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브] 나를 잊은 별에게 (7)
연습이 끝난 뒤 밴드부 전원이 의자 위로, 바닥으로 늘어졌다. 특히 드럼을 치는 은호가 젖은 턱 근처를 티셔츠를 끌어올려 땀을 훔쳐내더니 드럼 스틱으로 가볍게 탐탐 위를 쾅 두들기고 씩 웃었다. 깜짝 놀라 기타를 껴안고 잠깐 튀어올랐던 밤비를 보며 시원스럽게 묻는다.
“형, 냉면 먹으러 갈래요?”
“나랑…평양냉면, 먹을 거야?”
“까짓 거 그러지 뭐.”
어쩐지 기쁜 얼굴이 된 밤비를 뒤로 멤버들이 각자 악기와 음향장비들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진짜 평냉 먹어요? 하민이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밤비는 화색이 돈 얼굴로 같이 갈래? 하고 물었으나 하민의 눈은 쉽게 소년에게로 향했다. 예준이 형이 가면요. 언제나처럼 대답하자 밤비가 맥이 빠진 얼굴로 기타를 정리하고 노아를 힐끔거렸다.
“안돼, 나 오늘 단백질 아직 다 못 먹었어.”
“아 진짜 닭냄새 쇠냄새….”
야, 프로틴이 얼마나 중요한데. 반박하는 노아의 말에 예준이 옅게 웃다가 마이크와 라인을 마저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교복 셔츠 위에 가지런히 접어서 넣어둔 손수건을 꺼내던 소년이 하민에게 손짓했다. 저요? 하고 묻는 것 같은 얼굴에 예준이 먼저 다가가 가만히 손을 뻗었다. 많이 더웠나보다, 오늘 땀 많이 흘렸네. 가만가만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던 하민은 자연스럽게 몸을 조금 숙여 예준의 손이 쉽게 제 낯을 오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오늘 집에 어떻게 가, 하민아?”
하민은 소년의 눈을 잠시 들여다봤다. 새카만 눈이 비교적 색이 옅은 동공 위로 비치는 걸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버스 타고 가려고요, 형은요? 무심코 묻고서야 노아가 생각났다. 곧잘 두 사람은 서로의 집을 오가며 지냈고, 이렇게 연습이 길어진 날에는 대부분 노아가 소년의 집을 찾아가고는 했다는 사실이 생각이 난 탓이리라.
마른 입술을 축이는 하민을 보던 소년이 웃으면서 조심스럽게 그의 손끝을 잡아 제게로 당겼다. 집중을 요하는 동작을 하민이 기민하게 알아채고 웃으며 시선을 도로 그에게 뒀다. 눈길이 마주닿은 그 순간, 소년은 더없이 진중한 얼굴로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형이랑 같이 집에 가자. 바래다줄게. 그 말에 노아가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을 떼었다가 예준의 등을 가볍게 두들기고 먼저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나 그럼 먼저 간다? 그 말이 소년의 집에 가겠노라는 선전포고임을 알았으나 예준은 이렇다 할 거절의 말을 하는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손을 흔들었다. 이따 보자. 이따, 보자. 단 두 어절 뿐인데 그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쌓아왔는지가 느껴져 하민은 멈칫했다. 어쩐지, 자신이 굴러들어온 돌이 된 것만 같아서.
노아의 뒤를 따라 온통 오늘 먹을 메뉴 이야기로 한창 소란한 밤비와 은호가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찾아온 고요 속에서 소년이 하민의 손에서 기타를 부드럽게 가져와 케이스 안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그 부드러운 동작들이 의도된 것임을 하민은 깨달았다. 차라리 예준이 할 말이 있다고, 잠깐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면 이만큼 그가 가진 침묵과 다정에 짓눌리는 기분이 들지 않았을텐데.
“가자, 하민아.”
소년은 단정하지만 단호한 손을 하민에게 내밀었다. 이 손을 잡게 되면 후회할까. 하민은 우두커니처럼 선 채 있다가 결국 소년의 손을 조심스럽게 마주 잡았다. 이제 정말 여름이 오는지 예준의 손은 미지근하기보다 조금 뜨겁게 느껴졌다. 가만히 소년의 손 위에 대고 엄지를 굴리면 부드러운 살갗의 온도가 지문 사이로 파고들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소년은 자잘한 장난과 다정으로 하민의 마음을 허물어놓았다. 왜 형한테는 매번 제가 쉬울까요. 묻고 싶었으나 이런 말 앞에서 도리어 상처받은 얼굴을 할 소년을 알기에 하민은 말을 아꼈다. 꼭 잡은 손 탓에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와닿았으나 소년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예준은 정류장 앞에서도 그의 손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꼭 놓을 수 없는 사람처럼.
“예준이 형.”
하민은 어쩌면 그가 지난 번 체육관 창고에서 이야기했던 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기에 잠깐 소년의 손을 물리고, 그가 아득한 얼굴을 하기 전에 서둘러 깍지를 채워 손을 다시 잡았다. 날이 더 무더워지기 전에, 또 한 번 우리의 시간이 다하기 전에 하민은 이 손을 오래도록 잡고 걷고 싶었다.
“집까지 걸어가는 거, 안 돼요?”
소년은 잠시 놀란 눈을 했으나 이내 그의 손을 끌며 정류장을 먼저 벗어나며 웃음소리를 냈다. 꼭 그게 종이 울리는 소리처럼 맑다고 느끼는 동안, 예준이 그를 돌아보며 소근거렸다. 사실, 나도 그러고 싶었어. 하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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