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웬 아자리아

짐승의 기억 (下)

인간의 가치는 전부 썩었을진대 더 보아 무엇할까 싶다.

모든 것이 평등한 가치를 가진 이상세계로.

다 찢긴 인간의 역사 아래 우리는 모두 짐승일지어니.


총성. 이 전장엔 이상향을 쫓아 꿈속을 드나드는 짐승이 있다. 반 즈음 날아간 턱이나 피투성이가 된 새하얀 피부, 누군가의 살점을 물고 있는 가지런한 하얀 이와 섬뜩한 무표정까지, 인간의 탈을 쓴 그것은 재미없게 오직 살생만을 추구하는 짐승의 모습을 한다. 누군가에겐 크나큰 악몽이자 동시에 누군가에겐 없어서는 안 될 가치를 가진 짐승은 이 전장 위에서 스스로 후회할 것을 남기지 않는다. 짐승은 누군가를 안고 누군가에게 안기고 상처를 불로 지지며 완벽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완벽으로 향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그랬는데 말이지. 요동치는 이명. 보자. 방금 무슨 일이 있었지? 무언가에 쏘이고, 물리고, 베이고, 성한 곳이 없다. 짐승은 냉정하게 자신의 몸을 살핀다. 결과적으로 움직일 수는 있지만,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을 누워서 보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상황을 보다 손에 힘을 풀어 손에 쥐고 있던 시체를 툭 하니 바닥에 떨구었다. 입안에 고인 피와 살점 탓에 시체의 위에 침을 뱉었다. 이 치는 짐승의 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턱 아래에 총을 들이밀길래 짐승은 목덜미를 물어뜯어 주었다. 관통상이 생긴 턱의 상처는 이 때문이다. 저치는 죽어서도 참으로 아쉽겠다, 턱이 아니라 머리였다면 제아무리 신의 사랑을 받은 짐승이라 한들 한 번에 죽었을 텐데.

옆에 있던 동료는 짐승의 몸을 훑어보고는 고민하다 다른 상대를 향해 손짓한다. 굳은 피딱지와 구별이 되지 않는 탁한 적갈색의 눈동자가 내밀어진 손의 마디 끝을 바라본다. 전장에서는 안내가 필요하지 않다지만 인간 아닌 짐승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는 필요한 몸짓이다. 벌써 사년을 해온 일이다. 그동안 많은 위로도, 동경도, 사랑도 받아보았지만, 그냥 이젠 이 세상이 지옥 같았다, 어떻게든 이 세상을 낙원으로 바꿔놓아야만 진정 기쁠 수 있을 거라고. 그것이 짐승이 할 수 있는 생각 전부였다. 그러니 그저 지시받은 대로 짐승은 제 손가락 사이로 불길을 쥔다. 그것 외에 짐승이 할 줄 아는 일은 없었다. 오로지 신이 그것에게 안배한 힘에 손을 대는 것 말고는 말이다. 의지를 갖추고 전장 사이를 헤엄치는 불길은 많은 것을 불태우고 스스로 재창조하며 제 몫을 해낸다. 주변에서 뿌려대는 비명들, 쓸모없고 가치 없는 인간들의 비명들은 짐승에게 아무런 감상도 들게 하지 않는다. 짐승은 저 스스로 그들과는 다른 종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지. 짐승이 불길을 줄줄 흘리고 다니면 적진의 생들은 하릴없이 꺼져간다. 그 중 하나는 불길을 일으킨 게 무색하게도 너무나도 쉽게 그 사이를 뚫고 걷는다. 그 모습에 짐승은 길게 이어진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다. 어라, 어디서 본 얼굴인 것 같은데… 마주한 순간 원을 그리며 나란히 걸으며 짐승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주변에서 빛나는 액체. 이능력자?

아, 이능력자. 이능력자는 상대하기 꺼려지는 상대다. 짐승은 아니꼬운 얼굴로 제 앞에서 긴장한 얼굴을 한 어느 이능력자를 바라본다. 힘이 들어가지도 않아 무너질 것 같은 몸, 입술에 힘을 주며 저 자신을 몰아세운다. 불길로 이루어진 검을 만들어 휘두른다. 근처의 적당한 위치에 상대와 짐승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불길이 솟아오른다. 짐승은 번거롭다 생각하면서도 절대로 이능력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제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는 이상. 원을 그리며 걷는 내내 손을 떨던 상대의 평정심이 깨지면 짐승은 반색하며 몸을 낮췄다. 치렁거리는 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사적인 감정이 스며들었다. 기쁨. 기분이 좋다는 듯한 미소였다.

상대는 짐승이 달려들기까지 기다렸어야만 하였으리라. 아마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하지만 짐승은 먼저 이를 드러낸 상대의 몸짓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기량 정도야 쉽게 어림잡을 수 있었다. 살짝 찡그린 얼굴의 작은 경련, 제 귓가로 뻗어지는 손이 뽑아가는 공기의 움직임. 짐승은 사라진 듯이 빠르게 움직여 상대의 뒤를 잡고는 깔끔하게 검을 등 뒤로 박아넣는다. 혈흔이 튀어 붉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에 꽂는다. 짐승은 무언가를 죽인 후에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귀에 꽂는 습관이 있었다. 아, 생각났다. 이 치는 같은 유포니엄 소속의 이능력자였던 거 같은데. 죽어버렸으니 잊는다. 짐승의 생애에 죄악이 늘어간다.

시체를 지나친다. 또 누군가를 가리키는 손가락. 지나치는 시체. 가리키는 손가락… 그렇게 지나치는 시체의 숫자가 하나씩 커지면 짐승의 살갗 위에 피어오르는 붉은 반점들도 짙어져 간다. 더는 거칠어진 숨을 숨기기 힘들어서 비명만 울리는 전장의 위에서 겨우 숨 한 번 크게 내뱉으며 주변 건물의 뒤로 몸을 숨긴다. 급하게 상처가 심한 턱 위에 천을 덧대어 눌러보아도 멈추지 않는다. 도망칠 수는 없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제가 도망치고 싶은 곳은 제 손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는 손으로 불을 피워올려 상처의 위에 가져다 댄다. 끔찍했지만 이 끔찍한 고통은 어릴 적부터 불길의 짐승이 겪어온 것이다.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다른 손목을 올려다가 입술 사이로 물었다. 비명을 질렀다가 혼자서 처리하기 힘들 정도의 거물급 이능력자와 마주하기라도 한다면 승산이 없다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짐승의 흰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젖히는 자가 있다. 왜 눈치채지 못했지? 다급하게 이유를 찾아보자면 아까 턱에 총을 맞았을 때에 청각에도 무언가 이상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 전장엔 왜 또 온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

딱히 기억에 남는 목소리는 아닌데, 부상 탓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고개가 힘없이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채 전부 잡히지 못하여 파도치듯 출렁거리는 머리칼이 짐승의 입으로 들어왔다. 짐승의 얼굴은 온 얼굴이 피멍투성이였다. 상대는 그런 끔찍한 몰골의 짐승을 죽이지도 않고 바라보고 있다. 그 눈에 서린 것은 원망? 원망인가. 과거를 아는 이들에겐 휘말리기 쉽다. 평소였다면 피하였겠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인지라 결국 짐승이 입을 연다.

“ … 언제? 너, 누구였지? ”

기가 막하다는 듯이 입을 벙긋거리다가 짐승이 온전히 기억도 못 할 지난 일을 홀로 추억하며 상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협박은 통하려나? 못 이긴 척 다정한 척을 해주면? 저 스스로 죽겠다는 말에는 동할까? 과거에 얽매여 죽이지 못하는 걸 봐서는 못 이기는 척 응해줄 것도 같은데. 짐승은 머리채를 잡는 상대의 팔목에 자신의 팔을 두르며 눈을 감았다. 떼어졌다 다시 붙은 입술에 고작 시간이 좀 흘렀다고 다정함이 붙었다.

“ 아… 그래, 기억나는 것 같아. 너 분명… ”

“ 로웬, 나는…아악..-!! ”

상대의 아리땁게 흔들리는 눈동자, 쥐고 있던 팔목을 힘주어 비트는 이 틈새를 짐승은 즐겼다. 상대는 사양 없이 어린 마음으로 스스로 미련을 채우고, 저는 스스로 애써 그것을 짓밟아버리는 이 순간이 저의 재주라고 생각했다. 짐승이 흉내 내는 다정함은 이런 상황을 수십 번은 첨삭한 탓에 잘 다듬어진 다정함이었다. 나직한 비명, 부러진 팔을 놓아주며 짐승이 상대의 어깨를 꾹 눌렀다. 상대는 체념한 얼굴로 짐승을 올려다보았고, 짐승은 다시 표정없는 얼굴로 입을 연다.

“ 역시 가치 없이 불완전하게 태어난 인간이라 그런지 이 패턴은 어째 변하질 않는단 말이지. ”

이것은 짐승이 전장에서 저를 알아보는 이들에게 써먹는 방법이었다. 관두지 못했다. 그야 이 방법은 대개 성공 확률이 높았다. 예전에는 누구에게든 다정하게 굴려 애썼으니까… 한숨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죽여야 하는데, 이럴 때마다 죽이고 싶지가 않았고, 피하고 싶었다. 그게 짐승의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문제를 안다는 것은 제 일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짐승은 아주 빠르게 불길의 검을 만들어 제법 부드럽게 심장 향해 검을 갖다 꽂았다. 그러다 흐릿해지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를 관찰하다가 알아차렸다. 아. 기억났다. 성질 있는 인간이었는데… 짐승이 오랜만에 기억이란 회로를 이어보았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라며 저를 비난하던 정 많던 인간. 감정은 섞이지 않았어도 몸을 섞을 때만은 서로 흉포하게 탐했던. 짐승의 흰 머리카락 사이로 흔들리는 눈동자에 일말의 불안감이 비춰 보였다. 다만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화평을 꿈꾸던 어린 인간이 아닌, 시대를 위해 감정을 도려낸 끔찍한 짐승일 뿐이다.

한참을 그리 주저앉아있던 짐승은 숨이 끊어진 시체 위로 허리를 숙여 내내 누르고 있던 어깨 위로 입을 맞춰주었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아쉬웠다, 자신의 품에 안기길 소망했다면 함께 이상으로 향할 수도 있었을 것을… 다만 죽은 것은 잊어야 했다. 짐승은 절망을 되새기는 악습을 버렸기에 살아있다. 자신의 낙원으로 가기 위해서 말이다. 낙원. 완벽한 단어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짐승의 이상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설렜다, 착잡했던 것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자꾸 웃음이 터졌다. 시체의 온기 남은 피부 위에서 짐승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상으로 데워진 붉은 눈을 하고는 무언가 씐 듯이 일어나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이 모든 장면을 짐승의 곁에서 지켜보며 탄식하던 이상이 속삭였다.

그들과 함께한다면 결국 너 역시도 모자라게 사는 법 밖에 배울 수 없어. 너를 증명해. 그 누구보다 행복해지고 싶잖아. 자신을 봐, 무얼 원하는지 알잖아.너의 가능성을 우리는 알아. 먼 미래를 상각해. 너는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다시 그들과.

응, 맞아 나도 알아. 아름다운 이상 세계…

이 모든 폭풍이 지나면 세상이 요동치고 우스꽝스러운 인간들은 신의 눈을 가린 죄로 모든 것을 잃을 거야.


자, 모든 것이 영원을 잃은 이상세계로.

낙원 위의 우리는 모두 외롭지 않을지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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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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