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웬 아자리아

인간의 기억 (上)

내가 모르는 곳에서 행복해 줘.

스물다섯. 무관심하게 연도를 센다. 누군가는 저를 마주하면 흠칫 놀라며 급히 인사를 한다. 시비를 걸고 싶은 것인지 플러팅을 하는 것인지 모를 시선에 별 관심은 없다. 손이나 흔들어주었다. 저의 모든 신경은 여전히 이상을 향해 향해있다. 제 목적을 위해서 주요 인사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날마다 그들이 묻는 정보를 기계처럼 재확인하고 있는데도 그들의 긴장감이 저에게도 느껴질 노릇이다. 팔자에도 없던 서류 업무를 하고 있다. 다행히도 오늘의 임무는 끝이었다. 별 볼 일 없는 실내에서 나와 구석 어딘가 처박혀 이미 배터리가 전부 다 된 휴대전화의 화면만 만지작거린다. 검게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있자면 어딘가 불편해져서 저 멀리 어딘가로 던져버렸다. 강제성이 다분한 폭력을 얻은 화면의 위에 날카롭게 금이 갔다. 그것은 저와 그것의 공통점이 되었다.

불안했다. 행복하기도 했다. 묵시록과 도원향의 중간에 선 기분이었다. 어느 게 진정 행복이고 어느 게 불행이 될지 한참을 고민하는 일 년이었다. 모든 것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너희를 만난 것은 제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다는 것. 제 머릴 만지던 그 차가운 손길과 새벽에 모여 웃던 그 대화가 계속 생각나서 잠 못 이루고 주기적인 환상이나 보았다. 이상을 향한 그리움과 별의 아이들을 외면한 저에 대한 원망이었다. 하지만 분명 저는 답을 알기에 이곳에 있다. 제 사랑은 진정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러니 진실한 사랑을 하는 법을 되찾아야 해. 그전까지는 너희를 궁금해해서는 안 된다. 저 멀리 다시 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 추억을 끝낸다.

스물 여섯. 부탁을 받았기에 응한다. 그들은 이제 귀찮은 일을 나에게 맡긴다. 어쩔 수 없지, 더는 제가 안겨줄 수 있는 정보는 없으니까. 그것을 제외하고 제가 제대로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죽이는 것뿐이다. 적을 마주하면 번득이는 붉은 눈동자, 익숙하게 검집에서 검을 꺼내 든다. 제 손에 쥔 것에서 세상의 위로 차곡 하게 쌓은 죄악이 검을 타고 오른다. 미소 없는 얼굴로 저를 마주하는 상대 역시도 무언가의 이상으로서 정열을 가득 짊어지고 저를 마주하고 있을 텐데, 라며 머뭇거리기도 전에 눈앞에 펼쳐진 개판을 마주하면 검부터 휘두르게 되더라. 제 손에 있던 검을 던져 목구멍에 꽂아주며 이어 생각한다. 이것은 그렇게 계속 이어진 전쟁이다. 상호 협정 같은 것은 결국 없었다. 영원한 세계도 사랑도 없으니 결국 새빨갛게 누구 하나의 이름을 지워야 끝날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역시 마음이 좋진 않았다.

가끔은 이 알록달록한 전장에서 운 나쁘게 같은 별의 아이들을 만난다. 몇은 아직도 제게 호의적이라서 그들을 만나고 싶지가 않다, 그들에게 친절해지고 싶지가 않다. 아니, 그런 이유는 핑계고 나는 그들을 사랑하기에 그들에게 검을 겨누는 것에 불만을 품는다. 순백을 더럽히는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대놓고 별의 아이들을 피했다. 가끔 트라이야를 찾을 때에도 그 누구와도 안부를 나누고 싶지 않았으니 같은 이상을 가진 이들과도 정보만을 공유하는 것이 전부다. 외로웠다. 대충 구색을 갖춰 긍정적으로 예전처럼 사람을 품기도 했으나 이 모든 것이 거짓 감정놀음이라 생각하니 못할 일이 되어 전부 그만두었다.

인간과 교류하는 일이 점점 적어졌음에 제 평판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이 매일같이 이상하게 전달되고 곡해됐으며 제 하루는 엉망진창으로 굴러갔다. 이젠 동료가 전부 나가떨어져도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 더는 그들과 동기애나 전우애를 가질 수 없다. 별의 아이들을 향한 감정마저도 버려야 하는 판국에 평범한 인간들에게 나누어줄 감정은 없었다. 그렇게 제 옆에 서는 사람은 매일 바뀌었다. 농을 걸어오는 옆자리의 사람에게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하나도 즐겁지 않아. 익숙한 얼굴들이 그리웠다. 외로웠다. 못 박힌 듯 멍하니 그들의 생각을 하다가 한숨을 쉰다. 꺼림칙하다. 골치 아프다. 적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피치 못한 사정이 제게는 있었다. 슬슬 잠이 들자며 저를 지배하는 몰락한 혼들이 손짓하면 그들의 옆자리에 가 눕는다. 추억을 끝낸다.

스물 일곱. 결국, 매일같이 전장으로 향하는 삶이다. 누군가는 항상 내게 붙어 감시하듯이 전장이며 휴식처며 종횡무진 직접 따라다녔다. 배신할 생각은 없었지만 추악하고 이기적이며 동시에 현명하다 느꼈다. 그들은 이제 저를 중요한 패의 일부로 보고 있다. 어르고 달래고 타협하고 제 몸에 짙게 남겨진 전투의 흔적들을 치료하고는 항상 저를 전선으로 내몬다. 참으로 당연한 명제처럼.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해한다. 이례적인 일도 아니고 항상 하는 일이었는걸. 유연한 몸놀림, 총기보다는 검, 자잘한 틈도 놓치는 일 없이 상대의 숨을 앗아가는 저는 그 누구보다 가치 있는 사람. 제가 옳다며 숨통을 트여주고는 했던 환각들의 표정도 이 전선 위에서는 밝았다. 이제는 무언가를 죽이는 일이 몸에 밴 것도 같다. 눈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상대의 급소를 쫓고. 머리는 어떤 방식으로 대응해야 제가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지 고민한다. 이제는 이 전장 위의 그 어떤 것도 저를 업신여기진 못할 테지. 시체들의 부산물로 썩어가는 이 자리에서 몇십, 몇백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 이제는 쉬웠다. 순조로웠다. 아직도 별의 아이들을 마주하는 날에는 따분한 악몽을 꾸지만 다만 자책은 줄었다. 아름답고 눈부신 그들을 보아도 두 눈이 방황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저는 기어코 여기에 뿌리를 박아 제 이름의 꽃을 틔운다. 제 화원의 위에서 누군가가 제 가치를 찾는다. 잘게 떨던 몸이 다시 걸음을 옮겨 지천으로 붉은 꽃을 만개한다. 숨죽인 생들은 전부 이 악몽 앞에서 살아 돌아갈 수 없으리라. 추억을 끝낸다.

스물 여덟의 초. 하는 것이라고는 저 자신을 껴안은 채로 여전히 전선을 휘젓고 오는 것. 아, 그래도 이제 꼬리가 붙지는 않는다. 신뢰가 붙은 모양이지. 모든 게 어긋나버린 이 순간에 이능은 옳다, 최근에는 더욱 능숙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되는 일이 있었다. 결국, 저는 또다시 신의 인도로 성장한 것이다. 여태까지 걸어온 길이 올바른 것이라는 증명이지. 불치병처럼 저를 따라오던 병명이던 불안은 슬슬 사라지기 시작했다. 바닥 위에 제 이름을 적어본다. 최근은 이상한 이름으로 저를 부르는 이가 많아졌다. 별로 신경이 쓰이는 건 아닌데, 그 단어를 읊으며 하는 행동이 가관이었다. 반 즈음 불탄 몸으로도 제게 총을 겨눈다니… 갸륵한 마음으로 숨을 끊어주면서도 우습다. 재와 연기로 가득한 전장에서 숨을 쉰다. 항상 별의 아이들을 피해 다녔는데… 생각해보니 이제 더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지 않나? 생각이 잠시 열렸다가 도로 닫힌다. 그럼 그들도 이제 제게 의미가 없는 것이 되었나? 한때는 죽음만이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서도 갈라지는 걸 보면 영원은 없다. 그렇게 저도 언젠가부터 저는 그들이 마음을 바꾸기보다는 죽는 순간 적어도 제 품에 안겨있기를 바라게 된 것 같았다. 드디어 상처가 아물고 사랑했던 순간들은 모조리 재가 되어버린다. 불안을 망각한다. 잘 가. 나의 교리로 세워질 세상 위에서 다시 만나 사랑하자. 순간이 아닌 영원의 사랑을.

신에게 기도한다. 나의 오랜 기도 제목은 나와 주변인들의 행복이었는데 이젠 거기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을 기어코 빌게 되었다. 신의 잔혹을 원한다. 부디 모든 것을 잊게 해달라고. 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을 죽임으로 이상을 향한 제 충심을 증명하겠노라고. 설령 사랑마저 망각한다고 해도 좋으니 이 빌어먹을 세상을 가치 있는 것으로 규정하는 악습을 이 땅 위에 가지고 오라고.

신은 응한다. 저는 추억을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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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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