 콧잔등을, 가지런하고 짙은 눈썹과 그 아래 자리한 모양새가 예쁜 눈가를, 눈동자를….
“그럴까, 그럼.”
“왼쪽으로 와요.”
“왜?”
“이번엔 내가 데려다주는 거니까. 아, 형. 네? 내가 오른쪽에 서게 해 줘.”
혀엉, 하고 말꼬리를 늘이며 쏟아진 투정같은 말 앞에서 소년은 웃음을 터트리며 순순히 그와 자리를 바꿨다. 내가 바깥에서 걷는 게 신경쓰였어? 하는 말에 얼른 하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예준이 다시 손을 잡아왔다. 하민이 그랬듯이 조심스럽게 손틈 사이로 파고들어 깍지를 채운다. 언제나 그게 정해진 자리인 것처럼.
“이렇게 날 좋아할 거면서 왜 맨 마지막에 플레이브 하자고 했어?”
불쑥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서운하다, 서운해. 부러 장난스럽게 덧붙이는 말에 하민은 말을 잃었다. 그게요, 형. 하고서도 한참동안 말을 못하다가 먼저 걸음을 떼며 예준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제 신발코만 바라보며 소년의 집을 향해 다시 길을 돌아갔다.
“제가 형, 진짜 좋아하거든요.”
투박한 말에 소년은 와르르 웃으며 ‘그래, 나도 너를 정말 좋아한단다.’하고 단정하게 말했다. 그 숱한 다정을 원망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누구에게나 쏟아지는 다정을, 다정이라고 불러도 괜찮은걸까. 하민의 눈동자가 힐끔 예준의 반듯한 옆얼굴을 응시했다. 시선을 느낀 소년이 웃으며 하민의 손을 잼잼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자 하민이 도리어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래서 형한테는 다….”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나봐요. 하민은 이 모든 말들이 낯설었다. 꺼내어진 진심은 어쩐지 초라한 핑계처럼 들렸고, 그랬기에 소년의 앞에서 가장 남루한 얼굴이 되어버린 것만 같아 고개를 돌렸다. 예준은 그 말을 한참동안 곱씹는 사람처럼 말이 없다가, 어렵게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오늘은 물어보지 않고 싶었는데, 하민아. 걸어가던 걸음을 멈춘 그가 주머니 안에 있던 파편 하나를 꺼내 하민에게 내밀었다. 소년의 앞에서 희게 질린 하민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제는, 나한테 말해줄 때가 된 것 같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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