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은 별에게

[플레이브] 나를 잊은 별에게 (3)

소년은 피부에 느껴지는 열감에 눈을 떴다. 처음 시야에 잡힌 건 조금 풀어진 넥타이와 반듯하게 자리 잡은 명찰이었다. 잠들었구나. 얼마나 잠들어 있었지? 시계를 확인하고자 몸을 일으키려다가 저보다 긴 팔에 가로막혀 몸이 도로 매트 위에 풀썩 넘어졌다. 도로 시야는 하민의 명찰 위로 내려앉는다. 소년과 같은 글씨체로 유, 하, 민. 하고 적혀진 걸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민아.”

제법 깊게 잠들었던 모양인지 목이 잠겨있었다. 낮은 음성에 하민은 미간을 좁혔지만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며 잠투정을 했다. 하민아, 우리 일어나야할 것 같아. 부러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탄식과 같은 숨을 쉰다. 호흡이 오가는 입술 위에 가만히 엄지를 얹어본 소년이 키득거리며 하민의 팔에 도로 누웠다. 일어나서 팔 저리다고 하기만 해봐. 가만 안 둔다.

달게 잔 덕분인지 몸이 가뿐했다. 하민의 얼굴을 괜히 눌러보고, 머리칼을 헤집어봐도 그는 색색거리는 호흡을 이어갈 뿐 깨어나는 법이 없었다. 이렇게 된 김에 잠이나 잘까, 하던 차에 체육관 창고의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남예준, 있냐?”

입안에 막대사탕을 물고 나타난 준수한 얼굴의 소년이 체육관 창고 안을 한 번 훑다가 매트리스 바깥으로 빠끔히 나온 발을 찾아냈다. 예준이 형이 이런 데서 땡땡이를 칠까요? 그럴 사람 아닌 것 같던데. 바닥에 굴러다니던 농구공을 집어들고 자기 손가락 위에다 둔 채 스핀을 준 은호에게 밤비가 핀잔처럼 말했다.

“야, 그건 모르는거야. 원래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 먼저 올라가는 거라고.”

“부뚜막? 부뚜? 뚜부?”

“조용, 제발 조용. 내가 잘못했다.”

노아가 체육관 구석에 놓인 매트리스로 다가갈 즈음에 밤비는 은호의 입에 조용히 하고 이거나 먹어. 하고 쫀디기를 뜯어주고 있었다. 오, 쫀디기. 은호가 한 입 가득 받아먹고서 제 손 위에서 빙그르르 돌던 농구공을 드리블하며 밤비의 주변을 돌아다녔다. 자유롭게 움직이기는 어려울 법도 하건만 유연하게 여기저기 세워진 도구들을 피해다니며 놀리는 게 분명해 밤비가 약이 오른 얼굴로 그에게 따라붙었다. 제법 주변이 소란해진 탓인지 하민은 미간을 좁히고 무어라 중얼거렸고, 소년은 당황한 얼굴로 급하게 팔을 뻗어 허공 위에다 허우적거리며 흔들었다.

“한노아……!”

구조요청이라기엔 지나치게 조그맣고 조심스러운 부름이다, 싶어서 노아가 고개를 들이밀어보니 제법 꼴이 웃겼다. 뭐 이렇게 작고 소중하게 서로 부둥키고 있어. 저 허우적거림이 꺼내달라는 호소인 줄 알면서도 그는 괜히 소년의 팔이 애처롭게 버둥거리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노아가 선반 가까이에 몸을 기대고 서자 예준이 입을 삐죽 내밀며 상체를 세우려 노력했다.

“얼씨구. 지금 물만두처럼 본다고 봐 줄 것 같아?”

“그런 적 없어.”

“턱에 호두나 만들고 말이야.”

그가 몸을 숙여 예준의 턱을 꾹 누르자 애써 올라오던 상체가 도로 하민의 품에 푹 떨어졌다. 소년은 완전 울상을 하고서 신이 섬세하게 빚어놓은 것 같은 노아의 얼굴을 응시하며 다시 손을 뻗었다. 그 무렵에 뒤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나더니 은호와 밤비가 쏟아지듯 노아의 등 뒤로 넘어졌다.

와하학, 하고 은호가 웃는 순간 밤비가 굴러떨어질 뻔한 몸을 아슬아슬하게 일으켰다. 무심코 노아는 매트 위를 짚은 채 두 사람의 무게를 잠시 견뎠다. 놀란 눈의 소년이 제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하민은 노아가 버텨줬음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몸에 가해진 무게감에 옅은 신음과 함께 깨어났다.

“…예준이 형? 아우, 팔 저려.”

하민이 팔을 주무르며 몸을 일으켰음에도 제 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노아 탓에 예준은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뭐해. 하고 살짝 그의 어깨를 밀자 노아는 그 위로 도리어 푹 기대어 누웠다. 아, 왜 난 안 안아줘. 왜 난 안 안아주냐고, 남예준. 서운한 티를 팍팍 내는 것에 소년이 웃음을 터트리며 노아를 끌어안았다.

“알았어. 지금 안아줄게. 오늘 진짜 귀엽네.”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하민이 그 위를 둘러 안고, 그걸 보기가 무섭게 은호가, 못 이기는 척 밤비가 와서 끌어안았다. 그 날, 소년은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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