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은 별에게

[플레이브] 나를 잊은 별에게 (2)

뻗어진 손이 부드럽게 검은 머리칼을 쓸어주며 숱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게 유난스럽게 자신에게만 허락된 건 아닐 것이라고 하민이 수없이 되새기는 동안 소년은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았다. 이젠 정말 나랑 있는 게 편한 모양이네, 하고 생각했다. 도리어 제 손바닥에 대고 머리를 부비는 모양새가 영 붙임성 좋은 들짐승의 형태와 닮아있어 묘한 생각이 들게 하는 구석이 있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그런데 수업은….”

가만히 시선이 따라붙는다. 팔베개를 해주던 팔을 소년이 구부리자 하민의 머리가 조금 더 예준의 가까이로 붙었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표현을 알아챈 하민이 예준의 감긴 눈꺼풀 위를 응시했다. 무슨 속눈썹까지 가지런하지, 이 형은. 저 혼자 그런 생각을 삼키며 입술을 달싹이고 있자니 예준이 옅게 웃으며 남은 팔로 하민을 둘러안았다.

“나도 가끔 땡땡이라는 거, 해보고 싶었어.”

“와……, 진짜 안 어울려.”

“뭐야?”

당장 헤집을 것처럼 손에 힘을 더했지만, 소년의 희고 단정한 손끝은 하민의 머리칼을 매만질 뿐이다. 숱한 다정 속에 잠기지 않고자 발버둥을 치더라도 기어코 저를 끌어당기는 힘이 소년에게는 있었다. 어린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처럼 그는 조심스럽게 하민의 머리칼을, 등줄기를 다독이다가 긴 숨과 함께 입술을 달싹였다. 요즘 잠을 못 자서 그래. 그뿐이야.

소년의 문장은 오늘도 단정히 마침표가 찍혔다. 그 문장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문장들이 숨죽이고 스러졌을까. 하민은 예준의 팔 아래에서 얌전히 있다가 괜스레 몸을 구기고 소년의 품을 파고들었다. 하민의 동그란 머리 위에 가만히 예준은 턱을 대고서 웃었다. 왜 잠을 못 자는데요. 파헤쳐지길 원치 않는 소년 치고 많은 이야기를 그에게 해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민은 구태여 까닭을 물었다. 소년은 감은 눈을 뜨는 대신 가만히 품 안으로 파고든 그를 조금 더 힘있게 끌어안았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느린 숨소리가 하민의 귀 언저리를 스쳤다. 아니, 숨 자체가 스쳤던가. 감은 눈의 예준은 통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미간을 좁힌 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괜히 물어봤나. 하민은 뒷걸음질을 하는 마음으로 다급하게 말을 물리려 했으나 그보다 예준이 입술을 달싹이는 게 더 빨랐다. 요새 자꾸 이상한 꿈을 꿔. 그 말을 끝으로 소년이 몸을 물렸고, 이내 떨리는 눈꺼풀 아래에서 그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어떤 말도 없이 그는 하민을 응시했다. 하민의 목 너머로 늘어트리고 있던 손이 움직여 어린 뺨을 감싸쥐었다. 둥글게 엄지를 움직이며 느껴진 작은 움직임에 하민은 옅게 키득거렸다.

“간지러워요, 형.”

“많이 간지러워?”

으응, 하고 옅은 소리를 내며 하민이 도리질했다. 소년의 팔 위에서 하민의 머리칼이 흐트러지자 예준은 다시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단정하게 정돈해주었다. 다정한, 지독하게 다정한 몸짓에 이번에는 하민이 눈을 감았다. 거기에서 오해를 한 모양인지 예준이 알았어, 안 간지럽힐게. 하고 작게 웃었다. 예준은 다시 말을 고르듯 눈을 내리깐 채 숨을 길게 끌었다.

“꿈에 자꾸만 네가 사라져. 나 진짜 열심히 찾으러 다니는데 맨날 못 찾는다? 오기 생기게.”

“에이, 개꿈이네.”

내가 형을 두고 어딜 간다고. 그쵸. 그 말을 끝으로 하민은 소년의 몸을 마주 안았다. 충분히 그를 안는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매번 안겼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건지. 숨을 들이키자 예준 특유의 포근하고 달큰한 향이 폐부를 파고들었다.

“그러게, 우리 하민이가 그럴 리 없는데.”

소년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웃기다, 하민아. 나 그렇게 잠을 못 잤는데…. 옆에 누가 있으니까 잠이 오는 거 있지. 하민은 잠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년의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그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흰 목덜미 아래로 제 팔을 밀어넣었다.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 하민은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당겨안고, 등을 감싸안았다. 어디 안 갈테니까, 좀 자요.

“그럼…. 이번에는 사라지면 안 돼, 하민아.”

하민은 쉽게 대답하지 못한 채, 수마에 빠져드는 소년의 숨소리만을 오래도록 지켰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